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C 한 킴은 왜 쿠팡, 배달의민족, 배틀그라운드에 투자했나

  • 기자명 황장석
  • 기사승인 2018.12.04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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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팡, 배달의민족(우아한형제들), 토스(비바리퍼블리카) 등 한국의 대표적인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투자하며 업계에서 '스타 벤처투자가(Venture CapitalistㆍVC)'로 인정받고 있는 알토스벤처스 한 킴(한국명 김한준) 대표. 실리콘밸리와 한국을 오가며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는 그를 만난 건 지난 11월 23일 실리콘밸리 샌드힐로드(Sand Hill Road) 근처 커피숍에서였다.

샌드힐로드는 스탠퍼드 대학 근처에 있는 도로 이름이자 동시에 실리콘밸리 벤처투자사들이 모여 있는 도로 양 옆의 동네를 가리킨다. 알토스벤처스도 샌드힐로드에 있다. 한 킴 대표는 미국 추수감사절 연휴 기간에 잠시 실리콘밸리에 온 참이었다.

사실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건 9월이었다. 그가 실리콘밸리 밸리직구(Valley 直口) 모임에서 강연한 직후였다. 밸리직구는 한국계 창업가와 투자자, 창업이나 투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한 모임이다. 강연을 들은 뒤 한국에 투자하게 된 계기 등을 좀 더 묻고 싶었지만 당시 일정 때문에 인터뷰가 미뤄졌다.

 

한 해 미국과 한국에 각각 평균 600억~800억원 가량을 투자하고 있다는 알토스벤처스 한킴 대표. 실리콘밸리 기업들에 투자하며 미국에서 사업을 하던 그가 한국에 투자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2006년 판도라TV에 처음 투자를 한 게 시작이었어요. (2005년 초) 유튜브가 등장하고 동영상업체에 관심을 갖고 사람들을 만나던 때였어요. 인텔에서 일하던 미국 VC가 '한국에 가서 한 회사를 봤는데 지표가 아주 좋은 것 같다. 같이 만나 보자'고 했어요. 그래서 투자하게 된 회사가 판도라TV였어요. 우연히 투자하게 된 셈이었죠. 다음 투자 단계에서 다른 미국펀드도 끌어들였고, 그 미국펀드는 일본에 있는 펀드를 끌어들였죠. 한참 잘나갔어요. 회사가 오래 주춤해 있는데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하고 있고, 저희도 지분을 그대로 갖고 있어요.”

 

판도라TV에 투자하면서 한국을 자주 찾게 된 그에게 스타트업(벤처) 업계의 사람들을 소개해 준 인물은 현 4차산업혁명위원장인 장병규 블루홀 이사회 의장이었다. 그는 장 의장과의 인연으로 온라인슈팅게임 '플레이어 언노운스 배틀그라운드(PUBG)'로 대박을 터트린 블루홀에도 투자했다. 배틀그라운드의 흥행으로 블루홀은 지난해 매출 6665억, 영업이익 2517억원을 기록했다.

“장병규 의장과 만난 건 블루홀에 투자하기 2, 3년 전의 일이에요. (장 의장이 인터넷 검색 전문업체) '첫눈'을 (NHN에) 매각한 (2006년 6월) 이후였어요. 장 의장이 저희 미국펀드에 투자해서 만나게 됐죠. 한국 시장에도 좀 더 신경을 써 달라는 말을 많이 했고, 서로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조금씩 한국을 더 오가면서 하나 둘 투자에 참여하게 됐어요. 장 의장을 통해서 한국 앙트레프레너(entrepreneur, 기업가)들을 많이 만났고요. 2011년, 2012년 정도부터 한국 시장을 적극적으로 보기 시작했죠. 한국이 데스크톱에서 모바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을 느꼈어요. 많은 기업가들이 그 기회를 보고 창업을 하기 시작했거든요. 그리고 장 의장 같은 분들이 자기 돈으로 많은 (엔젤)투자를 했어요. 이니시스 창업자 권도균 (프라이머) 대표, 다음커뮤니케이션 공동창업자 이택경 (매쉬업엔젤스) 대표 같은 분들도 그랬고요. 앙트레프레너를 알고 이해하고 있는 분들이 후배, 동료 이런 사람들에게 투자하기 시작한 것을 보며 한국에 더 많이 투자를 하게 된 것이었죠.”

 

그는 어딜 가나 한국 시장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고 강조한다. 그에게 그런 인식을 갖게 해준 기업은 쿠팡이다. 알토스벤처스는 2011년 3월 쿠팡 초기 미국 벤처투자사 매버릭캐피탈과 함께 1800만달러를 투자했다. 쿠팡은 최근 소프트뱅크 비전펀드에서 20억달러(약 2조2000억원) 추가 투자를 받았다. 손마사요시(한국명 손정의) 회장의 소프트뱅크그룹에서 2015년 6월 10억달러 투자를 받은 뒤 3년 5개월만에 추가 투자를 받은 것이었다. 투자 기준이 된 회사 가치는 90억달러. 원화로 환산하면 10조원을 넘어섰다.

그는 밸리직구 강연에서 “쿠팡 같은 경우 우리나라(한국) 상거래 시장이 100조(규모)가 넘는데, 이게 이커머스(전자상거래)로 가고 모바일로 가는데, 여기서 1등 되면 30조는 갖고 가지 않겠느냐. 잘 하면 50조까지도 가능하다는 건데, 30조, 50조면 인도 이커머스 시장보다 큰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는 소프트뱅크 측의 추가 투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가만 보면, 소프트뱅크 투자금에 대출한 돈도 섞여 있잖아요? 그것(빌린 돈 이자율)보다 수익률이 더 나와야 하는데, 그 이상 벌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투자하는 것이죠. 자선사업하는 것도 아니고요. (소프트뱅크 측은) 충분히 수익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고, 회사(쿠팡)도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한 것이죠. 물론 아무도 모르죠. 어떻게 될지. 그래도 투자 당시에는 이 정도는 벌 수 있다, 이 정도로는 투자 받아도 되겠다 판단한 것이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아요.”

 

그는 소프트뱅크의 추가 투자 발표 직후였던 지난 11월 24일 페이스북에 “회사가 보도한 것처럼 그만큼 좋은 물류 인프라, 기술, 충성고객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쿠팡이) 뭘 또 할 수 있을지 상상하고, 그게 내 회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걱정해야 된다”고 적었다. 쿠팡이 대규모 적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소프트뱅크의 추가 투자에 무슨 다른 배경이 있는 건 아닌지, 회사 가치를 지나치게 높게 평가한 건 아닌지 등의 문제 제기를 비판한 것이었다.

“남의 회사가 투자 2조원 받았는데, 그 회사 가치가 적정하다 아니다 그렇게 한가한 얘기를 할 때는 아닌 것 같아요. 그 돈을 가지고 그들은 옆의 분야로 나아가기 시작할 거에요. 저는 안 봐도 뻔한데요. 그렇게 되면 제대로 경쟁할 수 있는 회사가 많지 않을 거에요. 쿠팡은 네이버 생태계 안에 들어가 있지도 않잖아요. 독자 생태계에서 소비자를 직접 끌어오는 것이니까요. 그런데도 거의 두 배 정도 성장하는 것이잖아요. 아마존만큼 무서운 기업이 될 것 같아요. 소비자와 연결된 분야는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는 쿠팡 초기에 투자를 결정한 이유를 “시장이 좋고, 창업자와 잘 맞는 분야라고 생각이 들면 종종 투자를 많이 한다. 쿠팡은 그때 빠르게 성장하고 있기도 했다”고 말했다. 투자를 결정하는 원칙은 무엇인지 물었다.

“투자할 때 우리 파트너(알토스벤처스에서 투자를 결정하는 사람들) 중 적어도 한 명은 가슴 뛰도록 그 회사가 좋아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투자가 안 돼요. 어찌 보면 그게 가장 간단한 기본조건이죠. 서로 왜 흥분되는지 묻죠. 대답하고 토론해서 결정하는 것이죠. 물론 그렇게 했는데도 잘 안되는 회사들도 나오죠.”

 

한 킴 대표는 창업자를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회사에는 투자 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종종 한다. 그동안 투자 경험으로 봤더니 창업자가 계속 CEO로 일한 회사들이 살아남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었다.

“사실 어쩔 수 없으면 창업자를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게 해요. 하지만 나중에 끌어내릴 생각을 하고 투자하지는 않아요. 실리콘밸리는 투자할 때 1년 안에 좋은 CEO 찾으면 창업자를 물러나게 하는 조건으로 투자하는 곳들이 여전히 꽤 있어요. 그것도 일리가 있어요. 실험을 열심히 하고 뭔가 찾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회사 초기에 (CEO로) 적합하고, 그렇게 뭔가를 찾으면 빨리 회사를 키울 수 있는 사람이 적합하고, 회사가 좀 큰 다음엔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적합해요. 세 개를 다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어요. 그에 맞춰서 CEO를 바꾸는 게 VC 책임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요. 다만 우리 데이터로 볼 때는 창업자가 계속 CEO로 있는 경우가 결과가 좋았죠. 다른 투자사는 우리보다 더 좋은 매니지먼트 도구를 갖고 있기 때문에 CEO 교체가 더 맞는 방식일 수 있어요. 저희가 옳고 그들이 그르다는 건 아니에요.”

 

 

한 킴의 알토스벤처스가 투자한 한국기업들. 위로부터 소셜커머스 <쿠팡>, 음식배달어플 <배달의 민족>, 배틀그라운드 제작사 <블루홀>

 

한 킴 대표가 VC로 성공만 해온 건 아니었다. 그는 1996년 스탠퍼드 경영대학원(MBA) 동기와 함께 알토스벤처스를 창업했다. MBA 과정에 진학하기 전 VC로 일했던 친구의 동업 제안에 손을 잡은 것이었다. 대학원을 마치면서 취업해 잘 다니던 컨설팅회사 부즈앨런해밀턴(Booz Allen Hamilton)을 그만두고 창업을 했다. 처음엔 주변 사람들의 돈을 종자돈 삼아 신생기업들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실리콘밸리 경기가 한창 좋을 때여서 실적이 조금만 나와도 회사 가치가 급등했다. 주위에서 함께 투자하던 또래 VC들은 경비행기도 사고, 요트도 샀다고 한다. 그러다가 2001년, 2002년 닷컴 버블이 꺼지면서 갖고 있던 자산 가치가 5% 이하로 하락했다. 가령 투자한 회사들의 주식 가치가 100억원이었다면 5억원으로 폭락한 셈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비행기 안 사고, 요트 안 사서 개인파산신고 안 해도 되니 그게 어디냐, 이렇게 스스로 위로하면서 새로 시작했어요. (외부 기관투자가의 돈을 끌어들여) 펀드를 만들기 위해 3년 정도 전 세계를 돌아다녔어요. 대부분 거절 당했고요. 결국 미국에 있는 가장 까다로운 데에서만 투자를 해주더라고요. 겨우 돈을 모아서 2005년부터 다시 시작했어요. 그때 진짜 (VC로) 시작한 것 같아요. 그 전까지는 그냥 훈련기간이었죠. 지금은 우리가 새로운 펀드를 한다고 돈을 모으면 보통 2, 3주 안에 다 차요. 투자 이력이 쌓일 수록, 외부 투자가들과 관계가 깊어질 수록 펀드를 모으기 쉬워져요.”

 

그는 한국과 미국 각각 연 평균 600억~800억원 수준까지만 투자자들로부터 돈을 받는다. 편안하게 운용할 수 있는 수준까지만 투자금을 모으고 그 이상은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펀드가 잘 되면 투자 하고 싶어하는 만큼 다 받아 줄 수 없어요. 가장 쉬운 건 우리가 훨씬 더 많은 자금을 받으면 되긴 하는데, 그러면 우리 투자 방식이 많이 달라져야 해요. 그래야 그동안 내온 수익을 낼 수 있어요. 그래서 저희는 그냥 정해진 금액, 우리가 편안한 금액 이상 안 받아요. 다만 요즘엔 조금이라도 자선사업 위주로 수익금을 쓰는 투자가의 돈을 좀 더 받으려 하고 있어요. 우리가 (펀드를 운용해) 돈을 벌어 수익금을 배분해 준다는 가정 하에 수익으로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대학, 기부활동을 하는 기관이나 개인 등을 위주로 투자가를 조금씩 바꿔나가고 있어요. 다 그렇진 않아도 되도록 secondary satisfaction(부차적인 만족)이 있는 곳에 우선순위를 두고 바꿔가는 중이에요.”
실리콘밸리 벤처투자사들이 모여 있는 샌드힐로드 근처 커피숍에서 <알토스벤처스> 한 킴 대표를 11월에 만났다. 황장석 촬영

처음엔 성공한 실리콘밸리 VC여서 막연히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모범생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1965년생인 그가 가족과 함께 미국에 간 건 1976년. 초등학교 6학년 1학기를 마친 뒤 태평양을 건넜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몸만 갔던 이민이었다.

“아버님이 옛날에 사업을 크게 하시다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 군사정부와 문제가 있어 조용히 (경기도) 평택에서 지내다가 '한국에서 사는 건 가망이 없다'고 해서 이민을 가야 했어요. 아버님의 재산을 다 내려놓고 가족이 몸만 왔어요. 정확히는 모르는데, 그게 (미국으로 가게 해주는) 조건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가족이 시카고로 이민을 왔죠. 부모님이 힘드셨어요. 고생 많이 하셨죠. 막노동 밖에 할 게 없었으니까요. 아버님은 회사 사장으로 일하시다가 갑자기 시간노동(시간제 육체노동)을 해야 했어요. 철(steel)도 깎고 별의 별 거 다 하셨죠.”

 

시카고에는 간호사로 이민을 와서 일하고 있던 이모 가족이 살고 있었다. 친척이 있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듯 싶어 시카고로 오게 됐다고 한다. 대학 갈 때까지 시카고에서 살았다. 그는 시카고가 홈타운(미국 고향)이라고 말한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웨스트포인트(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어릴 때부터 대망 같은 소설을 1년에 한 번씩은 읽었어요. 장교가 되고 싶었죠. 하지만 아버님이 군인을 싫어하셔서 설득할 자신이 없어서 몰래 지원했어요. 합격하고 나서야 말씀드렸죠. 엄청 화를 내셨어요. 막연한 생각에 웨스트포인트에 가긴 했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그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안 갔을 거에요.하지만 아버님과 대판 싸우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집에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어요. 내가 원해서 왔기 때문에 돌아가면 너무 창피하잖아요. 어떻게든 졸업은 해야 했죠.”

 

웨스트포인트 시절 그가 배운 건 실패를 관리하는 법이었다고 한다.

“웨스트포인트는 첫날부터 철저히 실패하게 만드는 곳이에요. 거의 매일 시험이 있는데요. 예를 들어 내일은 책 200페이지를 읽고 가야 하는 역사 수업이 있고, 복싱시합이 있고, 화학실험이 있고, 수학시험이 있어요. 게다가 수업이 끝나면 오후에 2시간씩 운동해야 해요. 그럼 저녁 먹고 공부해야 하는데, 갑자기 대통령이 와서 연설을 한다고 해요. 모두 참석해야 해요. 끝나고 나면 9시 정도부터 공부할 수 있어요. 거의 울음이 나와요. 언제 읽고, 언제 논문 쓰고, 시험 준비하고, 화학실험 준비해요? 밤 새야 하잖아요. 근데 밤 새면 복싱시합 나가서 얻어터질 게 뻔하죠. 지쳐 있으니. 그럼 뭔가 하나를 못해요. 냉정해야 해요. 주어진 조건, 룰은 바꿀 수 없는 것이고. 내일은 그냥 얻어 맞고, 대신 다른 걸 하는 방법이 있죠. 그런데 복싱도 네 번 연속 지면 낙제인데, 만약 세 번 계속 졌다고 하면 무조건 이겨야 해요. 수학 성적은 이번에 못 받아도 대세에 지장이 없는 상황이라면 수학을 포기하는 거죠. 우선순위를 정해야 해요. 복싱시합 하다가 팔 부러지기도 하는데요. 수술하고 마취 깨어나면 수학 선생님이 병원으로 와요. 손으로 쓸 수 없으면 시험지 주면서 말로 시험 봐요. 모든 게 냉정하게 진행돼요. 실패하고 좌절하기 시작하면 못 있어요.”

 

그와 함께 입학한 생도는 1500~1600명 정도였는데 졸업한 인원은 1000명 가량. 보통 입학생의 60% 정도가 졸업하는데 그보다 훨씬 높은 기록이었다고 한다.

그는 웨스트포인트 3학년 때 근처 학교에 다니던 아내와 만났다. 졸업 직후였던 1987년 결혼해 두 딸을 두었다. 큰 딸은 스탠퍼드대를 영문학 전공으로 졸업한 뒤 직장생활을 하다가 올해 아버지가 다녔던 스탠퍼드 MBA 과정에 입학했다. 작은 딸은 프린스턴대 학생이다.

그는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뒤 2년 동안 한국 미군부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공동경비구역(JSA)에서도 3개월 근무했다. 한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장교였던 그의 소대는 한국군과 함께 하는 중요한 임무를 도맡았다.

“광주에서 홍수 났을 때 복구작업도 저희 소대가 맡았고, 복구작업, 전쟁연습 등 중요한 건 다 맡아서 했어요. 누군가 인정해준다는 게 신나는 일이었어요. 정말 재미있었죠. 원래 꿈꾸던 군인의 일로 돌아온 거에요. 그런데 미국으로 돌아가 공병 본부에서 근무하게 되니 숨이 막혀 일 못하겠다 싶었어요. 몇 달 전에 통보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체계, 너무나도 질서정연한 그런 곳이었거든요. (의무복무기간 5년 중) 4년 정도 됐을 때 이건 못하겠다 싶었는데, 아는 웨스트포인트 선배가 MBA라는 게 있다면서 한번 해보라고 얘길 해줬죠. 하버드대에 놀러가서 MBA가 뭐하는 건지 보고 왔죠. 경영대학원입학시험(GMAT) 책 하나 사서 2주 공부하고 시험 쳐서 상위 10개 MBA 학교들에 지원했어요. 붙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했는데, 친하게 지내는 신부님이 스탠퍼드 가라고 추천했어요. 날씨가 얼마나 좋은지 아느냐는 얘기부터 시작해서요. 그래서 캘리포니아에 오게 돼서 그 뒤로 다른 곳엔 안 갔죠.”

1년 동안 한국에서 4개월, 실리콘밸리에서 2개월, 그 외 기간을 다른 국가에서 보낸다는 한 킴 대표. 한국 스타트업계에서 스타 VC인 그는 창업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한국은 늘 이랬다'며 모든 걸 주어진 조건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계속 그래야 하나, 바뀌려면 뭐가 필요한가 이렇게 생각하고 시도했으면 좋겠어요. 창업으로 엄청난 부도 창조할 수 있다는 걸 더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그래서 더 많은 창업자가 나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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