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수교, 그리고 주미 대한제국공사관의 슬픈 역사

  • 기자명 박광일
  • 기사승인 2020.11.1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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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국제정세를 살펴봐도 짐작할 수 있듯이 외교는 쉽지 않습니다. 사실, 늘 외교관계는 조금 복잡하고 풀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근대 역사 속에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역사 유적이 여럿 있는데 정동과 덕수궁 일대에 그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서울 정동에 있는 「덕수궁 중명전」 외부 01_ ⓒ여행이야기
서울 정동에 있는 「덕수궁 중명전」 외부 01_ ⓒ여행이야기
서울 정동에 있는 「덕수궁 중명전」 내부(오른쪽) 모습. 02_ ⓒ여행이야기
서울 정동에 있는 「덕수궁 중명전」 내부(오른쪽) 모습. 02_ ⓒ여행이야기

 

을사늑약의 현장인 중명전도 그러한 곳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역사의 흔적 가운데 한 곳이 외국, 그것도 미국 워싱턴에 있습니다.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시절 설치한 공사관 건물인데요, 2018년에 비로소 복원이 끝나서 당시 모습을 재현했다고 합니다. 이 공사관 건물과 당시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의 외교가 어떠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900년대 초 미국 워싱턴 대한제국공사관 외부 모습.
1900년대 초 미국 워싱턴 대한제국공사관 외부 모습.

 

먼저 주미대한제국공사관(조선시대부터 썼지만 최근 공식 이름을 이렇게 붙였습니다)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이 건물을 쓰기 시작한 것은 18892월인데요, 조선의 첫 주미공사관 건물은 약 1년 전에 다른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89112, 이 건물을 매입합니다. 25,000달러의 비용을 들였습니다. 당시 주소는 워싱턴 D.C 아이오와 서클 북서 O1500번지입니다. 처음에는 주미조선공사관이었지만 1897,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이 되었죠. 그렇지만 1905, 을사늑약으로 외교공관으로서 업무가 정지되었다가 1910, 일제가 강제매입 후 미국인에게 팔아넘깁니다. 강제매입한 금액이 5달러, 팔아넘긴 금액이 10달러입니다..

이후 이 건물은 레크레이션 센터나 화물운수노조 사무소 등으로 쓰였습니다. 다행스러운 건 1972, 미국 국립공원관리청이 이 공사관 건물이 있는 지역을 역사지구로 지정하면서 옛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던 중 옛 공사관을 다시 찾겠다는 뜻이 모이면서 201210, 문화재청과 문화유산국민신탁이 350만 달러에 이 건물을 사들입니다. 그리고 2015년부터 2017년까지 복원공사를 했고요, 2018522주미대한제국공사관의 이름으로 개관을 했습니다.

복원된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외관_ ⓒ문화재청
복원된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외관_ ⓒ문화재청

 

대략 과정만 들어도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처음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공사관을 설치하기까지 과정이 어떠했는지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조선이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1882,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면서입니다. 중국, 일본을 제외한 서양 국가 가운데 처음으로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가 미국입니다. 이 조약문에 흥미로운 부분은 제1조에 거중조정, 그러니까 서로 어려움을 겪을 때 개입하여 중재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는 점입니다. 당시 조선이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으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1882년 제물포의 임시장막에서 거행된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
1882년 제물포의 임시장막에서 거행된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

 

하지만, 조선의 생각과는 달리 미국은 정부 차원에서 조선, 대한제국에 대해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참고로 이때 미국을 가리키는 한자는 대아미리가합중국줄여서 미국이라고 표기했습니다. 외교관계가 수립되자 미국은 다음 해 푸트 특명전권공사를 조선에 파견했고, 푸트 공가는 정동의 민계호 가옥 등을 매입해 공사관 건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서울 종로 「우정총국 전시관」에 전시 중인 조미수호통상조약문(복원품)에 적혀있는 '대아미리가합중국(大亞美理加合衆國)' 01_ ⓒ여행이야기
서울 종로 「우정총국 전시관」에 전시 중인 조미수호통상조약문(복원품)에 적혀있는 '대아미리가합중국(大亞美理加合衆國)' 01_ ⓒ여행이야기
서울 종로 「우정총국 전시관」에 전시 중인 조미수호통상조약문(복원품)에 적혀있는 '대아미리가합중국(大亞美理加合衆國)' 02_ ⓒ여행이야기
서울 종로 「우정총국 전시관」에 전시 중인 조미수호통상조약문(복원품)에 적혀있는 '대아미리가합중국(大亞美理加合衆國)' 02_ ⓒ여행이야기

 

지금도 당시 건물 가운데 한 채는 원래 위치에 남아있습니다. 미국이 푸트 공사를 파견한 것처럼 조선도 미국에 공사를 파견해야 했으나 재정과 청나라의 간섭으로 주미공사를 파견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재정 부분이야 짐작할 수 있지만, 외교관을 파견하는데 청나라의 간섭이라는 것이 조금 납득이 어려울 수 있는데요, 청은 조선과 미국이 외교관계를 맺는 과정에서부터 자신들이 상국임을 드러내고자 했죠. 심지어는 조미조약문에 이 부분을 넣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외교조약문에 이를 넣는 것이 실패하자 대신 조선의 외교관들이 지켜야 할 내용을 강요합니다. 바로 영약삼단이란 것인데요, 일종의 이면요구사항 정도가 될 수 있습니다.

조선/대한제국의 외교 사절은

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공사를 찾아와 그의 안내로 주재국 외교부에 간다.

대한제국 공사는 회의나 연회석상에서 청국공사의 아래에 자리를 잡는다 .

대한제국 공사는 중대사건이 있을 때 반듯이 청국공사와 미리 협의한다

는 내용입니다. 자주국에게 요구할 수 없는 치욕적인 것이었죠.

당시 보빙사 일행을 찍은 사진, 뒷줄 왼쪽부터 무관 현흥택, 통역관 미야오카 츠네지로, 수행원 유길준, 무관 최경석, 수행원 고영철, 변수 앞줄 왼쪽부터 퍼시벌 로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중국인 통역 우리탕_ ⓒ위키백과
당시 보빙사 일행을 찍은 사진, 뒷줄 왼쪽부터 무관 현흥택, 통역관 미야오카 츠네지로, 수행원 유길준, 무관 최경석, 수행원 고영철, 변수 앞줄 왼쪽부터 퍼시벌 로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중국인 통역 우리탕_ ⓒ위키백과

 

이러한 상황에서 1883년에 미국에 사절단을 보내는데 당시 임오군란 이후 청의 간섭이 극성기였던 시기라 외교관을 파견하는 대신 보빙사란 이름으로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해서 홍영식, 서광범, 현홍택, 유길준, 변수 등 사절단과 중국인 통역관 우리탕, 일본인 마야오카 스네지로, 미국인 퍼시벌 로웰 등이 참여를 합니다. 이때 인천에서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배는 미국 해군의 배였습니다. 보빙사 일행은 당시 아서 대통령을 뉴욕 호텔에서 만나서 먼저 우리나라 식으로 큰절을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1883년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등으로 구성된 사절단인 보빙사가 미국 뉴욕을 방문하여 당시 미국 대통령 체스터 A. 아서를 만나는 모습을 전면에 실은 미국 주간지(illustrated)_ ⓒ위키백과
1883년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등으로 구성된 사절단인 보빙사가 미국 뉴욕을 방문하여 당시 미국 대통령 체스터 A. 아서를 만나는 모습을 전면에 실은 미국 주간지(illustrated)_ ⓒ위키백과
1883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체스터 A. 아서_ ⓒ위키백과
1883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체스터 A. 아서_ ⓒ위키백과

 

미국 대통령이 당황하여 허리를 숙이고 곧 서양식 예법으로 마주했다고 합니다. 당시 신문에는 한글로 번역한 국서가 사진으로 소개되기도 했는데, 보빙사의 등장으로 미국에 한글의 존재가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민영익, 홍영식, 유길준 등 당시 젊은 지식인들이 미국 대통령을 만나고 오면서 외교 업무와 외교관의 파견이 중요함에 대한 인식이 올라갔지만 이어진 갑신정변 등으로 오히려 상황이 악화됩니다. 이처럼 외교관 파견을 미루다가 1887, 드디어 박정양을 주미전권공사로 파견합니다.

1888년 시절의 박정양_ ⓒ위키백과
1888년 시절의 박정양_ ⓒ위키백과
1888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활동 당시 박정양 공사 일행(한국이민사박물관 소장 사진)
1888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활동 당시 박정양 공사 일행(한국이민사박물관 소장 사진)

 

이때 앞에서 말씀드린 영약삼단을 청에서 강요하고 이를 준수하는 조건으로 공사를 파견하기로 한 것이죠. 하지만 박정양은 미국에 도착에 영약삼단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벌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을 만날 때 청의 외교관을 대동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워싱턴에서 공사관의 부임 순서에 따라 방문하는 관례에 따라 28개국 가운데 18번째에 청의 공관을 방문합니다. 당연히 이것이 문제가 되어 박정양은 소환되지만 이와 같은 태도가 다른 주미공사들에게도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영약삼단은 힘을 잃게 됩니다.

 

지금과 달랐을 미국 가는 길이 어땠는지도 궁금한 부분일 것 같습니다. 당시 박정양 전권공사가 미국으로 가는 길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서울에서 인천, 나가사키를 지나 홍콩으로 가서 다시 요코하마를 거쳐 호놀룰루를 지나 샌프란시스코로 간 뒤 워싱턴으로 갔습니다. 18871112일에 출발해서 188819일에 도착했으니 대략 50일 정도 걸린 셈입니다. 도착한 뒤 1주일 정도가 지난 117, 당시 미국대통령인 클리블랜드를 예방하고 국서를 전달했습니다. 박정양 공사의 일행은 서기관 이하영과 이상재, 참찬관 이완용, 번역관 이채연, 수행원 강진희, 이헌용, 이종하, 그리고 미국인 참찬관 알렌이 동행했습니다.

 

공사였던 박정양을 비롯해 당시 외교관 일행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박정양 공사는 온건한 개혁파 관료로 합리적인 인물로 평가됩니다. 개화파로 활동하며 독립협회와 관민공동회를 이뤄 중추원 설립을 준비했던 인물이기도 하죠. 무엇보다 미국에 도착해 청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주적인 외교활동을 벌인 것을 통해 외교관이란 어떤 태도를 갖춰야하는지 잘 보여준 인물입니다. 서기관 이상재는 독립협회 활동 뿐 아니라 3.1운동, 기독교청년회 활동으로 유명한 인물이죠.

만년의 이생재 모습 01_ ⓒ위키백과
만년의 이생재 모습 01_ ⓒ위키백과
만년의 이생재 모습 02_ ⓒ위키백과
만년의 이생재 모습 02_ ⓒ위키백과

 

그런데 흥미로운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수행원 강진희인데요, 이분은 관료이면서 화가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미국에 도착해 자신이 본 미국을 수묵화로 남겨놓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화차분별도>입니다. 미국 각지를 돌아볼 때 탄 기차를 그린 그림이죠.

강진희 화차분별도_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소장
강진희 화차분별도_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소장

 

그러한 분위기를 알려주는 기록 하나를 살펴보겠습니다.

서기관 이상재, 번영관 이채연, 수원 강진희, 무변 이종하 등이 바람쐬러 볼티모어에 갔다가 당일로 돌아왔다. (중략) 12시에 출발하는 기차는가 제때 출발하지 못하고 대기하다가 오후 3시에 비로소 출발하여 4시에 볼티모어에 도착했다. 120리 연로의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중략) 단 기차가 너무 빨리 달려서 한쪽 눈을 돌리면 이미 지나가 버리고 잘 볼 수가 없었다.’

-박정양의 <미행일기>

또 흥미로운 인물은 이채연입니다. 제중원에서 일한 것을 계기로 영어를 배웠는데 그 덕분에 번역관으로 참여했는데요,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갈 때 부인인 배씨를 데리고 간 겁니다. 당시 배씨 부인은 한복차림으로 외교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해서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고 또 사진으로도 남아 있습니다.

워싱턴 주미대한제국공사관에 전시된 액자. 왼쪽은 이채연 공사, 오른쪽은 남편과 함께 미국 땅을 밟은 부인 배씨(사진 속 오른쪽 여성)
워싱턴 주미대한제국공사관에 전시된 액자. 왼쪽은 이채연 공사, 오른쪽은 남편과 함께 미국 땅을 밟은 부인 배씨(사진 속 오른쪽 여성)

 

그러던 중 1890, 부부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자 워싱턴을 음차한 화손, 그러니까 이화손이란 이름을 지어줍니다. 하지만 안타깝게 2달 만에 병으로 잃었죠. 그 아이의 묘비가 지금도 인근 오크힐 공원묘지에 남아있습니다.

이후 미국의 공사관에는 여러 공사가 부임을 합니다. 대리공사까지 할 경우 14대에 이르는데요, 이 가운데 눈에 띄는 인물이 바로 이범진 공사입니다. 이범진 공사는 러시아공사로 있을 때 일제의 소환에 응하지 않다가 1911년 자결한 인물인데요.

미국 공사 부임 초기의 이범진과 이위종(오른쪽)이 찍은 사진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미국 공사 부임 초기의 이범진과 이위종(오른쪽)이 찍은 사진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이준, 이상설, 이위종의 사진(왼쪽부터) Yi Tjoune, Sangsul Yi and Tjyongoui Yi (Hague Secret Emissary Affair)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이준, 이상설, 이위종의 사진(왼쪽부터) Yi Tjoune, Sangsul Yi and Tjyongoui Yi (Hague Secret Emissary Affair)

 

미국 공사 시절 찍은 가족사진이 남아 있습니다. 이 사진에는 부인과 아들의 모습이 남아있는데요, 1897년 당시 11살이던 아들 이위종의 똘망똘망한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10년 뒤, 21살의 나이로 헤이그특사의 일원이 되는 이위종은 이때 이미 영어를 잘해서 아버지의 비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이제 공사관 건물을 살펴보겠습니다. 공사관은 빅토리아풍의 아름다운 3층 건물입니다. 당시 공사관 건물이 되자 곳곳에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표시를 달았는데요, 먼저 옥상에는 국기게양대를 만들어 큰 태극기를 걸었습니다. 1층 입구 앞에 포치를 만들어 거기에도 태극기 문양을 장식했죠. 이 모습은 1910, 국권을 빼앗긴 이후에도 남아 있어서 1928년 뉴욕 일대를 여행하던 나혜석이 보고 반갑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는 감정을 밝히기도 합니다. 또 당시 미국의 교포들은 태극기가 크게 그려진 공사관 건물 엽서를 많이 만들어 쓰기도 했죠.

1920년 초의 나혜석 모습_ ⓒ위키백과
1920년 초의 나혜석 모습_ ⓒ위키백과

 

공사관 1층은 손님을 맞이하는 객당, 그리고 연회를 베풀던 식당, 그리고 중심 공간인 정당이 있었는데요, 정당에는 고종과 순종의 사진이 있었습니다. 공사관에서 지방의 관청처럼 1달에 두 번 망궐례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바로 이 장소에서 그러한 예를 치른 것입니다. 또 복도 역할을 하는 홀에는 커다란 태극기를 걸고 그 위에 경복궁 광화문 사진을 걸었습니다. 바로 한양을 상징하고 왕이 있는 곳을 늘 본다는 뜻인 거죠.

공사관 2층은 집무실과 사무실, 서적실, 그리고 공사의 침실이 있고요, 3층에는 다른 공관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3층은 중간에 레크레이션 센터로 쓰이며 벽체를 모두 헐어내 조그마한 강당의 모습으로 바뀌어 지금은 전시실로 쓰고 있습니다.

공사관에서 펼쳐진 지역축제(Logan Circle Holiday House Tour ) 행사 현장(2018)_ ⓒ문화재청
공사관에서 펼쳐진 지역축제(Logan Circle Holiday House Tour ) 행사 현장(2018)_ ⓒ문화재청

 

워싱턴의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은 당시 외국에 설치한 공사관 가운데 유일한 것입니다. 또한 국내가 아니라 국외에서 당시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아주 귀한 곳입니다. 그런 점에서 미국을 여행하는 분들이라면 잠시 짬을 내 옛 외국에 있는 우리 역사의 유적지를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의 외교가 어렵다고 하지만 이때와 비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사실 외교는 드러나는 부분도 있고, 또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외교는 상대가 있다는 점에서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이뤄지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요, 그런 점에서 국민들은 겉으로 드러난 기사를 통해 외교의 하나하나를 단적으로 평가하기보다는 그 흐름을 보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외교관들도 조심스럽고 어려운 부분이 있겠지만 외국에서는 국민을 보호하는 것을 최선의 업무로 하되 정부 사이, 기관 사이 외교에서 국민을 믿고 당당하게 국가를 대표하는 역할을 해 주웠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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