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언론실천재단은 202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창간 100년에 맞춰 <조선·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최악 보도 100선> 책을 발간했습니다. 책 내용을 뉴스톱에 칼럼으로 기고합니다.
25. 경술국치’를 “양국의 행복과 동양의 평화를 위한 것”이라 지지한 「조광」의 사설
「조광」은 1940년 10월 호에서 일제의 조선 병탄(경술국치)30년을 이렇게 옹호했다. “… 회고하건대 지금부터 만 30년 전 전 동아의 정국은 난마와 같이 흩어져 구한국의 운명이 위급존망의 추秋 에 당하였던 명치 43년 8월 22일 일한 양국은 드디어 양국의 행복과 동양 영원의 평화를 위하여 양국 병합의 조약을 체결하고 그달 29일부터 이것을 공표 실시하였다 … 데라우치寺內 총독은 조선통치의 대본大本을 정하여 창업의 토대를 쌓은 위대한 공적을 남겼거니와 현 미나미 총독에 이르기까지 만 30년 간 … 오늘날과 같은 문화조선 건설을 결실시켰다”라고 일본의 식민통치를 미화했다.
■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가 직접 쓴 ‘동아신질서’ 옹호
방응모는 1940년 11월 「조광」제6권 11호에 ‘사장 방응모’라고 명기한 권두언을 싣고 “… 지나에서 사변이 발발한 이래 우리는 시국인식 철저화에도 미력을 다하여 왔습니다 … 국민된 자로서는 누구나 실로 최후의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될 때를 당하였습니다. 안으로는 신체제의 확립, 밖으로는 혁신 외교정책을 강행하여 하루 바삐 동양신질서 건설을 완성시켜 세계의 신질서를 건설하고 한 걸음 나아가서 세계영구평화를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국민은 모름지기 이 선에 따라 행동하고 생활하고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하면서 이른바 침략전쟁에 의한 ‘동양신질서’ 건설을 계속 옹호했다.
■ “미국 태평양 함대 박멸 소식에 감격”
방응모는 「조광」1942년 2월 호에 <<대동아전쟁과 우리의 결의>>라는 제목 아래 ‘타도 동양의 원구자怨仇者라는 글을 자신의 이름으로 실었다. ‘원구자’는 ‘원수’라는 뜻이다. 그는 “… 이미 선전포고가 내렸고 그 서전緖戰에 있어 그들이 항상 자랑하던 미국 태평양함대가 황군의 기습작전 일격 아래 박멸되었다는 보도를 보고 그 순간 나는 실로 한없이 감격하는 동시에 통쾌하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고 썼다. 태평양함대 기습작전이란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말한다. 또한 이 잡지는 사설에서 “내 손으로 지은 쌀을 내 마음대로 소비하고 처분할 수 있는 것이 구체제라면 내 손으로 지은 쌀, 내 자본으로 만든 물건을 모두 들어 나라에 바치고 그 처분을 바라는 것이 신체제요, 총력운동이요, 또 신절을 다하는 소이이기도 하다 …”라고 주장했다.
■ “미영 격멸로 성전 완수에 매진”
「조광」은 진주만 공격 1주년을 맞아 1942년 12월 호에 ‘12월 8일과 우리의 각오’라는 글을 싣고 “작년 12월 8일 미영 격멸의 대조大詔를 봉배奉拜한지 1년, 1억 국민은 황군의 혁혁한 전과에 감격하여 일로 성전 완수에 매진하게 되었다” 면서 “반도는 불원에 징병제가 실시되어 장병들은 모두 영예의 군문으로 가겠지만 다수한 총후의 인人은 생산전에서 제일선과 똑같은 전쟁을 하여야 한다”고 모든 국민이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고 썼다.
■ “해군 지원병제도는 반도 동포의 광영”
「조광」은 1943년 6월 호의 <<해군지원병제 실시와 반도 청년의 영예>>에서 “… 대對 미영전쟁이 진행하는 가운데 태평양을 중심으로 치열한 결전이 계속되는 중에 반도에 해군지원병제가 실시된 것은 그 의의가 중대한 바이다 … 이제 반도인도 황국 해군의 일원으로 동아 10억 인을 대표하여 태평양의 수호자가 된다는 것은 저대著大한 감격에 잠기는 바이다”라고 썼다. 조선의 청년들이 강제로 전쟁에 끌려가게 되자 온 나라 안의 기차역에서는 ‘무운 장구’라고 쓴 어깨띠를 걸어주며 부모형제들이 눈물을 쏟아 이를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데, 이 기사와 너무 대조적이다.
■ ‘국어(일본어) 해독률 높이는 일대운동 전개해야’
「조광」은 1944년 8월 호에서 조선의 일본어 해독률 36%는 대만의 일본어 해독자 6할에 비하면 훨씬 뒤떨어진 것”이라 개탄하고, 일본정신 체득을 위해서 국어(일본어)가 각 가정에까지 침투되도록 전 사회적으로 일대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6.‘친일 반민족 단체 가입 및 각종 친일동원행사 주최
■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일보사 연맹을 결성
조선일보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정동연맹)이 결성될 때 사장 방응모 등이 발기인 및 역원(임원)으로 참여하는 한편 조선일보 자체도 1939년 2월 11일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일보사 연맹’을 조직하여 ‘정동연맹’에 가입했다. 조선일보는 1939년 4월 1일자 사보에서 “본사에서는 이월 삼십일의 기원가절(일본 건국기념일)을 기해 오전 십 시 본사 대강당에서 기원절 축하식에 뒤이어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일보사 연맹의 결성식을 거행했다. 전원 2백 칠십일 명을 십사 반으로 편성하고 각 반에는 반장을 두었는데 동일 오후 이시 본사 주최 각 반장은 조선 신궁에 참배하였다”라고 보도했다.
■ 친일 동원행사 여러 번 주최
조선일보는 일본제국주의 정책에 협력하기 위해 조선 민중을 침략전쟁에 내몰기 위한 각종 친일 동원행사를 여러 번 주최했다.
조선일보는 1939년 3월 9일 소위 일본 ‘육군기념일’(3월 10일)을 맞아 용산에 주둔한 일본군 병영을 방문하는 견학단을 모집하고 남녀 각 100명을 방문케 했다. 이는 조선의 젊은이들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일보는 1940년 5월 28일에도 ‘해군기념일’을 맞아 인천항에 입항한 해군 군함을 관람시키기 위해 견학단을 모집했다. 이 모임에도 남녀 각 100명이 참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