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모토 타로와 진보정당 참의원 선거에 도전하다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21.01.29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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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와 시대의 반란」의 시납시스는 “영화배우에서 극우파에 맞서는 전투적 자유주의 정치가로 변신한 야마모토 타로의 진보정당이 2019년 여름 참의원 선거에 도전한다.” 정도로 요약되지만, 그 디테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스틸은 선거독려 캠페인에서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들. (c)FukyoFilms
「레이와 시대의 반란」의 시놉시스는 “영화배우에서 극우파에 맞서는 전투적 자유주의 정치가로 변신한 야마모토 타로의 진보정당이 2019년 여름 참의원 선거에 도전한다.” 정도로 요약되지만, 그 디테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스틸은 선거독려 캠페인에서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들. (c)FukyoFilms

성에가 뒤덮인 유리창처럼 모든 것이 불투명하던 시절 도망치듯 내려간 해운대에서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만났다.

박찬욱 감독이 <올드보이>로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해, 황금종려상에 노미네이트된 작품. 단짝 친구와 안데스산맥을 넘어 아마존으로 향한다는 계획 아래 낡은 모터사이클에 몸을 실은 주인공은 훗날 과테말라 정부군의 총탄에 스러진 뒤에도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68혁명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에르네스토 ‘체(Che)’ 게바라였다.

반군의 2인자에서 혁명정권의 관료가 되었다가 편지 한 장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리얼 슈퍼히어로이자 세기의 로맨티스트의 청년기 모습은 필자에게 젊음에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나이를 먹으면 우리는 누구나 그저 그런 날들을 먹어치우는 어른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체도 만약 쿠바에 머물렀다면 ‘혁명 1세대’의 칭호쯤을 간직한 채 늙어갔을까.

옛 집 서재의 양장본처럼 마음 한구석에서 먼지가 쌓여가던 의문에 가위표가 쳐진 것은 어렵사리 잡힌 비대면 인터뷰 스케줄에 맞춰 노트북 앞에 앉은 지 채 10분도 되지 않아서다.

하라 카즈오.

68혁명을 온몸으로 경험한 만 75세. “홍상현의 인터뷰”가 만난 영화인 가운데 최고령인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물으며 천황에게 쇠구슬 테러를 감행한 오쿠자키 겐조가 주인공인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로 베를린국제영화제 칼리가리영화상을 받으며 ‘다큐멘터리영화의 귀재’라 불렸고, 오사카예술대학 교수이자 시네마학원 원장으로 후진을 길러왔지만 전문학교 중퇴가 학력의 전부, 누구의 사사도하지 않았다. 애초 사진작가로 데뷔했지만 특수학교의 노동자 생활의 결과물이었다.

특히 메가폰을 잡은 후의 행보는 ‘혁명아’그 자체. 레디컬 페미니스트인 전 배우자(고바야시 사치코)를 소환해 전통적 가족관을 해체하는가 하면(<극사적 에로스>), 유명 소설가인 주인공(이노우에 미츠하루)의 허위경력이 포착되자 오히려 실상을 파헤치며 부지불식간에 중심인물에 대한 프레임을 유지하는 다큐멘터리의 스테레오타이프를 산산조각 내버렸다(<전신소설가>).

<레이와 시대의 반란>은, 관계당국의 정치적 해결에 가려져 있던 미나마타병 피해자들의 15년 세월을 재조명한 부산국제영화제의 <미나마타 만다라>와 더불어 한국의 또 다른 국제영화제인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초청된 하라 감독의 최신작이다.

시납시스는 “은막의 스타(<역도산>, <마이웨이> 등 한국영화에도 출연했다)에서 극우파에 맞서는 전투적 자유주의 정치가로 변신한 야마모토 타로의 진보정당 ‘레이와 신센구미’가 2019년 여름 참의원 선거에 도전한다.” 정도로 요약될 수 있지만 248분이라는 상영시간이 말해주듯 그 디테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입후보자 공모로 모인 루게릭병 환자 기타리스트(후나고 야스히코), 뇌성마비 중증장애인(기무라 에이코), 노숙인 출신 파견노동자(또한 두 아이의 싱글마더, 와타나베 테루코) 등이 악전고투 끝에 비례에서만 228만 표를 넘는 지지를 획득, 두 개의 의석을 쟁취해내는 정치실험, 혹은 ‘반란’의 전말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라 감독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주인공으로 그 자신 최전선에서 극우파와 각을 세우는 한편, 일관되게 아동권익과 동물보호 또한 주장해 온 성소수자 지식인, 야스토미 아유미 도쿄대 교수를 내세운다.

만 75세의 하라 카즈오 감독. 세계가 인정하는 다큐멘터리 거장인 그는 오사카예술대학 교수이자 시네마학원 원장으로 수많은 후진을 길러왔다. (c)FukyoFilms
만 75세의 하라 카즈오 감독. 세계가 인정하는 다큐멘터리 거장인 그는 오사카예술대학 교수이자 시네마학원 원장으로 수많은 후진을 길러왔다. (c)FukyoFilms

홍상현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으로 비프메세나상을 수상하시고 이듬해 서울환경영화제의 특별전에서는 무려 세 편의 작품이 동시에 상영되었습니다. 그리고 2020년, 신작 <미나마타 만다라>의 부산국제영화제 초청과 함께 <레이와 시대의 반란>으로 도쿄국제영화제와 로테르담국제영화제를 거쳐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오셨는데요.

하라 카즈오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이 촬영 8년, 편집 2년, 모두 합쳐 제작에 10년이 걸렸습니다. <미나마타 만다라>가 가장 최근에 완성되긴 했지만, 크랭크인은 더 빨랐지요. 촬영에 15년, 편집에 거의 5년이 걸렸으니까요. <미나마타 만다라>가 완성될 즈음 마침 석면 재판이 끝나 더 이상 촬영할 필요가 없어진 까닭에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도 같이 편집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홍상현

15년. 엄청난 촬영기간이네요. (웃음)

하라 카즈오

15년이 지나고 보니 더는 찍을 게 없더라고요. (웃음) 그래서 마무리를 했지요. 그렇게 편집을 하다 급하게 <레이와 시대의 반란>을 찍게 되었습니다. 결국 지극한 우연으로 이 모든 과정이 한꺼번에 맞물리게 된 거지요. (웃음)

 

홍상현

2020년 6월 8일에 75세가 되셨는데, 작품 몇 편의 스케줄이 그렇게 맞물려 있었으니 다른 분들보다 좀 더 천천히 연세가 드시는, 그러니까, 좀 더 정정하신 것도 왠지 이해가 됩니다. 하셔야 될 일이 많으니까. (웃음) 자, 그럼 여기서 제 인터뷰라면 누구든 거치는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평소 한국영화를 즐겨보시는지요. 좋아하시는 작품이나 감독, 배우 등은 있으신가요.

하라 카즈오

저도 저지만 제 프로듀서인 시마노 치히로 군이 워낙 한국영화의 열렬한 팬입니다. (웃음) 입만 열면 한국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이것만은 보셔야 한다’고 매번 추천작을 소개해 준 덕분에 접할 기회가 많았어요.

사실 미국영화, 정확히는 할리우드 액션영화 같은 오락물을 좋아하는데요. 한국영화에서는 확실히 할리우드적인 재미가 느껴져요. 일본영화는 따라잡기 힘든 차이가 분명히 있지요. 액션의 퀄리티도 다르고. 그밖에 시마노 군에게 소개받은 이창동 감독, 봉준호 감독 같은 명장ㆍ거장의 작품은 하나같이 명불허전을 실감할 수 있을만한 것들이었습니다.

하라 카즈오 감독의 대표작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의 주인공 오쿠자키 겐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뉴기니에서 고립된 경험이 있는 그는 후에 전쟁 책임을 물으며 천황에 대한 쇠구슬 테러를 감행했다. (c)FukyoFilms
하라 카즈오 감독의 대표작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의 주인공 오쿠자키 겐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뉴기니에서 고립된 경험이 있는 그는 후에 전쟁 책임을 물으며 천황에 대한 쇠구슬 테러를 감행했다. (c)FukyoFilms

홍상현

감독님의 삶의 궤적을 더듬어가다 보면 마치 ‘떠돌이 검객’처럼 성장해 대가가 되신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오사카예술대학 등에서 수많은 후진을 양성해오셨고, 심지어 개인적으로 시네마학원을 운영하실 만큼 젊은이들과 함께하는데 힘을 쏟고 계시는데요.

하라 카즈오

이마무라 쇼헤이와 그 후배인 우라야마 키리로라는 감독이 있는데, 우라야마 씨의 경우 국제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편은 아니지만 좋은 작품을 많이 만들었어요(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비행소녀>로 금상을 수상. ※주). 그밖에 쿠마이 케이(1974년 작 <산다칸 8번 창관 / 망향>으로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 ※주)라는 감독이 있는데요. 그까지 포함해서 이 세 사람이 닛카쓰라는 스튜디오가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영화를 많이 내놓던 시절 활약했어요.

저는 이 가운데 쿠마이 감독이 이마무라 감독의 현장에서 조감독으로 일하던 시절 촬영조수로 함께했습니다. 이들의 리얼리즘은 확실히 제가 현장에서 몸으로 체득해온 것들과 무척 가까운 느낌이었거든요. 도제관계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특히 이마무라 씨의 영화가 좋아서 자발적으로 열심히 공부해 왔습니다.

 

홍상현

그렇군요. 이마무라 감독은 워낙 거장이시기지만 한국과도 인연이 깊으시지요. 한국최초로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수입된 일본영화가 <우나기>였을 정도니까요. <간장선생>이나 <복수는 나의 것>도 유명하고요.

하라 카즈오

잘 알고 계시네요. (웃음)

그밖에도 1968년, 1969년 무렵의 방송다큐멘터리 가운데 상당히 전위적인 것들이 많았습니다. 해서, 저 스스로도 많이 공부를 하면서 그 디렉터들을 시네마학원의 강사로 초빙해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했죠. 시네마학원은 단지 후진을 양성하는 곳이 아니라 제 스스로 영화공부를 하려고 다양한 감독들과의 만남의 장으로 마련한 곳이기도 하니까요. 배움이란 어떤 기술이나 지식을 습득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그 내용을 다음세대 젊은이들에게 전해줌으로서 완전한 의미를 갖게 되잖아요.

최근 제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면서 시네마학원의 기획은 따로 진행하지는 않게 되었지만 ‘좋아하는 작품을 만든 감독으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유효한 공부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홍상현

68혁명의 물결이 아시아에 밀어닥칠 당시 청년기를 보내셨습니다. 감독님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노멀(normal)’이라는 사회의 일방적인 기준이나 전통적 가족관에 대한 회의(<안녕 CP>, <극사적 에로스>), 절대적 금기, 혹은 권위의 해체(<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 등 세계에 혁명의 기운이 충만했던 시대적 분위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는데요.

하라 카즈오

이마무라 쇼헤이 이외의 동세대 감독으로 오시마 나기사(<감각의 제국>으로 유명한 거장. ※주), 다큐멘터리에서는 오가와 신스케(나리타국제공항 건설 반대 투쟁을 그린 <산리즈카> 시리즈로 유명한 다큐멘터리영화의 거장. ※주)나 츠치모토 노리아키(1963년 작 <빨치산 전사>가 2010년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화제가 되었다. ※주) 같은 사람들이 있는데요. 이들의 영화를 보면, 아시겠지만, 과거 우리사회에 일본공산당이라는 정당이 혁명적 색채를 짙게 드러내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1945년 무렵의 이야기인데요. 그들은 이 요체를 수용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요. 젊은 시절의 저도 그런 그들의 생각을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저는 1945년 생으로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대학을 다닐 수 없었거든요. 그러니 학생도 아니고 제대로 된 노동자도 아니라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을 그 주체로서 접해 본 일은 없었지만 스무 살 무렵 도쿄로 상경했을 당시 전공투(전학공투회의) 운동이 대단히 격렬했어요. 주축은 저보다 두세 살 아래인 연배의 학생들이었지만 사상적인 영향만을 따지면 이들로부터 받은 것이 가장 컸지요.

데뷔 이후 하라 카즈오 감독의 행보는 ‘혁명아’ 그 자체였다. 자신의 네 번째 작품 「전신소설가」를 촬영할 당시 주인공이자 유명 소설가인 이노우에 미츠하루(사진)의 허위경력이 포착되자, 그는 오히려 실상을 파헤치며 부지불식간에 중심인물에 대한 프레임을 유지하는 다큐멘터리의 스테레오타이프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c)FukyoFilms
데뷔 이후 하라 카즈오 감독의 행보는 ‘혁명아’ 그 자체였다. 자신의 네 번째 작품 「전신소설가」를 촬영할 당시 주인공이자 유명 소설가인 이노우에 미츠하루(사진)의 허위경력이 포착되자, 그는 오히려 실상을 파헤치며 부지불식간에 중심인물에 대한 프레임을 유지하는 다큐멘터리의 스테레오타이프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c)FukyoFilms

홍상현

오히려 그렇듯 특정 집단에 소속되었던 경험이 없으시다 보니 사고의 스펙트럼 또한 더 넓어지신 것 아닐까 싶습니다만. (웃음) 여하튼 그 영향이라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는 수준이었겠네요.

하라 카즈오

이마무라 쇼헤이나 오시마 나기사, 츠티모토 노리아키, 오가와 신스케 등 한 살 위 연배인 영화인들을 보면서 혁명운동의 궤적을 확인하고, 이를 계승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전공투 운동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던 경험이 오늘날 저의 정신을 형성해준 게 아닐까합니다.

제 생각이나 제가 만들어온 다큐멘터리에는 전공투 운동의 학생활동가들로부터 배운 사상을 제 것으로 소화, ‘배양’한 내용이 녹아 있거든요.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오소독스(orthodox)를 아직도 크게 이식한다는 점에서 순진무구한 체질이라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웃음)

 

홍상현

그리고 감독님의 작품의 경향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 싶습니다. 먼저, 환경문제에 집중하고 계신 것인데요. 사회적 소통의 수단으로써의 영화에서 “환경”이라는 키워드를 특히 강조하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하라 카즈오

제가 가장 먼저 선택한 영화의 키워드는 ‘장애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컨대 교육문제나 차별문제처럼 사회적 학습이 필수적이라 일컬어지는 사화문제의 테마 중 하나로 집중했던 건 아니었어요. 단지, 장애인이라는 말은 그 반대지점에 건전인(健全人)이라는 개념을 전제하거든요. 또한 사회적으로 우리 중 거의 대부분이 바로 이 ‘건전인’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는 믿음이 존재하고요. 이 지점에서 제가 가진 문제의식은 “‘내 몸’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였습니다.

 

홍상현

대단히 흥미로운 말씀이신데요. 사회적 문제의식을 가진 다른 다큐멘터리 감독들과 발상의 과정이 차별화되는 느낌입니다.

하라 카즈오

즉, 이 신체의 문제를 ‘사회문제’라는 틀에 끼워놓으면 장애인 문제가 보인다는 겁니다.

인간은 존재해 나가기 위해 육체를 가지지요. 정신이나 영혼, 그리고 몸의 문제에 대한 인식은 결국 어떤 존재의 방식을 갖느냐 하는 철학적 태도와 연결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제 작품이 사회적인 문제제기 차원에서 환경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파악될 수도 있다는 점을 부정하진 않습니다. 결론을 도출해내는 사고의 과정에 있어 다소 차별화 될 수 있다 하더라도 말이죠. 아울러 저 자신 사회적 존재로서의 본연의 자세와, 스스로의 철학적인 자세가 겹쳐지는 지점에서 창작의 테마를 찾아내 가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작 「미나마타 만다라」. 관계당국의 정치적 해결에 가려져 있던 미나마타병 피해자들의 15년 세월을 재조명한 이 영화는 촬영에 15년, 편집에 거의 5년이 걸렸다. 상영시간은 372분. (c)FukyoFilms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작 「미나마타 만다라」. 관계당국의 정치적 해결에 가려져 있던 미나마타병 피해자들의 15년 세월을 재조명한 이 영화는 촬영에 15년, 편집에 거의 5년이 걸렸다. 상영시간은 372분. (c)FukyoFilms

홍상현

2020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초청작인 <레이와 시대의 반란>과 함께,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미나마타 만다라>와 더 깊이 연관되는 이야기 같네요.

하라 카즈오

이번 <미나마타 만다라>는 미나마타병이라는 메틸수은이라는 맹독을 바다로 흘려보냄으로써 일어나는 사회문제를 다룬 영화지만, 정작 제가 작품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었던 건 뇌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메틸수은이 미나마타병이라는 뇌질환을 일으킨다는 내용은 영화에서도 다뤄지지만, 이는 그 자체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파괴된다는 의미를 갖거든요. 유해물질은 뇌의 오감(후각, 미각, 청각, 촉각)을 관장하는 신경에 타격을 줍니다. 그런데 인간은 바로 이 오감을 통해 문명을 향유하잖아요. 그러니 단지 질환의 발병이라는 의미를 넘어, ‘인간성을 상실시키는’ 종말론의 이미지가 있는 거지요.

이렇듯 지구라는 환경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론적 문재를 다뤄보고 싶었습니다. 물론 모든 요소를 이미지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감독으로서의 문제의식은 그랬다는 겁니다.

 

홍상현

슬슬 이번 초청작 <레이와 시대의 반란>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가 볼까요. 이번 작품은 일단 ‘변혁’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는 전작과의 연장선상에 서있지만, 정당과 선거라는 구체적인 정치행위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특별한데요.

하라 카즈오

질문에서 지적하시는 부분과 맞아떨어지는 신작을 만들게 된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우선은 ‘엠페러 시스템(the Emperor system)’입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일본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이미 제 전작인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지요. 아울러, 교육제도도 선거제도도 모두 결국 ‘엠페러 시스템’과 무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레이와 시대의 반란>의 주인공인 야스토미 아유미 씨의 생각과도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아직 영화를 만들기 전인 20대 초반 무렵에 받았던 전공투 운동의 영향에 대해서도 다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는데요. 당시 함께하고 있던 오가와 신스케 감독의 오가와 프로덕션이 산리즈카 문제, 바로 나리타국제공항 건설에 반대하던 농민들의 투쟁을 다룬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마을 주민 모두가 참여한 싸움이었는데, 그 중 젊은 사람들이 청년행동대를 만들어 왜 공항 건설에 반대하는지 밤새워 토론하는 긴 장면이 있었어요. 흑백영화의 야간장면이라 백열전구의 빛이 닿는 곳은 하얗게, 그렇지 못한 곳은 어둡게 비쳐졌죠.

그런데 대단히 기대했던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에서 졸음이 오더라고요. 토론의 내용이 귀에 안 들어오기 때문이었어요. 바로 그 순간‘나는 지적인 타입이 아니니 말에 의존하지 않는 영화를 만들자’고 결심했습니다. 다큐멘터리일지라도 액션으로 뭔가를 보여줄 만한 영화를 꼭 만들어보자고. 이런 생각을 가지고 감독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죠.

 

홍상현

역시(웃음). 그렇다면 성공하신 것 같습니다. 감독님의 작품에는 원래 의미 없는 대사가 길게 이어지는 장면이 전혀 등장하지 않을뿐더러, 이야기의 전개방식도 흥미진진하다 보니 늘 명시된 상영시간보다 영화가 훨씬 짧게 느껴지니까요.

하라 카즈오

하지만 액션만으로 구성된 영화를 만든다는 건 정말 쉽지가 않더라고요. (웃음) 그렇다 보니 한 편의 영화를 만들 때마다 말이 양이 늘어납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 내내 꺼림칙한 마음이 있었어요.

성소수자 지식인 야스토미 아유미 도쿄대 교수와 하라 카즈오 감독은 하라 감독이 운영하는 사설 영화교육기관 시네마학원의 유튜브 채널에서 만났다. 야스토미 교수의 참의원 선거 출마는 「레이와 시대의 반란」의 제작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c)FukyoFilms
성소수자 지식인 야스토미 아유미 도쿄대 교수와 하라 카즈오 감독은 하라 감독이 운영하는 사설 영화교육기관 시네마학원의 유튜브 채널에서 만났다. 야스토미 교수의 참의원 선거 출마는 「레이와 시대의 반란」의 제작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c)FukyoFilms

홍상현

말씀하신 내용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레이와 시대의 반란>은 말과 영상 사이의 균형감을 대단히 적절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하라 카즈오

그렇게 봐주셨다니 기쁩니다. 앞서 말씀드린 제 경향에 대해 고민하면서 <레이와 시대의 반란>에서는 도리어 ‘말을 정면에서 마주본다’는 결심을 굳혔거든요. 이제까지의 경향과 정 반대의 입장에 서있다는 점에서 <레이와 시대의 반란>은 제게 ‘모험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때로는 영상 이상의 효과를 내는 말의 중요성을 고려하더라도 말이죠.

 

홍상현

다음은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애초에는 한국영화에 출연하신 적도 있는 영화배우 출신 정치인 야마모토 타로 씨 아닐까 하고 예상했는데, 뜻밖에 야스토미 아유미라는 실로 매력적이고 독특한 인물이었습니다.

하라 카즈오

시마노 군과 의논한 끝에 시작했던 시네마학원 유튜브 채널이 계기였습니다.

초기에는 우리가 마음에 드는 영화의 감독을 게스트로 부르고는 했었는데요. 이후, 꼭 영화와 관련한 분들뿐만 아니라 그때그때 화제가 되고 있는 분들을 섭외하게 되었어요. 야스토미 씨는 그 두 번째였지요. 그래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던 참에 예전에 야스토미 씨자 자방선거에 출마했던 이야기가 나왔고, ‘더는 선거에 나갈 생각이 없다’는 대답으로 웃으면서 마무리되었거든요. 그리고 정확히 1년이 지난 시점에 야스토미 씨가 다시 그 화제를 꺼내면서 ‘감독님이 영화를 만들면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볼까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서둘러 크랭크인을 했지요. (웃음)

 

홍상현

원래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연출로 유명하십니다만, <레이와 시대의 반란>도 마치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연출을 하시면서 어떤 부분에 포인트를 두셨는지 궁금합니다.

하라 카즈오

<레이와 시대의 반란>의 경우는 인간의 감정을 심도 있게 그려낸다는 다큐멘터리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 집중했습니다.

언급하신, ‘다큐와 극영화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시도에 특히 신경을 쓴 건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 때였는데요. 영화가 완성되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상영을 하는데 한 중국 감독이 “이게 극영화인가요. 다큐멘터리인가요?”라고 묻더라고요.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도 같은 질문을 받았고요. 국제비평가연맹상을 수상했는데 트로피랑 같이 받은 편지에 적혀있었지요. (웃음)

제 대답은 일단 ‘인간의 감정을 심도 있게 그려간다’는 말과 ‘인간의 감정을 드라마틱하게 그려간다는 말’이 의미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다는 거예요.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띤다 하더라도 휴먼드라마만 제대로 그려낸다면 얼마든지 극영화처럼 보일 수 있다는 거죠. 저는 늘 이 지점에 방점을 둡니다.

다만, 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아무 때나 자기의 강한 감정을 드러내면서 사는 건 아니니까요. 그러니 기간을 할애해서 조금씩 감정을 폭발시키는 신을 찍어갈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레이와 시대의 반란>은 처음부터 선거운동 과정에서 영화를 만드는 게 조건이었기 때문에 제 방법론을 고집할 경우, 제때 완성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었어요.

하라 카즈오 감독은 완성된 작품의 길이를 상정해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이는 「레이와 시대의 반란」의 제작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라 감독은 1천 시간을 넘는 촬영분량을 9시간 정도로 붙인 뒤, 작업이 이루어질 때마다 대략 한 시간 분량을 압축하는 방식으로 편집을 진행했다. (c)FukyoFilms
하라 카즈오 감독은 완성된 작품의 길이를 상정해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이는 「레이와 시대의 반란」의 제작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라 감독은 1천 시간을 넘는 촬영분량을 9시간 정도로 붙인 뒤, 작업이 이루어질 때마다 대략 한 시간 분량을 압축하는 방식으로 편집을 진행했다. (c)FukyoFilms

홍상현

하긴 그렇겠네요. 촬영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제작기간 자체가 정해진 작품이었으니까요. (웃음)

하라 카즈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어요. (웃음) 의식적으로 야스토미 씨의 속마음을 작정하고 촬영하지는 않았는데, 도리어 등장인물들이 스스로의 감정을 몰아가는 거예요.

이를테면 야스토미 씨는 고향 인근의 유세장에서 연설을 하다 자기도 모르게 펑펑 울어버린다든가. (웃음) 아니, 감정을 몰아갔다기보다, 카메라에 그런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힘이 깃들어 있었을 지도 모르겠네요. 촬영기간이야 짧았지만 일단 총선출마 자체가 각 등장인물들의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잖아요. 굳이 연출을 하지 않아도 다들 극적인 상황에, 그것도 각자의 의지에 따라 뛰어들게 되었던 거니까.

 

홍상현

예컨대 싱글마더에 파견노동자인 와타나베 테루코 씨처럼 말이지요.

하라 카즈오

그렇습니다. 와타나베 씨는 유세 당시 어려웠던 시절 경험을 이야기하다가 말에 감정이 실렸죠. 저는 이 부분과 관련해서 어떤 디렉션도 한 일이 없는데 말이죠. 이렇듯 모든 등장인물들이 본인의 의지에 따라 감정을 표현하고, 이것이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어우러졌다는 점이 <레이와 시대의 반란>을 촬영하면서 가장 큰 재미를 느낀 부분이었습니다.

 

홍상현

<레이와 시대의 반란>은 관객을 최소 두 번 이상 놀라게 합니다. 일단은 248분이라는 러닝타임인데요. 스토리가 전개되는 가운데 주인공이 경력사기가 밝혀지는 전작 <전신소설가>도 157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실로 놀라운 길이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전혀 따분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는 건데요.

하라 카즈오

원래부터 완성된 작품의 길이를 상정해서 영화를 만들지 않습니다.

장면에 따라 복수의 카메라로 촬영한 것들이 몇 개 있고, 촬영분량이 1천 시간을 넘는다고 편집 스태프한테 들었는데요. 하나의 스토리에 맞춰서 붙여보니 9시간 정도가 되더군요. 이렇게 하나의 축이 형성된 것으로 보고, 불필요하다 생각되는 곳들을 잘라 나갔어요. 대충 한 번의 작업에 한 시간 정도씩 줄어들었는데요. 4시간 정도가 되니 이거면 충분하겠다 싶더군요. 더 편집을 하게 되면 반드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던 말들을 잘라내야 했거든요. 물론 상영시간이 4시간이나 되면 영화관 측이 부담스러워한다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야스토미 아유미 교수는 그 자신 최전선에서 극우파와 각을 세우는 한편, 일관되게 아동권익과 동물보호 또한 주장해왔다. (c)FukyoFilms
야스토미 아유미 교수는 그 자신 최전선에서 극우파와 각을 세우는 한편, 일관되게 아동권익과 동물보호 또한 주장해왔다. (c)FukyoFilms

홍상현

설정이라든가 자막을 통해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등 희극적인 감각도 돋보이고 있습니다. 하라 감독님이 원래 이렇게 유머러스한 분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요. (웃음)

하라 카즈오

평소 사람이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비극적인, 그리고 희극적인 양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어떤 일에 꽤 몰입을 해 있더라도 주변 사람들 눈에는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요. 편집을 하면서 이런 면이 도드라질 수 있도록 연출한 결과입니다.

 

홍상현

“레이와신센구미”라는 대안적 정치세력에 주목하는 것 외에 <레이와 시대의 반란>은 야스토미 교수와 동행하는 말,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희망의 토로에도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하라 카즈오

저는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패배했던 1945년에 태어났습니다. 일본에 민주주의가 들어온 해이기도 했죠. 따라서 어린 시절 받은 교육을 통해 민주주의를 몸으로 익힐 수 있었고요. 일본의 번영은 제가 민주주의를 익혀가는 시간과 맞물려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가 풍요의 시기에 접어든 이후부터 다시 부패가 시작되었죠. 어느 시대의 문명이나 마찬가지일 테지만요.

그렇게 사회적 풍요에 대한 비판과 함께 과연 일본인들 사이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려있는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하면서 저 또한 비슷한 회의를 갖게 되었어요. 제 영화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의 주인공 오쿠자키 씨처럼 내심 테러리즘으로 치닫는 것이 더 빠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 것도 이러한 흐름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선거라는 정치과정을 다룬 <레이와 시대의 반란>을 연출하면서 다시금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 어린 시절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세월을 살아낼 수 있었던 것 또한 민주주의의 가치관 때문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고요.

 

홍상현

아시아에서는 흔히 양립할 수 없는 가치의 예로 꼽는 경우가 많았던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에 관한 논의를 떠올리게 되는 말씀입니다.

하라 카즈오

저는 사회계층에 따라 분류하면 가장 아래쯤에 위치하는 사람으로 태어나 자랐습니다. 이른바 ‘기층’이라고 할까요. 이런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를 유지하는 권력에 맞서지 않는다면 결코 자유로워 질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제가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나 <전신소설가> 같은 작품들을 만들던 시대에는 ‘엠페러 시스템’에 시비를 거는 태도가 받아들여질 여유가 존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것들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방향으로 변모하게 되었지요.

예컨대 <센난 석면 피해 소송>이나 <미나마타 만다라>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기층의 사람들이 어떤 문제제기도 없이 매사 고분고분한 태도로 살아간다고 해 보죠. 사회가 변화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런 상황이 한참동안 이어졌던 겁니다. 그렇게 한 걸음 두 걸음씩 뒤로 물러서다 보니 어느덧 배수의 진을 쳐야 할 상황이 왔다는 거죠. 영화를 만드는 일은 사회에서 제가 어디쯤에 서있는지를 확인하는 의미를 갖습니다. 아울러 모든 가난한 이들이 보수화된 사회에 저항해 반란을 일으키자는 선동으로써의 의미 또한 담고 있고요.

하라 카즈오 감독은 말한다. “영화를 만드는 일은 사회에서 제가 어디쯤에 서있는지를 확인하는 의미를 갖습니다. 아울러 모든 가난한 이들이 보수화된 사회에 저항해 반란을 일으키자는 선동으로써의 의미 또한 담고 있고요.” (c)FukyoFilms
하라 카즈오 감독은 말한다. “영화를 만드는 일은 사회에서 제가 어디쯤에 서있는지를 확인하는 의미를 갖습니다. 아울러 모든 가난한 이들이 보수화된 사회에 저항해 반란을 일으키자는 선동으로써의 의미 또한 담고 있고요.” (c)FukyoFilms

홍상현

<레이와 시대의 반란>의 영문 타이틀에 굳이 ‘업라이징(uprising)’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이유와도 연결되는 내용인 같습니다.

하라 카즈오

저는 오늘날의 일본정치가 최악의 상황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지요. 그렇다 보니 정권교체 또한 쉽지 않고요. 저 같은 사람으로서는 정말 억울한 상황인데요. 제 고민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영화가 ‘무엇을 할 것인가’ 입니다. 영화인은 업계에서만 길러지는 게 아닙니다. 사회성원 전체가 노력하지 않으면 건강한 영화도 나올 수가 없거든요. 제가 제 작품을 통해 제 아무리 건강한 일본인을 그려낸다 하더라도 사회적 현실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리얼리티가 결여될 수밖에 없고요.

역으로 이 문제는 최근 한국영화가 보여주는 발전상과도 연결됩니다. 우리 모두 알고 있다시피 한국에서는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깨달은 순간, 수백만의 사람들이 떨쳐 일어났고, 그 결과 현실을 바꾸는 결과를 쟁취할 수 있었잖아요. 건강한 국민과 건강한 나라, 그 아래서 건강한 영화가 태어날 수 있는 거니까요.

「레이와 시대의 반란」은 입후보자 공모로 모인 루게릭병 환자 기타리스트, 뇌성마비 중증장애인, 노숙인 출신 파견노동자 등이 악전고투 끝에 비례에서만 228만 표를 넘는 지지를 획득, 두 개의 의석을 쟁취하는 정치실험의 과정을 박진감 있게 담아낸다. (c)FukyoFilms
「레이와 시대의 반란」은 입후보자 공모로 모인 루게릭병 환자 기타리스트(앞줄 왼쪽), 뇌성마비 중증장애인(앞줄 가운데), 노숙인 출신 파견노동자(앞줄 오른쪽) 등이 악전고투 끝에 비례에서만 228만 표를 넘는 지지를 획득, 두 개의 의석을 쟁취하는 정치실험의 과정을 박진감 있게 담아낸다. (c)FukyoFilms

“일본사회에서 살아가는 저로서는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일본영화는 한국영화에 뒤처져있죠. 분발해야합니다.

한국은 일본과 문화적으로 무척 비슷하면서도 다른 문화를 진 나라라는 생각에 한국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는 젊은이들과 대화할 기회를 마련해봤는데 정말 즐겁더군요. 다들 제대로 역사를 공부하고, 다큐멘터리 제작에 대한 기초를 쌓은 연후에 현장에 나오신 분들이었습니다. 반면, 일본은 그런 환경이 아니죠. 개인의 감성에 기대어 한 두 편의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지속가능한 전망을 내놓을 수 없지요. 게다가 일본사회는 영화를 문화로 평가하지 않는 폐쇄적인 면도 가지고 있습니다.

제 나이도 어느새 만 75세. 앞으로 몇 년을 더 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사회를 짓누르는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조금이라도 끊어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습니다. 열심히 영화를 만들어서 또 한국의 영화제에 오고 싶고요.”

 

2021년 1월의 마지막 지면을 장식할 거장과의 인터뷰는 당초의 예상과 무척 다른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우선, 생물학적 연령이 팔순을 바라보는 당신과의 대화에 각계의 대가들이 종종 쓰는 ‘왕년에 화법’이 단 한 번도 않았다는 것. 기사화를 위해 가장 많이 편집된 것은 인터뷰라기보다 다과회처럼 편안한 분위기의 인터뷰에서 필자와 시마노 프로듀서 사이에 오간 이야기들이었다. ‘배움이 일천하고 경험도 많지 않다’면서 줄곧 몸을 낮추던 하라 감독은 그 와중에서도 재치 있는 코멘트로 분위기를 흥미진진하게 이끌어가는 유쾌한 좌장의 역할을 해주었다.

다만, 무척 다양한 형태가 등장하지만 사실(fact)과 현실(reality)이라는 단어만큼은 결코 빠지지 않는 다큐멘터리영화의 정의를 떠올릴 때, 결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대목이 있었다. 예컨대 한국 관객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앞으로 몇 년을 더 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이라고 언급하던 부분. “차기작으로 2시간짜리 영화가 만들까 하는데, 다시 개인에 초점을 맞춘 내용이 될 것”이라는 언급과 더불어“같이 싸워가자는 목소리를 유언처럼 담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피력하는 하라 감독의 눈에 청년 같은 생기가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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