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한 친일파의 증거' 윤덕영의 호화별장 '강루정' 잔해를 찾아내다

  • 기자명 석지훈
  • 기사승인 2021.03.10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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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가장 악질적인 친일파 가운데 하나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의 숙부이기도 했던 윤덕영 (尹德榮, 1873 - 1940, 사진 1). 그는 경술년 한일병합조약의 실질적 책임자로서 합방 후 일제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자작 작위와 은사금을 받아 호의호식하고, 노년에 이르도록 일제의 정책을 찬양하고 지지하는 온갖 활동을 벌이다가 1940년에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사진 1. 희대의 친일파이자 순정효황후 윤씨의 숙부였던 윤덕영 (1873-1940).
사진 1. 희대의 친일파이자 순정효황후 윤씨의 숙부였던 윤덕영 (1873-1940).
사진 2. 2021년 1월 출간된 심은경 작가의 소설 '영원한 유산'. 윤덕영의 옛 저택이었던 옥인동 벽수산장을 둘러싸고 이야기가 전개된다.
사진 2. 2021년 1월 출간된 심은경 작가의 소설 '영원한 유산'. 윤덕영의 옛 저택이었던 옥인동 벽수산장을 둘러싸고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는 특히 명실공히 조선 최대의 서양식 저택이었던 서울 종로구 옥인동 47번지의 벽수산장(碧樹山莊)을 짓고 살았던 것으로도 유명한데, 최근에는 심윤경 작가의 소설 <영원한 유산>을 통해 이 저택에 대한 이야기가 더더욱 세간의 주목을 끈 바 있다 (사진 2). 하지만 윤덕영이 짓고 살았던 또 하나의 별장, 즉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교문리 (현재의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에 있었던 강루정(降樓亭)에 대해서는 그 동안 대중에게는 물론이고 학계에도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다.

 

필자는 그간 여러 기록에 단편적으로 남아있던 자료들을 토대로 202131일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아차산 산등성이에 위치하고 있는 옛 강루정 유적을 답사했다. 답사 당일은 비가 오는 악천후라 진흙탕 투성이었던 데다, 명확한 지도 없이 답사하다보니 곧바로 이 유적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40여분 간의 수색 끝에, 현존하는 강루정 건물의 일부와 각종 중요한 석물들을 확인했다.

 

강루정은 윤덕영이 환갑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해인 19325월에 처음 건립되었다. 윤덕영이 하필 이 곳에 별장을 지은 이유는 그다지 명확하지 않지만, 윤덕영의 먼 방계 후손으로 어린 시절에 강루정을 직접 보며 자란 윤평섭 전 삼육대학교 원예학과 교수가 1986년에 <한국정원학회지>에 투고한 글을 비롯한 여러 기록들이 있어 많은 참고가 된다. 그에 따르면 조용한 노후를 보내고 싶었던 윤덕영이 해평 윤씨 문중의 일족들이 많이 거주하고, 또 조상들의 선영이 자리잡은 이곳 교문동 아차산 동편의 능선에 별장을 건립하기로 마음먹고, 금곡 홍유릉의 능터를 잡았다는 당대의 유명한 지관(地官) 서규석(徐奎錫)을 시켜 일대의 적당한 땅을 골랐다고 한다. 이때 서규석은 윤덕영에게 이 땅이 "용이 구름을 타고 오르는 지세"를 갖춘 곳이라고 설명했고, 윤덕영은 이에 이 별장을 등룡동(登龍洞)이라고 명명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윤덕영은 19317월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교문리 380번지에서 383번지의 임야 및 대지 39,000여 평을 매입하고, 이 가운데 381번지 일대에 있던 양조장 건물을 허물어버리며 확보한 2,300여 평을 별장 터로 닦은 뒤 이 곳에 여러 채의 건물을 빠르게 지어 올렸다. 이때 이곳에 지어진 건물들은 1930년과 1931년에 민간에 매각되어 해체된 서울 종로 가회동 91번지의 완순군 이재완(完順君 李載完)의 사저를 이축한 것으로, 본래 1908-1909년 사이 운현궁에서 양관(洋館)을 짓기 위해 헐려 나온 건물들의 부재를 사용하여 지어진 것들이었다. 그리하여 19325월에 이르러 이곳의 별장 건물들은 모두 완성되었는데, 윤덕영은 이 별장의 안채를 강루정(降樓亭)이라고 명명하고, 안채보다 조금 낮은 곳에 지은 사랑채는 갑탁정(甲坼亭)이라고 명명하였다.

사진 3. 1986년 윤평섭 교수가 그린 구리 교문동 윤덕영 별장 강루정의 복원 배치도. 출처는 윤평섭, 「윤덕영의 별장 강루정」, 『대한정원학회지』 (5:1), 1986.
사진 3. 1986년 윤평섭 교수가 그린 구리 교문동 윤덕영 별장 강루정의 복원 배치도. 출처는 윤평섭, 「윤덕영의 별장 강루정」, 『대한정원학회지』 (5:1), 1986.

 

이곳 등룡동 별장 안에는 안채와 사랑채 이외에도 별도의 서실과 서재, 그리고 윤덕영이 별장에 없을 때 관리인(청지기)이 살 수 있도록 한 일종의 관리사, 윤덕영이 만주에 가서 사왔다고 하는 옥불(玉佛)을 모신 석제 좌대와 7층 석탑 등이 있었으며, 배나무와 노송, 반송, 감나무, 목련 등을 가득 심은 후원에는 돌로 만든 분수대와 세 개의 작은 연못, 그리고 네 개의 우물들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시설물들이 들어찼다고 한다. 현재 이 별장의 사진자료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지만, 당시의 배치 구조에 대해서는 역시 1986년에 윤평섭 교수가 그린 복원 배치도(사진 3)가 있어 참고가 된다.

사진 4. 충남 계룡산 갑사 부근에 새겨진 일중도 一中圖 석각. 1930년대 초반에 윤덕영이 부근에 또 다른 별장을 짓는 과정에서 새겨 넣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 촬영.
사진 4. 충남 계룡산 갑사 부근에 새겨진 일중도 一中圖 석각. 1930년대 초반에 윤덕영이 부근에 또 다른 별장을 짓는 과정에서 새겨 넣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 촬영.
사진 5. 1920년대 초 중국 상하이를 방문했던 윤덕영이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에게 받은 '윤집궐중 允執厥中' 휘호의 원본. 개인 소장.
사진 5. 1920년대 초 중국 상하이를 방문했던 윤덕영이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에게 받은 '윤집궐중 允執厥中' 휘호의 원본. 개인 소장.

 

이곳에 있었던 시설물 가운데 가장 특이한 것은 이른바 일중도(一中圖)라는, 도가 계열의 주술 도형을 본따 만든 연못인데, 이는 윤덕영이 1930년대 이후 홍만자회(紅卍字會) 등을 비롯한 각종 종교단체에 관여했던 흔적으로, 지금 계룡산 갑사 부근에 그가 새겨놓은 것으로 알려진 일중도 암각(사진 4)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또한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언덕에는1920년대에 윤덕영이 상하이에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아이신기오로 푸이 (宣統帝 愛新覺羅 溥儀)에게 받은 <윤집궐중允執厥中> 휘호 (사진 5)를 돌에 새긴 커다란 비석이 우뚝 서 있었다.

사진 6. 933년 6월 22일자 '조선신문'에 실린 윤덕영 별장 관련 보도. 윤덕영이 별장 인근 교문리 일대의 "무산아동" 20여명에게 강루정 별장의 서당에서 무료로 공부를 할 수 있게 했다는 내용이다.
사진 6. 933년 6월 22일자 '조선신문'에 실린 윤덕영 별장 관련 보도. 윤덕영이 별장 인근 교문리 일대의 "무산아동" 20여명에게 강루정 별장의 서당에서 무료로 공부를 할 수 있게 했다는 내용이다.
사진 7. 1940년 10월 26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윤덕영의 영결식 보도. 기사의 제일 마지막에 윤덕영의 "영구는 양주군 구리면 등룡동"으로 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진 7. 1940년 10월 26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윤덕영의 영결식 보도. 기사의 제일 마지막에 윤덕영의 "영구는 양주군 구리면 등룡동"으로 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윤덕영은 이후 1930년대 내내 자주 이곳을 찾았는데, 이곳에서 손님을 맞기도 했고, 또 여러가지 자선 사업 등을 벌이기도 했다. 한 예로 <조선신문> 1933622일자에는 윤덕영이 별장에 있는 서당에 교문리 일대에 살던 20여명의 "무산아동"을 데려와 무료로 공부를 시켰던 기록 (사진 6)이 남아있기도 하다. 그 후 윤덕영이 1940101867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그의 무덤이 자리잡은 곳도 바로 이 등룡동 강루정 뒷편이었다. (사진 7).

 

그러나 이미 1930년대 말 과소비와 사치 향락으로 기울어가던 윤덕영 일가의 가세는 윤덕영의 사망 후 급격히 기울어 갔고, 결국 해방 직전에 이르러 그의 양손(養孫) 이었던 윤강로(尹强老)는 옥인동 벽수산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재산을 매각해 팔아버리고 말았는데, 이때 매각된 자산에는 이 강루정 별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강루정은 6.25의 참화를 간신히 버텨냈지만, 주인 없는 집이 되어 계속해서 퇴락해가던 중, 1958년에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이 주인 없는 좋은 집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이를 매입한 뒤, 강원도 모처의 자기 소유의 별장 경내로 건물과 분수대만 뜯어가 버렸다. 이때 박흥식이 뜯어간 강루정 안채는 1970년대 말 다른 사람에게 매각된 이후 철거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1960년대 말에는 이 일대에 남아있던 윤덕영의 묘를 비롯한 해평 윤씨들의 무덤 대부분이 파주와 양주 등지로 이장되거나 파묘되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1970년과 1971년에는 강루정 정원과 후원이 자리잡았던 381번지의 임야가 둘로 쪼개져 절반은 서울삼육중고등학교의 교사 부지로,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통일교가 매입해 가면서 흔적이 없어졌다. 이때 삼육중고등학교 측에서는 운동장과 기타 시설물들을 만들기 위해 강루정 후원과 그 주변의 각종 석물 등을 불도저로 전부 밀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 별장의 존재는 그 후로 완벽하게 잊혀져, <구리시지> (1996)를 비롯한 향토사 서적은 물론 거의 어떤 책에도 다시는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

사진 8.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380번지 일대 도로 부근에 세워져 있는 "등룡동 입구" 표석. 2021년 3월 1일 필자 촬영.
사진 8.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380번지 일대 도로 부근에 세워져 있는 "등룡동 입구" 표석. 2021년 3월 1일 필자 촬영.
사진 9. 윤덕영의 등룡동 별장의 사랑채였던 갑탁정의 일부. 심하게 변형되어 원형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2021년 3월 1일 필자 촬영.
사진 9. 윤덕영의 등룡동 별장의 사랑채였던 갑탁정의 일부. 심하게 변형되어 원형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2021년 3월 1일 필자 촬영.
사진 10. 사랑채 주변에 있는 일영대 日影臺 (해시계 받침)와 기타 각종 석물의 잔해. 2021년 3월 1일 필자 촬영.
사진 10. 사랑채 주변에 있는 일영대 日影臺 (해시계 받침)와 기타 각종 석물의 잔해. 2021년 3월 1일 필자 촬영.
사진 11. 사랑채 앞 수돗가에 쓰러져 빨래판 구실을 하고 있는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의 휘호 '윤집궐중 允執厥中' 휘호 석각 석비. 2021년 3월 1일 필자 촬영.
사진 11. 사랑채 앞 수돗가에 쓰러져 빨래판 구실을 하고 있는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의 휘호 '윤집궐중 允執厥中' 휘호 석각 석비. 2021년 3월 1일 필자 촬영.

 

2021년 현재 이곳 교문동 야산 일대에 남아있는 강루정의 흔적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그래도 그 전반적인 규모를 짐작해볼 수는 있다. 먼저 등룡동 별장의 입구 부근에는 별장 지대의 시작을 알리는 "등룡동(입구)" 표석 (사진 8)이 다소 비뚤어졌지만 아직도 여전히 서 있으며, 비록 심하게 변형되어 원형을 확인하기도 곤란하지만 이 별장의 사랑채였던 갑탁정과 그 부속 건물 일부가 개조, 개축된 채로 개인 주택이 되어 남아있다. (사진 9). 슬레이트 지붕에 시멘트를 덕지덕지 바른 벽 사이로, 누마루가 계곡을 바라보며 경쾌하게 앉아있던 흔적과 전형적인 한식 중정형 가옥의 형태를 간신히 알아볼 수 있다. 이 사랑채 건물의 문 앞에는 해시계를 놓던 일영대(日影臺)를 비롯한 각종 석물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사진 10) 또 이 사랑채 건물과 그 옆의 증축된 부속채 사이에 만들어진 수돗가에는 선통제 푸이의 휘호를 새긴 비석이 쓰러져있는데 (사진 11), 지금은 이들 주택의 수돗가 빨래판으로 쓰이고 있어 다소 아쉬울 따름이다.

사진 12. 강루정 옆에 조성되었던 곡수정 曲水井. 이 별장의 정원 시설로 현재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자취이다. 2021년 3월 1일 필자 촬영.
사진 12. 강루정 옆에 조성되었던 곡수정 曲水井. 이 별장의 정원 시설로 현재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자취이다. 2021년 3월 1일 필자 촬영.
사진 13. 강루정 일대 건너편 야산에 버려져 있는 옛 묘지의 석물들. 1970년대에 파묘된 해풍 윤씨 일가 무덤들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2021년 3월 1일 필자 촬영.
사진 13. 강루정 일대 건너편 야산에 버려져 있는 옛 묘지의 석물들. 1970년대에 파묘된 해풍 윤씨 일가 무덤들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2021년 3월 1일 필자 촬영.

 

한편 이보다 위쪽, 돌과 시멘트로 쌓은 축대로 구분된 옛 강루정 안채 터에는 현재 <바람이 분다>라는 이름의 가든형 레스토랑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 한쪽 구석에는 당시 이 내부에 조성된 정원시설로 유일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남아있는 곡수정(曲水井)이 있다. (사진 12). 한편 강루정 대지를 돌아나와 작은 계곡 건너편에 있는 삼육중고등학교 후문 진입로 쪽으로 오면, 옛 해평 윤씨들의 무덤들에서 버려진 것이 확연한 목 부러진 석인상과 파괴된 비석의 잔해 등이 (사진 13) 남아있다. 삼육중고등학교 경내에도 강루정 정원의 일부로 조성된 석물의 잔해와 식수 저장용으로 만들어진 연못 하나가 더 남아있다고 하나, 이번 답사에서는 출입문이 닫혀있어 명확하게 확인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지난 60여년 넘는 세월 동안 완전히 잊혀져버린 옛 집의 유허를 필자 스스로 고증하여 다시 찾아낸 것은 무척 뿌듯한 일이었다. 비록 악질 친일파의 호의호식을 위해 지어진 건물의 잔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파괴된 잔해라도 수습해서 친일파의 몰락과 말로를 보여주는 산 증거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경내에 아무렇게나 방치되며 마모되어가고 있는 푸이의 친필휘호 석각 비석 역시 엄연히 동아시아 근대사의 질곡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구리시청 등지에서 마땅히 수습해 보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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