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한국형 블라인드 채용’ 득인가 독인가

  • 기자명 이강진 기자
  • 기사승인 2021.11.17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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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더불어민주당 고민정 의원이 올린 페이스북 게시글이 화제가 됐습니다. ‘블라인드 채용법’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본인이 분교를 졸업하고도 KBS에 입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블라인드 채용 덕”이라며, “효과도 입증된 이 제도가 법제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습니다. ‘블라인드 채용’이란 채용 과정에서 ‘출신지·학력·성별·인종·신체조건·가족관계’ 등 불합리한 차별과 편견을 야기할 수 있는 요인은 제외하고, ‘실무 능력’만을 평가해 채용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고 의원의 페이스북 글은 곧바로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같은 대학을 졸업한 동문과 재학생들은 출신 대학을 비하한 것이라며 반발했고, 각종 SNS상에서는 블라인드 채용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졌습니다.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KBSI)’ 소속의 한 책임연구원은 페이스북을 통해, ‘블라인드 채용’은 ‘심각하게 나쁜 것’이라며 고민정 의원의 발언을 반박했습니다. 해당 연구원은 “학교 이름도 다 공개하면서도 이를 채점 기준에 반영하지 않고 단지 실력으로만 채용하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블라인드 채용”이라며, 과거 과학기술연구소에서 전문인력으로 박사학위자를 채용할 때 블라인드 채용이 큰 걸림돌로 작용했던 사례를 설명했습니다.

 

블라인드 채용의 긍정적 효과

우선 블라인드 채용은 ‘특권 대물림’ 방지 효과가 있습니다. 지원자 가족의 재산, 직업, 학력을 밝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작년 8월 ‘사람인’이 구직자 1,578명을 대상으로 ‘채용 공정성’에 대해 조사한 결과, ‘39%’가 ‘채용과정에서 불공정함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가장 높은 응답률을 기록한 항목은 가족관계, 학벌 등 ‘직무와 관련 없는 질문을 받은 경험(42.4%)’이었습니다. ‘가족’에 대한 정보는 실무 능력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기업이 고위직 자녀를 부정 채용했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취업을 준비하는 ‘평범한’ 청년들은 깊은 좌절감에 빠집니다. 공정을 최선의 가치로 여기는 젊은 세대들은 소위 ‘엄마(아빠) 찬스’에 크게 분노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재산과 학력, 직업 등이 채용 과정에서 영향을 끼친다면, 결국 지원자 본인의 능력과는 무관하게 부모의 사회적 지위가 자녀에게도 대물림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따라서 가족에 대한 정보를 물을 수 없는 블라인드 채용은 오직 지원자의 역량만이 평가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옵니다.

출처: 사람인
출처: 사람인

또한 블라인드 채용은 비명문대 출신의 지원자에게도 공평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실제로 2016년, KEB하나은행이 서울대·연세대·고려대, 일명 ‘SKY’대학과 외국대학 출신을 합격시키기 위해 면접점수를 조작했다는 보도가 있었고 현재 관련 재판이 진행중입니다. 또한 신한은행은 신입 사원을 채용할 때, 서류 전형에서 대학별로 다른 ‘필터링 컷’을 적용한 것이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필터링 컷이란 서류 심사 전 기준 학점을 미리 설정해 놓고 지원자의 학점이 기준 점수에 미달하면 심사 없이 바로 탈락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한은행은 아이비리그 등 최상위 대학 출신은 ‘3.0’, 서울대 등 상위권 대학은 ‘3.3’, 지방대는 ‘3.5’로 학점군을 분류해 놓았습니다. ‘필터링 컷’으로 지원자를 탈락시키는 행위를 ‘직무 적합성과 능력’을 고려한 평가로 볼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대학별로 ‘A 학점을 받을 수 있는 비율’ 등 학점 부여 기준이 다르고, ‘상위권 대학'을 정의하는 기준도 주관적이기 때문에 학점 군을 분류하는 것은 공정성 논란 문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출처: 심상정 의원실
출처: 정의당 심상정 의원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 “공무원과 공공부문에서 블라인드 채용을 추진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똑같은 조건과 출발선에서 오로지 실력으로만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문 대통령이 밝힌 블라인드 채용제 도입의 이유였습니다. 이에 따라 2017년 하반기부터 공공기관과 지방공기업에 블라인드 채용이 전면 시행됐고, 민간기업도 블라인드 채용이 확산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2018년 11월,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는 <편견 없는 채용 · 블라인드 채용 실태조사 및 성과분석 최종보고서>를 공개했습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공공기관에서 블라인드 채용제를 적용하기 전과 후를 비교했을 때,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출신자 비율이 15.3%에서 10.5%로 4.8%p 감소했고, 비수도권 대학 출신자의 비율은 38.5%에서 43.2%로 4.7%p 증가했습니다. 통계적으로도 유의미한 결과이긴 하지만, 이는 ‘지역인재할당제’와 블라인드 채용을 병행한 결과이기에 이 성과를 오로지 ‘블라인드 채용’의 성과로만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해당 보고서는 블라인드 채용제 도입 이후 공공기관의 ‘대졸 여성’ 채용 비율이 높아졌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제도 도입 전후를 비교했을 때, 대졸 채용인원 중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39.8%에서 43.1%로 3.3%p 증가했고, 통계적으로도 유의미한 결괏값을 보였습니다.

블라인드 채용으로 선발된 직원은 입사 이후에도 좋은 행보를 보인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2018년 고용노동부는 <2018 공공부문 블라인드 채용 우수사례집>을 발간했는데, 여기에는 주택도시보증공사의 사례도 실렸습니다. 해당 기관에서 채용을 담당했던 인사처 직원은 인터뷰에서 “신입사원들이 강화된 직무능력 평가를 통해 입사해서인지 업무 적응력이 좋다”며, “블라인드 채용 덕에 우수인재도 뽑고, 퇴사 시 발생하는 재채용 및 재교육 비용도 절감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주택도시보증공사의 신입사원 퇴사율은 블라인드 채용제 도입 전 5.3%에서 도입 후 1%로 급감했습니다.

출처: NCS
주택도시보증공사의 블라인드 채용 성과. 출처: NCS

 

해외 주요국과 우리나라 블라인드 채용의 차이점

‘블라인드 채용’은 세계적인 추세인 듯 보입니다. 공공이 주도하든,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시행하든 블라인드 채용제도를 도입하는 해외 기업들의 사례는 흔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2017년, 캐나다는 연방정부 6개 부처에서 채용을 진행할 경우 입사지원서에 지원자 성명 기재를 금지하고, 인종 및 성별과 관계없이 동등한 기회를 갖도록 하는 파일럿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담당 재무 이사는 “소수 민족의 이름을 가진 지원자보다 영어 이름을 가진 지원자가 채용될 가능성이 40% 더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며 “성별 및 인종 차별을 막기 위해 이 제도를 도입했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2010년, 독일 연방정부는 개인 정보(나이, 성별, 외모 등)가 고용 관행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기 위해 한 파일럿 프로젝트를 고안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는 유수의 독일 공공 및 민간부문의 기업들이 참여했습니다. 당시 진행된 채용 과정에서 지원자의 이름, 연령, 성별, 외모 등을 알 수 없는 익명화된 입사지원서를 채택했는데, 그 결과 여성 및 이민자에 대한 면접 요청 확률이 이전보다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영국에서는 민간 기업이 자발적으로 블라인드 채용을 시행한 사례가 있습니다. 세계 4대 회계법인 중 한 곳인 딜로이트 영국지사는 지원자의 출신 학교를 보지 않고, 비판적 사고력을 평가하는 테스트를 채택했습니다. 또한 영국 공영방송 BBC는 2008년부터, 기자 선발 시 지원자의 배경과 학력을 보지 않는 채용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이처럼 해외 주요 국가들에서도 블라인드 채용을 통해 ‘편견 없이’ 인재를 선발하는 기업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해외의 블라인드 채용이 한국 정부가 주도하는 블라인드 채용과는 다르다는 것을 드러낸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지난 2019년, 한국노동연구원은 <공정 채용의 현실과 개선방안>이라는 제목의 연구자료를 공개했습니다. 이 연구에서는 “해외 주요 국가 중 공공부문에서 채용을 진행할 때 지원자의 출신 학교, 전공, 학점 등이 드러나는 것이 공정성을 저해한다고 간주하고 이러한 정보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사례는 사실상 거의 없다”며, “다만 입사지원서 기재 항목을 제한해 지원자가 인종차별, 성차별, 연령차별, 외모차별 등에 노출되지 않게 하는 사례는 다수 존재한다”고 밝혔습니다. 즉, 채용 과정에서 학력과 학점까지 노출을 금지하는 한국형 블라인드 채용은 ‘이례적인 형태’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해당 연구에서는 “영국의 딜로이트는 지원자의 학점 등의 요인을 적극 참조해 비명문대일지라도 학업 수행을 성실히 한 지원자의 노력을 인정”하며, “영국 공영방송 BBC도 지원자의 학점까지 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한국형 블라인드 채용'은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

‘대졸 신입’을 채용하는 것이 아닌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직군에서 ‘전문가’를 채용해야 할 때, 학력까지 비공개인 ‘한국형 블라인드 채용’이 문제가 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서론에서 언급한 KBSI의 책임 연구원은 페이스북에서, "과학기술연구소에서 전문인력으로 박사학위자를 뽑아야 할 때 블라인드 채용 규정이 걸림돌로 작용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지원자가 어느 교육기관에서 학위를 받았는지, 공동 연구는 어떻게 했는지, 어느 연구실에서 어떤 지도교수와 연구했는지도 알 수 없고, 추천서를 받아서도 안 된다”며, 블라인드 채용을 통해 최종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린 지원자 중 절반이 실무 경험도 없었던 실제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정부출연연구기관에 블라인드 채용 제도가 일괄 적용되면서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지원자가 최종 합격하는 사례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한 인공지능 관련 연구실은 채용과정에서 전문성이 떨어지는 지원자가 높은 점수를 받게 되자, 후순위의 지원자를 뽑은 것이 논란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또한 로봇 연구를 하는 한 연구실에서는 직무에 전문성이 없는 지원자가 최종 선발돼 타 연구실에서 데려가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는 심사 기준을 ‘공정성’에만 맞추다 보니, 실무 평가가 아닌 ‘논문 개수’ 같은 정량 평가가 심사 기준으로 적용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한 카이스트 박사과정생은 “블라인드 채용 과정에서는 논문을 질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논문의 양에 의존하게 된다”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블라인드 채용은 ‘과정의 공정성’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선발의 수월성’에서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실제로 블라인드 채용에는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갑니다. 앞서 언급했던 한국노동연구원의 연구자료에는 255개의 정부부처 산하 공공기관 채용 업무 담당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p59)가 공개돼 있습니다. 블라인드 채용 절차의 ‘소요 시간 변화’에 대한 질문에 응답자의 ‘76.5%’가 ‘채용 소요 시간이 길다’고 답했고, ‘금전적 비용 변화’에 대한 질문에는 응답자의 ‘74.5%’가 ‘비용이 크다’고 답했습니다. 즉, 지원자에 대한 정보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지원자의 역량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더 다양하고 심층적인 평가 절차를 고안해야 합니다. 따라서 채용 과정에서 시간과 비용의 증가는 피할 수 없습니다.

출처: 한국노동연구원. 공정 채용의 현실과 개선방안(2019).
출처: 한국노동연구원. 공정 채용의 현실과 개선방안(2019).

부모님의 빽도, 명문대 졸업장도 없는 취업 준비생에게 ‘블라인드 채용’은 취업 시장에서 공정성을 담보해주는 한 줄기 희망입니다. 지원자의 ‘배경’이 아닌 ‘직무 능력’만이 평가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학력과 학점까지 ‘블라인드 처리’되는 채용방식은 한국만의 독특한 형태이며, 이 방식이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분야에까지 적용될 경우 인재 선발에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블라인드 채용 시 지원자의 어떤 정보를 제한시킬 것인지에 대한 재논의가 필요하며, 블라인드 채용제를 천편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분야를 선별해 적절한 평가 방식을 고안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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