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배우의 이름은 '칸 하나에'가 아니라 '한영혜'다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18.11.26 04:3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I decide who I am.”

좀 엉뚱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보헤미안 랩소디>를 통해 부활한 세기의 로큰롤 히어로, 프레디 머큐리의 이 대사를 듣는 순간 필자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1991년 11월 런던에서 머큐리가 사망하기 정확히 한 해 전인 1990년 11월, 시즈오카에서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의 딸로 태어난 배우 한영혜다. (인터넷무비데이터베이스에서 그녀의 이름은 한영혜의 일본어 독음을 영어로 표기한 'Hanae Kan'으로 검색된다. 엔딩크레디트에 가타가나가 병기되지 않은 <아무도 모른다>가 국제무대에 그녀의 존재를 알린 첫 작품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 그녀를 설명하는데 이보다 적확한 표현이 있을까. ‘한류’ 비슷한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던 시절, 왕가위, 쿠엔틴 타란티노, 오우삼 등에게 영향을 준 거장(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올해의 아시아 영화인상’수상자, 故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베니스국제영화제 초청작 <피스톨 오페라>로 데뷔한 그녀는 3년 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출세작 <아무도 모른다>에서 다시 열연을 펼쳤다. 보통 아역으로 이 정도 커리어를 쌓을 경우, 흔히 거치게 되는 경로가 있다. 대형 연예기획사에 소속되어 질릴 만큼 CF에 나오고, 온갖 예능프로에 얼굴을 내밀다 적당한 시기에 음반을 취입한다. 그리고 높아진 인지도를 활용해 드라마에 데뷔, 소위 ‘꽃’으로 살아가거나, 모든 재능을 소진하고 과거의 영화(榮華)를 간직한 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한영혜는 다른 길을 걸었다.

블로그의 사진 한 장, 문장 한 줄까지 홍보와 연결시키는 영업력과, 팬들 앞에서의 표정 하나까지 연출하는 관리력으로 소속 아티스트의 ‘삶 자체’를 경영하는 매니지먼트사가 아니라, 인디스피릿의 화신들이 모여 있는 창작집단의 일원이 되어, 출연 제안을 받은 영화의 예산을 따지기보다 시나리오부터 받아 읽었다. 새벽바람을 맞으며 홀로 현장으로 향했다가 촬영이 끝나면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출연분이 없을 때 감독 옆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보는 정도로 ‘열정’ 운운하는 칭송을 받는 배우가 흔했지만 그는 달랐다. 현장에서 새우잠을 자고, 스태프들과 함께 식사했다. 코디네이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의상이라도 가져올라 치면 종일 히스테리를 부리는 ‘스타님’은 ‘상상 속 존재’였다. 주연을 맡든, 조연을 맡든, 자신의 손으로 메이크업을 마치고 대기하는, ‘모두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동료’가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28년 인생에서 무려 19년째 배우로 살고 있는 그녀가 출연한 CF는 단 네 편, TV드라마는 고작 세 편, 예능프로는 전무(全無)하다. 하지만 29편에 달하는 필모그래피를 훑어보면 일세를 풍미한 명장(名匠)의 이름이 줄지어 늘어서있다.

그렇게 대량생산된 액세서리처럼 영혼 없는 미소의 장막을, 천개의 칼날로 걷어내는 슈퍼히어로가 서 있었다.

나른한 소녀의 얼굴을 가진 한영혜는 ‘천 개의 칼날(thousand knives)’ 같은 연기로 관객의 가슴을 파고든다. ⓒYeong-hye Han

홍상현:

우선 5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이상일 감독에게 일본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ㆍ감독상ㆍ각본상을 안겨준 감성미스테리, <악인>을 통해 성인 연기자로 신고식을 치른 한영혜가 있다.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슬하에서 태어난 그녀는 일본에서 데뷔했다. 프랙티컬(practical)한 관점에서 볼 때 ‘한국 국적의 한영혜’가 되면 주어지는 배역이 ‘한국인 역’으로 제한될 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한국 국적을 선택했다.

한영혜:

당시 제작된 저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도 밝혔지만, 국적과 뿌리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일본의 법률상 22세 까지 국적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일본에 있든 한국에 있든,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도리어 어중간하고 뉴트럴(neutral)한 존재로 살아가고 싶다는 게 저의 답이었다.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이라는 특성을 존중하고 싶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하프(half)는 물론, 세계 곳곳에서 온 사람들이 뒤섞여 살아가고 있건만, 일본에서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고, 한국에서는 역으로 ‘외국인 말투이니 공부를 더 하라’는 소리를 듣는 입장, 둘 중 하나의 국적을 선택하라는 보이지 않는 압박감 속에 솔직히 어디에도 제가 설 자리는 없다는 걸 느꼈다. 도리어 그래서 어느 쪽에도 물들지 않는 ‘역경(逆境)’을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This is me’라고 할까.

또, 원래 데뷔 당시부터 ‘한영혜’라는 이름을 그대로 썼기 때문에 (웃음) 국적으로 역이 제한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홍상현:

배우 한영혜의 커리어는 실로 놀랍다. 파격적인 비주얼에 기존의 영화적 서사구조를 파괴하는 스즈키 감독의 작품(<피스톨 오페라>)으로 데뷔했다. ‘사람들 앞에 서는 세계’를 동경하는 또래들이라면 아이돌 기획사를 생각할 연령대다. 그러나 암살자 조직의 일원이 주인공인 작품에 아역으로 출연했다.

한영혜:

부모님과 요코하마에 놀러갔다가 아역 모델 에이전시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9세 때였다. 그리고 바로 스즈키 감독 작품의 오디션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영화에 출연한다는 것의 의미는 잘 몰랐지만, 학교에 별로 가고 싶지 않던 터라 도망치듯 응시했다.

제 부모님은 국제결혼을 했기에 서로 다른 성을 쓰신다. (일본의 경우, 통상 결혼을 하면 여성도 남성의 성을 사용한다) 저도 당시까지 사적으로 통명(재일한국인이 흔히 사용하는 일본식 이름)을 쓰기도 했는데, 그냥 ‘한영혜’라는 이름으로 데뷔하도록 결정해 주신 분이 스즈키 감독이다. 지금까지도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한다.

홍상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초청작 <오컬트 볼셰비즘(Occult Bolshevism)>에서는 어린 시절 실종을 경험한 후, 미지의 존재에 시달리는 주인공을 연기했다. 관련 인터뷰에서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악마가 가장 무섭다’는 부친의 말씀을 언급하는 것이 인상적이더라. 부친은 어떤 분이신가. 연기자 생활을 하면서 영감을 받고 있는가.

한영혜:

아버지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제가 배우가 되려 할 당시에는 맹렬히 반대하셨다.

상냥한 성격에, 술을 좋아하는 분이시다. 10대 때는 갈등도 했지. 부친으로부터 연기적 영감을 받는 일은 거의 없는데, 제가 출연한 영화를 보고 예리한 평론가처럼 코멘트를 던지는 까닭에, 매번 작품을 보여드리기 긴장된다.

최근에는 줄곧 한국어 발음 공부를 권유하고 계신다.

 

홍상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물론, 한국 영화팬들에게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로 유명한 이누도 잇신 감독의 작품 <황색 눈물>에도 출연했다. 심지어 독립영화의 거장, 와카마츠 코지 감독이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아시아 영화인상을 받고 서거한 해 공개된 <11ㆍ25 자결의 날>에도 함께했다. 작품을 고르는 나름의 시각이 없다면 쌓아올릴 수 없는 필모그래피다.

한영혜:

어릴 때는 작품성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피스톨 오페라>를 끝낸 뒤 곧장 아역 모델 에이전시에서 카타시마 익키(그는 독립영화계의 명장이다) 감독이 이끄는 도그슈거(DOGSUGAR)로 소속사를 옮겼는데, 그래서 아역 시절에는 작품 선정을 카타시마 감독과 부모님께 맡겼다가 17세 이후부터 스스로 작품을 고르게 되었다.

 

홍상현:

아역 출신은 성인 연기자로 활동을 이어갈 경우, 예전 이미지가 너무 강해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당신은 달랐다. 인간의 광기와 폭력에 대한 작가적 탐구로 ‘일본의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라 불리며 한국에도 마니아 팬이 많은 츠카모토 신야 감독의 <악몽탐정 2>를 본 관객이 ‘저 사람이 한영혜인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성장해 있었다.

한영혜:

제 스스로는 여전히 아역 이미지가 강하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출연했던 작품을 좋아하신다는 분들을 많이 만나기도 하고. 츠카모토 감독의 작품도 촬영한 것은 10대 시절이었으니 28세인 지금의 제 입장에서 보면 아역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이다. 하지만 그렇게 몇 년이 지나든 변함없이 누군가의 마음에 남아있는 것이 영화니까 대단히 기쁘게 생각한다. 다만, 당시의 연기로 인해 나 자신 바뀌어버린 것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겠지. 어느새 어른이 되어있는 까닭에 그때로 돌아갈 수야 없겠지만.

영화는 제게 ‘일’이라기보다, ‘인생의 앨범’처럼 저 자신의 성장과 함께해 온 것이기에, 이제는 성인이 된 제 성장 앨범의 페이지가 영화를 봐주시는 관객의 시선 속에서 다시금 늘어나기를 바란다. 그래서 매일 노력하는 하루를 보내고 있고.

<서북서>에서 한영혜는 ‘모든 경계의 위, 혹은 그 너머’에 있는 특유의 캐릭터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Seihokusei 2018

홍상현:

지금까지 당신이 출연한 수많은 작품에 대해 이야기한 데는 이유가 있다. 대부분 독립영화계에서 작가주의 영화세계를 추구하는 감독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이유(예컨대 출연료 같은)로 TV에 출연하는 다른 연기자들과 차별화된다. 

한영혜:

딱히 ‘드라마라서 싫다’는 생각은 전혀 한 적 없지만, 영화 쪽의 출연제의를 받는 일이 많다. 다만, 이제껏 저 자신이 예산규모를 신경 쓰면서 작품을 바라본 일은 없다. 그저 많은 분들과 여러 가지 안(案)을 구사하며 영화를 만들어가는 걸 좋아할 뿐이다. 어떤 배역도 쉽지 않지만, 무슨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작품을 해내겠다는 마음이 강해서일지도 모르겠다.

 

홍상현:

평소 SNS를 통해 영화에 대한 열정을 강하게 내비친다. 물론 영화를 좋아하는 배우야 많지. 하지만 영화에 대한 당신의 열정에서는 목숨을 거는 비장함마저 느껴질 때가 있다.

한영혜:

앞서 드린 말씀과도 연결되지만, 한 편 한 편 영화를 해내겠다는 생각에 앞서, 관객들께 뭔가를 전해드리고 싶은 마음 또한 강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국가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앙금마저 뛰어넘을 수 있는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영화제에서 ‘한영혜 씨의 작품을 보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내일도 힘을 내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아무리 힘들더라도 영화를 그만둘 수 없겠지? (웃음)

오늘 인생을 끝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누군가에게, 내일을 살아갈 힘을 전해주는 영화를 만드는 나날 속에서 저 또한 보다 강하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홍상현:

소속사도 독특하다. 대형 연예기획사가 아니라 당신이 출연한 <아시아의 순진>, <예를 들어, 레몬> 등을 만든 카타시마 익키 감독과 동료들이 모여 있는 창작집단, 도그슈거다. 취재협조를 요청했더니 카타시마 감독이 직접 연락을 해 오셔서 엄청나게 놀랐다. (웃음)

한영혜:

제 소속사는 연예기획사가 아니다. 그렇다 보니 솔직히 ‘영업력’은 제로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촬영 현장에도 아침에 혼자 나갔다가 저녁에 혼자 돌아온다. 영화제나 무대인사가 있을 때도 거의 혼자 간다. 현장에서 곤란한 일이 생겨도 스태프 분들이나 감독님께 의지하게 되고. 메이크업, 의상, 연기, 무엇이든 ‘스스로 창조한다’는 것이 모토다. 너무 힘들어서 소속사를 바꿀까 생각할 적도 있지만, 어디를 가든 결국 스스로 해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한 바퀴를 돌다 보면 결국 여기 서있더라. 아니, 이 ‘루프(loop)’를 한 100번 정도 돌았을지도 모르겠네. (웃음)

하지만 그 덕분에 현장에서 쾌적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이랄까, 특히 독립영화 현장은 하루하루가 서바이벌게임 같은 상황인데,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했을 때, ‘내 스스로 해결하는’ 힘을 자연스레 기를 수 있었다. 감독과 스태프 분들께도 거리낌 없이 제 생각을 전달할 수 있게 되었고. 도그슈거의 구성원들은 일의 영역을 넘어, 모두 가족 같은 느낌이다. 그런 까닭에 혼자서 모든 일과 맞닥뜨리는 게 편하고, 오히려 카타시마 감독이 계시면 아버지가 보고 있는 느낌이라 사무실로 돌아가 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웃음)

기지촌 래퍼로 분한 <야마토(캘리포니아)>의 감독은 한영혜에게 ‘언어에 담겨있는 영력을 전해달라’고 요구했다. ⓒDeep End Pictures Inc. 2018

홍상현:

연기 외에도 다양한 재능을 지녔는데 일단은 배우생활에 집중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예컨대 가나가와 현의 기지촌의 젊은이들을 그린 <야마토(캘리포니아)>에서는 래퍼로 등장한다.

한영혜:

촬영 전에 감독(미야자키 다이스케)과 스튜디오에 가서 처음 랩을 해보았다. 감독의 요구는 솜씨 좋고 노련한 래퍼를 연기하기보다 언어에 담겨있는 영력을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무심하게, 나른하게, 혹은 분노를 실어서, 그때그때의 마음을 서툴게라도 괜찮으니까 랩으로 연결시켜보라는. 덧붙여서, 영화 속에 나오는 랩은 서툴지만 모두 제가 직접 한 것이다.

 

홍상현:

‘한영혜’라는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단어는 ‘기습(sudden attack)’이다. 일면 평범한 듯이 보이다가(첫 등장에서는 튀지 않게 연기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새 비수 같은 연기로 가슴을 파고든다. 연기술과 관련해 어떤 트레이닝을 하고 있는 건가? 그밖에 연기를 대하는 마음가짐 같은 것이 있다면 말해 달라.

한영혜:

영화를 찍을 때, 이야기의 내용과 대사를 최소한도로 기억하는 것 외에, 연기의 움직임 등의 연습을 딱히 하지 않는다.

다만 현장의 세트나 분위기, 그리고 상대의 대사를 받아 연결하는 순간의 냄새까지 확실히 느끼면서, ‘그 장면을 살아가며’ 촬영하는데 심혈을 기울일 뿐이다. 그밖에 촬영이 이루어지는 시간보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감독, 그리고 다른 배우들과 보내는 시간을 대단히 중시한다. 현장에서 서로 거리낌이 없도록, 촬영 전에 얼마나 서로를 마주할 수 있는지에 따라 나 자신의 모티베이션(motivation) 또한 바뀌게 되니까.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이 저마다 파란만장하지 않나. 한영혜라는 사람의 인생을 보더라도, 영화처럼 한 2시간 정도 만에 끝나버렸으면 좋겠다 싶은 순간ㆍ감정이 있는가 하면, 이대로 쭉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 제가 진심으로, 생생하게 느낀 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인생이 한 줄의 선이라고 할 때, (제가 맡은) 배역의 감정을 그 선에 매달려가도록 하는 이미지인 거다. 하지만 최근에는 혼자서 감정이 질주하지 않도록 상대에게 감정을 맡기는 일 또한 중요하다는 점을 배우고 있다.

학살의 기억을 말하는 <국화와 단두대>의 장면에서 관객은 슬픔의 지평을 넘어서는 한영혜의 연기에 숨을 죽였다. ⓒThe Chrysanthemum and the Guillotine 2018

홍상현: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에 상영된 <국화와 단두대>에서 재일조선인 역사(力士)로 출연, 관동대지진 당시 벌어진 학살의 기억을 고백하는 장면이었다. 처참한 광경을 묘사하며 눈물을 흘리던 당신을 보며 사람들은 숨죽인 채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단순히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멜로드라마 연기’가 아니라, 고통과, 공포, 분노, 그리고 비애가 한데 뒤섞여 스크린을 뚫고나오는 감정이 느껴지더라는 거다.

한영혜:

감사하다. <국화와 단두대>라는 작품은 제제 다카히사 감독이 독립영화인데, 재작년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프로젝트마켓(APM)에서 브라이트이스트필름 어워드를 수상하면서 제작비 부분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후, 수많은 영화팬들의 도움으로 촬영 2년 만에 완성되었다. 3시간이 넘는 긴 상영시간 속에 연기자들의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작품이다. 촬영이 시작되기 전 3개월 동안, 연기자들은 함께 스모 도장에서 연습을 하고, 체중을 불리기 위해 불고기를 먹으러 다니면서 정을 쌓았다. 올해 부산영화제를 통해 공개되었을 당시에도 정말 많은 분들이 보러와 주시고, 다양한 질문을 해주셨다. 이 인터뷰에서처럼 저 개인에 관한 것, 제가 맡았던 배역(한반도 출신의 도카치가와), 혹은 스모 등에 대해서. 그 모든 질문에 답하면서 제가 여러분께 가장 전해드리고 싶었던 것은 ‘이 영화의 메시지는 싸움이 아니라 사랑입니다’(그녀는 이 부분에서 정확한 한국어를 구사했다)였다.

‘도카치가와’는 한반도에서의 비참한 생활로 고통 받다 일본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인물이다. 처음 대본을 받아서 말씀하신 부분을 읽는데 저 또한 눈물이 멈추지 않더라. 그간 한국인과 일본인의 하프로 일본에서 자라오면서 느낀 외국인으로써의 콤플렉스나 그로 인한 억울함의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 자신 이 작품이 좋았던 것은, 영화의 서사가 당대에 사회적 지위가 낮았던 이들(여성ㆍ외국인ㆍ농민 등)의 입장에 주목하며 전개되는 부분 때문이었다. 보통 역사적인 이야기를 만들면서 어느 한 쪽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국화와 단두대>는 달랐다. 그 벽을 한 단계 뛰어넘은 작품이다.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어서 떨쳐 일어난 사람들의 생명력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한국의 관객 여러분께서도 공감해주신 것 아닐까 한다.

<아무도 모른다>에서 한영혜(왼쪽)와 함께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뒤), 야기라 유야(가운데), 키타우라 아유(오른쪽). ⓒYeong-hye Han

애초에 이 대화가 시작될 때부터 '아무리 긴 시간이 주어져도 글로 옮겨 적은 인터뷰이의 답변이 150자를 넘기 쉽지 않은' 인터뷰의 불문율을 의식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때로는 열광하고, 때로는 눈물짓고, 또, 때로는 유쾌한 웃음을 지을만한 언어들로 넘쳐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모두 정리한 순간, 잊고 있던 한 가지를 기억해낸 필자가 이마를 쳤다는 것은 적어둬야겠다.

이 무슨 건망증인지. 인터뷰를 기획할 당시부터 그녀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을 놓쳐버린 것이다.

그리 대수로운 건 아니다. ‘2004년 야기라 유야에게 칸 영화제 최연소 남우주연상 수상의 영예를 안긴 <아무도 모른다>에서, 그와 특별한 교감을 나누는 소녀로 분한 한영혜의 출연분량이 141분의 상영시간 중 약 54분 지점부터가 아니라, 예컨대 약 14분 지점부터였더라면 심사위원들은 최연소 여우주연상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했을 것’이라는, 다분히 주관적인 발언.

“뭘...”

하지만 이내 혼잣말을 하며 웃어버린다. 객쩍은 소리라고 생각해서는 아니다. 그간의 배우인생을 통틀어 가장 많은, 네 편의 출연작이 공개된 올해, 가장 나중에 개봉되어 현재도 관객들을 만나고 있는 <서북서(West North West)>에서 이란 출신의 여배우 사헬 로사와 호흡을 맞추는 그녀를 보며, 작품을 하면 할수록 그 어떤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이든 그녀에게는 결국 시간문제일 뿐임을 다시금 확신했기 때문이다.

물론, 부산영화제 당시 국내 언론과 한 인터뷰를 직접 일본어로 번역해 소개할 정도의 한국어 실력을 가진 그녀는, 이 글을 읽고 예의 시크(chic)한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칠 테지만.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기사
오늘의 이슈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