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원 안장 논란' 백선엽은 간도특설대를 어떻게 평가했나

  • 기자명 송영훈 기자
  • 기사승인 2020.06.15 0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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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불거진 ‘현충원 친일파 파묘’ 논란으로 백선엽 예비역 장군의 사후 현충원 안장 여부가 또 다른 논란으로 불거졌습니다. 백 전 장군은 일제 강점기 만주국 간도특설대 복무전력 때문에 친일인사로 분류되는 동시에 6.25 한국전쟁 당시 휴전회담에 한국 측 대표로 참여한 전쟁영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관련 팩트를 확인했습니다.

유튜브 방송화면 갈무리
유튜브 방송화면 갈무리

팩트① 백선엽의 현충원 안장은 현행법상 가능하다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국립묘지법)은 국립묘지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제5조에 국립묘지별 안장 대상자를 규정하고 있는데,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현역군인 사망자, 무공훈장 수여자, 장성급 장교, 20년 이상 군 복무한 사람, 의사상자 등이 대표적입니다.

백 전 장군은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국가유공자법), 참전유공자 예우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 등에 의거해 현행법상 국립묘지 안장대상입니다. 단, 국가보훈처는 현재 서울 현충원 장군 묘역에 자리가 없어 대전 현충원으로 모실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 때문에 여당인 민주당 일각에서 관련법 개정 추진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이번 논란도 민주당 이수진 의원의 발언으로 시작됐습니다.

 

팩트② 백선엽은 한국전쟁의 영웅이다

해방 후 미군정이 세운 군사영어학교 졸업 후 중위로 임관한 백 전 장군은 한국전쟁 개전 당시 제1사단장으로 활약했고, 1953년 휴전 당시 대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이어 두 차례의 육군참모총장과 연합참모부 의장을 끝으로 1960년 예편했습니다. 한국전쟁 중 낙동강 방어선이었던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했고 평양 전투, 중공군 춘계 공세에서도 활약하는 등의 성과를 이룬 명장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같은 공로로 2013년 8월 미8군 명예 사령관에 임명됐습니다. 주한 미 육군 측은 “백선엽 장군은 북한을 상대로 한반도를 방어하는 데 있어 탁월한 업적을 달성해 왔다”며, “그는 제임스 A 밴플리트, 더글라스 맥아더, 월튼 워커, 매튜 리지웨이 장군 등 한국 방어에 있어 리더십과 영웅적 행위로 알려진 장군들과 함께 한미 연합의 오랜 일원이다”라고 명예 사령관 임명의 배경을 밝혔습니다. 물론 이견도 있습니다.

 

팩트③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했다

백 전 장군은 1941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여, 1943년부터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하면서 반만항일항쟁에 나섰던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 토벌작전을 수행했습니다. 1945년 8월 일제가 항복을 선언했을 때는 만주군 헌병 중위였습니다. 1944년 봄, 일본군에 맞선 중국공산당의 주력부대 중 하나인 팔로군 토벌 작전에 참가해 정보수집에서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여단장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간도특설대에 몸담았던 시절에는 독립군과 싸운 적 없다고 했지만, 간도특설대는 ‘조선 독립군은 조선인이 다스려야 한다’는 명분으로 대대장 등 몇몇 직위를 제외하고 조선인으로 채워진 특수부대였습니다. 일제의 패망으로 부대가 해체할 때까지 독립군 말살에 앞장섰고, 그 활동이 특히 악랄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2008년 12월 한일관계사연구 제31집에 게재된 김주용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의 ‘만주지역 간도특설대의 설립과 활동’ 논문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특히 한인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한 활약을 펼쳤다. 항일단체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마을 전체를 소각하거나 민간인을 학살한 예는 한인들로 하여금 일제가 간도특설대를 설립한 목적에도 부합하는 행동들이었다. 가장 악랄한 방법은 한인들이 쓴다는 것을 일반인에게 인식시키기에 충분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만드는 <세계한민족문화대전>의 ‘獨立軍(독립군)을 索出(색출)하라, 滿洲(만주)에서 惡名(악명)높던 間道 特設隊(간도 특설대) 항목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간도 특설대는 창립부터 1943년 말까지 간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간도 특설대는 전시 상태의 군인들이었기 때문에 민간인에 대한 살상을 금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민과 병을 가리지 않았다. 잔인한 탄압의 대명사였던 간도 특설대는 주로 민간인에 대한 구타와 고문, 살해를 자행하였다. 7년 여간 활동하면서 항일 무장 세력에 대한 탄압과 민심동향 파악 및 무자비한 ‘토벌’ 등 이주 한인들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강하게 심어준 존재였다.”

이 때문에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백 전 장군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바 있습니다.

일본에서 출간한 『若き將軍の朝鮮戰爭(젊은 장군의 조선전쟁)』표지
일본에서 출간한 『若き將軍の朝鮮戰爭(젊은 장군의 조선전쟁)』표지

 

팩트④ 공(功)에 대한 보상은 있었고, 과(過)에 대한 반성은 없었다 

‘나라를 구한 전쟁영웅’,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명백한 명암이 존재하는 백 전 장군의 국립묘지 안장 논란이 불거진 상황에서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그의 공과 과에 대한 보상과 반성 여부입니다. 군사정권 시절 군이나 군 출신, 특히 장성 출신들은 많은 특혜를 받았습니다. 입법부나 행정부의 요직으로 가는 경우도 많았지만, 공공영역이 아닌 곳에서도 많은 혜택을 받았습니다.

백 전 장군은 32살에 예편해 인천에서 중학교와 상업고교를 인수해 백선엽·백인엽 두 장군 형제의 이름을 딴 <선인학원>을 설립했습니다. 2011년 6월 방송된 CBS <변상욱의 기자수첩>은 “선인학원은 군사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온갖 비리를 이용해 엄청난 규모로 커졌습니다. 민주화가 되면서 학생과 교사, 교수들의 투쟁으로 재단비리가 교육부 감사로 밝혀졌고 동생 인엽 씨는 구속기소되기도 했습니다. 독재권력의 비호로 학원재벌이 되면서 지방토호 비리의 뿌리가 되는 전형적인 과정이었습니다.” 고 보도했습니다.

군사정부 시절을 비롯해 오랜 기간 군 장성 출신으로서의 혜택을 누린 데 비해 일제강점기 간도특설대 복무에 대한 사과나 유감 표현은 없었습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될 당시, 백 전 장군은 “직접 독립군 토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며 이의를 제기했지만, 위원회는 근거 자료가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백 전 장군은 국내에서 출간한 자서전과 회고록 등에서 간도특설대 복무 사실을 서술했지만, 이를 명확히 반성하거나 사죄하는 내용은 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출간한 책에선 간도특설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기록했습니다. 1993년 일본에서 출간된 『対ゲリラ戦―アメリカはなぜ負けたか (대(對) 게릴라전-미국은 왜 졌는가?)』라는 책 초반부 「間島特設隊の秘密(간도특설대의 비밀)」 장(章)에선 간도특설대 활동에 대해 합리화 시도로 여겨질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역시 일본에서 2000년에 처음 발간된 『若き將軍の朝鮮戰爭(젊은 장군의 조선전쟁)』에서도 간도특설대 복무 경력에 대해 기술했지만 반성보다는 자부심으로 보인다는 평입니다.

 

팩트⑤ 파묘, 이장, 친일표식, 다크투어리즘이 논의되고 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다고 지명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5명 가운데 11명이 현충원에 안장돼 있습니다. 친일파의 범위를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으로 확대할 경우, 총 4390명의 친일파 중 63명이 현충원에 안장돼 있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일본군 헌병 오장 출신의 전범으로 두 차례나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만주군 장교 출신들의 추천으로 국방경비대에 입대 후 이승만의 총애를 받았던 김창룡도 있습니다.

현행법상 친일 논란 인사들의 현충원 묘역 이장을 강제할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한쪽에서는 친일 과거를 근거로 이장 혹은 파묘를 주장하지만, 반대쪽에서는 공훈을 근거로 국립묘지 안장 혹은 이장 반대를 주장합니다.

역사적 평가가 바뀌면서 이전에 칭송받던 인물들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는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의 영향으로 유럽에서 제국주의 또는 인종주의와 관련된 인물의 동상이 수난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공과가 엇갈리는 경우, ‘과오에 대해서도 안내하는 친일행적비 등의 표식을 설치하자’, 또 ‘이런 표식을 통해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계기로 삼는 ‘다크 투어리즘’테마로 삼자는 주장도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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