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일본을 바라보는 이방인의 시선, 그 속에서의 진실 찾기

  • 기자명 이승윤
  • 기사승인 2022.07.06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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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1. 2016년 처음 일본 도쿄를 방문했다. 그 때 인상적으로 경험했던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한국인 친구 그리고 그 친구의 일본인 지인과 함께 도쿄의 어느 골목을 걷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일본인 지인이 갑자기 전봇대를 가리키며 묻는 것이었다.

“혹시 저 전봇대 윗부분에 페인트로 그어져 있는 검은 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그 일본인이 가리키는 전봇대의 검은 줄은 10m 정도 높이 전봇대의 꼭대기 부분 가까이에 그려져 있었다. 전봇대의 검은 줄은 어림잡아도 지상으로부터 7m 이상의 높이에 위치하고 있는 셈이었다. 일본을 처음 방문한 이방인이 사전 지식 없이 검은 줄의 의미를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어떤 의미를 지니냐고 되물었을 때 일본인 지인의 대답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이곳 부근에 제방이 있습니다. 도쿄는 원래 습지 곳곳에 제방을 쌓아 건립한 도시니까요. 만일 홍수나 지진이 일어나서 가까운 곳의 제방이 무너지면 물이 저 검은 줄 위치까지 차오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검은 줄은 곧 죽음을 의미하죠.”

크고 작은 지진들이 일상처럼 발생하고 있는 나라에서 검은 줄이 죽음을 의미한다는 말은 분명 옳을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인 지인은 마치 손등의 사소한 생채기를 바라보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일본인 지인의 담담한 얼굴과 죽음을 상징하는 전봇대의 검은 줄을 번갈아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일본인들은 죽음이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는 삶을 용케 태연스러운 표정으로 견디며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

그 생각의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또 다른 생각은 우리는 참으로 만만치 않은 민족과 이웃하며 살아가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2. 사실 우리 한국인들은 일본을 잘 알지 못한다. 상호 간에 활발한 경제,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고 코로나 전까지는 양국을 오고가는 여행객이 수백만명을 헤아리던 상황이지만, 정작 우리가 일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면서 단편적인 부분에 국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일례로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공통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일본의 역사적 인물은 두 명뿐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와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이다. 당연히 그들은 매우 부정적인 의미에서 인지 대상이 되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발발의 장본인이고 이토오 히로부미는 한일합방을 주도했던 핵심 인사이다. 이 두 인물은 한국인들이 일본을 바라볼 때 느끼는 보편적인 정서를 상징하고 있다.

물론 한국인 입장에서 한반도 침략의 원흉들을 증오하는 것이 문제될 수는 없다. 문제 되는 부분은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일본을 대할 때 부정적인 부분에만 기준을 맞추어 그들을 규정하는 태도이다. 어떤 시야가 한쪽 국면에만 치우칠 때 그 시야는 편협성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시야적 편협성은 필연적으로 인지 대상이 지니고 있는 다중적 측면을 인식하는데 있어 장애를 일으키게 한다.

그 장애의 결과물이 일본을 흔히 ‘섬나라 오랑캐’로 규정짓는 모습이다. 그러나 서글프게도 ‘섬나라 오랑캐’라는 관점 속에서는 일본의 진정한 실체를 찾을 수 없다. 그렇기에 한국인 대부분은 연산군 시절 조선에서 먼저 발명되었던 은 추출법(연은분리법)을 뒤늦게 도입한 일본이 기술의 적극적 활용을 통해 17세기 세계 은 유통량의 1/3 가량을 차지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뿐만 아니다. 한국인 대부분은 세계 최초의 근대적 선물(先物) 시장이 17세기 일본에서 도지마 쌀시장(堂島米市場)을 통해 열리게 되었다는 것도, 에도 막부 시대(1603~1866)의 수도 에도(도쿄의 옛 지명)가 눈부신 상업 발전을 통해 인구 백만에 육박하여 유럽의 대도시들을 능가하는 세계 최대의 도시 중 하나였다는 사실도 전혀 모른다. 적어도 일본에 관한 한 우리는 조선 후기 소중화(小中華) 의식 속에서 정신 승리에 몰두했던 사대부 선비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3. 태평양 전쟁(1941~1945) 당시 일본과 맞서 싸웠던 미국 역시 일본에 대하여 무지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는 무지에 대한 변명이 어느 정도 가능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이 본격적으로 세계열강의 반열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일반적인 미국인들에게 일본은 전설 속의 '지팡구(ジパング: Zipangu)'처럼 아득히 먼 나라였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양국은 상호 간의 국익 앞에서 사활을 걸고 갈등할 이유가 좀처럼 없었다. 태평양 전쟁 때조차도 서양인들의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운, 일본군의 반자이( ばんざい: 만세)돌격과 항복을 거부하는 집단 옥쇄 행위가 없었다면 미국 정부가 루스 베네딕트 여사에게 일본의 실체에 대한 연구서를 위촉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인류학을 전공했던 루스 베네딕트는 단 한 번도 일본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일본 관련 서적과 논문 같은 문헌들과 영화와 같은 영상 기록물 그리고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에 거주했던 일본인들과의 면담들을 바탕으로 일본학 서적을 완성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1년 후 1946년 발간된 그 책의 이름이 곧 <국화와 칼>이다.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발발한 태평양 전쟁은 미국으로 하여금 일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접근을 요구하는 계기가 됐다. 미국 정부는 인류학자였던 루스 베네딕트 여사에게 일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연구서를 부탁했고 그 결과물이 [국화와 칼]이다.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발발한 태평양 전쟁은 미국으로 하여금 일본에 대한 진지한 태도의 접근을 필요케 하는 계기가 됐다. 미국 정부는 인류학자였던 루스 베네딕트 여사에게 일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연구서를 부탁했고 그 결과물이 [국화와 칼]이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4. <국화와 칼>에서 일본의 실체에 대하여 접근하기 위해 일관적으로 관통해 가는 키포인트는 바로 온(恩 한국식 발음: 은)이다. 일본식 발음인 온은 한자의 뜻 그대로 해석하면 은혜를 의미한다. 그런데 루스 베네딕트가 보기에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온은 단순한 은혜의 범위를 넘어선다.

“온의 여러 용법을 모두 관통하는 의미는, 사람이 짊어질 수 있는 부담, 채무, 무거운 짐이다. (중략) 일본인이 ‘나는 누구에게서 온을 입었다’고 말하는 것은 ‘나는 누구에게 의무의 부담을 지고 있다’ 라는 의미다.”

일본인들이 온을 중시하는 이유는 일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각자 알맞은 위치 갖기’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각자 알맞은 위치 갖기’는 온의 개념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각자 알맞은 위치 찾기’는 물론 계급 구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일본의 계급 구조는 위로는 (천황)을 정점으로 하여 그 아래로 (황실 귀족), (무사), (농민, 공인, 상인)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계급은 마땅히 서로의 위치를 조화롭게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그 조화로운 질서를 온전히 지탱시켜 주는 관념적 매개체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온 즉 은혜에 대한 채무 갚기인 셈이다.

루스 베네딕트는 온이라는 부채를 갚기 위한 의무로서 기무(義務 한국식 발음: 의무)와 기리(義理 한국식 발음: 의리)를 들었다. 기무는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결코 그 전부를 갚을 수 없고 또 시간적으로도 한계가 없는 의무이다. 천황, 국가, 양친, 자신의 일에 대한 의무가 이 범주에 들어간다. 기리는 자신이 받은 은혜와 같은 수량만을 갚으면 되고 또 시간적으로도 제한된 부채로서 세상에 대한 기리와 이름(名)에 대한 기리로 나누어진다. 은혜 갚기의 종류가 다양하게 세분되어 있어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사실 요점은 하나이다. 이토록 부채를 갚기 위한 의무의 종류가 세분화되어 있을 정도로 일본인의 의식 구조에 있어 온이라는 관념은 몹시 무거운 심리적 압박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한국에서 고전으로 가장 사랑받는 작품은 님에 대한 정절을 주제로 하는 <춘향전>이지만 일본에서는 <주신구라>(忠臣蔵 한국식 발음: 충신장)를 친다. <주신구라>는 에도 막부의 고위 관리에게 자신들의 주군(主君)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에 대해 분개하여, 47인의 사무라이들이 직접 그 관리의 저택에 침입해 복수를 감행한 1703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이 작품이 지금까지도 일본인들에게 광범위한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 47명의 사무라이들은 온에 대한 채무를 목숨을 바쳐 갚은 의사(義士)들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전쟁 시에 항복자와 사망자의 비율이 서양의 경우 평균 4:1인데 비해 태평양 전쟁 일본 군인들의 경우 최대 1:120의 수치를 기록했다. 그 이유는 적에게 항복하는 것이 온에 대한 배신이라는, 정신적 부채 의식이 크게 작용한 까닭으로 보인다.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에서 패전 후의 일본인들이 온에 대한 정신적 굴레를 벗고 새로운 길로 나아갈 것을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생활방식 때문에 값비싼 대가를 치러 왔다. 그들은 미국인이 공기처럼 매우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단순한 자유를 스스로 거부해 왔다. 이제 일본인들은 패전 이래 민주화로 향하고 있다. 우리는 순진하게, 또한 천진난만하게 자신이 원하는 데로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일본인을 미치도록 기쁘게 하는 것인가를 상기해야 한다.”

루스 베네딕트는 하나의 예로 자신이 인터뷰했던 스기모토 부인을 든다. 스기모토 부인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입학한 도쿄의 미션스쿨에서, 자신만의 정원을 배당받았을 때의 기쁨을 이야기해주었다.

“무엇이든 심어도 되는 이 정원은 나에게 개인의 권리라는, 아직까지 경험한 일이 없는 전혀 새로운 감정을 맛보게 했다. (중략) 그런 행복이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놀라움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대부분 꽃을 심었으나 스기모토 부인은 감자를 심었다.

“이 바보 같은 행위로 내가 얻을 수 있었던 무모한 자유의 감정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중략) 자유의 정신은 나의 문을 노크했다.”

이러한 예를 든 후 루스 베네딕트는 이야기한다.

“이 위장한 자연은 그녀에게는, 그녀가 그때까지 교육받아 왔던 위장된 의지의 자유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 곳곳에 이와 같은 위장이 가득 차 있었다. 일본 정원의 땅 속에 반쯤 파묻혀 있는 큰 바위들은 모두 신중하게 골라 운반해 온 다음 땅 밑에 작은 돌을 깔아 그 위에 놓아둔 것이다. (중략) 국화도 마찬가지로, (중략) 볼만한 꽃잎은 한 잎 한 잎 재배자의 손으로 정돈되고, 또 때때로 살아 있는 꽃 속에 눈에 띄지 않는 철사로 만든 고리를 끼워서 올바른 위치를 지키게 한다.”

루스 베데딕트의 시각으로 보면 결국 일본인들에게 사무라이들의 상징인 칼뿐만 아니라 정원의 국화조차도 정신적 억압기제로 작용하고 있었던 셈이다.

일본 정원은 작은 꽃, 작은 나무 한 그루조차 매우 세밀하게 그리고 고도의 계산 하에 조성된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는 '각자의 알맞은 위치 찾기'의 관념이 정원 조성의 영역까지 그 영향을 미친다는 한 방증이다.
일본 정원은 작은 꽃, 풀 한포기조차 매우 세밀하게 그리고 고도의 계산 하에 조성된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는 '각자의 알맞은 위치 찾기'의 관념이 정원 조성의 영역까지 그 영향을 미친다는 하나의 방증이 된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5. <국화와 칼>이 일본사회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연구서로서 매우 뛰어난 업적을 이룬 고전인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비판적 시각이 몇 가지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첫 번째, 일본에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연구자가 일본 연구서를 저술했다는 점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이 존재한다. 두 번째, 과연 한 국가와 그 국가의 국민들을 어떤 하나의 관점 혹은 틀에 맞춰 바라보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 하는 비판이 있다. 세 번째, 온에 대한 부채 의식이 동아시아에서 오직 일본만의 고유한 특성인가 하는 의문 제기가 있다. 의미에 있어 미묘한 차이가 있을 수는 있으나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도 일본의 기무, 기리에 해당되는 의무, 의리에 대한 관념이 염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서평을 통해, 상술한 비판적 시각들에 대하여 시시비비를 논할 의사는 전혀 없다. 그것은 이 서평의 논점을 벗어난다. 우리는 <국화와 칼>의 주장에 대하여 동의할 수도 있고 부정할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동의와 부정의 각각의 시각에서 머무는 것이 아닌, 상반된 관점을 두루 살펴보는 과정 속에서 또 다른 새로운 접근방식으로 일본을 바라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국화와 칼>이라는 훌륭한 텍스트는 일본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유용한 실마리를 던져 주고 있다는 점에 그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실마리를 통해 ‘섬나라 오랑캐 취급’의 관점에서 벗어나 어떻게 이전보다 가깝게 일본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

 

6. 2022년 6월 29일(현지시간) 한미일 정상회담이 열렸다. 회담 장소는 나토 정상 회의가 개최되고 있는 스페인 마드리드였다. 한미일 정상회담에 참석함으로서 윤석열 대통령은 한반도의 핵문제를 한미일 공조를 통해 해결하겠다는 의사를 대내외적으로 분명히 나타낸 셈이다.

한국의 안보 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과 북한에 거리를 두고 일본을 새롭게 끌어들이는 것이 옳은 판단인가 하는 문제는 분명 민감하고도 첨예한 이슈다. <국화와 칼>에 대한 관점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동의와 부정의 상반된 시각이 존재할 수 있다. 우리의 국익에 부합되도록 일본을 설득하고 또 그에 따른 국내외적 반발을 해소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난제이다.

그러나……. 전후 미국이 일본인들을 소위 ‘JAPS’ 라고 지칭하는 경멸과 증오의 대상에서 이해의 대상으로 인식을 전환하였을 때 양국 사이에 공존의 길이 열렸다. 한일 관계도 그렇지 않을까. 혐일과 혐한을 넘어 서로를 다층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서만이 양국 간에 진정한 공동 번영의 길이 열릴 것은 분명하다.

설사 일본과의 공존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도, <국화와 칼>에서의 루스 베네딕트의 조언은 일리 있어 보인다.

“적의 행동에 대처하기 위해 우선 적의 행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손자병법의 명문장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이라는 말과 일백상통하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극일(克日)을 위해서건, 혹은 일본과의 공존 번영을 위해서건 그 목적 달성을 위해 일본을 정확히 알고 이해하는 것은 필수요소인 것이다. 일본을 진정 이해하기 바라는 이들을 위해 뛰어난 지침서 중 하나가 될 수 있는 책 <국화와 칼>의 일독을 권한다.


<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윤식, 오인석 옮김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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