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강조한 고이즈미 정권의 특별한 미디어 전략

기발한 미디어 전략으로 여론 휘어잡은 고이즈미
실제 정책 의미보다 '단순한 구도'로 알기 쉽게 전하는 데 주력

  • 기사입력 2022.03.29 09:58
  • 기자명 윤재언

새 정권이 탄생할 때마다 ‘국민과의 소통’이 늘 화두가 된다. ‘전 정권이 국민과의 소통을 잘 못했으니 새 정권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게 취지인 듯하나 실제 정권이 시작하면 비슷한 지적과 문제가 반복된다. 일상적으로 대통령 기자회견이 열리는 미국이나 내각제라 수상이 국회의원들 앞에 서야 하는 일본과도 대조적이다. 이를 보면 한국은 단순히 대통령 개인의 의지 문제만이 아니라 소통을 강제하는 제도와 관행의 부족도 영향을 주는 게 아닌가 싶다. 

당초 기대감을 안고 출범했던 문재인 정권의 기록적으로 적은 기자회견초기와 달리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메시지를 ‘하달’하는 모습은 아쉬웠다. 그러나 이에 안티 테제로 등장한 윤석열 당선인이 취임 전부터 청와대 용산 이전을 ‘소통을 위한 것’이라고 밀어붙이는 자세 역시 정당화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오히려 불통에 가까워 보인다. 한국에서 나오는 여론조사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윤석열 당선인 지지 목소리가 높은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청계천 복원 신화’를 들며 “여론 설득이 왜 필요하냐”는 반응도 적지 않게 보인다. 청와대를 개방하면 반대가 자연스럽게 수그러들 것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청계천 추진 당시 이명박 시장 측은 오히려 ‘끈질기게 반대하는 청계천 상인들을 찾아가서 설득했다’는 점을 부각했었다. 이는 저서 ‘대통령의 시간’에도 등장하는 대목이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공직자들에게 지시해 “4000여 차례 상인들과 만나 의견을 수렴하고 대책을 마련했다”고 한다. 적어도 밀어붙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가 수장이 민의를 고려해 행동한다는 점은 주요 득점 요소 가운데 하나다. 유권자가 특정 정권이나 정책을 어느 정도 지지하는지는 현재의 동력뿐만 아니라 미래의 지속 가능성을 가늠하는 데도 중요 지표가 된다. 특히 대통령제와 달리 수상 임기가 보장돼 있지 않고, 의원 숫자가 그대로 여야를 가르는 의원내각제 하에서 낮은 여론지지는 그 자체 단기간에 정권의 향배를 가를 가능성이 크다. 

의원내각제에 대해 한국에서는 직접 선출이 아니라는 점에서 선호가 낮다. 그러나 여론에 따라 언제든 수상이 그만둘 수 있다(그만두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통령제보다 여론에 민감한 부분이 있다. 적어도 내각제 수상의 사임은 국회 탄핵과 헌법재판소 결정과 같은 높은 요건을 필요로 하지 않기에 사회적 갈등을 고려하면 내각제가 반드시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된다. 이 같은 전제 하에 이번 글에서는 일본 수상, 그 중에서도 고이즈미의 소통과 미디어 전략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990년대 이후 여론에 민감해진 일본 정치

전후 일본은 오랜 기간 정권 교체가 없었기 때문에 1990년대까지 여론을 주요 지표로 삼고 정치할 필요성이 크게 높지 않았다. 물론 일정 수준 이하로 지지율이 떨어지면 국정 운영에 지장이 생겼으나, 그럼에도 정권 교체가 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제 1야당 사회당조차 회의적이었다. 이런 분위기가 바뀐 것은 1993년 처음으로 야당 연합으로의 정권 교체가 일어나고(아래 사진), 90년대 후반 구사회당 내 우파와 자민당 이탈세력을 규합한 민주당이 탄생하면서다. 

첫 정권교체 수상이 된 호소카와 총리(TBS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IKi4XP2xZiY)
첫 정권교체 수상이 된 호소카와 총리(TBS 유튜브 캡처, https://www.youtube.com/watch?v=IKi4XP2xZiY)

여기에 비슷한 시기, 이전의 중선거구제가 한국과 같은 소선거구제(+일부 비례대표제)로 바뀌는 이른바 ‘정치개혁’ 속에서 여론은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게 된다. 이 부분은 더불어민주당 중심으로 한국에서 이뤄지는 논의와 관련해 추후 다뤄볼 생각이나, 간단히 설명하면 소선거구제는 여론 대세에 영향받는 중도층, 부동층의 영향이 절대적으로 커진다. 중선거구제에서는 자기 지역구 내 지지층 관리(지역 조직이나 각종 이익단체)만으로도 당선이 가능했다면, 소선거구제에서는 거기에 플러스 알파가 요구된다. 즉 1명 뽑는 선거구에서 1대 1로 붙을 때와 3명 뽑는 선거구에 6명이 나왔을 때, 경쟁률은 같지만(2대 1) 당선에 필요한 득표율은 크게 다르다. 중선거구에서는 10%대 지지율로 당선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중선거구제 하에서 금권선거와 파벌정치가 판을 쳤다는 이유로 소선거제로의 개혁이 서둘러야 할 과제로 여겨졌었다.

정치개혁 분위기 속에서 1990년대를 무사히 넘기는 것으로 보였던 자민당에게 2000년 들어 위기가 찾아온다. 오부치 게이조 수상이 급사하자 자민당 내에서는 원로들 중심으로 모리 요시로를 경선 없이 후임으로 내정한다. 이 같은 ‘밀실 내정’으로 모리는 초반부터 인기가 낮았고 각종 실언과 실책으로 지지율이 9%까지 폭락하며 2001년 퇴임에 내몰린다. 이상론에 경도돼 있던 과거 야당과 달리 간 나오토와 하토야마 유키오를 중심으로 좀 더 현실적인 정책을 제시하며 대안 야당으로 부상하던 민주당도 자민당에는 위협요인이었다.

 

자민당 총재선거서 바람 일으킨 고이즈미

자민당은 여론 지지를 만회하고자 이례적으로 총재선거, 즉 차기 수상 선거를 되도록 민의가 반영되도록 구성한다. 미국이나 한국처럼 일반인이 투표권을 갖고 참여하거나 여론조사를 반영하는 형식은 아니었으나, 국회의원 외에 자민당 지방 조직(지방의원, 당원 등) 표의 비중을 이전보다 3배 높였다. 이는 총재 선거 후보자들이 내부 논리에 따를 필요 없이 좀 더 여론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효과를 낳았다.

흥행을 결정적으로 이끈 것이 ‘국민과의 직접 소통’을 강조한 고이즈미 준이치로였다. 고이즈미는 장관 경험자이긴 했으나 외무상이나 관방장관 등 이른바 요직을 거치진 않은 흔한 세습(3세) 의원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당내 실력자로 불린 수상 경험자 하시모토 류타로가 재임시 실패를 만회한다는 이유로 다시 선거에 나선 상황이었다. 유력후보도 물론 하시모토였다. 고이즈미의 맞대응 전략은 ‘미디어를 활용한 적극적 소통’이었다. 특히 그때까지 정치를 다루지 않았던 방송국의 ‘와이드쇼(주로 대낮에 방송되는 시사 프로그램으로 고이즈미 이전까지는 범죄나 연예인 신변잡기가 주 대상이었다)’나 가벼운 내용의 주간지나 여성지, 스포츠지를 적극 공략했다. 이 때 유명해진 게 ‘원 프레이즈 정치’다. 즉 불필요하게 어려운 말로 정책을 설명하지 않고 일상 언어를 반복해 사용했다. 지금도 회자되는 “자민당을 깨부수겠다”는 선언이 대표적이다.

평소 정치에 큰 관심 없던 층이 주로 보는 매체에 등장해 지지를 호소하고, 사실상의 러닝 메이트로 여성에게 인기가 많던 다나카 마키코(다나카 전수상의 딸로 하시모토 세력과는 적대관계, 아래 사진)를 발탁해 정치적 붐을 일으킨다. 고이즈미 스스로가 구태 자민당을 개혁하는 이미지 획득에 성공한 셈이다.

고이즈미와 함께 총재선거 유세에 나선 다나카 마키코(유튜브 캡처, https://www.youtube.com/watch?v=eKaCBINLGZs&t=122s)

이 같은 바람 속에서 고이즈미는 지방표를 석권하고 이에 영향 받은 국회의원도 여론을 따라가면서 총재선거에서 이례적 압승을 거둔다. 취임 당시 지지율은 일부 매체에서 80%대까지 기록한다. 독특한 미디어 전략으로 위기의 자민당을 구함과 동시에 본인도 수상이 된 것이다.

 

고이즈미 정권의 이례적 미디어 전략과 성공

수상에 취임한 고이즈미의 미디어 전략 역시 이전과 달랐다. 자민당 정권 내에는 그때까지 제대로 된 미디어 전략이 사실상 없었다. 정치적 경쟁이 적고, 레거시 미디어인 신문기자들과는 사실상 결탁(파벌기자라 불렸다)해 있는 상황에서 미디어를 통한 ‘정치의 기술’이 개입할 여지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고이즈미는 기자 개개인 혹은 특정 매체와 특별히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지 않고 그렇다고 차별적 대우를 하지 않으면서 미디어를 활용한다. 국민에게 직접 다가간다는 점을 반복해 강조하며 ‘오프 더 레코드’도 허용하지 않았다. 

미디어 활용의 대표적 수법 가운데 하나가 총리가 관저를 드나들 때 받는 기자들과의 문답이다. ‘부라사가리(ぶら下がり, 아래 사진)’라 불리는 것으로 ‘매달림’이란 뜻이다. 고이즈미 정권은 주도면밀하게 부라사가리 취재를 하루 두 번 설정했다. 낮에는 신문 기사가 되게(얘기가 되게) 자세한 설명을(대신 카메라 취재를 제한), 저녁은 TV뉴스 시간에 맞춰 ‘그림이 될 만한 짧은 대사와 표정’으로 대응했다. 정권 홍보에도 좋고, 미디어 업계 관계자들도 보고할 거리가 있으니 서로가 윈윈하는 방식이었다. 게다가 질문에 제한을 두는 일도 없었고 불편한 질문이라고 강압적으로 대답하지도 않았다(아래 영상에 일련의 과정이 잘 나온다). 

부라사가리 취재에 응하는 고이즈미 (TBS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tY3VlrZlhYM)
부라사가리 취재에 응하는 고이즈미 (TBS 유튜브 캡처, https://www.youtube.com/watch?v=tY3VlrZlhYM)

 

 

고이즈미 비서 출신으로 다양한 정책과 전략을 뒤에서 지원했던 이이지마 이사오(후에 아베 정권에도 적극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회고록에서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당내 기반이 미약한 고이즈미에게 톱다운으로 정책을 추진하려면 ‘국민에게 어떻게 정책 내용을 알기 쉽게 전할지’가 중요했다는 것이다. 고이즈미가 실제 당내 기반이 약했는지에 대해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나(같은 파벌 의원이 적지 않았다), 정권 과업으로 외쳤던 ‘우체국 민영화’가 자민당 주요 지지단체인 특정우체국장(지역 유지들이 소유하는 사실상 개별사업체로 한국에도 동일한 별정우체국이 있다)의 이해관계와 배치됐다는 점에서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즉 높은 여론 지지를 정책 추진 동력으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2002년 9월에 있은 북일정상회담(아래 사진)도 정권의 명운을 건 일대 이벤트로 추진됐다. 여기에서 김정일의 사과와 함께 처음으로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가 밝혀진다. 당시 고이즈미 정권은 외교 현장 보도를 하지 않던 주간지나 스포츠 신문 등을 포함해 모두 120여명이나 되는 취재진의 동행을 요구했고 관철시킨다. 역대 최대 규모였다. 다시 말해 ‘납치문제 해결’이라는 명목과 함께 정상회담 역시 정권 부양의 호기로 삼은 셈이다. 하락세였던 지지율은 크게 반등한다. 

북일정상회담에 임한 고이즈미 (TBS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7OXbTs6ZY4U)
북일정상회담에 임한 고이즈미 (TBS 유튜브 캡처. https://www.youtube.com/watch?v=7OXbTs6ZY4U)

2005년 총선거는 우체국 민영화가 최대 화두로 등장한다. 당시 중의원(하원)에서 가결됐던 민영화 법안이 참의원(상원)에서 부결되자 고이즈미는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에 돌입한다. 참의원 법안 부결로 중의원을 해산하는 건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고이즈미는 자신의 공천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해 법안에 소극적이었던 자민당 의원들을 '저항세력'으로 낙인 찍고 해당 선거구마다 여성 등을 ‘자객’으로 보낸다. 이 같은 정치 활극(일본에서는 ‘고이즈미 극장’이라 한다) 속에 미디어들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보도했고 투표율도 67%(직전보다 7포인트 상승)로 급상승한다. 자민당은 의석수를 84석 늘린다. 여론으로 정책을 추진하는 포퓰리스트적인 면모가 다시 드러난 셈이다.

선거 전 자민당의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담은 문서가 발각돼 논란이 되는 일도 있었다. 선거 반년전쯤 작성된 ‘우정민영화·합의형성 커뮤니케이션 전략(안)’이다. 이 문서에는 고이즈미 지지 기반을 ‘주부층과 아이들, 노년층’으로 파악하고 이들을 ‘B층’이라 규정했다(아래 그림). ‘구체적인 것은 모르나 고이즈미 총리의 캐릭터를 지지하는 층, 내각각료를 지지하는 층’으로 이들에 대해 ‘민영화의 대의와 구조개혁상의 중요성 인식 레벨을 올리는 게 필요 요건’이라 했다. 논란이 된 것은 B층의 인식 수준(IQ로 표현)을 낮은 것처럼 묘사해 놨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알기 쉽게 설명, 반복 설명’할 필요성도 제시돼 있었다. 이 뒤 B층이란 말은 일본 위키피디아에 항목이 생길 정도로 퍼졌다.

타겟 전략을 설명한 문서
타겟 전략을 설명한 문서

 

고이즈미는 이 같이 능숙하게 미디어 전략을 쓰며 자민당 정권을 되살리고 총재 임기를 꽉 채운 뒤 5년 반 뒤 미련 없이 수상직을 떠난다. 그러나 고이즈미 이후 아베, 후쿠다, 아소로 이어지며 자민당 정권은 오히려 힘을 잃어간다. 특히 1차 아베 정권이었던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소수당으로 몰락하고, 이는 2년 뒤 정권 교체의 단초가 된다. 특히 고이즈미만큼 미디어 전략에 능하지 못했던 후임 수상들은 여론의 요구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이는 아베가 다시 수상을 노리며 다른 의미의 미디어 전략(이명박 정권 때와 비슷한 일종의 장악 시도와 성공)을 마련하는 교훈으로도 작용했다.

결론적으로 정권 기반이 허약한 상황에 여론으로 정책을 추진한 고이즈미의 선택은 옳았다고 판단된다. 다만 여론 몰이를 시도한 당시의 정책 하나하나가 현재 일본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는 미지수다(대표적인 게 야스쿠니 참배 강행). 적어도 미디어 전략이 ‘정치가로서의 합리성 측면(즉 지지율)’에서는 평가할 만하지 않나 싶다. 정치적 설득에서 정치가가 ‘어떻게 알기 쉽게 전할까’를 고민했다는 점에서 그렇다(여론에 민감했던 고이즈미는 동일본대지진 이후 탈원전 전도사로 변신한 상황이다). 이 지점은 한국의 새 정권뿐만 아니라 전체 정치권이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으리라 본다.

윤재언   sharply2u@gmail.com    최근글보기
일본 히토츠바시대 강사, 전 신문기자. 연세대에서 사회학과 경제학을 전공한 뒤 2010년 매일경제신문 입사. 예전부터 갖고 있던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기자일을 뒤로 한 채 2015년 훌쩍 바다를 건넘. 2021년 히토츠바시대에서 박사 학위 취득 뒤 연구자의 길에 접어듦. 전공은 국제관계(국제정치경제)지만 일본과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정치 / 경제 / 사회(특히 미디어)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연구하고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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