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학생들은 어디로 수학여행을 갔을까

  • 기자명 박광일
  • 기사승인 2020.07.09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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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가 자신이 입학하는 고등학교에 수학여행이 없다고 실망을 하더군요. 원래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녀석인데 수학여행은 조금 다른 모양입니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보낸다는 점이 여행 이상의 뭔가를 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요즘은 수학여행에 대한 열기가 덜한 편입니다. 3~40년 전에는 여행 자체가 귀한 때라는 점에서 수학여행은 중, 고등학교 시절 특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수학여행이 일제강점기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당시 수학여행의 전체 모습은 아니겠지만 잠시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일제강점기 이화학당 학생들의 소풍_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일제강점기 이화학당 학생들의 소풍_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먼저 수학여행(修學旅行)이란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01년 황성신문입니다. 다른 나라 소식을 전하는 기사에 나오는데요, 러시아의 해삼위동양어학교 그러니까 블라디보스토크의 외국어학교가 만주로 수학여행을 갔다는 내용이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부터 학교에서 가는 여행을 수학여행이라고 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수학여행이란 말이 쓰이기 전에는 소풍이라고 했고 화류라고도 하고 일본에서 쓰던 원족이란 표현도 가져다 썼습니다.

그런데 1902, 대한제국이 이민업무를 맡아보던 관청인 <수민원>과 관련된 법령에서 수학유람(修學遊覽)’이란 표현을 씁니다. 유람이긴 하지만 학습의 의미가 포함된 외국여행을 의미하는 낱말이죠. 그러던 중 190691일 공포한 사범학교 관련 법령에 수학여행을 간 날은 수업 일수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내용(지금 학교에 적용한다면 아이들이 무척 실망하겠죠)이 있는 걸로 봐서 수학여행이란 개념이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일제강점기 우이동으로 소풍 간 고등학생들(1940)_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일제강점기 우이동으로 소풍 간 고등학생들(1940)_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이처럼 수학여행이란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는 건 사실 용어의 등장만큼이나 학생들의 학교 생활과 관련된 여행 프로그램이 등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수학여행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은 1899년 경인선 개통입니다. 대규모로 사람을 실어나를 수 있는 교통시설이 생기며 단체여행이 가능해진 거죠.

경인선 개통식 당시 모습(1899)_ ⓒ위키백과
경인선 개통식 당시 모습(1899)_ ⓒ위키백과

 

 

이렇게 등장한 대한제국 시기 수학여행은 근대시설을 살핀다는 수학여행 본래 목적과 함께 여러 사람이 함께 움직이다 보니 충군애국을 다지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수학여행이 일종의 조회나 집회와 같은 성격이 강했던 겁니다. 이처럼 처음 소풍이라 부르던 교실 밖 체험학습, 곧 수학여행은 운동회와 더불어 근대교육이 확산되며 자리를 잡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를 방문한 학생들(1922)_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일제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를 방문한 학생들(1922)_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그런 점에서 일제의 압박이 강해지고 또 강제로 국권을 빼앗긴 시절, 통감부, 그리고 조선총독부는 처음에는 수학여행을 꺼렸는데요, 1912년 조선총독부는 각 도의 장관에게 보낸 문서에서 수학여행에 대한 주의감독을 요구합니다. 그 내용을 잠깐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숙박을 요하는 수학여행을 하지 말 것. 특별한 사유가 있을 경우 도장관(도지사)에게 허가를 받을 것

수학여행을 할 경우 그 여행 중 연구사항, 경과, 지명 및 경비를 기재하여 도장관에게 보고할 것

 

이와 같은 내용과 함께 수학여행 비용과 같은 경제적인 문제를 크게 부각시켜 이 문제로 인해 학부모에게 부담을 주는 것을 막는 것이라는 쪽으로 몰아가는 느낌을 주는데요. 결국 많은 학생이 함께 수학여행을 하면 애국심을 높일 수 있다는 걱정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정책의 영향으로 1910년대 수학여행에 대한 내용은 거의 살펴볼 수 없습니다. 일제의 기관지 역할을 한 신문인 <매일신보>를 보아도 수학여행 기사는 9건 정도에 불과할 정도죠.

일제강점기 단발머리 여학생들의 단체사진(1930년대 후반)_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일제강점기 단발머리 여학생들의 단체사진(1930년대 후반)_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하지만 3.1운동 이후 수학여행은 늘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문화통치를 강조한 것과 관련이 있으며 다른 이유로는 당시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의 의도에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민족운동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시하는데요.

 

조선 문제 해결의 사활은 친일인물들을 많이 얻는 데 있으므로 친일 민간인에게 편의와 원조를 주어 수재교육의 이름 아래 많은 친일 지식인을 긴 안목으로 키운다.’

 

이러한 일본 총독의 언급에서 짐작할 있는 것처럼 이제 수학여행은 일제의 통치를 홍보하고 발달한 일본(그리고 일본의 통치를 받아 발전한 한국)의 모습을 보여주어 식민지 지배를 안정시킬 계획을 세우게 되죠. 실제로 1920년에 수학여행을 겸한 일본 관광이 붐을 이루게 됩니다. 1920년에서 1923년까지 수학여행 관련 기사가 급격하게 증가하였는데 그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수학여행 참여 인원은 11명의 작은 규모부터 800명까지 이릅니다. 강계공립보통학교 학생이 무려 800명의 학생이 움직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몇몇 학교는 학부형이 수학여행에 참여하기도 했고요. 그리고 가장 큰 문제였던 수학여행비는 매년 일정액을 모아 수학여행이 있는 해에 충당하는 방식을 썼습니다. 그런데 경성공업전문학교의 경우 총 36원의 수학여행 경비 중 13원을 학교에서 지원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89일 동안 일본으로 다녀오는 경우라 비용부담이 커서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일제강점기 서울 세검정으로 소풍 간 어린이들_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일제강점기 서울 세검정으로 소풍 간 어린이들_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수학여행 목적지는 국내의 경우 경성, 평양, 개성, 경주, 수원, 부여, 강화를 축으로 하는 역사 유적이 많은 곳이 포함되었지만 실제로 인천, 진남포, 신의주, 원산 등 공업시설이 많은 곳이 주를 이뤘습니다. 당시 수학여행 관련 기사 273건을 분석한 기사를 보면 산업시설을 살펴본 곳이 69%, 역사 유적을 살펴본 곳이 31%로 그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산업, 공업 시설의 예로는 이런 것이 있는데요, 수원으로 가면 권업모범장, 진남포로 가면 일본군함이 정박해 있던 모습, 인천의 갑문 등이 주요 관람지였던 것입니다. 인천 수학여행과 연계해 1923년 월미도유원주식회사가 월미도를 관광지로 개발하기 시작하죠. 당연히 이러한 시설을 본다는 것은 해당 행정관청 및 군부대의 협조를 받아야 했습니다.

 

당시 월미도 관광지도, 각 시설의 이름을 임의로 표기하였다.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소장_ ⓒ위키백과
당시 월미도 관광지도, 각 시설의 이름을 임의로 표기하였다.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소장_ ⓒ위키백과

 

또한 이 시기에 조선총독부는 교통시설, 숙박시설 등을 확충합니다. 최초의 관광철도라고 할 수 있는 금강산철도 역시 1921년 공사를 시작하고, 1929년 서울에서 열린 박람회에서는 셔틀버스를 도입하기도 합니다. 또 큰 규모의 숙소도 등장하는데요, 경상의 전동여관, 개성의 송도여관, 원산의 통전여관 등이 유명했습니다. 또 여관 외에도 교회기숙사, 천도교 종리원, 관음사 등 종교시설이 숙소로 활용되기도 했죠. 실제로 1916년 조선총독부는 숙박업소관리규정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금강산선 내금강 역(1944)_ ⓒ위키백과
일제강점기 금강산선 내금강 역(1944)_ ⓒ위키백과

 

그렇다면 당시 수학여행에서 한반도를 대표하는 서울이나 평양, 그리고 일본에서 어떤 곳을 살펴보았는지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각 지역에서 들렀던 것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서울(경성) - 총독부 인쇄소, 노량진 수도수원지, 창덕궁 동물원, 상품진열장, 남산공원

평양 숭실중학교, 을밀대, 제당회사, 사동탄광, 항공대, 승호리시멘트사, 77연대

일본 야하타제철소, 탄광, 공장, 박람회

일제강점기 평양의 풍경이 인쇄된 엽서, 을밀대(乙密台)에서 본 모란봉 및 대동강 전경_ ⓒ위키백과
일제강점기 평양의 풍경이 인쇄된 엽서, 을밀대(乙密台)에서 본 모란봉 및 대동강 전경_ ⓒ위키백과

 

이런 가운데 일제의 손이 닿지 않는 사립학교의 경우 수학여행이 민족정신을 높이는 계기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강화도의 역사유적에서 근대사의 비극을 떠올리는 글을 쓰거나 산업시설이 일본으로 넘어간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러한 점에 유의한 일부 교사들은 학교 공부를 밖에서 확인하는 것이며 여관의 같은 방에서 자며 사제지간 정이 두터워지고 자연을 벗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역사, 지리, 박물에 있어서는 필수적으로 수학여행이 필요하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1932, <동광>이란 잡지에 실린 글인데요, 잠시 살펴보면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이 풍신수길(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로 용장이란 것을 알지만 이 충무공이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신 이인지도 모르며, 아키타 현이 석유가 많이 나는 것은 알지만 조선 땅에 묻힌 석탄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른다.’

며 수학여행의 필요성을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학생들은 어떠했을까요. 여러 자료를 보면 총독부의 의도도, 또 민족정신을 강조한 교사들의 의도와도 조금은 다른 방향(?)에서 수학여행에 대한 욕구는 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군산의 메리물턴학교 학생들은 수학여행을 허락해 달라며 동맹휴학을 하기도 했고, 배화여고보 학생들은 수학여행 대신 소풍을 갔다는 이유로 동맹휴학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동기들과 함께 평소에 가볼 수 없는 곳을 다녀온다는 수학여행 본래의 모습에 크게 열광했을 것 같습니다.

일제강점기 학생들의 관악산 등산(1940)_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일제강점기 학생들의 관악산 등산(1940)_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그런데 정작 이 시기 수학여행에서 가장 큰 이슈는 비용 문제였습니다. 동아일보에 나온 기사로 제목을 의역하면 <사치의 계절>이란 글인데요, 잠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얼마 있으면 각 학교에서 수학여행이 있을 것이다. 수학여행도 매우 좋은 일이나 그것도 의식이 족한 자에게 하는 말이다. 집에서는 늙은 부모, 어린 처자가 기아를 참고 모아 보내는 학비로 경주, 부여, 평양에 3.4일을 특별한 뜻 없이 돌아다니게 하는 것은 큰 사치요 낭비가 아닐까. 경성역에서 학교 당국자가 수 백원 어치 차표를 사는 것을 볼 때 그 수백원의 지전에서 늙은 학부형의 피땀이 뚝뚝 떨어지는 듯하여 전율을 금치 못한다.

(당시 1년 학비는 2~300원이었고 수학여행 비용은 10~15원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여론에 따라 수학여행을 일정 기간 멈춘 학교도 많았죠. 그렇지만 일본이나 만주로 수학여행을 가는 것이 아니라면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의 여러 곳을 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수학여행은 1930년대 전쟁이 격화되며 급격히 줄어들게 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일제강점기 수학여행의 의미와 의의를 어느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수학여행과 관련이 있는 다양한 주체가 관심사가 다른 것, 또 의도와 결과가 다른 경우나 나타나기 때문인데요. 아마 지금의 수학여행도 그와 같은 처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수많은 학생들이 들뜬 마음으로 오갔을 서울역(당시 경성역) 모습_ ⓒ위키백과
수많은 학생들이 들뜬 마음으로 오갔을 서울역(당시 경성역) 모습_ ⓒ위키백과

 

다만, 이 당시 수학여행은 학생들에게 큰 혜택이었다는 점은 생각해 볼 거리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여행을 하기 어려운 시절, 국토의 여러 곳, 그리고 일제의 의도가 반영되었다고는 하지만 외국의 여러 곳을 본다는 것은 학생들에게 새로운 생각거리를 던져주었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요즘 수학여행이 어떻게 가야할지 고민을 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수학여행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점도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요즘 학생들에게 여행은 더 이상 혜택이나 특별한 것이 아닌 상황이라는 점에서 수학여행의 미래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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