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1천년 전 유적이라는 '북한 국보' 구천각, 사실은 80년된 건물이었다

  • 기자명 석지훈
  • 기사승인 2020.04.2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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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써왔던 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국내에 소재하는 수많은 유형문화재, 그 중에서도 특히 건조문화재들의 경우는 그 정확한 내력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주지하다시피 이는 이에 대한 고증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처음에 잘못 고증된 이후로 계속해서 사실관계의 확인 없이 계속해서 그 오류가 각종 서적과 안내서, 그리고 인터넷 등지를 통해 계속해서 확대 재생산되는 것에도 역시 이유가 있다.

오늘은 이런 고증 오류 가운데에서도, 현재 한국에서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북한 소재 문화유산의 사례를 한번 거론해 볼까 한다. 물론 북한 소재 문화유산의 경우는 우리가 직접 실물을 확인할 수 없다는 명백한 한계가 있지만, 그 건축물들의 내력을 조사하거나 기록한 일제강점기의 고적조사 자료나 각종 간행물은 물론이고 신문 및 잡지 기사 등을 이제는 손쉽게 열람할 수 있기 때문에, 적어도 현존 건축물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들의 해방 이전 내력을 파악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혹자는 굳이 무슨 이유로 북한의 문화유산에 대해서까지 팩트체킹을 해야 하겠는가 하고 반문할 법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해방 이후 사실상 "반쪽짜리" 샘플을 토대로 만들어진 문화사 담론으로 인해 한국 문화의 해석에 치명적인 맹점이 생겼다는 생각이고, 이를 극복한 보다 폭넓은 한국 문화사의 이해를 위해서는 북한 지역의 각종 문화유산, 특히 현재까지 남아있는 전근대 유적, 유물들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해석이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사진 1. 함경남도 함흥시 동흥산구역 동흥산 (구 반룡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는 구천각. 북한 함경남도 국보유적 제 108호.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kernbeisser/4751380051/
사진 1. 함경남도 함흥시 동흥산구역 동흥산 (구 반룡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는 구천각. 북한 함경남도 국보유적 제 108호.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kernbeisser/4751380051/
사진2. 1980년 북한에서 발행한 러시아어 관광엽서 속에 담긴 구천각의 모습. 뒷면 하단부에 1108년에 처음 지어 1613년에 다시 지어졌다는 캡션이 있다. 출처: https://www.retrodprk.com/2015/08/1980-postcard-set-hamhung-hungnam-and.html
사진2. 1980년 북한에서 발행한 러시아어 관광엽서 속에 담긴 구천각의 모습. 뒷면 하단부에 1108년에 처음 지어 1613년에 다시 지어졌다는 캡션이 있다. 출처: https://www.retrodprk.com/2015/08/1980-postcard-set-hamhung-hungnam-and.html

 

북한에서 발행된 각종 공식 출판물이나 사진 엽서 등을 통해 그간 많이 소개된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로, 현재 함경남도 함흥시 동흥산구역 동흥산 (구 반룡산)에 소재한 "구천각"이라는 건물이 있다. (북한 함경남도 국보유적 제 108) (사진 1, 2) 북한에서는 이 건물에 대해, "고려 시기인 1108년에 함흥성의 북쪽 장대 (군사 지휘처)로 세운 누정으로 높은 축대 위에 올라선 특이한 모양의 건물", "외래 침략자들을 물리친 우리 선조들의 애국투쟁의 역사와 높은 건축술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적"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사진 3)

사진 3. 현재 구천각 앞에 놓여있는 함경남도인민위원회의 공식 구천각 안내판. 안내판의 뒤쪽으로, 근대적인 기계를 통해 가공하여 모르타르로 쌓아올린 석벽의 모습이 눈에 잘 들어온다.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kernbeisser/4752016790/
사진 3. 현재 구천각 앞에 놓여있는 함경남도인민위원회의 공식 구천각 안내판. 안내판의 뒤쪽으로, 근대적인 기계를 통해 가공하여 모르타르로 쌓아올린 석벽의 모습이 눈에 잘 들어온다.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kernbeisser/4752016790/

 

국내에서 출판된 출판물들도 북한측 자료를 인용하여 이와 대동소이한 내용을 싣고 있다. 대표적으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다음과 같은 서술을 들 수 있다.

 

"북한 함경남도 함흥시 동흥산구역 동흥산(東興山)에 있는 고려전기 함흥읍성의 누정. 정면 3, 측면 3칸의 2익공 사모지붕 건물. 함흥읍성(咸興邑城)의 북장대(北將臺)로서, 고려 예종 3(1108)에 처음 세우고, 1713(숙종 39)에 고쳐 지었다. 전시에는 전투지휘처로, 평시에는 적을 감시하는 망루(望樓)로 이용된 장대로서, 높은 축대와 정자로 이루어졌고, 축대는 화강암을 다듬어 쌓았다. 축대 속은 비우고 그 안에 21단짜리 돌층계를 놓아 축대 위로 오르내리게 하였으며, 돌층계를 들어서는 어귀에는 홍예형(虹霓形)의 문길을 냈다. 축대 위에는 성가퀴[城堞: 성 위에 낮게 쌓은 담]를 돌리고, 멀리 쏠 수 있는 구멍과 가까이 쏠 수 있는 구멍들을 내었으며, 축대의 네 면에는 빗물이 모여 흘러내릴 수 있도록 물홈을 팠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저 사진 속의 구천각이라는 건물의 모습을 뜯어보면 도무지 전근대, 특히 고려시대나 혹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건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실제 건축물을 꼼꼼히 뜯어보며 관찰할 수는 없지만, 가령 사진 3의 안내판 뒤편으로 보이는 구천각의 축대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분명히 현대적인 기계를 사용해 균일하게 깎아낸 돌로 벽체가 이루어져 있고, 석재의 사이사이에는 분명히 모르타르 마감이 되어있는 것이다. 게다가 "성가퀴"라고 설명이 된 축대 윗편의 돌벽 역시 일반적인 성가퀴와는 달리 포나 대포를 쏠 수 있는 총안 시설 같은 것이 전혀 갖춰져 있지 않다. 이는 북한 지역에 남아있는 다른 유명한 망루/성곽 유적, 가령 평양성의 을밀대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더욱 명백하다. (사진 4)

사진 4. 비교를 위해 올리는 평양 을밀대의 모습. 총안이 구비되어 있는 성가퀴(여장)와 자연석으로 쌓아올린 옛 평양성벽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사진 4. 비교를 위해 올리는 평양 을밀대의 모습. 총안이 구비되어 있는 성가퀴(여장)와 자연석으로 쌓아올린 옛 평양성벽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도대체 이 건물의 정체는 무엇일까결론부터 말하면, 이 건물은 옛 함흥성의 북장대, 혹은 원래의 누정인 구천각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20세기, 1937년에 지어진 근대 건축물에 불과하다. 그나마 그것도, 무슨 고적 복원을 목적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당시 함흥부 당국이 1930년대 초반부터 야심차게 추진한 소위 반룡산공원 조성 사업의 일환이었을 뿐이다.

사진 5. 1904년 말/1905년 초 촬영된 함흥성의 폐허 모습. 뒷쪽으로 보이는 건물은 함흥성 북장대이고, 오른편 일본군 병사들이 올라선 곳이 파괴된 원래의 구천각이다.  개인 소장
사진 5. 1904년 말/1905년 초 촬영된 함흥성의 폐허 모습. 뒷쪽으로 보이는 건물은 함흥성 북장대이고, 오른편 일본군 병사들이 올라선 곳이 파괴된 원래의 구천각이다. 개인 소장
사진 6. 18세기 말/19세기 초에 그려진 함흥읍도 (충남 유형문화재 제 217호)에 드러나 있는 구천각과 북장대(북산루)의 모습. 성벽의 일부로 아치가 붙어있는 건물이 북산루이며, 그런 것 없이 성벽에 붙어있는 세 칸 짜리 정자는 구천각임이 확인된다. 즉 이 두 건물은 분명한 별개의 건축물이며, 1713년 (혹은 1613년/1913년)에 북장대 터에 구천각이 들어섰다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사진 6. 18세기 말/19세기 초에 그려진 함흥읍도 (충남 유형문화재 제 217호)에 드러나 있는 구천각과 북장대(북산루)의 모습. 성벽의 일부로 아치가 붙어있는 건물이 북산루이며, 그런 것 없이 성벽에 붙어있는 세 칸 짜리 정자는 구천각임이 확인된다. 즉 이 두 건물은 분명한 별개의 건축물이며, 1713년 (혹은 1613년/1913년)에 북장대 터에 구천각이 들어섰다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일단 확실히 해 둘 것은 구천각이라는 누정이 실제로 전근대에 존재한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며, 이 건물이 고려시대 이후 20세기 초엽까지 줄곧 존재해왔던 것 역시 사실이라는 점이다. 함흥 지역에서는 태조 이성계와 그 아버지 이자춘이 이곳에서 여진족을 활로 쏘아 소탕했다는 전설도 전해졌으며,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으로 유명한 김병연(김삿갓)이 구천각에 올라 시를 쓴 것도 남아있다. 그러나 1904년에 러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함흥과 그 주변 일대에서 일본군과 러시아군이 격전을 벌이는 와중에 함흥성 일대는 상당한 피해를 겪었고, 구천각과 그 곁에 있던 북장대 건물 역시 심하게 파괴되고 말았다. 당시의 격전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으로, 1905년 미국인 작가로 러일전쟁을 취재하고자 종군기자로 들어왔던 잭 런던 (Jack London)이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사진 5)이 남아있다. 이는 현재 공주 충남역사박물관이 위탁 소장하고 있는 18세기 말/19세기 초의 함흥읍도 (충남 유형문화재 제 217) 등과 대조 (사진 6)해보면 그 실체가 명확해진다. 북한 측의 공식 설명이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북장대 터에 옮겨지었다고 쓴 것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실제로는 20세기 초까지 두 건물은 서로 다른 별개의 건물이었다.

사진 7. 함흥성의 훼철 소식을 알리는 [대한매일신보] 1906년 5월 8일자 기사.
사진 7. 함흥성의 훼철 소식을 알리는 [대한매일신보] 1906년 5월 8일자 기사.

 

파괴된 잔해로나마 남아있던 구천각은 19065월 통감부에 의해 함흥성 성곽이 전부 철거되는 과정 속에서 완전히 헐려나가게 되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보도에 따르면 (190658일자, 사진 7),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성벽은 비적을 방어하는데 쓸모가 있는데다 오랫동안 내려온 고적이라는 이유로 함흥성의 철거를 반대했다. 그러나 이미 을사조약으로 실권을 잃어버린 대한제국으로서는 일본군과 경찰이 주둔하고 있으니 함흥 지역의 치안 문제는 없다는 통감부의 반박을 다시 문제 삼을 도리가 없었다. 결국 성곽은 19066월부터 철거되어 그해 말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구천각의 잔해도 이때 깨끗이 사라졌다.

사진 8. [황성신문] 1906년 6월 28일자에 보도된 구천각 관련 "괴변" 보도
사진 8. [황성신문] 1906년 6월 28일자에 보도된 구천각 관련 "괴변" 보도

 

당시 함흥 지역의 주민들이 일본의 일방적인 성벽 철거, 특히 구천각의 철거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가졌음은 황성신문1906628일자의 다음 기사 (사진 8)를 통해 엿볼 수 있는데, 이 기사는 전라남도 구례에 살던 유학자 매천 황현이 거의 그대로 매천야록에 옮겨 적어놓은 것에서 알 수 있듯당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듯 하다.

 

<또 하나의 괴이한 일 (亦一恠事)> (해석: 석지훈)

함흥군 통신에 따르면 함흥군 내 치마대(馳馬臺)와 구천각(九天閣)은 본래 우리 태조 고황제께서 어린 시절에 말을 달리고 활을 쏘시던 옛 터로 무척 소중한 곳이다. 군내 주둔하고 있는 일본 헌병이 성벽을 파괴하고 구천각을 헐어내다가 그 가운데에 있는 1천 근에 달하는 축대석이 무거워 이를 폭약으로 파쇄해 없애자 그 안에서 큰 뱀 한 마리가 튀어나오는데, 그 굵기는 대들보만하고 길이는 4-5() 정도 되었다. 뱀이 지붕과 담장에 기어올라 사람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니 일본 헌병 한 명이 이를 총으로 쏘았으나 맞지 않았고, 두 명이 이를 쏘았으나 역시 맞지 않았다. 다시 병정 일곱 명이 계속해서 총을 쏘았더니 그제야 총에 맞아 뱀이 죽었기에 이를 일본 헌병들이 동문 밖으로 가져가 불태웠다. 성 안에 푸른 연기가 자욱하고 악취가 코를 찌르더니 뱀을 쏘아 죽인 일본 병정 일곱 명이 갑자기 죽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은 뱀이 나온 구멍에서 다시 또 큰 뱀 하나가 나와 동서로 왔다갔다하며 밤낮으로 곡성을 내는 것이 끊이지 않아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한다.

 

여하튼 이렇게 해서 원래의 구천각은 1906년에 자취를 감추었고, 구천각과 성벽이 있던 반룡산(盤龍山) 꼭대기 주변 일대는 1910년대 중반에 약간의 조경과 식수가 이루어진 뒤 (매일신보1915518일자 참조)반룡산 공원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1920년대에 이르러 함흥부 당국이 주최한 각종 공공 행사가 개최되기도 했는데, 운동회나 야유회같은 행사부터, 부내 관민 합동으로 진행된 이른바 요배식(遙拜式) 등 노골적인 친일 행사도 있었다. 그러나 1910년대와 20년대의 각종 신문 기사 등을 보면 이곳이 오늘날의 의미대로의 공원으로 제대로 관리된 것 같지는 않은데, 가령 이 일대에 빈민들이 지은 무허가 토막집들은 물론, 묘지, 심지어 공설화장장까지 아무렇게나 들어섰다는 기록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사실상 방치되었던 반룡산 공원이 본격적으로 공원의 형태를 제대로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초였다. 먼저 19305월 함흥부 부협의원회가 공원 내의 화장장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기로 하고, 1932년에는 반룡산공원 내에 정식 도로가 지어지면서 본격적으로 공원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것에는 1930년대 초부터 본격화된 함흥부의 도시화와, 이에 따른 부영주택 건설 사업 및 빈민/영세민 이주 사업, 그리고 함흥부내 관광자원의 본격적인 확충이라는 요소가 작용했다. 그리하여 1935년에는 옛 함흥의 객사로 당시 함남도립의원 병실로 사용되고 있던 풍패관(豊沛舘)을 공원 내로 옮겨지어 함흥부 거주민의 휴식처 및 공공행사장으로 삼고, 본격적인 부지 정리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옛 화장장과 묘지 등을 정리한 부지에는 야구장을 겸한 공설야구장 등의 시설을 짓기로 하고, 반룡산의 꼭대기, 즉 옛 북장대가 서있던 일대 (속칭 삼각정”)에는 새롭게 전망대를 짓기로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조선일보193649일자의 다음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함흥 반룡산공원, 미화공작(美化工作)의 계속. 3개소 시공 예산통과>

함흥약진하는 함흥 - 매년 함흥으로서 없지 못할 명랑한 존재인 반룡산(盤龍山)은 이미 5-6년 전 부터 10여만원의 경비를 들여 공원으로서의 시설에 극력하고 있던 바 금년도에 역시 여러 가지 미화작업을 실시하기로 되어 그 예산안까지도 무사히 통과되었다는데 금년도 화장작업(化粧作業)의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삼각정 꼭대기에 공비(公費) 3천원으로 전망대(展望台)를 설치

하북부에 있는 예전 분묘지에 공비 7만원으로 주택지를 설치

구 화장장 터에 공비 2천원을 들여 아동운동장을 조성

 

사진 9. 반룡산공원 내로 1935년 이축된 옛 함흥 객사 풍패관의 모습. 1936년 함흥 사사누마 사진관 (笹沼寫眞館)이 발행한 함흥안내명승사진첩(咸興案內名勝寫眞帖)에 수록된 사진이다. 옆에는 옛 함흥성 성벽의 극히 일부가 보존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작은 사진이 같이 수록되어 있다.
사진 9. 반룡산공원 내로 1935년 이축된 옛 함흥 객사 풍패관의 모습. 1936년 함흥 사사누마 사진관 (笹沼寫眞館)이 발행한 함흥안내명승사진첩(咸興案內名勝寫眞帖)에 수록된 사진이다. 옆에는 옛 함흥성 성벽의 극히 일부가 보존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작은 사진이 같이 수록되어 있다.

 

사진 10. 함흥 반룡산공원 내에 1937년 9월 신축, 준공된 "함흥전망대" 구천각의 모습. 『동아일보』 1937년 10월 31일자 수록. 옆의 기사 본문에서도 이를 "전망대 구천각이 중건되어 관광객의 편의를 도하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사진 10. 함흥 반룡산공원 내에 1937년 9월 신축, 준공된 "함흥전망대" 구천각의 모습. 『동아일보』 1937년 10월 31일자 수록. 옆의 기사 본문에서도 이를 "전망대 구천각이 중건되어 관광객의 편의를 도하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이렇게 해서 1936년부터 옛 북장대와 구천각이 있던 터에 본격적으로 함흥 시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건축이 시작되었고, 그리하여 19377, 1년여 간의 공사 끝에 반룡산 정상에는 새롭게 지어진 함흥 전망대가 완공되어 이해 915일에 준공식을 가졌다. 당초에는 이 건물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를 명확하게 정하지 못했던 것 같으나, 건물이 준공될 무렵에는 그 옛날 누각의 이름을 따 구천각이라고 이를 정식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당시 새로 지어진 건물의 사진은 동아일보19371031일자 기사 (사진 10)에 수록되어 있는데, 보다시피 오늘날 남아있는 구천각 건물의 모습과 일치한다.

사진 5를 참조해보면, 1930년대에 이 전망대를 축조할 당시에 아마 사진 혹은 다른 기록으로 남아있던 옛날의 북장대의 모습을 기반으로 하여 이 건물을 새롭게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고려시대에 축조된 함흥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좋게 보아야 옛 건물의 모형에 불과하다. 이는 마치 일본의 오사카 성이 철근 콘크리트로 재건된 모형으로 현재는 현대식 용도로 사용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함흥 반룡산 정상에 서 있는 문제의 건물은, 고려시대에 지어진 함흥성의 북장대도 아니고, 그 부근에 서 있던 구천각 옛 누각도 아니요, 결과적으로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승인해 활동한 친일 기초의회 기구인 함흥부협의회의 주동으로 1930년대에 지역 관광자원의 확충을 위해 지은 일개 전망대 건물에 불과한 것이다.

겨우 80여년 전에 지어진 건축물인 것을 북한 당국이나 그 일대의 주민들이 모를 리가 없을테지만, 앞서 살펴본 북한 측의 안내문에 나온 것처럼 이곳에 김일성과 김정일이 친히 왕림했다는 이유에서인지 이러한 사실은 깨끗이 묻혀버리고 말았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사진 2와 같은 1990년대 이전까지의 사진 자료에서는 건물에 별도의 현판이 붙어있지 않지만,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 이후에 촬영된 사진자료에서는 현판이 새로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아마도 북한 당국에서도 이 건물의 역사성을 계속 부풀리려는 모종의 시도를 진행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처럼 이 건물을 가지고 애국투쟁의 역사와 높은 건축술을 보여주는 건물이라고 운운하는 북한 당국의 선전도 한심스럽지만, 이렇게 국내에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여러 사료와 자료들만 간단히 훑어보아도 금방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음에도, 그간 부실하게 이전의 글만 베껴대기에 급급했던 우리 측의 행태도 딱히 우열을 가리기 힘든 잘못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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