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이 유우, 40년대 '스파이의 아내'가 되다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21.03.30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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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으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부문에 초청되었던 「스파이의 아내」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이례적인 시대극이다. (C)2020 Wife of a Spy Film Partners
베니스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으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부문에 초청되었던 「스파이의 아내」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이례적인 시대극이다. (C)2020 Wife of a Spy Film Partners

처음엔 좀 의아스러웠다.

칸영화제에서만 세 번에 걸친 수상경력을 가진 구로사와 기요시가, 이제 와 왜 새삼스럽게 그간 도전해본 적 없는 시대극을 연출했는지.

그러나 상영관의 불이 꺼지고 2004년 <하나와 앨리스> 이후 출연작이 대부분 한국에 소개되어 이제는 결혼소식 등의 사생활 관련 기사까지 아무렇지 않게 국내매체에 보도될 정도로 친근한 배우, 아오이 유우가, 1950년대 우리영화의 고전 <자유부인>의 오선영(김정림 분)을 연상시키는 ‘고색창연한 말투’의 히로인으로 등장한지 대략 10분쯤 지나고 나니 알 수 있었다. 60대 중반을 넘긴 거장감독과 올해 데뷔 22주년을 맞는 롱런스타가 손을 잡은 이 작품이, 왜 그들에게 ‘새로운 분수령’으로 자리매김 할 수밖에 없는지.

코로나 19 사태가 맹위를 떨치던 와중에 어렵사리 개최된 지난해 말 부산국제영화제를 거쳐 이달 25일 개봉한 <스파이의 아내>가 필자에게 떠올리게 하는 것은 영국이 청교도혁명과 공화정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던 시절 산문(prose)에 대한 논쟁으로 20년을 보내며 깊은 상처를 받은 밀턴이 원죄의 문제에 천착해 쌓아올린 세계문학의 금자탑 『실락원』이다. 

칸영화제 3회 수상경력에 빛나는 기요시 감독은 2001년 「인간 합격」이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되면서 한국관객과 처음 만나 폭넓은 스펙트럼의 작품들로 사랑받아왔다. (C)2020 Wife of a Spy Film Partners
칸영화제 3회 수상경력에 빛나는 기요시 감독은 2001년 「인간 합격」이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되면서 한국관객과 처음 만나 폭넓은 스펙트럼의 작품들로 사랑받아왔다. (C)2020 Wife of a Spy Film Partners

천지창조의 과정에서 모습을 숨기고 있던 사탄이 뱀의 형상으로 낙원에 잠입, 감언이설로 하와를 꼬여 선악과 열매를 베어 물게 한다. 그리고 하와는 다시 아담을 ‘죄’와 ‘죽음’을 부르는 유혹의 연쇄에 끌어들인다. 끝내 대천사 미카엘에게 끌려올라간 산 위에서 인간계의 불행을 파노라마로 확인하게 되는 두 사람. 하지만 이와 더불어 언젠가 세상에 올 그리스도가 스스로 십자가에 매달림으로써 인류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희망 또한 배우게 된다. 그렇게 신의 자비에 감사하고 사랑과 근신을 서약하며 기꺼이 자신들의 길을 가게 된다는 내용의 대서사시.

이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을 창세기에서 태평양전쟁 직전인 1940년으로 바꾸고, “‘죄’와 ‘죽음’을 부르는 유혹의 연쇄”는 “진실과 정의를 포기하지 못하는 양심”으로 뒤집어보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얽히고설킨 애정과 신념을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로 완성했다”고 호평 받은 <스파이의 아내>를 좀 더 보편적으로 읽을 수 있다.

아름다운 아내 사토코(아오이 유우 분)와 행복하게 살던 고베의 무역상 유사쿠(타카하시 잇세이 분)는 사업 차 만주에 갔다가 군국주의자들의 만행을 목격 하고, 이를 국제사회에 알리기로 결심한다. 사토코는 이 폭로가 자신들의 가정을 위협할 것이라는 예감에 유사쿠를 말려보지만 끝내 대의에 동참해 기꺼이 ‘스파이의 아내’가 되기로 한다.

2001년 <인간 합격>이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이래, 폭넓은 스펙트럼의 작품들로 한국의 관객과 평단 모두에게 폭넓게 사랑받아왔으며, 지난해에는 광기의 역사에 대한 반성을 담은 화제작 <스파이의 아내>로 베니스국제영화제 감독상을 거머쥔 구로사와 감독을 만났다.

장담컨대 영화가 시작된 지 대략 10분쯤 지나고 나면 알 수 있다. 60대 중반을 넘긴 거장감독과 올해 데뷔 22주년을 맞는 롱런스타가 손을 잡은 이 작품이, 왜 그들에게 ‘새로운 분수령’으로 자리매김 할 수밖에 없는지. (C)2020 Wife of a Spy Film Partners
장담컨대 영화가 시작된 지 대략 10분쯤 지나고 나면 알 수 있다. 60대 중반을 넘긴 거장감독과 올해 데뷔 22주년을 맞는 롱런스타가 손을 잡은 이 작품이, 왜 그들에게 ‘새로운 분수령’으로 자리매김 할 수밖에 없는지. (C)2020 Wife of a Spy Film Partners

홍상현

2017년 <속죄>가 아시아영화의 창 부문에 초청된 이래, 매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참가하고 계십니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는 코로나 19 사태로 세계가 고통 받는 가운데 개최되다보니 더욱 감회가 특별하실 것 같은데요.

구로사와 기요시

부산을 비롯한 해외의 훌륭한 영화제에 초대받는 것은 제가 영화를 찍음으로써 누릴 수 있는 큰 기쁨의 하나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무대는 작품이 일본에서 잠깐 히트를 쳤다든가, 누군가에게 칭찬을 좀 받았다든가 하는 것을 훨씬 웃도는, 참으로 신나는 경험이지요. 그런데 이게 코로나 19 사태로 완전히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어요. 하지만 다행히 작품은 바다를 건너 그 나라에 전해지니 비록 저는 가지 못하더라도 작품이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대변해 주고 있다고 할까요. 현재로서는 그저 이 사실만을 마음으로 의지하면서 물리적으로 멀어진 부산을 떠올리고 있을 뿐입니다.

 

홍상현

특히 한국에서의 지지가 전폭적인 것으로 유명합니다. 일반관객과 영화인 모두에게 폭넓게 사랑받고 계시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구로사와 기요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크나큰 영광이고, 격려가 됩니다.

제가 제 작품을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작가주의 영화와 장르 영화의 딱 중간쯤에 해당하는 작품을 찍어 온 게 제 필모그래피의 한 가지 특징이라는 점이죠. 그런데 한국엔 그런 분들이 많이 계시는 거 같아요. 예컨대 박찬욱 감독님이나 봉준호 감독님처럼.

예전엔 일본에도 <피스톨 오페라>의 스즈키 세이준이나 <붉은 모란> 시리즈의 카토 타이처럼 한국의 두 분과 비슷한 감독들이 있었는데 현재는 그 수가 많지 않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상대적으로 제가 이러한 포지션에서 만들어내는 작품의 특성이 한국 관객 여러분께 다른 현대 일본영화에 비해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본인이 생각하는 「스파이의 아내」의 베니스국제영화제 수상요인에 대해 “비슷한 시대적ㆍ공간적 배경을 가진 것들 중에 이 작품처럼 서스펜스나 멜로드라마 같은 장르성을 갖춘 사례가 거의 없었다”고 언급하면서 겸허한 태도를 보였다. (C)2020 Wife of a Spy Film Partners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본인이 생각하는 「스파이의 아내」의 베니스국제영화제 수상요인에 대해 “비슷한 시대적ㆍ공간적 배경을 가진 것들 중에 이 작품처럼 서스펜스나 멜로드라마 같은 장르성을 갖춘 사례가 거의 없었다”고 언급하면서 겸허한 태도를 보였다. (C)2020 Wife of a Spy Film Partners

홍상현

인터뷰 항례의 질문입니다. 평소 좋아하시는 한국영화 작품, 감독, 또는 배우가 있으신지요. 또, 최근의 한국영화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구로사와 기요시

최근 들어 영화 자체를 거의 보지 못해서 죄송한 마음이 드는데요. 물론 <기생충>은 봤습니다만. (웃음)

한국영화가 뛰어날 수 있는 포인트 중 하나는 로케이션(location)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가 ‘이 장소는 영화적이다’ 혹은 ‘여기서 찍으면 절대로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작품에서 아주 선명하게 느껴지거든요. 그런 작품은 걸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드는 장소를 우리 손으로 만든다’는 게 얼마나 행복하고도 이상적인 시스템인가요.

 

홍상현

특히 이번 초청작 <스파이의 아내>는 세계 4대 영화제의 하나인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화제작입니다. 감독님 본인께서 생각하시는 수상요인이 궁금한데요.

구로사와 기요시

비슷한 시대적ㆍ공간적 배경을 가진 것들 중에 이 작품처럼 서스펜스나 멜로드라마 같은 장르성을 갖춘 사례가 거의 없었기 때문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 점이 베니스에서 진기한 사례로 평가받은 거 아닐까 싶어요.

「스파이의 아내」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엔딩의 결론이 무척 명확하다. 시대적ㆍ공간적 배경인 1940년대 일본에 대한 역사적 판단이 명확하게 내려져 있기 때문이다. (C)2020 Wife of a Spy Film Partners
「스파이의 아내」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엔딩의 결론이 무척 명확하다. 시대적ㆍ공간적 배경인 1940년대 일본에 대한 역사적 판단이 명확하게 내려져 있기 때문이다. (C)2020 Wife of a Spy Film Partners

홍상현

감독님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노라면 시대적 문제의식을 다양한 장르를 통해 폭넓게 표현하는 작풍이 돋보입니다. 그런데, <스파이의 아내>의 경우, 그 중에서도 드문 시대극인데요. 2020년의 오늘, 80년 전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을 기획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구로사와 기요시

제가 지금껏 만들어온 영화들은 대부분 현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합니다. 또, 엔딩에서의 결론이 애매하게 비쳐질 수 있는 것들이 많았지요. 주인공의 행동이 과연 올발랐는가, 행복했는가, 이런 것에 대한 판단이 현대에서는 쉽게 내려지기 어려우니까요. 이렇다 보니 그리 멀지 않은 과거를 배경으로,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한 역사적 판단이 이미 나와 있는 상황 하에서 드라마를 만든다면 엔딩의 결론 또한 이제까지보다 훨씬 명확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실현될 기회를 꽤 오래전부터 기다려 왔어요. 하지만 사극이라는 게 워낙 많은 예산을 필요로 하다 보니 좀처럼 기획이 실현되지 못했는데, 이번에 겨우 기회가 주어진 거지요.

 

홍상현

<스파이의 아내>는 스릴러로써의 재미도 뛰어나지만 변화하는 시대상의 속에서 혼란을 경험하는 인간, 그리고 갈등하고 대립하는 가치관을 깊이 있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감독님의 전작인 <밝은 미래>, <도쿄 소나타> 등과도 같은 맥락에 서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구로사와 기요시

물론 이 영화는 스릴러이자 서스펜스, 그리고 멜로드라마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쟁이라는 아주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어요. 등장인물은 이 무거운 주제 앞에서 혼란을 느끼기도 하고, 길을 잘못 들기도 합니다. 다만, 앞의 질문에 답하면서 언급해드린 것처럼, 만드는 이들은 오늘날의 시대에서 무엇이 올바르고, 또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 역사적 평가를 거의 객관적으로 전제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 <스파이의 아내>는 아마 <밝은 미래>나 <도쿄 소나타>보다 훨씬 쉽고 장르성도 명확해서 지금까지 제가 발표한 작품 가운데서 일반관객으로서는 가장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고베의 무역상 유사쿠는 사업 차 만주에 갔다가 군국주의자들의 만행을 목격 하고, 이를 국제사회에 알리기로 결심한다. 사토코는 남편의 폭로가 자신들의 가정을 위협할 것이라는 예감에 유사쿠를 말려보지만 끝내 대의에 동참해 기꺼이‘스파이의 아내’가 되기로 한다. (C)2020 Wife of a Spy Film Partners
고베의 무역상 유사쿠는 사업 차 만주에 갔다가 군국주의자들의 만행을 목격 하고, 이를 국제사회에 알리기로 결심한다. 사토코는 남편의 폭로가 자신들의 가정을 위협할 것이라는 예감에 유사쿠를 말려보지만 끝내 대의에 동참해 기꺼이‘스파이의 아내’가 되기로 한다. (C)2020 Wife of a Spy Film Partners

홍상현

특히 이번 작품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활약하셨고, 한국 관객들에게는 <아사코>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과 같이 각본을 쓰셨습니다. 일견, 감독님과는 조금 다른 컬러의 인물인데 공동 작업은 어떠셨나요.

구로사와 기요시

애초에 <스파이의 아내>의 원안을 낸 사람은 제가 아니라 하마구치 류스케와 노하라 타다시, 두 사람이었습니다.

이 둘은 몇 년 전에 <해피아워>라는 영화에서 각각 감독과 공동각본을 맡았어요. 그리고 제가 도쿄예술대학 영상연구과에서 가르친 학생들이기도 합니다. 시나리오 초고를 쓴 것도 그들이고. 이후 80퍼센트 이상이 그들의 작업을 통해 만들어졌어요. 등장인물들의 긴 대사가 어딘가 <해피아워>를 떠올리게 하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하마구치와 노하라는 언젠가 제가 잡담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어보고 싶다’고 말한 걸 기억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저가 했던 역할은 지나치게 길다 싶은 대사를 조금 쳐 낸 정도였어요.

 

홍상현

한국에도 팬이 많은 아오이 유우 배우의 연기가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초반에는 전형적인 행복하고 유복한 가정의 사모님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스토리가 전개될수록 불안과 갈등 등을 뛰어나게 표현하는 내면연기로 관객을 몰입시키는데요. 특히 결말부에서의 경우 지금까지 좀처럼 느껴볼 수 없었던 강렬한 캐릭터 변신을 보여주고요. 이런 흐름 속에서 아오이 배우에게 어떤 디렉션을 하셨는지요.

구로사와 기요시

아오이 배우와 같이 일하는 건 이번이 3번째입니다. 저는 그의 천재적인 연기능력을 100%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에 제가 딱히 디렉션을 한 것은 없어요. 다만, 대사의 어조가 1940ㆍ50년대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같은 느낌으로 되어있다는데 대해서는 작업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함께 확인을 해두었습니다. 그나마도 아오이 배우가 당시 작품들을 자주 보고 있어 쉽게 이해할 수 있던 까닭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요.

한국에도 공개된 「9월의 사랑과 만날 때까지」, 「억남」, 「하늘을 나는 타이어」 등에 출연하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다카하시 잇세이 배우(사진 왼쪽)는 “40세를 전후한 일본의 남성 영화연기자들 가운데 가장 연기를 잘 하는 사람”으로 꼽힌다. (C)2020 Wife of a Spy Film Partners
한국에도 공개된 「9월의 사랑과 만날 때까지」, 「억남」, 「하늘을 나는 타이어」 등에 출연하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다카하시 잇세이 배우(사진 왼쪽)는 “40세를 전후한 일본의 남성 영화연기자들 가운데 가장 연기를 잘 하는 사람”으로 꼽힌다. (C)2020 Wife of a Spy Film Partners

홍상현

한국에도 공개된 <9월의 사랑과 만날 때까지>, <억남>, <하늘을 나는 타이어> 등에 출연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다카하시 잇세이 배우의 모습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군국주의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폭로하려 하는 유사쿠로 분했는데요. 그의 연기변신은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는지요.

구로사와 기요시

다카하시 배우와 일해 본 건 처음입니다만, 40세를 전후한 일본의 남성 영화연기자들 가운데 가장 연기를 잘 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관계자가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정도이다 보니, 저도 이전부터 같이 작업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유사쿠라는 사토코에게도 관객에게도 그 정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사내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데 고도의 연기력이 필요했으니까요. 아울러, 이 캐릭터 역시 1940ㆍ50년대식의 장황한 어법을 구사하다 보니 당시의 고전영화를 많이 접하고 있는 상황이어야 했지요. 이런 제 요구조건에 부응해서 타카하시 배우는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홍상현

아오이 배우와 다카하시 배우의 케미스트리가 대단히 뛰어납니다. 역시 연출의 성공이었던 건가요.

구로사와 기요시

아닙니다. (웃음) 모두 배우들의 역량으로 이뤄낸 결과였어요. 연기력도 그렇지만 이 어려운 각본을 이론적으로, 그리고 직감적으로 이해해 준 두 사람의 그 능력이 보신바와 같은 연기를 만들어낸 겁니다.

2018년 작 「오버 드라이브」 이후 2년 만에 한국 개봉작에서 모습을 보인 히가시데 마사히로 배우(사진 오른쪽).  「스파이의 아내」에서는 사토코에 대한 감정으로 혼란스러워하는 ‘입체적인 악역 캐릭터’로 분했다. (C)2020 Wife of a Spy Film Partners
2018년 작 「오버 드라이브」 이후 2년 만에 한국 개봉작에서 모습을 보인 히가시데 마사히로 배우(사진 오른쪽). 「스파이의 아내」에서는 사토코에 대한 감정으로 혼란스러워하는 ‘입체적인 악역 캐릭터’로 분했다. (C)2020 Wife of a Spy Film Partners

홍상현

<아사코>, <국화와 단두대> 등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했던 히가시데 마사히로 배우가 이번에는 악역 캐릭터로 등장합니다. 다만, 전형적인 악인이라기보다 초기 사토코에 대한 감정으로 혼란스러워하는 입체적인 캐릭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구로사와 기요시

히가시데 배우와는 벌써 네 작품 째인데요. 저는 그의 악인인지 선인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이상하리만치 탁한 캐릭터를 너무 좋아합니다. 당연히 연기력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타고난 개성과 재능이 그런 독특한 인물상을 만들어 내는 거 아닐까 싶어요. <스파이의 아내>에서도 다면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타이지 역으로 애초부터 그를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도 워낙 ‘공부하는 연기자’이다 보니 이미 고전영화들을 많이 섭렵하고 있던 상대라 영화에서 가장 까다로운 부분인 1940ㆍ50년대 말투를 소화하는 데도 크게 무리가 없었습니다.

 

홍상현

<스파이의 아내>는 스릴러입니다만, 자극적인 장면을 나열하기보다는 배우의 표정이나 뒷모습, 묵음 등의 우회적인 표현을 통해 긴장감을 극대화시키는 효과적인 연출을 하고 있습니다. 감독님께서 애초부터 의도하셨던 방향인가요.

구로사와 기요시

그렇습니다. 지적하신 바대로 피사체를 직접 비쳐주지 않고 다른 무언가를 통해 암시해서 관객의 상상력에 호소하는 방식은 제가 그동안 호러나 스릴러, 서스펜스 등의 장르를 연출하면서 오랜 동안 연습해 온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홍상현

<스파이이 아내>를 보는 재미는 타이틀의 의외성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처럼 꽃으로서, 늘 웃고, 상냥하며 기다리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였던 사토코가 갈등하고, 고민하면서 점점 능동적으로 변해간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구로사와 기요시

대단히 재미있는 지적입니다.

<나비부인>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어느 시대의 인간이나 사정은 다를지라도 똑같이 고민하고 갈등하며, 행복이나 이상을 찾아 한 발짝이라도 앞서 나가려고 한다는 사실이죠. 사토코도 마찬가지입니다.

1940년의 사회정세나 정치체제는 지금과 전혀 달랐지만 인간의 본질은 지금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 점은 남편인 유사쿠나 헌병인 타이지의 캐릭터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겁니다. 그 시대, 그 사회를 어떻게 살아가갈 것인지 고민하고, 몇 가지 모순을 반복하며 내린 결론은 다 제각각이겠지만 머잖아 일본은 패전하고 시대가 바뀌면서 새로운 절망, 내지는 희망이 태어났겠죠. 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자막으로 제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도 이러한 역사의 변천 속에 사토코가 찾아냈을 희망이었습니다.

「스파이이 아내」를 보는 재미는 타이틀의 의외성에도 있다. 애초에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처럼 꽃으로서, 늘 웃고, 상냥하며 기다리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였던 사토코가 갈등하고, 고민하면서 점점 능동적으로 변해간다. (C)2020 Wife of a Spy Film Partners
「스파이이 아내」를 보는 재미는 타이틀의 의외성에도 있다. 애초에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처럼 꽃으로서, 늘 웃고, 상냥하며 기다리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였던 사토코가 갈등하고, 고민하면서 점점 능동적으로 변해간다. (C)2020 Wife of a Spy Film Partners

“처음으로 역사드라마에 도전해 봤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암운에 휩싸여있던 1940년 일본을 무대로 한 서스펜스이자 멜로드라마인데요. 어둡고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지만 일단은 오락영화의 느낌으로 접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고조되는 시대적 긴장 속에 사회 밖으로 뛰쳐나간 자, 사회에 집어삼켜진 자, 사회 안에 머물러 삼켜지지 않고 스스로를 관철한 자, 이들 가운데 과연 누가 옳았고, 누가 가장 행복했는지를 생각해본다는 건 대단히 어려운 문제죠. 비단 저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이와 같은 주제에 대한 고민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호러(<은판 위의 여인>)를 비롯해 외계인의 지구침략을 다룬 SF(<산책하는 침략자>)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는 한편, 글로벌 금융위기에 맞물려 고통 받는 평범한 노동자의 삶 또한 다루며(<도쿄 소나타>) 시대에 대해 발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대가가 한국 관객들을 위해 특별히 전한 코멘트는 생각보다 쉽고 부드러웠다. 하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램 어드바이저 시절 만난 그의 한국인 제자(도쿄예술대학)도 대학시절부터 8밀리 영화 동아리를 결성, 뉴웨이브의 기수로 활약해온 이력이 풍기는 인상과 달리, “행여 대선배의 권위를 과시하는 인상을 주지 않을까 끊임없이 스스로를 성찰하는 자상한 선생님”이라 평하지 않았던가.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치열히 다루되, 가장 평범한 관객의 시선을 소중히 생각하는 그와 특별한 대화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었다는 것이 새삼 기쁘게 느껴졌다. (※ 3월 2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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