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거래 욕망'이 여행을 이끌었다

  • 기자명 탁재형
  • 기사승인 2019.01.2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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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한 해, 여행의 트렌드를 이끌 키워드는 LCC(Low Cost Carriers 저비용항공사), DIY(Do It Yourself 여행자가 직접 계획/주도), OTA(Online Travel Agency 온라인 여행사)가 될 전망이라고 한다. 마진이 최소화된 상품을, 여행자가 직접 선택해서 중개자의 개입없이 계획부터 실행까지 해나간다는 것이다. 여행사에겐 책자나 행사를 이용해 손님들을 모으고 그들을 상대로 패키지 상품을 팔던 기존의 역할보다, 이러한 DIY 여행자들을 항공권, 호텔, 그리고 현지의 액티비티와 편리하게 연결해주는 플랫폼의 역할을 더 많이 요구된다. 온라인 여행사들이 점점 더 대세가 되어가는 이유다. 작년 10월, 한때 국내 항공권 판매 부동의 1위로 여겨졌던 탑항공이 폐업을 맞이한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항공사에서 판매자에게 많게는 항공권 가격의 9퍼센트까지 지급해주던 발권수수료를 폐지하기 시작하면서, 항공사와 여행자 사이에서 항공권을 중개하던 기존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생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여행업에서도, 직거래의 시대가 닥쳐온지 오래다.

인도 시장의 향신료. 출처: 플리커

조금은 거창한 이야기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직거래의 욕망이야말로 인간을 여행하게 만든 가장 강력한 동인(動因) 중 하나다. 남이 가져다주는 정보와 재화를 내가 직접 그 산지에 가서 내 눈으로 확인하고픈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를 다른 나라로 향하게 하는 에너지다. 더군다나, 과거엔 그 여행에서 얻은 전리품이 지금과는 비할 수 없이 커다란 부와 명예까지 가져다 주었다. 이를 찾아 미지의 세계에 목숨을 걸고 바다로 향하는 이들이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서구 문명이 태동한 이래, 황금과 함께 귀중품의 대표격으로 여겨졌던 것은 향신료다. 그 중에서도, 인도네시아의 섬들 중 몇 곳에서만 생산되는 육두구나 정향 같은 향신료는 한때 같은 무게의 금과 맞먹는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16세기가 될 때까지, 유럽인들은 도무지 이 향신료들이 어디에서 생산되어 어떤 경로를 거쳐 식탁에 오르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가장 동쪽에 위치하는 몰루카 제도가 바로 이들 향신료의 산지다. 2만개에 육박하는 이 지역 섬들 중에서 육두구와 정향이 나는 섬은 불과 열 개 남짓. 심지어 이들의 면적을 다 합쳐 봐야 100평방킬로미터가 넘지 않는다. 이렇다 보니, 이 향신료들의 공급은 중간상인에게서 중간상인으로 이어지는 길고 복잡한 릴레이에 의존했다. 그 대열에는 인도는 물론, 이슬람과 비잔틴 제국, 그리고 베네치아가 끼어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향신료의 유럽 가격은 현지 가격의 30배에 달하는 경우가 흔했다. 유럽사람들이 보기에, 육두구와 정향이 자라는 땅은 그야말로 나무에서 돈이 열리는 곳이나 다름없었다. 그 곳에 직접 가서 거래를 트려는(혹은 약탈하려는) 사람들의 욕망이 커져갔음은 물론이다.

처음 이 과제에 성공한 나라는 포르투갈이었다. 지난 글에 쓴 대로, 항해왕자 엔히끄의 혜안에 힘입어 국가의 핵심과제로 인도 항로 개척을 천명한 포르투갈은, 1948년 바스코 다 가마의 캘리컷 도착 이래 연이어 후속 함대를 보냈다. 1500년 3월 8일에는 1000명의 선원과 13척의 대형 군함으로 이루어진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Pedro Álvares Cabral)의 함대가 인도로 떠났다. 이들에 의해 캘리컷의 아랍 상인들은 물건은 물론 생명까지 빼앗겼으며, 바다에서 쏘아대는 해상 포격의 위력 앞에 캘리컷의 지배계급도 무릎을 꿇고 말았다. 포르투갈령 인도 제국, 즉 ‘에스타도 다 인디아’의 탄생이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1년 후, 포르투갈 배 두 척이 지금의 벨기에 해안에 나타난다. 스헬더 강을 따라 안트베르펜까지 들어온 이 배들은 곧 선창에서 엄청난 양의 향신료를 부려 놓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이 곳에 향신료를 공급하던 베네치아 상인들의 가격보다 훨씬 싼 것은 물론이고, 품질도 훨씬 좋았다. 르네상스 내내 유럽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로 군림하던 베네치아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의 인도항해(적색)과 귀국 항해(청색). 카브랄은 인도로 가는 중 브라질을 발견하고 그곳을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의 영토로 하고 인도로 향했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이란 없는 법. 포르투갈의 호시절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인도, 그리고 더 나아가 고급 향신료가 나는 섬들과 직거래를 트는 데 성공했지만, 그 상황을 독점적으로 유지하고자 해상을 봉쇄하는 데 너무나 많은 인력과 자원을 들여야 했던 것이 문제였다. 애당초에 군함, 그것도 둔중한 범선 십 수 척으로 드넓은 인도양을 틀어막겠다는 것 자체가 무리한 시도였다. 야음을 틈타 아랍과 인도의 상인들은 소형 쾌속선으로 포르투갈의 감시를 피해 빠져나갔고, 이를 방지하려고 포르투갈은 더 많은 재정을 투입해야 했다. 급기야는 포르투갈의 스파이가 왕실에 ‘비용 절감을 위해서 인도 항로를 포기하고 향신료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구매하는 것이 더 나을 것으로 판단된다’는 보고서를 올렸을 지경이었다. 재화와 정보를 완벽하게 통제한다는 것이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이때의 포르투갈이 이미 잘 드러내 보여준다.

결국 17세기 들어 아시아 향신료 무역의 주도권은, 루트를 통제하기보다 생산지를 요새화하는 방법을 택한 네덜란드 사람들에게로 넘어간다. 하지만 그들 역시 향신료 묘목과 씨앗의 유출을 완벽하게 틀어막을 수는 없었고, 정향과 육두구는 차츰 인도네시아의 외딴 섬을 벗어나 열대 지방 곳곳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예의 ‘직거래’ 신봉자들은 문익점이나 제임스 본드 뺨치는 활약을 보이기도 했다.

이처럼 중간 단계를 뛰어 넘어 자신이 원하는 것에 직접 도달하려는 욕구는, 여행의 역사와 궤를 같이해 왔다. 하물며 그러한 여행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여행업에서랴. 이제 여행사의 미래는 개별 여행자가 좀 더 편리하고 안전하게, 그러면서도 생동감을 잃지 않고 현지와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것에 달렸다. 여행자들이 직접 도달하기 힘들 것 같은 황금의 패키지를 아무리 틀어쥐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행자들은 ‘직거래’의 길을 트기 마련이다. 항상 그래왔듯이. 아무쪼록 길을 떠나는 사람들도 이런 변화를 귀찮게 여기지 말고, 자신의 여행지와 숙소, 액티비티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찾고, 고르고, 지불하는 것에 익숙해질 일이다. 그렇게 여행하는 이에게야말로 대양을 가로질러 인도로 향했던 직거래 신봉자들의 영광이 함께 할 터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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