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총선은 '한일전'도 '한중전'도 아니다

  • 기자명 김형민
  • 기사승인 2020.04.10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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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한테는 가위바위보도 이겨야 돼.” 몇 년 전 중학생이었던 딸이 한일전 축구 경기를 앞두고 주먹을 부르쥐며 한 소리다. 나는 당연히 한껏 편안한 옷으로 의관정제하고 맥주 한 캔 들고서 ‘무조건 이겨야’ 하는 한일전의 스릴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열 너덧살이었던 딸이 그리도 야무지게 한일전 승리의 의지를 불태울 줄은 또 몰랐었다. “너희들도 그러냐?”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 “한국 사람이잖아. 몰라. 그냥 일본한테 지면 기분 나빠.” 나도 모르게 그 심경 내가 안다고 맞장구를 칠 뻔 했다.

한일전은 그런 것이다. 한국 일본 축구팀이 4강에 들어서 각각 다른 나라와 준결승을 펼친다고 하자. 나는 당연히 한국의 승리를 바라지만 동시에 일본이 깨지기를 기도한다. 결승에 올라와서 한국과 맞붙는 것도 재미야 있겠지만 졌을 때의 스트레스가 걱정되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국 야구팀이 일본 야구팀을 이겼을 때 타격의 달인 이치로가 “Fuck”을 부르짖는 것이 카메라에 잡혔는데 일본에 질 때마다 나 역시 딱 그 표정이 돼서 “젠장”을 외쳐 댔던 것이다.

꼭 이겨야 하는 경기라는 부담감은 있지만 그래도 한일전은 재미있다. 역대급 명승부가 거의 경기마다 속출할 정도다. 그런데 요즘 별나게 많이 등장하는 ‘한일전’ 소리는 별로 달갑지 않다. 경기(?)는 얼마 남지 않았는데 기대되지도 않는다. 더하여 진짜 한일전도 아닌데 나 같은 사람의 승부욕만 부풀리려는 의도의 허당 이벤트 같아서 불쾌하기까지 하다. 바로 “총선은 한일전”이라는 구호 때문이다.

이를 홍보하는 포스터도 각양각색이다. 백범 김구가 가운데 서고 유관순과 윤봉길 등이 옆에 서고 그 뒤에 수십 명의 선열들이 늘어서서 ‘총선은 한일전이다.’를 부르짖고 있기도 하고 안중근 의사의 단지(斷指)한 손바닥을 걸어놓고 그 아래에 ‘총선은 한일전이다.’를 새겨 놓기도 했다. 이쯤 되면 궁금한 게 많아진다. 일단 해방된 지 75년이고 일본 사람들이 여기 남아 있서 총선 출마한 것도 아닌데 왜 한일전이냐. 그러니 ‘토착왜구’들이 많기 때문이고 이번 총선에서 그들을 ‘박멸’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단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이번엔 입의 침샘에서 침 대신 의문이 고이기 시작한다.

 

왜구와 박멸이란 단어를 쉽게 쓰는 사람들

무엇보다 먼저 ‘토착왜구’의 정의가 궁금하다. 미통당은 토착왜구 정당인가?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 역시 ‘토착왜구’ 부류라고 보아야 하는가? 나라를 팔아먹어도 미통당 찍을 사람들이 국민의 20%는 될 듯 하고 심정적으로 미통당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 두 배는 될 거 같고, 왔다 갔다 하긴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을 지지했던 이들이 51.6%였는데, 이들이 모두 ‘토착왜구’ 내지 ‘토착왜구’ 지지자인가? 정확한 범위도, 기준도 없는 ‘토착왜구’ 낙인을 감히 한 나라의 수천만 국민에게 어찌 그리 쉽게 찍을 수 있는가? 이해하려고 기를 쓰다가 방귀가 나올 지경이지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그들을 ‘박멸’하자는 표현은 또 어찌 그리 쉽게 가능한가? ‘빨갱이를 박멸하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진짜 빨갱이는 말할 것도 없지만 언뜻 보기엔 비슷해도 전혀 다른 사람들, 나아가 자기 마음에 안드는 삐딱이들까지 씨를 말렸던 ‘박멸의 역사’를 간직한 나라에서 어떻게 민주주의를 한다고 나대는 사람들이 그런 표현을 함부로 쓴단 말인가? 빨갱이 박멸은 부당하고 토착왜구 박멸은 정당하다고? 혹시 그렇게 뻗대는 사람이 있다면 험한 말이 튈 수 밖에 없다. 에라이 바보야. 인간에 대해 ‘박멸’이라는 표현을 씀은 어떤 경우에도 부당하며 불의하며 불온한 일이 되는 것이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 무슨 민주주의를 하며 무슨 민족 정기를 세운다는 거냐. “에이 말이 그렇지 뜻이 그러냐?”고 한 발 빼려는 자들의 귓방망이에는 하이데거 선생이 왕년에 하신 말씀을 꽂아 넣고 싶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또 하나. 일본인들이 자행한 민족차별에 누구보다 분노할 그분들을 두고 어느 못된 일본인이 ‘조센징’이라고 뇌까렸다고 가상해 보자. 아마도 대단한 사달이 나리라. 조센징? 조센징? 아마 그 일본인은 영혼이 털리는 것은 물론 뼈와 살이 분리되는 고통을 이해하게 되리라. 조센징은 조선인(朝鮮人)의 일본어 발음일 뿐이지만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민족 차별이 그대로 반영된 말이기에 우리는 그 말에 이맛살을 찌푸리고 주먹을 부르쥐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왜구’라는 말을 서슴없이 쓰는 건 뭘로 이해해야 되나? 이미 수백년 전에 일본의 아메노모리 호슈는 “우리나라 사람을 보고 반드시 왜(倭라) 하니 우리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라고 조선 통신사에게 항의했다. 일본인에게는 차별적이고 모욕적인 단어인 셈이다. 조센징은 열받을 일이지만 왜구는 정당한가?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할 말이 없다. 참 천지분간을 못한다고 할 밖에. 혹자는 이렇게 항변하리라. “일본의 혐한들은 얼마나 심한 줄 알아?” 그러면 나는 딱 두 어절로 답하고 폼나게 돌아설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닮게?”

이야기가 샜다, 한일전으로 돌아가자. 2020년 4월 15일은 우리가 투표하는 날이지 1945년 8월 14일도 아니고 1910년 8월 30일도 아니다. 전쟁을 하는 게 아니라 민주적 투표로 의회를 꾸릴 국회의원들을 뽑는 날이다. 여기서 여당이 압승한다고 치자. 그럼 ‘토착왜구’를 몰아낼 수 있는가? 미통당 해산시키고 조선일보 폐간시키며 친일파 재산 몰수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인가? 단언컨대 없다. 그럴 수 없다. 그쯤 되려면 선거가 아니라 전쟁을 치러야 할 일이거니와 선거에서 250석을 얻은들 그렇게 해서는 안 되고 그렇게 할 가능성조차 없다. 선거에서 진 소수를 그렇게 다루는 건 민주주의의 절차가 아니라 전쟁 후 ‘전후처리’의 범주고 선거에서 이긴다고 그런 권리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대한민국이 막 해방돼서 천지분간 못하는 신생 공화국인 줄 아는가. 또. 또. 또 “말이 그렇지 뜻이 그러냐?”고 하는 사람이 있겠지. 그런데 ‘뜻이 그런’ 말을 왜 포스터까지 만들어 떠벌이고 다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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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은 한중전이다" 미러링이 등장한 이유

물론 짐작이 가는 바는 있다. “말이 그렇지 뜻이 그러냐.”는 얘기는 반대편에서도 똑같이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편에서는 “총선은 한중전” 또는 숫제 “남북전”을 소환하고 있다. 이 정권은 다 빨갱이 정권이고, 그를 지지하는 이들 역시 다 빨갱이에 넘어간 사람들이라 그들과 맞서는 것은 곧 한중전 또는 남북전이라는 논리다. 역시 ‘박멸’을 주장하고 그 기세 또한 드높다. 그런데 정작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냐고 치고 들어가면 대개는 “말이 그렇지 뜻이 그러냐”고 할 것이다. 집 몇 채씩 가지고 부동산 부자를 꿈꾸고 그 비싼 미국 음대에 척척 자식 집어넣는 ‘빨갱이’들이 뭔 빨갱이겠나. 또 그들이 250석을 차지한들 왕년같은 ‘빨갱이 사냥’이 가능하겠나.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결국 대충만 살펴도 이 “말.그.뜻.그”는 결국 서로에게 으르렁대지만 한 몸에서 난 머리들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 ‘몸’은 결국 한국전쟁 이후, 그리고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흑백 논리, 즉 적 아니면 아군, 우리 편 아니면 적의 편이라는 편리하지만 위험한 사고방식, 기어코 한쪽을 ‘박멸’하자는 외침으로 자기편을 묶어 세우고 그 와중에 정치적 이익을 취하려던 음험한 의도, 상대방을 악한으로 만들수록 자신들이 정의로워진다는 무지한 착각 등으로 구성된다. 결국 총선은 ‘00전’이라는 사람들의 거리는 빗금 하나보다도 넓지 않다. 똑같은 논리를 가지고 대상만 바꾸어 전개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현상은 뉴라이트들에게서 향용 나타난다. 대학 시절 코카콜라를 미제의 정액이라고 부르며 미제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던, 휴전선 너머 자주의 나라 수령님을 흠모하던 이들이 별안간 돌변하는 것을 보며 어떻게 저리도 180도로 바뀔 수 있나 한탄한 기억 많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 비결은 간단하다. 악의 축만 바꾸면 된다. 미 제국주의라는 상수를 버리고 거기에 북한의 세습 정권을 대입해 버리면 그들은 열정적으로 헌신적으로 또 다른 절대악을 향해 분노의 화살을 꽂는 것이다. 그들이 바뀐 게 아니라 그들의 바라보는 방향이 바뀌었을 뿐이다. 총선은 한일전이라 외치는 이들과 총선은 한중전이라 고집하는 이들의 멘탈은 그래서 같다.

 

빨갱이 타령토착왜구 타령은 다르지 않다.

어디 제헌국회 선거도 아니고 해방된 지 75년 되는 해에 이뤄지는 선거에서 ‘총선은 한일전’이 나오는 자체가 어이가 없지 않은가. 해방둥이들이 여든을 바라보는 마당에 해방 직후의 반민특위보다도 더 광범위하고 더 엄격한 잣대로 ‘친일파’를 가려내는 것이 가능한지도 모르겠지만 굳이 그들을 ‘청산’하는 게 지상과제로 부상한다면 차라리 수백 년 전 북벌을 제기하던 윤휴처럼 “(코로나 등으로) 천하의 사세 변화가 눈앞에 바싹 다가왔습니다. 이 기회를 틈타 군사를 훈련하고 식량을 저축한다면 크게는 원수를 갚아 수치를 씻을 수 있을 것이고 작게는 나라를 편안히 하고 백성을 보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면서 ‘남벌’(南伐)을 도모함이 어떨까 한다.

‘빨갱이’ 타령 하는 사람들, 광화문에서 턱도 없는 빤스 전광훈 목사의 설교에 열광하는 이들이 왜 생겨났는지를 생각해 보라. 그건 독재 세력들이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집단을 ‘빨갱이’로 혐오할 것을 수십 년 동안 가르치고 주입한 결과다. 왜 그들을 흉내내서 사람들을 갈라치고 규정하고 낙인찍고 그를 통해서 자신들의 정치적 유익을 구하려 하는가. 이것은 죄악이다. ‘빨갱이 타령’과 ‘토착왜구 타령’은 다르지 않다. 달라봐야 자진모리와 휘모리일 뿐이다. 이것만 해도 황망함은 하늘에 닿지만 억지로 인정하고 넘어가려고 해도 다음의 질문에 부딪치면 그만 코를 싸매고 털썩 주저앉게 된다.

“온 지구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뒤덮이고 마스크를 두고 국가가 날치기를 벌이고, 정보기관이 투입돼 진단 장비를 훔쳐 오고, 경제 대공황의 경고가 연신 울려 퍼지는 상황에서, IMF 때는 집이 무너졌지만 이제는 땅이 꺼지고 있는 판국에, 삶이 바닥으로부터 와해되는 공포가 현실화되고 있는 절박한 시점에, 건곤일척 벌어지는 선거판의 슬로건이 얼씨구 ‘한일전’ 절씨구 ‘한중전’이라면 솔직히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을까? 이 중차대하고 복잡한 선거판에서 우리는 상대방을 악마로 몰고 박멸 대상으로 치부하는 선거전을 굳이 펼치고 지켜보아야 할까?” 아이고 우리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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