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혈의 고통’을 받아들였다...꿈을 꾸기 시작했다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21.06.15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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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도쿄국제영화제,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호평 받은 장지위 감독의 장편독립영화 데뷔작 「짱개」는 단순한 성장영화를 뛰어넘어 특별한 휴먼드라마의 단계에 올라서는 성취를 보여준다. 사진제공: 2021 전주국제영화제
지난해 도쿄국제영화제,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호평 받은 장지위 감독의 장편독립영화 데뷔작 「짱개」는 단순한 성장영화를 뛰어넘어 특별한 휴먼드라마의 단계에 올라서는 성취를 보여준다. 사진제공: 2021 전주국제영화제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으로 가보자.

2월 2일 관악산에서 소수의 아군이 중공군 정예부대와 맞붙었다. 선두의 병사가 눈에 띤다. 그는 1950년 12월 중공군이 남하했다는 정보를 목숨 걸고 얻어낸 전공이 있었다. 전투는 전원 한국어와 중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와 47명의 동료들이 중공군으로 위장, 적진지를 파괴하다 신분이 노출되면서 벌어졌다. 실탄이 바닥났음에도 개머리판을 휘두르며 저항하던 그는 결국 적의 총탄에 스러진다. 만 스물여섯. 1950년 10월 한국군 지휘관을 제 발로 찾아가 총을 든 ‘중국집 청년’이었다.

함께 사선을 넘나들던 또한 명의 병사가 생사의 기로에 선 것은 1951년 4월. 적진에 침투해 포격유도용 깃발을 게양하는 ‘자살’에 가까운 작전에 투입되었다. 임무완수는 물론 주어진 세 명의 적군까지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박격포 파편에 치명상을 입은 그는 네 시간 여의 수술 끝에 목숨을 건진다. 역시 자원병 출신으로 전쟁이 끝난 뒤에는 한의사가 되어 죽는 날까지 극빈층 무료진료와 장학 사업에 헌신했다.

이상은 은성화랑무공훈장과 금성화랑무공훈장을 받은 강혜림과 위서방의 기록이다. 국립 서울 현충원에 있는 두 묘비의 이름 앞에는 소속과 계급 대신 다음 네 글자가 적혀있다.

“종군화교(從軍華僑)”

국립 서울 현충원에 묻혀있는 단 두 사람의 아시아계 외국인 순국선열. 이들은 서류상 모국인 대만에 평생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보니 영화를 전공하느라 뒤늦게 입대했을 당시, 강원도 화천 15사단 신병교육대에서 만난 동료도 국민대 재학 중 자원한 한국 화교였다.

한국인 어머니, 대만인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인종차별 정책이 맹위를 떨치던 남아공의 프리토리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장지위 감독은 신인답지 않은 중량감으로 성공적인 신고식을 치러냈다. 사진제공: 장지위 감독
한국인 어머니, 대만인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인종차별 정책이 맹위를 떨치던 남아공의 프리토리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장지위 감독은 신인답지 않은 중량감으로 성공적인 신고식을 치러냈다. 사진제공: 장지위 감독

현재로 돌아와 인터넷 창을 열어보자.

“유경”을 중국어로 발음한 “요찡”이라는 이름의 한국인 “대만 유학러”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19만 4천 명에 달하는 대만인 구독자를 거느린 그가 타이베이 코리아타운을 찾는다. 한국슈퍼, 한국음식점, 한국카페, 마주치는 상인의 상당수는 한국 출신이지만 ‘교민이냐’고 물으면 ‘한화(韓華)’ 즉, 한국 화교라는 답이 돌아올 테다. “화교”라는 명칭에 굳이 ‘한’ 자를 붙이는 정체성 규정. 요즘 한국에서 잘 쓰는 표현으로는 ‘K-화교’다. 문득 LA에서 가보았던 자장면집의 기억이 떠오른다. ‘서울분이시냐’며 필자를 반기던 한국인 주인장은 알고 보니 용산구 출신의 화교 3세였다. 오래전 서울을 떠나왔음에도 코리아타운 언저리에 자리 잡고 사는 화교학교 동문들과 ‘동네 말(한국말)’로 대화하던 그의 점심메뉴는 두부찌개였다. 서른이 넘어서야 처음 대만에 갔는데 택시기사로부터 “억양이 딱 한국 사람인데 왜 자꾸 아니라고 우기냐”는 소리를 들었다며 껄껄 웃었다.

지난 5월 2일. ‘외국인이지만 외국인이 아닌’ 이들을 대하던 순간의, 이 묘한 느낌을 상기시키는 작품을 만났다. 한국인 어머니와 대만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장지위 감독의 장편독립영화 데뷔작 <짱개>, 지난해 도쿄국제영화제,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화제를 모은 한국ㆍ대만 공동제작 영화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한국인 어머니와 화교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광용(허예원 분)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짱개’라는 별명이 따라다녔지만 엄격한 아버지와 달리 온화하고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 덕에 무난하게 지내올 수 있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화교학교에서 공립학교로 전학을 오면서 ‘일진’들의 차별과 괴롭힘을 받게 되기 전까지는. 난국을 타개할 유일한 방법은 미국으로의 교환학생 선발뿐이지만 여기에도 장애물이 놓여있다. 여권상의 모국인 대만에 입국할 때조차 비자가 필요한 국제고아 신세가 초청의 결격사유로 작용해서다. 광용은 어머니의 나라와 아버지의 나라 사이에서 그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본 지면 최초로 한국어로 진행된 이번 인터뷰의 도입부에서 이처럼 몇 가지 화두만을 던져놓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본편’이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

“날을 세워 비판을 가한다든가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의도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저, 적지 않은 한국 화교들의 삶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또한 경험해온 불평등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고 싶었을 따름이에요. 해서, 모두가 서로를 좀 더 이해하고, 가능하면 한국 화교들의 어려운 상황에 관심 또한 가져주시기를 바란 겁니다.”장지위 감독의 말이다. 사진제공: 2021 전주국제영화제
“날을 세워 비판을 가한다든가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의도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저, 적지 않은 한국 화교들의 삶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또한 경험해온 불평등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고 싶었을 따름이에요. 해서, 모두가 서로를 좀 더 이해하고, 가능하면 한국 화교들의 어려운 상황에 관심 또한 가져주시기를 바란 겁니다.” 장지위 감독의 말이다. 사진제공: 2021 전주국제영화제

홍상현

데뷔작으로 지난해와 올해, 아시아를 대표하는 두 영화제(도쿄국제영화제ㆍ전주국제영화제)를 섭렵하셨습니다.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요.

장지위

초청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리고요. 대단한 영광입니다. <짱개>가 한국의 관객 여러분을 만나는 건 제게 무척 큰 의미가 있어요. 함께 고생한 제작ㆍ출연진 여러분에 대한 보상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코로나 19 때문에 직접 영화제에 참석하지 못한 건 아쉽지만요. (슬픈 웃음)

 

홍상현

감독님의 태생과 성장과정을 살펴보면, 정말 “‘코스모폴리탄’이라는 호칭이 이 이상 어울리는 영화인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홍상현의 인터뷰” 독자 여러분을 위해 자기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장지위

“홍상현의 인터뷰”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영화 <짱개>를 연출한 장지위입니다. (웃음)

어머니는 한국사람, 아버지는 대만사람이고요. 어릴 때는 남아공의 프리토리아에서 자랐습니다. 대만의 국립대만예술대 라디오TV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의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영상예술학과에서 영화연출전공으로 제작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단편영화 <순수로의 회귀 - 타이베이>(2008), <숨바꼭질>(2009), <짱개>(2013), <원 웨이 티켓>(2016) 등을 연출, 장편독립영화 <낫 버마 에니모어>(2016), 장편다큐멘터리 <생활보호를 받는 로커>(2017) 등을 제작했어요. 현재는 같은 학교에서 박사과정 수료 후 학위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원안이 되는 동명단편 「짱개」가 표현주의사조를 실험적 영상을 통해 시도한 작품이었던데 반해, 장편 「짱개」는 정체성에 관한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룸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풋풋함이 넘쳐나는 성장영화의 분위기로 관객에게 장르적 재미를 선사한다. 사진제공: 2021 전주국제영화제
원안이 되는 동명단편 「짱개」가 표현주의사조를 실험적 영상을 통해 시도한 작품이었던데 반해, 장편 「짱개」는 정체성에 관한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룸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풋풋함이 넘쳐나는 성장영화의 분위기로 관객에게 장르적 재미를 선사한다. 사진제공: 2021 전주국제영화제

홍상현

올해 만 서른여덟이 되시는데. 지난해 <짱개>를 만드셨으니 감독에 데뷔할 연령대로는 많지도 적지도 않다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정작 국제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신 건 국립대만예술대 졸업 직후 <순수로의 회귀 - 타이베이>가 부산국제단편영화제에 초청된 13년 전인데요.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일찍 데뷔하실 수 있었을 것 같은데, 혹시 완벽주의자신가요. (웃음)

장지위

아니오, 전혀 그렇지 않고요. (웃음) 모든 게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연이 무르익지 않았다면 아무리 애를 써도 억지로 되지 않잖아요. 긴 시간 속에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공부도하고, 작품도 만들고, 사람들도 만나고... 여러 가지 경험을 쌓는 가운데 모든 조건이 갖춰져야만 때가 오는 거 아닐까 않을까 싶어요. 나무도 봄이 되어야 꽃을 피우는 것처럼.

 

홍상현

양친이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을 지칭하는 영어표현으로 ‘하프’라는 게 있습니다. 하지만 감독님의 경우 완전히 ‘더블’의 느낌이에요. 두 군데, 혹은 그 이상의 나라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부산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개설한 특별 프로그램을 수료하고, 대만영화인이자 한국영화인으로 활약하고 계시잖아요. 애초에 의도하셨던 건가요.

장지위

앞서 말씀드린 ‘인연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리 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한국과 대만 모두 제 집이고요. (웃음)

한국에서 공부하면서도 대만에서 영화 큐레이터와 영화제 프로그래밍을 하고 있을뿐더러, 제가 진행하는 영화제작 프로젝트(혹은 프로듀서ㆍ촬영감독 등으로 참여했던)가 대부분 여러 나라의 공동제작 작품이거든요. 때문에 항상 중간에서 ‘브리징(bridging)’을 해야 했고요. 그렇게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혼혈인으로 태어난 저는 언제나 두 나라 사람으로서의 특징을 치우침 없이 활용해서 ‘하나 더하기 하나’를 ‘둘’ 이상으로 만드는 시너지 효과를 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야만 제 몸에 흐르는 두 나라의 피에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만만치 않은 현실 속에서도 끝까지 배우자와 아이, 모두를 이해하고 감싸 안는‘엄마’로 분한 이항나 배우. 영화와 TV드라마를 통해 다져진 탄탄한 연기력으로 작품의 매력을 더해주었다. 사진제공: 2021 전주국제영화제
만만치 않은 현실 속에서도 끝까지 배우자와 아이, 모두를 이해하고 감싸 안는 ‘엄마’로 분한 이항나 배우. 영화와 TV드라마를 통해 다져진 탄탄한 연기력으로 작품의 매력을 더해주었다. 사진제공: 2021 전주국제영화제

홍상현

화제가 나온 김에 활동하고 계신 대만ㆍ한국영화문화예술교류협회에 대해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장지위

대만ㆍ한국영화문화예술교류협회는 한국과 대만 두 나라 간의 문화예술, 콘텐츠산업 등의 교류를 통해 협력과 친선을 도모할 목적으로 2013년, 대만 타이베이에서 설립된 자발적 비영리단체입니다. 우리는 대만과 한국의 문화예술을 다양한 분야와 관점에서 소개하며, 특히 독립예술영화를 중심으로. 일반인들에게 양국의 문화예술이 더욱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영화제, 전시, 공연 등 각종 교류 이벤트를 기획ㆍ운영하고 있습니다.

 

홍상현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짱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우선 타이틀에 관한 건데요. ‘소스 독(Sauce Sog)’이라는, 다소 자극적인 의미로 번역되는 단어, 즉 ‘장구(醬狗)’를 제목으로 정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금고를 관리하는 사람,’ 즉 ‘장궤(掌櫃)’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기는 하지만, 한국의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짱개”를 “흑형”등과 더불어 혐오발언으로 지정하기도 했는데요.

장지위

질문에 답해드리기 위해 잠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는데요.

1963년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집권 이후, 한국정부는 무척 오랜 기간 동안 한국 화교들의 경제ㆍ사회활동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정책을 유지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의 화교들이 중국음식점을 운영하는 것 외에 마땅한 생계수단이 없었어요. ‘짱개’라는 표현의 등장은 이와 궤를 같이합니다. 또, 대한민국이 원래 이민을 통해 형성된 나라도 아니다 보니 당시로서는 국적 취득도 거의 불가능했지요.

여기 또 한 가지 문제가 더해지는데요. 대만 정부가 한국 화교들에게 발급하는 ‘무호적(無戶籍) 여권’ 일명 ‘깡통 여권’이 그것입니다. 이걸 가진 사람들은 대만에 호적이 없다는 이유로 신분증번호도 없고, 참정권도 제한받으며, 심지어 대만에 가면서도 입국 비자를 받아야 해요. 해서, 현재도 한국 화교들은 한국인도, 대만인도 아닌 ‘정치적 고아’로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중국인 취급, 대만에서는 한국인 취급, 어딜 가든 아웃사이더인 거지요.

장지위 감독은 한국과 대만 두 나라 간의 문화예술, 콘텐츠산업 등의 교류를 통해 협력과 친선을 도모할 목적으로 2013년 설립된 대만ㆍ한국영화문화예술교류협회를 이끌며 활약하고 있다. 사진출처: 2018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아카데미
장지위 감독은 한국과 대만 두 나라 간의 문화예술, 콘텐츠산업 등의 교류를 통해 협력과 친선을 도모할 목적으로 2013년 설립된 대만ㆍ한국영화문화예술교류협회를 이끌며 활약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은 아시아영화아카데미에 참석한 중국의 로예 감독) 사진출처: 2018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아카데미

홍상현

설정된 상황 자체가 워낙 특수하다 보니 묘사한 작품의 타이틀도 다소 자극적일 필요가 있었겠네요.

장지위

“짱개”라는 단어를 굳이 제목으로 삼은 것은 바로 이런 한국 화교의 스토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쁜 말이라는 거야 잘 알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날을 세워 비판을 가한다든가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의도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저, 적지 않은 한국 화교들의 삶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또한 경험해온 불평등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고 싶었을 따름이에요. 해서, 모두가 서로를 좀 더 이해하고, 가능하면 한국 화교들의 어려운 상황에 관심 또한 가져주시기를 바란 겁니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는 역시 ‘튀는’ 타이틀을 정하는 게 소재를 노출시키는데 효과적이겠다고 판단했고요.

 

홍상현

확실히 ‘한화’ 즉, 한국 화교는 상황 면에서나 본인들의 정체성 면에서나 세계 화교사회에서도 이례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죠. 그럼에도 영화작가인 장지위 감독이 특별히 이 문제에 주목하게 된 좀 더 자세한 이유가 궁금해지는데요.

장지위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제가 한국인 어머니와 대만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데다,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가 맹위를 떨치던 시절의 남아공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거든요. 부모님 나라의 언어도 잘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인종차별과 분리주의를 피부로 실감하는 가운데 영어와 아프리칸스어로 교육을 받은 겁니다. 그러니 대만에 가서도 항상 아웃사이더로 지낼 수밖에 없었고요. 결국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는 일은 제 삶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이슈였던 거지요.

아버지 역의 조이 투 배우는 실제로도 한국 회교 출신 연기자다. 장지위 감독은 작품의 리얼리티를 위해 한국사람 역할은 한국 배우, 대만사람 역할은 대만 배우, 한국 화교 역할은 화교 배우로 캐스팅한다는 원칙을 세워 실천했다. 사진제공: 2021 전주국제영화제
아버지 역의 조이 유 배우는 실제로도 한국 회교 출신 연기자다. 장지위 감독은 작품의 리얼리티를 위해 한국사람 역할은 한국 배우, 대만사람 역할은 대만 배우, 한국 화교 역할은 화교 배우로 캐스팅한다는 원칙을 세워 실천했다. 사진제공: 2021 전주국제영화제

홍상현

<짱개>는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홈페이지에 공개해 놓으신 동명단편, <짱개>(2013)를 장편으로 리메이크한 작품이라 들었는데요. 단지 분량에 있어서의 차이가 아니라 서로 무척 다른 스타일의 영화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장지위

단편 <짱개>는 표현주의사조를 실험적 영상을 통해 시도한 작품입니다.

극중에서 과거와 꿈(또는 환상) 장면은 컬러, 현재의 장면은 흑백을 사용하다 결말부에서 이야기가 현실로 돌아오면 다시 컬러를 사용해서 주인공의 심리상태를 표현해보고자 했어요. 주인공이 화교로서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품고, 답을 구하지만 이내 “현실은 꿈의 끝이다”라는 메시지와 마주하는 것으로 끝을 맺지요. 또 하나. 대만의 전설과 민요를 적절히 섞어 차용해 은유적인 표현에 활용했습니다.

 

홍상현

산업적인 측면에서 보면 <짱개>야말로 국제공동제작의 모범을 보여주는 사례 아닐까 싶습니다. 대만과 한국, 두 나라의 캐스트ㆍ스태프가 환상적인 케미스트리를 보여주고 있는데요.

장지위

독립영화이다 보니 제작과정이 만만치 않았어요. 저예산에 빡빡한 스케줄, 게다가 해외로케까지 진행하느라 프리프로덕션 단계서부터 스태프 구성, 캐스팅, 로케이션 헌팅 등을 위해 몇 번이나 한국과 대만을 오갔습니다. 일단 메인 스토리의 90% 이상은 한국에서 전개가 되고, 나머지 10%는 대만에서 이어지는데. 2019년 8월 24일 한국에서 1회차 촬영을 시작해 2019년 9월 20일 대만에서 20회차로 마무리했습니다. 그중 한국 촬영분이 17회차, 대만 촬영분이 3회차였는데, 의사소통의 효율성을 위해 한ㆍ중 2개 국어가 가능한 인원을 팀별로 한사람씩 배정했고요. 나름대로는 꽤 여러 가지를 고려했지만 그럼에도 제작ㆍ출연진 여러분들께는 힘든 과정이었을 거예요.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진심어린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대만 정부가 한국 화교들에게 발급하는‘무호적 여권’은 일명 ‘깡통 여권’으로도 불린다. ‘깡통 여권’ 소지자는 대만에 호적이 없다는 이유로 신분증번호도 없고, 참정권도 제한받으며, 심지어 대만에 갈 때는 비자까지 발급받아야 한다. 사진제공: 2021 전주국제영화제
대만 정부가 한국 화교들에게 발급하는 ‘무호적 여권’은 일명 ‘깡통 여권’으로도 불린다. ‘깡통 여권’ 소지자는 대만에 호적이 없다는 이유로 신분증번호도 없고, 참정권도 제한받으며, 심지어 대만에 갈 때는 비자까지 발급받아야 한다. 사진제공: 2021 전주국제영화제

홍상현

광용으로 분한 허예원 배우를 보면서 ‘어떻게 이런 배우를 여지 껏 모르고 있었지?’ 하고 감탄했습니다. 그러다 엔딩크레디트의 성명 표기에서 한국 화교이신 걸 알고 다시 한 번 무릎을 쳤는데요. 이런 배우를 도대체 어떻게 ‘발견’하셨나요?

장지위

‘하비홍’이라는 한국어 이름도 가지고 있는 허예원 배우와는 오디션을 통해 만났습니다.

<짱개>라는 작품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언어’예요. 대사의 80% 이상이 한국어이지만 나머지 20% 정도는 중국어(혹은 중국어의 방언)로 되어있으니까요. 게다가 한국 사람이 쓰는 한국말과 대만사람, 또는 한국 화교가 쓰는 한국말, 심지어 같은 한국말이라 할지라도 서울출신과 지방출신이 하는 한국말이 다르듯이 대만사람이 하는 중국말과 한국 화교, 혹은 대륙 사람이 하는 말에도 각각 차이가 있거든요. 제 경험상으로도 각자의 억양과 어휘선택 등에 따라 문화적 배경이나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 있어 미묘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이 차이는 커다란 효과로 이어지고요.

그런 이유로 <짱개>의 캐스팅에서는 한국사람 역할은 한국 배우, 대만사람 역할은 대만 배우, 한국 화교 역할은 화교 배우로 캐스팅한다는 원칙을 세워 실천했습니다.

 

홍상현

아예 본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 연기가 더욱 자연스러웠겠지만, (웃음) 그래도 감독님이 디렉션을 하셨는지 궁금한데요.

장지위

허예원 배우의 첫 주연 작품이라 상당히 구체적인 디렉션과 충분한 대화, 그리고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습니다. 인물의 심리적(또는 물리적) 상황이나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설정 등에 관해서 말이죠. 여기에 더해서, 최대한 일상에서처럼 편안하게 연기해달라고 주문했어요. 그런데 역시 배우 자신이 실제로 화교 3세로 주인공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보니 상황에 자연스럽게 몰입해 들어가더라고요.

히로인으로 분한 김예은 배우는 프리프로덕션 단계부터 시나리오 분석력과 캐릭터에 대한 이해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상대 배우와 잘 호흡을 맞추면서도 본인의 연기를 자연스럽게 보여준 김예은 배우의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된다. 사진제공: 2021 전주국제영화제
히로인으로 분한 김예은 배우는 프리프로덕션 단계부터 시나리오 분석력과 캐릭터에 대한 이해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상대 배우와 잘 호흡을 맞추면서도 본인의 연기를 자연스럽게 보여준 김예은 배우의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된다. 사진제공: 2021 전주국제영화제

홍상현

등장부터가 범상치 않은 히로인, 김예은 배우와의 케미스트리도 대단히 훌륭합니다.

장지위

김예은 배우 역시 연기경험이 그리 길지 않은 편이지만 시나리오 분석력과 캐릭터에 대한 이해력이 정말 탁월했습니다. 상대 배우와 호흡을 잘 맞추면서도 본인의 연기를 자연스럽게 보여주었고요. 앞으로의 활약이 정말 기대되는 연기자입니다.

 

홍상현

제가 보기에도 광용과 아버지 사이의 ‘정체성에 대한 갈등’을 표현함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 역할을 한 게 ‘언어(한국어와 중국어)’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가정일 경우, 거의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갈등의 원인이라는 데서 공감을 자아내는 부분이기도 한데요. 개인적 경험이 반영된 건가요?

장지위

제 개인적인 경험은 물론, 주변 지인이나 친지들의 경험담도 많이 반영되었습니다. 사실적인 소재에 허구적인 내용을 적절히 더해 구성한 거지요. 그러나 영화 속 광용의 캐릭터는 실제의 저와 좀 차이가 있는 까닭에 엄밀히 말하면 <짱개>를 자전적인 영화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고요. (웃음)

 

홍상현

광용과 아버지의 갈등을 현실과 꿈을 넘나드는 영화적 상상력의 범주에서 풀어내신 점이 절묘했습니다.

장지위

『금강경』에 보면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진 응작여시관(一切有為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이라는 문구가 나옵니다.

“현상계의 모든 생멸의 법칙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보아야 할 것이라”는 의미인데요. 현실이란 꿈과 같아서 그 어떤 것이든 때가 되면 사라지는, 허무한 것일 따름이니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세계관에 근거해서 비록 “육체(현실)”로는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넘을 수 없지만 “영혼(꿈)”으로 시공간을 초월해 부자간에 마음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봤어요. 어쩌면 이는 부처님이 그들 부자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짱개」는 허예원 배우의 첫 주연 작품. 연기경험이 풍부하지 않은 만큼 구체적인 디렉션과 충분한 대화,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지만 그 자신 회교 3세로 ‘광용’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보니 상황에 자연스럽게 몰입해 들어갔다고. 사진제공: 2021 전주국제영화제
「짱개」는 허예원 배우의 첫 주연 작품. 연기경험이 풍부하지 않은 만큼 구체적인 디렉션과 충분한 대화,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지만 그 자신 회교 3세로 ‘광용’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보니 상황에 자연스럽게 몰입해 들어갔다고. 사진제공: 2021 전주국제영화제

홍상현

심오하군요. (웃음) 슬슬 결말부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가 보겠습니다.

<짱개>는 결국 주인공이 모든 문제들을 스스로 (일정부분) 해소하고, 앞으로도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결심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성장영화를 뛰어넘어 특별한 휴먼드라마의 단계에 올라섭니다. 만만찮은 인생을 살아가겠지만 일단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이 카타르시스를 주기도 하고요. 미래에 대한 감독님의 의지가 반영된 건가요.

장지위

의외라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겠는데, 삶에 대한 저의 인식을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은 “인생무상(人生無常)”입니다.

특히 코로나 19로 인해 많은 분들이 목숨을 잃고, 세상도, 삶도 갑자기 멈춰선 가운데 미래에 대한 불안감, 불확실성이 넘쳐나는 요즘의 현실을 보면 이를 더욱 실감하게 되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걸 포기하고 체념할 게 아니라, 어려움과 고통, 고난을 받아들이고, 인생은 고통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역으로 희망을 유지할 능력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요. 저 역시 그런 마음가짐으로 노력하고 있고요.

 

홍상현

‘진정 절망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희망을 꿈꿀 수도 있다’는 메시지군요. 좋은데요? (웃음)

차기작이 어떤 작품이 될지 기대됩니다. 장르영화를 만드셔도 상당한 재능을 보여주실 것 같은데.

장지위

재능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인연이 된다면 다양한 장르영화에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웃음).

어려서부터 아웃사이더로 살아와서 그런지 늘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는데, 최근 코로나 19라는 경험이 더해지면서 새삼 많은 것들을 느끼고 있습니다. 불투명한 미래, 사람과 사람 사이가 멀어지는 가운데 빈부격차와 차별, 혐오 같은 소수자 문제 등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더 많은 이들이 고통으로 신음하게 되는 현실. 어찌 보면 코로나 19보다 무서운 건, 무관심 바이러스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코로나 19보다 더 무서운 건, ‘무관심 바이러스’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곡을 찌르는 장지위 감독의 말을 곱씹으며, 「짱개」가 꼭 극장개봉을 통해 일반관객과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사진제공: 2021 전주국제영화제
“코로나 19보다 더 무서운 건, ‘무관심 바이러스’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곡을 찌르는 장지위 감독의 말을 곱씹으며, 「짱개」가 꼭 극장개봉을 통해 일반관객과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사진제공: 2021 전주국제영화제

“<짱개>는 한국 회교의 삶에 초점을 맞췄다는 특수성과 반항기의 한 소년을 통해 성장의 고통과 자아정체성, 문화적 혼란ㆍ충돌 등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보편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나는 누구이며 나의 뿌리는 어디에서 왔는지, 진정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이며, 내 미래는 어때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모든 분들이 함께 볼 수 있는 영화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각자 삶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긴 산고 끝에 세상에 내놓은 데뷔작이 전주국제영화제와 도쿄국제영화제에서 호평 받으며 성공적인 신고식을 치른 장 감독이지만, 지난해 봄부터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 19는 어머니의 나라 한국, 아버지의 나라 대만의 독립영화계를 아우르며 활약하던 그에게 좌절을 안기기도 했다. 대만ㆍ한국영화문화예술교류협회 이사장으로서 준비하던 한국ㆍ대만독립영화교류전이 무산되어 버린 것.

뿐인가. 하늘길이 막히면서 갇혀버린 대만이 최근 백신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지난 토요일 하루에만 250명의 확진자가 발생하는 불안한 나날이 이어지는 중이다. 서울의 가족ㆍ친지를 걱정하던 불과 두어 달 전 상황이 역전되면서 잠 못 이루는 밤은 얼마일까.

그때그때의 화제에 적확한 사자성어를 하나하나 인용하며 유려한 우리말로 긴 시간을 함께해준 그에게 마지막으로 “대한(大寒) 끝에 양춘(陽春)이 있다(큰 추위의 고비만 넘기면 따뜻한 봄이 올 것)”는 우리 속담을 건네고 싶다. 이는 어쩌면 그와 나, 우리 모두를 위한 격려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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