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여성과학자 샤틀레가 짊어진 부담과 차별, 21세기엔 달라졌을까

  • 기자명 더사실포럼
  • 기사승인 2021.02.1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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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왕이라면, 여자에게 인간이 누려야 할 모든 권리를 갖게 해줄 텐데. 특히 이성에 관련된 모든 권리를.”

- 에밀리 뒤 샤틀레 (Émilie du Châtelet)

 

2020년 3월,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으로 WHO는 팬데믹을 선언했다. 백신과 치료제가 없는 상황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가 세계는 마스크 쓰기와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새로운 생활 수칙을 지키며 지난 한 해를 보냈다. 2020년은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전 세계에 우울함이 드리워진 시기였지만, 과학계에서는 여성 과학자들의 활약이 빛났던 해이기도 하다. 매해 가을에 발표되는 노벨 물리학상은 블랙홀 연구로 안드레아 게즈에게, 노벨 화학상은 DNA를 정교하게 잘라 내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CRISR-Cas9) 연구로 미국의 제니퍼 다우드나와 프랑스의 에마뉘엘 샤르팡티에게 수여되었다. 보수적인 노벨위원회에서, 지난해처럼 여성 과학자의 수상 비율이 높은 적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빛나는 사실은, 헝가리 출신의 여성 과학자 카탈린 카리코의 mRNA 치료 연구가 팬데믹 국면의 희망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연구는 지난 수십년 동안 외면받아왔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빛의 세기, 계몽주의 시대 속의 오래된 편견

프랑스에서 빛의 세기 (Siècle des Lumières)라고 불렸던 18세기는 계몽주의 시대였다. 이성의 빛으로 기독교의 권위에 도전하고, 미신과 편견에서 벗어나 이성과 합리성으로 인간과 자연을 이해함으로써 사회를 변화시키려 했던 시기였다. 수학자이자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서기였던 콩도르세 후작(Marquis de Condorcet )은 인간의 이성으로 편견과 미신을 타파하고 과학이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과학이 인간의 도덕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과학을 기반으로 새로운 사회로 변화해 나가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주장했다[1].

그는 기독교의 영향을 벗어난 무상 교육과 공공 교육을 주장하며, 모든 인간이 성별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창조됐고, 같은 대뇌를 가지고 정신적으로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1795년 자신의 저서 『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관』에서 여성도 공공 교육 및 과학 교육으로 여성의 사회 참여와 진보를 통해 과학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그리고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 경우를 예로 들며,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1637년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도 이미 그의 『방법서설』 에서 성별과 상관없이 인간이 이성을 가졌고, 여성도 남성처럼 과학을 포함한 학문들을 배우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데카르트가 자신이 가르친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은 물론, 자신과 서신을 교환했던 보헤미아 엘리자베스 공주의 지적 능력을 직접 경험했기에 여성의 능력을 폄하하지 않고 인정했던 것이다. 1673년에는 철학자이자 작가인 풀랭 드 라 바르(François Poullain de La Barre)는 『양성평등, 고정 관념을 없애는 데 중요한 육체적 정신적 담론』 통해 정신에 성별은 없다고 말했다. 여성이 남성과 같은 물리학, 의학 및 수학 등의 교육을 받도록 허용하고, 여성도 남성이 가지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1675년의 저서 『남성의 우수성』에서 여성이 열등한 것은 관습과 전통 그리고 결함을 가진 교육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데카르트 철학과 그의 추종자들은 여성의 능력이 열등하지 않다고 했지만 이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 정신적, 지적으로 열등하고 여성에게 순종을 강요했다. 심지어 과학혁명으로 촉발된 근대 과학을 통해 사회를 진보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계몽주의자들조차, 과학을 이해하고 공부할 수 있는 이성과 능력을 가진 ‘인간’은 여성이 배제된 남성만을 지칭하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여성이 남성과 같은 본성과 능력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이성의 빛을 강조한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도 여전히 남녀의 본성 차이에 대한 어두운 편견이 지배적 이었다. 일례로 계몽주의자인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종신 서기관 베르나르 드 퐁트넬(Bernard Le Bovier de Fontenelle)은 자신의 저서에서 순진하고 지적 수용력을 가진 후작 부인을 내세워, 여성이 우주의 ‘고차원’적인 진리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임을 강조하거나 수학자인 남성이 새로운 우주에 대한 재치있는 대화로 후작부인을 유혹하는 내용으로 여성이 이해의 한계가 있다고 비아냥거렸다.[2]

그림 1. 1738년 볼테르의 '뉴턴 철학의 개요'에서 책 안 쪽에 있는 그림이다. 뉴턴의 지식을 미네르바(에밀리 뒤 샤틀레)가 받아서 그 빛(지식)을 볼테르에 주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볼테르가 책을 쓸때 샤틀레의 도움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보고 있다.
그림 1. 1738년 볼테르의 '뉴턴 철학의 개요'에서 책 안 쪽에 있는 그림이다. 뉴턴의 지식을 미네르바(에밀리 뒤 샤틀레)가 받아서 그 빛(지식)을 볼테르에 주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볼테르가 책을 쓸때 샤틀레의 도움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보고 있다.

 

빛의 공간이 된 살롱과 과학에, 여성의 공식적인 자리는 없었다

12세기에 설립되기 시작한 대학들이 유럽 전역에 있었고,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갈릴레이, 그리고 뉴턴으로 이어지는 근대 과학이 시작되면서 유럽의 주요국가에 학회, 협회, 그리고 아카데미 등이 설립되었다. 1660년 영국에서 왕립학회(The Royal Society of London for the Improvement of Natural Knowledge)가 과학자들 주도로 설립되고, 1666년 프랑스에서 재무장관 장 바티스트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가 제안하고 루이 14세의 승인으로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Académie des sciences)가 설립되었다. 영국의 경우는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이 되었고, 프랑스는 국가에서 엄격한 시험으로 회원을 선발하고, 국가에서 연금을 지급하는 국가 과학 기관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를 제외한 유럽 국가에서 여성들은 대학에서 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연구하고 싶은 여성에게 과학 기관은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과학 기관이 여전히 기독교의 영향으로 여성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을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여성이 공식 기관의 교육에서 배제되었고, 과학 기관에서 연구에 필요한 지원을 받은 과학자는 되기 힘들었다. 계몽주의 시대의 과학에서 여성의 자리는 없었다.[3]

18세기 계몽주의가 가장 융성했던 프랑스는 또한 살롱 문화의 탄생지였다. 살롱에서 여성과 남성이 함께 자유롭게 문학, 철학, 그리고 과학에 대한 토론과 새로운 지식의 소개되었다. 그리고 귀족 여성의 주도로 여성의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공간이 되었다. 17세기 중반부터 여성은 살롱에서 학계의 공용어인 라틴어 대신 프랑스어로 쓰인 책들을 읽으면서, 새로운 철학과 과학을 만나고, 자신의 능력을 깨닫게 되었다. 살롱은 점차 여성이 다양한 학문을 익힐 수 있는 배움의 장소가 되었다. 과학 기관이 아닌 사적인 공간, 여성이 주체적으로 만든 살롱에서 여성은 과학자와 교류하고 토론하며, 그들의 강연을 통해 새로운 과학을 배울 수 있었다.

프랑스의 살롱은 과학이 전파되는 곳 이었고, 여성이 과학을 배우고 과학 활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되었다. 그래서 살롱은 정치, 문화 세력의 구심점이 되고, 살롱의 주인은 명성을 얻으려는 인재들의 경력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한때 유명한 살롱의 주인인 마담 르 방베르의 살롱을 거쳐야 과학 아카데미에 입성할 수 있다는 말까지 생겼다. 과학자들은 살롱에 참석하고, 살롱 여성들의 협력을 얻어 대중에게 과학을 선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살롱에 참석하는 학회 회원인 과학자들은 과학 기관에서 공식적으로 과학을 하고, 살롱을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선전하는 곳으로 이용했다. 여성은 단지 살롱에서 과학을 전파하는 사람으로서, 과학의 구경꾼으로만 이용되었다. 학회의 회원인 남성은 살롱과 학회에서 활동을 할 수 있었고, 여성은 살롱에서만 과학을 구경할 뿐 학회의 회원이 될 수 없었다. 학회는 여성에게 남성의 독점적 영역인 ‘과학자’라는 자리를 주지 않았다.[3]

그렇게 여성이 과학에서 배제되어 구경꾼으로만 남아야 했던 계몽주의 시대에 명망 있는 과학자가 된 여성이 있다. 바로 에밀리 뒤 샤틀레다.

최초의 근대 여성과학자로 알려진 에밀리 드 샤틀레 초상화.
최초의 근대 여성과학자로 알려진 에밀리 드 샤틀레 초상화.

 

에밀리 뒤 샤틀레, 찬란한 빛이 되다

계몽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작가 볼테르의 연인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에밀리 뒤 샤틀레(Émilie du Châtelet)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과학 기관과 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그의 업적을 인정받은 철학자이자 과학자였다. 그는 계몽주의자인 아버지 브르퇴유 남작은 직접 가르치고, 가정 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는 라틴어를 포함 7개국어로 읽고 쓸 수 있었고, 수학과 물리학에 재능을 보였다. 특히 자신의 수학 실력으로 도박을 즐기고, 도박으로 딴 돈으로 드레스와 책 그리고 과학 실험 도구 등을 샀다고 한다. 결혼한 후에 물리학자인 피에르 모페르뒤스(Pierre Maupertuis)에게 수학을 교육받았고, 사교계와 살롱을 출입하며 볼테르란 명성있는 애인을 두었다. 이런 조력자들을 통해 그는 과학을 접하고, 공부하며 자신의 지적 열망을 채워 나갔다.

프랑스 교외의 시레성에서 아이작 뉴턴(Sir Isaac Newton)의 『프린키피아』에 감명받은 볼테르가 뉴턴의 새로운 과학에 대한 책을 집필할 때, 에밀리는 볼테르와 뉴턴의 과학에 대한 토론을 하며, 자신의 수학 실력으로 뉴턴의 과학을 볼테르에서 설명하고 집필에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볼테르는 그의 이름을 표지에 적는 대신, 책 안쪽 삽화에 뉴턴의 지식을 거울로 반사시켜 글을 쓰는 남성 즉 볼테르 자신에게 보내는 미네르바의 이미지로 에밀리의 큰 도움을 표현했다. 뉴턴주의자로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철학으로 받아들인 볼테르와 달리 에밀리는 근대 과학과 수학으로 관점으로 뉴턴의 자연 철학을 이해하였다. 더 나아가 에밀리는 자신이 직접 뉴턴의 과학에 대한 책을 쓰기 시작했다. 책의 집필 도중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의 형이상학을 접하고는 쓰던 책을 다시 고쳐 쓰며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자연 철학에 대한 개념들을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렇게 그의 아들을 위해 쓴 책인 『물리학의 체계』를 후작 부인이란 이름으로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을 프랑스에 처음 소개한 책이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다른 과학자들이 맹목적으로 뉴턴이나 라이프니츠를 추종했던 것과 다르게 자신의 지식과 견해로 과학을 이해하고 해석했음을 보여 준다.[4] 저술가로서 그는 능숙한 라틴어와 수학으로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뒤 샤틀레 후작부인에 의한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출판했다. 이 책은 단순히 번역서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계산을 해보면서 방대한 주석을 달아 명확하게 뉴턴의 새로운 과학을 설명했다. 이 책은 프랑스어로 번역된 유일한 뉴턴의 책이다. 그의 번역본 덕분에 프랑스 과학계는 뉴턴의 조국인 영국에서보다 뉴턴의 과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하게 된 것이다.

그는 여성에게 과학자라는 자리를 주지 않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빛에 대한 연구 논문으로 그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1737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열, 불, 그리고 빛에 대한 논문을 공모하였다. 볼테르는 작가의 명성과 더불어 과학자의 명성을 얻기 위해 시레성에서 에밀리와 함께 실험을 하였다. 이 때 에밀리는 엄마이자 성의 안주인으로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볼테르와 연구를 같이 해야했다. 게다가 실험을 하면서 자신보다 과학적 이해가 떨어지는 볼테르에게 자신의 견해를 직설적으로 말하지도 못하고 답답해 했다고 한다. 에밀리는 볼테르의 『뉴턴 철학의 개요』를 쓸 때 빛의 속도를 계산해 봤기에, 빛의 성질에 대해 연구했다. 그리고 빛의 무게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빛 속에 힘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내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실험을 하고 싶었지만, 상황은 그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가족이 있고 돌봐야 할 집이 있으면 할 일이 너무 많다. 중요하지도 않은 자질구레한 일이 어찌나 많은지, 새로 산 책을 읽을 시간이 거의 없다, 내가 얼마나 무식한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남자였다면, 내 인생에서 이런 쓸데없는 일을 모조리 밀어 내버렸을텐데.”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5] 그런 힘든 상황에도 밤에 혼자 촛불을 켜고 연구를 꾸준히 하면서 결국 아무도 모르게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논문을 제출했다. 에밀리는 이 논문으로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과학자들에게 ‘과학자’로 인정을 받고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 명성은 곧 유럽으로 퍼졌고, 이탈리아 볼로냐 아카데미의 외국인 회원이 되었다.[3] 여성이 과학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편견, 공식 교육과 과학 기관에서 배제된 여성이 유럽에 과학자로 이름을 알리게 된 사건이었다. 하지만 1903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던 마리 퀴리가 두번째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발표된 1911년에도 퀴리를 학회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샤틀레에게 회원 자격을 수여하지 않았다.

 

21세기의 에밀리 뒤 샤틀레

18세기의 에밀리 뒤 샤틀레는 21세기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가. 21세기에 학위를 받고, 과학자로 살고 있는 여성들이 있다. 여성의 능력에 의구심을 갖는 분위기도 사라지고 있다. 300여년에 걸쳐 서서히 변하고 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18세기 에밀리가 가사에 지쳐 모두가 잠든 후에 홀로 연구를 하던 모습과 21세기 팬데믹에 재택 근무를 하며 육아와 가사일을 대부분 짊어지는 여성 과학자들의 모습은 비슷하다. 가사 양육을 담당하는 여성의 역할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팬데믹으로 여성 과학자의 가사 분담은 늘고, 남성 과학자와 연구 실적 격차가 벌어졌다. 가사 부담과 양육으로 인한 경력 단절에 대한 문제 의식은 항상 있어 왔지만, 여전히 해결은 되지 않고 있다. 팬데믹 현상으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 이상, 사회와 과학계는 이 상황을 해결할 지혜를 모아야 한다. 그리고 방법을 찾아야 한다. 21세기에도 에밀리 뒤 샤틀레처럼 빛나는 여성들이 다시 어둠으로 사라지면 안될 일이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1]토마스 헨킨스, 『과학과 계몽주의』, 글항아리(2011).

[2]문지영 (2020). 18세기 프랑스 여성과학자 에밀리 뒤 샤틀레 (Emilie du Châtelet)의 삶과 연구활동. 프랑스사 연구(42), 191-228.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9312422

[3]마거릿 버트하임, 『피타고라스의 바지』, 사이언스 북스(1999).

[4]Hagengruber, R. Emilie du Châtelet, 1706–1749: Transformer of Metaphysics and Scientist.Math Intelligencer 38, 1–6(2016). https://doi.org/10.1007/s00283-016-9660-3 .

[5]데이비스 보더니스, 『마담 사이언티스트』, 생각의 나무(2006).


필자 정현희는 물리학과에 입학해서 우여곡절 끝에 좋은 지도교수님 덕분에 공부를 포기하지 않고 ‘덜대칭 초전도체의 질서 계수에 대한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과학자의 길을 벗어나 이공대생을 위한 일반물리와 인문대생을 위한 과학을 강의하고 있다.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새로운 공부를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변화하려고 노력중이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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