[조선·동아 100년] 인촌 김성수의 친일행각

  • 기자명 자유언론실천재단
  • 기사승인 2020.03.10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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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언론실천재단은 202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창간 100년에 맞춰 <조선·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최악 보도 100선> 책을 발간했습니다. 책 내용을 뉴스톱에 칼럼으로 기고합니다

 

15. 김성수의 친일행각

동아일보 사장 김성수의 친일 행적은 동아일보의 친일 보도의 한 뿌리이자 지금까지 동아일보의 친일 청산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다.

김성수의 친일 행위는 19377월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는 이른바 '시국 강연'의 연사로 참여함으로써 일제의 전시 동원 정책에 적극 협력했다. 19379월 경성시(京城市)의 라디오 강연에 나서서 일제의 전시 동원에 협조했으며, 또한 강원도 춘천까지 '순회강연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19387'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 당시에는 발기인 및 이사로 참여했으며, 19397월에는 전시 체제하에서 당시 일본에 있던 조선인의 치안대책을 강구하며, '황국신민화'를 도모하기 위해 일본 내에서 협화회(協和會)'재경성 유지간담회'에 참석해 발언하기도 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후신으로 194010월에 조직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로 참여했고, 1943년에는 이 단체의 총무위원이 되어 활동했다. 이 국민총력조선연맹은 그야말로 조선인을 '총체적으로' 전시체제에 동원하고, 억압하기 위해 조직되었던 '총력조직' 이었다. 1941년에는 조선인 스스로 일제의 전쟁동원에 협력하기 위해 단체를 조직하기도 했는데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과 임전보국단(臨戰報國團)의 준비위원과 감사로 참여해 활동했다.

김성수는 특히 1943년부터 징병제와 학병제의 실시에 맞춰 더욱 노골적인 친일 행각을 보였다. 김성수는 보성전문학교 교장의 자격으로 194385일 징병제를 찬양하는 장문의 논설을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기고해 징병제와 학병제 찬양을 시작했다.

"문약(文弱)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尙武)의 정신을 찬양하라"는 이 논설은 징병제는 조선반도 청년의 영예이며, 조선인의 단점인 문약과 단결하지 못함을 치료할 양약이니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이를 이용하여 힘써 노력하여 위대한 황국신민이 돼야 할 것이라고 조선 청년들을 성전에 참여토록 했다.

같은 해 10월 학병을 권유하는 담화를 발표한 후에, 117일자 '매일신보'에는 "학도여 성전(聖戰)에 나서라"라는 조선 내 지식인들의 학병 권유논설 가운데 세 번째로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라는 제목의 논설을 게재했다.

118일에는 '학도 출진 장행의 밤'이라는 행사를 개최하여 "반도 청년에게 순국의 실이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왜 학도 전원이 용감하게 지원하지 않는가"라는 요지의 '격려사'를 했다.

 

인촌 김성수(왼쪽)와 이승만 대통령
인촌 김성수(왼쪽)와 이승만 대통령

 

그러나 이 같은 김성수의 친일 죄과는 8.15 해방 후 1948년에 '반민족 행위자 처벌법'에 제대로 단죄되지 않았다. 그가 주요 정당인 한국민주당을 이끌고 있어서 '면죄부'를 발급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김성수의 친일 행적에 대한 심판은 결국 2000년대 들어와서야 뒤늦게 이뤄지고 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펼친 사실이 드러났다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해 서훈을 박탈한 20명에 포함돼 대법원의 확정 판결로 1962년에 받았던 건국공로훈장서훈이 취소됐다.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아직도 여전히 김성수의 친일 행위에 대해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16. 조선일보의 일본 왕실에 대한 찬양과 아부

조선일보는 일본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최 정점이자 상징인 일본 국왕과 왕실을 찬양 미화하고 일제의 시책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고난 속에서도 독립을 염원했던 우리 민족과 국민들을 크게 배신했다. 일본을 대표하는 일본 국왕과 왕실에 대한 노골적인 찬양과 아부는 일제에 대한 소극적인 복종을 넘어 적극적인 충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 민족이 결정적인 위기를 맞았을 때 조선일보가 어떻게 우리 민족에 반역했는가를 증거해 주는 것이다.

 

 

일본 왕실을 찬양하고 아부한 조선일보의 황태자 전하의 어탄생

조선일보는 방응모가 경영권을 인수한(19333) 후인 19331224일에 이미 노골적으로 일본왕실을 찬양하고 아부하는 <<황태자 전하의 어탄생御誕生>>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이 사설에서 조선일보는 “1223639분에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황위를 계승하옵실 황태자 전하께옵서 탄생하시었다. 어모자 두 분 다 건전하시다니 황실을 비롯하여 내외가 다 축하의 건성虔誠을 아뢰옵고 있다고 황태자의 탄생을 봉축했다. 그리고 일본은 다른 나라와 달라서 건국 이래로 황실은 곧 일본 전 민족의 대종가라는 신념이 있고, 더욱 명치천황폐하의 어우御宇에 이르러 일본이 일약하야 세계의 대국이 되매 일본국민의 황실을 존숭하는 정은 더욱 깊어졌고 근년에 이르러서는 황실 중심의 국민주의가 최고조에 달하였음을 본다. 일본국민에 있어서는 황실은 영국 기타의 황실과 달라서 혈통적 친근성과 종교적 존엄을 가지신다라고 하면서 일본왕실을 일본민족의 대종가라고 찬양했다. 여기서 말하는 황태자는 2019년 퇴위한 일왕 아키히토明仁이다.

해마다 11일이면 일왕부처의 사진 크게 싣고 일본왕실에 충성맹세

조선일보는 1938년부터 1940년 폐간되기까지 해마다 새해가 시작되는 11일이 되면 1면 상단에 국화문양을 곁들인 일왕 부처의 사진을 크게 싣고 일본 왕실을 찬양하고 충성을 맹세했다.

193811일엔 1면 머리에 <<천황폐하의 어성덕 御聖德>>이란 제목을 달고 그 옆에 일왕 부부의 사진을 크게 싣고는 일본왕실을 찬양하는 기사를 실었다. 194011일에도 조간 1면 머리에 <<천황폐하의 어위덕御威德>>이란 제목을 달아 일왕부처의 사진을 크게 싣는 한편 조선일보 제호 위에 일장기를 얹어놓아 일본총독부의 기관지나 다름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보다 앞서 1937113일 이른바 명치절에는 축하행사 소개와 함께 일본왕실에 충성을 맹세하는 강령인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序詞>를 일본어로 싣기도 했다.

 

해마다 일왕 생일을 축하한 <<봉축천장가절 奉祝天長佳節>>

조선일보는 1937년부터 일왕 생일 429일이 되면 봉축천장가절이라 하여 이를 대대적으로 축하했다. 특히 1939429일엔 봉축 천장절이란 제목의 사설을 싣고 극충극성克忠克誠을 다짐했다. “춘풍이 태탕하고 만화가 방창한 이 시절에 다시 한 번 천장가절을 맞이함은 억조신서億兆臣庶가 경축에 불감不堪할 바이다. 성상 폐하께옵서는 옥체가 유강하시다니 실로 성황성공誠惶誠恐 동경동하同慶同賀할 바이다. 일년 일도 이 반가운 날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홍원한 은과 광대한 인에 새로운 감격과 경행이 깊어짐을 깨달을 수 가 있다. 뿐만 아니라 적성봉공 충과 의를 다 하야 일념보국의 확고한 결심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라며 일본 국왕 히로히토裕仁의 생일을 축하했다. 조선일보는 이 사설에서 황공이란 말도 모자라 성황성공이라 했으며 경하란 말도 부족해 동경동하라고 했고,‘충성극충극성克忠克誠 이라 하고 일왕을 지존至尊이라고 까지 부르면서 일왕을 찬양하고 일념보국할 것을 다짐했다. 조선일보는 또한 폐간 4개월 전인 1940430일에도 일왕의 39회 생일을 맞아 신자臣子의 충심으로 흥아성업도 황위 하에 일단은 진척을 보아 선린의 새 지나 정부가 환도의 경축을 하는 이때에 이 아름다운 탄신을 맞이한 것은 더욱 광휘 있고 경축에 불감할 바이다라고 찬양하면서 그때까지 신민臣民 이라 표현해 왔던 조선 민중을 신자臣子라고 불러 졸지에 일왕의 자식으로 바꾸어 놓았다.

일본의 건국 기념일을 대대적으로 축하한 조선일보

기원절紀元節은 일본의 초대 신무왕神武王이 즉위한 날이라 하여 일본이 건국일로 기념하는 날인데, 조선일보는 해마다 이를 크게 기렸다. 조선일보는 1939211일자 1면 맨 꼭대기에 사설 <<기원절>>을 싣고 무릇 일본 정신은 저 물질 중심의 자본주의, 개인주의와도 다르고, 전체가 있은 후 개체가 있다는 파시즘과 다르다. 일본 정신은 일본 독특한 국민성, 국민 기질에 의한 것으로서 타의 모방 우는 추월追越을 불허하는 바이니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만지日滿支 협조 등은 다 서양류의 식민지사상과 다르다. 학제개혁과 지원병제도의 실시는 그 현현顯現의 일례라 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일왕 숭배 중심의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가 다른 나라의 것보다 우월하다고 칭송했다. 그리고 조선의 젊은이들을 일제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모는 지원병제도를 찬양했다.

조선일보는 1940211일자 조간에서도 1면에 <<봉축 황기이천육백년 기원절 奉祝 皇紀二千六百年 紀元節>>이란 사설을 싣고 양춘이 내복하고 만상이 활발하여 서기가 팔방에 충만한 이날에 황기 이천 육백년의 기원절을 맞는 것은 대화민족 전체의 감격과 녹행이 무상한 바라고 했다. 그리고 때마침 지나 사건으로 인한 흥아의 성업이 달성되려는 도중에서 이 날을 맞는 것은 신무천황께옵서 망국 홍유로 승시하옵신 육합일도, 팔굉일우의 대이상이 동아천지에 완전 실현할 촌보전사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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