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이게 AR이라고?

  • 기자명 박현우
  • 기사승인 2019.01.18 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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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드라마는 AR 게임을 소재로 하고 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이 드라마가 AR 게임을 소재로 하고 있다고 하는 건 내 표현이 아니라 드라마측의 표현이다. 공식 포스터에는 “클래식 명곡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낭만적인 기타 선율과 첨단과학기술 증강 현실(AR)이 만나면 과연 어떤 신비로운 일이 벌어질지, 드라마를 통해 직접 확인하시기 바란다.”고 적혀있고, 드라마 작가는 <포켓몬고>를 통해 이 드라마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인터뷰했다.

AR이 뭔가? AR은 augmented reality의 약자다. 한국에서 AR은 “증강 현실"로 번역된다. AR을 가장 빠르게 이해하는 방법은 AR 게임인 <포켓몬고>를 직접 플레이해보는 거다. AR은 실존하는 현실을 조작하지 않는다. 해서, AR에서 나타난 물체나 피카츄는 손으로 직접 잡으려고 하면 잡히지 않는다. AR을 통하면 그것은 분명 존재하지만, 스마트폰을 치우거나 눈에 착용한 웨어러블 기기를 빼면 그것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포켓몬이 게이머에게 돌격해도 게이머는 물리적인 충격을 받지 않는다. 포켓몬은 실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포켓몬고>의 포켓몬이 게이머에게 직접 충격을 가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일단 게임이 그런 기능을 제공해야하고, 유저는 그 기능을 수용할 특수 수트를 착용해야 한다. 수트도 입지도 않았는데 AR로 구현된 가상의 실체에 맞아서 아파한다? 둘 중 하나다. 게이머가 게임에 과몰입 했거나, AR이 아니거나.

tvN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AR 게임을 주요 소재로 하고 있는데 기술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이 제멋대로 기술을 쓰고 있다. 제작진이 작성한 것으로 강하게 추측되는 나무위키 항목에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라는 아서.C.클라크의 말을 인용하며 잡을 수 있는 똥폼은 다 잡고 있는데 정작 드라마는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 오히려 유사과학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주인공은 AR로 구현된 칼을 손에 잡는다. AR로 구현된 칼을 볼 수 있는 것까지는 문제되지 않는다. 그것을 잡으려고 시도하는 것도 문제될 건 없다. 그런데 그 칼을 손에 잡는다? 손잡이가 손에 잡힌다? 이건 문제다. 더 웃긴 건 AR로 구현된 칼끼리 칼싸움을 한다는 거다. 실체가 없는 데이터 덩어리들이 어떻게 서로 만나나? 또 주인공은 AR로 구현된 총알이나 화살을 맞으면 아파하는데, 이것도 이상하다. 그는 아무것도 몸에 두른 게 없기 때문이다. 그는 왜 아파하는가? 과몰입인가? 사실은 AR이 아닌건가? 홍보는 낚시였나? 이 모든 것은 꿈이었고 주인공이 한 건 AR도 아니고 그냥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게 마지막 화에서 알려지나?

당신이 무조건 피해야 될 망작 <The Call Up>(넷플릭스엔 <로그온 배틀그라운드>로 업로드되어있다) 역시 AR 게임을 소재로 한다. 이 영화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보다 AR 게임을 구현하는데 성실한 모습을 보인다. 영화가 시작하면 주인공들은 10만 달러를 얻기 위해 한 빌딩의 방 안에 모인다. 그 방에는 첨부한 사진에서 보이는 헬멧과 수트가 준비되어있다. 헬멧은 일종의 렌즈로서 기능한다. 헬멧을 쓰면 AR로 구현된 가상현실이 보이지만, 헬멧을 벗으면 그저 하얀 벽 뿐이다.

<The Call Up> 포스터.

 

가상 현실에는 적이 있는데, 적이 총을 쏘면 주인공들은 실제로 충격을 받는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일단 영화에서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하지만 주인공들이 특수한 수트를 입고 있기 때문에 관객은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수트가 어떤 식으로 기능하는지 상상을 펼쳐볼 수는 있다. 우선, 가상 현실 속 적이 총을 쏘는 비주얼 데이터와 총이 발사될 때 발생하는 사운드, 총알이 나아가는 방향 등이 데이터 클라우드에 업로드되어야한다. 그리고 그것들과 총에 맞은 사람의 수트가 동기화되면 게임 세팅은 끝난다. 세팅이 완료된 후, 적이 총을 쏘면 총알이 날아가는 좌표에 위치한 수트 착용자는 수트가 주는 충격에 통증을 느낄 수 있다.

피해야 될 망작이라면서 <The Call Up>을 굳이 언급한 이유는 이 망작조차도 영화 속 소재를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했다는 걸 보이기 위해서다. 굳이 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할리우드에서 제작되는 영화들 중 현존하는 기술을 다루는 영화들은 그 기술을 그럴듯하게 구현하기 위해 상당히 애를 쓴다. 기술적으로 오류가 발생하면 관객들의 몰입이 깨지기 때문이다. 단순히 스토리를 진행하기 위해서 AR 기술을 제멋대로 쓰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같은 행태는 IMDB에서 4.9점을 받고 있는 <The Call Up> 같은 B급 영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수트 없이도 주인공이 가상현실의 적들에게 공격을 받을 때 아파하려면, 이에 대해서 드라마가 충분히 설명을 했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영화는 영화로, 드라마는 드라마로 봐라.”라고 말할 게 예상되는데, 드라마와 현실의 갭을 깬 건 애초에 내가 아니라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라는 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이런 게임이 현실에도 등장한다면?’이라는 가설을 세우면서 시청자들을 자극했다. 현실을 기반으로 할 거면, 현실에 존재하는 AR 기술을 드라마에 쓸 거였으면 그 기술에 대해서만큼은 고증을 제대로 했어야했다. 애초에 이 드라마가 AR이라는 단어를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드라마는 명확히 AR이라는 기술을 꺼내들어 핵심 셀링 포인트로 삼았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그것은 AR이 아니고 그냥 아무것도 아니다.

<Wanted>라는 영화가 총알을 휘어서 날려보낼 때 “에이 어떻게 총을 저렇게 쏴”라고 지적하는 사람은 없다. 영화에서 구현된 세계는 그런 세계니까. 마블의 영화를 보면서 “사람은 방사능에 노출된다고 초록색 괴물이 되지 않아”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애초에 초현실적인 인간들이 등장하는 히어로 장르의 영화니까. 그런데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명백히 현실을 지지대로 삼고 있다. 여기에서 묘사되는 ‘AR은 아니지만 AR로 불려지는 무엇’을 지적하는 이유는 이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그것이 “AR”로 불리기 때문이다. 아예 장르를 SF로 바꾸고, 드라마에만 존재하는 어떤 기술을 설정상 창조하는 전략을 택했으면 어땠을까? 그건 차라리 말이 된다. 그럼 이 글은 애초에 쓰이지도 않았겠지.

해외에서 로케를 할 정도로 큰 자본이 들어간 프로젝트인데, 드라마 스토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소재인 AR에 대해서는 이렇듯 무지한 모습을 보인다는 건 비극이다. 나는 제작진들이 기술에 대한 무지 때문에 드라마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기술을 이렇게 자기 멋대로 해석해도 시청자들은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 드라마를 비평하는 수많은 기자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AR을 멋대로 설명해버리면 이 드라마를 소비하는 자들은 AR 기술을 잘못 이해하게 된다. 대중들이 이상하게 해석된 기술을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라며 필터링해 받아들일 거라 기대하기는 힘들다. 아직도 민비를 명성황후랍시고 찬양하는 이들은 발에 치이고, <시크릿 가든> 때문에 사회지도층이라는 이상한 말이 대중들의 뇌를 지배하고 있잖나?

<Grey’s Anatomy>를 제작한 숀다 라임스는 드라마를 통해 의학적 사실을 접하는 대중들이 많기 때문에 사소한 사실을 넣을 때도 주의를 기울이고, 드라마가 교육적인 창구가 될 수 있게 했다. 드라마를 보면서 의학적 사실도 학습할 수 있게 한 거다. 드라마가 반드시 교육적이어야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다만, 거짓말을 하지 말자는 거다. AR이 아닌 걸 AR이라고 우기지 말자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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