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국회의장 펠로시의 '음모론', 그리고 미용실 폐업

  • 기자명 황장석
  • 기사승인 2020.09.18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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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소속의 낸시 펠로시 연방하원의장(한국으로 치면 국회의장)이 자신의 지역구이자 자택이 있는 샌프란시스코를 찾은 건 8월 말이었다. 의회 일정이 없는 기간에 잠시 지역구를 방문한 것. 시내 미용실에 가서 머리 손질을 한 건 8월 31일 월요일이었다.

그런데 다음날인 9월 1일, 펠로시 의장이 미용실에서 머리 손질을 하는 동영상이 방송 뉴스에 나왔다. 샌프란시스코 시가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미용실 영업을 금지하는 상황에서 거물 정치인이 법(위반할 경우 1000달러 이하의 벌금, 심한 경우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도 있는 법)을 어기고 머리 손질을 했다는 보도였다. 평소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예방을 위해 마스크 착용을 강조해온 펠로시 의장이 마스크를 쓰지 않고 이동하는 모습도 담겨 있었다.

동영상을 제보하고 인터뷰를 한 사람은 미용실 주인 에리카. 펠로시 의장과 약속을 잡고 머리 손질을 해준 건 에리카의 미용실 남는 공간을 임대해서 독립적으로 영업을 하는 프리랜스 미용사였다. 샌프란시스코 미용실의 경우 영업금지가 몇 달째 이어지자 생계가 막막한 미용사들이 몰래 손님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은 상황이었다. 에리카는 펠로시 의장이 다녀간 뒤 제보를 했다. 모르는 척 지나갈 수도 있었지만 거물 정치인이 그런 식으로 미용실을 이용했다는데 화가 났다고 한다.

그러자 펠로시 의장은 미용실 주인 에리카가 쳐 놓은 덫에 걸렸다며 음모론을 제기했다. 에리카의 전화와 이메일, 소셜미디어 계정, 미용실 이용후기를 등록하는 웹사이트에는 욕설과 비난이 쇄도했다. 민주당을 대표하는 펠로시 의장을 일부러 곤경에 빠뜨렸다는 것이었다. 에리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였다. 그렇지만 음모론은 말도 안 된다고 부인했다. 프리랜스 미용사가 펠로시 의장과 약속을 했다는 걸 알게 된 건 방문 전날 저녁이었고,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에겐 프리랜스 미용사에게 손님을 받아라 말아라 할 권한도 없다고 했다.

이 사건은 9월 초 샌프란시스코 뿐 아니라 미국 정치권에서 논란이 됐다. 악수도 하지 않을 만큼 펠로시 의장을 싫어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남들한테는 마스크 쓰라고 설교를 해대면서 마스크도 쓰지 않고, 미용실 영업 금지된 상황에서 미용실 문열게 해서 머리를 했다"고 트위터에 글을 올리면서 거세게 비난했다. 2주쯤 지난 현재 언론 보도는 많지 않고 사건은 일단락된 분위기다. 그 사이 미용실 주인은 폐업을 결정했다. 15년 동안 살아온 샌프란시스코를 아예 떠나기로 했다.

미용실 주인이 손님인 펠로시 의장을 곤경에 빠뜨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트럼프 지지자로서 11월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의 의회 1인자이자 거물 정치인을 골탕먹이려던 것이었을까.

미용실 주인 에리카는 9월 3일 취재문의가 폭주하자 화상으로 기자회견을 했다. 제보를 하게 된 이유는 영업 금지 명령에 대한 불만이라고 했다. 이런 거물 정치인이 스스럼없이 올 정도면 미용실 영업을 허용해도 되는 것 아니냐,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는 3월 중순 이후 미용실 영업을 금지했다. 펠로시 의장이 방문한 다음날인 9월 1일에야 제한적인 영업을 허용했다. 실내영업은 허용하지 않는 대신 미용실 바깥에 의자를 두고 영업하도록 했다. 머리 감는 건 허용되지 않았다. 미용실, 헬스장처럼 사실상 영업이 전면 중단된 경우 자영업자들은 정부 지원에 의지해 버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안 되면 폐업을 했다. 지금도 현지언론에는 매주 문 닫는 상점들이 늘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혼자 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 에리카도 정부에서 지원하는 자금으로 1만2000달러를 받았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경제활동을 강력하게 규제하는 민주당 주정부, 시정부에 대한 불만도 컸던 걸로 보인다. 캘리포니아는 미국 내에서도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초기 경제활동, 외부활동을 강하게 규제한 곳이다. 게다가 샌프란시스코와 그 주변 도시는 캘리포니아 내에서도 특히 엄격한 규제정책을 실시했다. 에리카는 트럼프 지지자이기도 했다.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그는 나의 대통령"이라며 트럼프 대통령 지지를 숨기지 않았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민주당 펠로시 의장에게 호감이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펠로시 의장이 제기한 음모론을 뒷받침할 근거는 찾기 어렵다. 대표적인 민주당 텃밭인 캘리포니아주, 거기서도 민주당 깃발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샌프란시스코의 현직 하원의장이 11월 3일 대통령선거와 더불어 치러지는 하원의원 선거에서 떨어질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펠로시 의장은 말로만 음모론을 제기했을 뿐 딱히 이렇다할 근거도 대지 못했다. 미용실 주인이 덫을 놓았다는 근거도, 덫을 놓을 이유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덫을 놓은 미용실 주인이 사과해야 한다"는 주장은 굽히지 않았다. 

에리카는 전화,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각종 협박에 시달리게 됐다며 가족의 안전을 위해 미용실을 폐업하고 샌프란시스코를 떠나겠다고 방송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러자 한 친구가 고펀드미(gofundme) 웹사이트에서 에리카를 도와달라며 모금을 시작했다. 92일 시작된 모금은 9600여 명이 참여하면서 6일만에 목표금액 30만달러를 훌쩍 넘은 33만6000달러로 종료됐다. 원화로 환산하면 약 4억원. 에리카는 아이들과 함께 다른 도시로 가서 미용실을 낼 계획이라고 한다.

돌이켜 보면, 이번 사건에서 주목을 끈 게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샌프란시스코 시장의 대응이었다. 민주당 소속의 런던 브리드 시장은 민주당의 의회 최고실력자 펠로시 의장을 여러 가지 논리로 변호했다. 한 기자가 펠로시 의장의 미용실 방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하자 브리드 시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변명하려는 건 아닌데, 펠로시 의장은 이 나라의 독재자에 맞서 선봉에서 싸우는 사람이다. 시민들이 힘든 상황에서 이런 문제로 시를 혼란스럽게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브리드 시장은 지난 10일, 샌프란시스코에서 14일부터 미용실 실내영업을 허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시는 당초 이달 말 미용실 실내영업을 허용한다는 방침이었다. 펠로시 의장의 미용실 방문 사건으로 영업 규제에 대한 불만이 치솟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난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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