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노동기구의 서한은 '의견 조회'일 뿐이다? 맥락 살펴보니

  • 기자명 김정은 기자
  • 기사승인 2022.12.13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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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화물연대)가 지난 9일 조합원 총투표를 거쳐 16일 간 이어 온 파업을 종료하기로 발표했습니다. 대통령실은 화물연대의 총파업 철회 결정에도 강경 대응을 시사했습니다.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같은 날 "화물연대의 집단운송거부(총파업)는 우리 경제와 민생에 천문학적 피해를 줬다"고 말했습니다. 화물연대의 총파업 철회에 정부의 '법과 원칙' 기조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국제노동기구(ILO)가 지난 2일 한국 정부에 보낸 서한을 두고 '국제기구가 정부에 개입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국제노동기구 사무국은 화물연대와 국제운수노조로부터 '개입' 요청을 받았다며, 2일 우리 정부에 서한을 보냈습니다. 공문의 제목이 'Intervention(인터벤션, 개입)'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노동계는 국제노동기구가 '긴급개입' 절차에 나섰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고용노동부는 지난 4일부터 파업이 끝난 12일까지 'Intervention'이라는 영어 단어는 '개입'보다 '의견조회(전달)'의 의미가 강한 것으로 해석된다고 해명(아래 사진 참고)했습니다. 

 

▲고용노동부가 7일 발표한 반박자료. 고용노동부는 국제노동기구의 공문이 '노동계의 개입 요청에 따른 접수 사실을 알린 것'이라고 해명했다. 사진=고용노동부 블로그

야당에서는 국제노동기구의 의견을 폄하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정의당 위선희 대변인은 5일 "ILO 개입의 의미조차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에 어이가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이수진 원내대변인도 7일 "강제노동을 금지하는 국제협약에 따른 ILO의 '즉시 개입'을 '의견 조회'에 불과하다며 거짓으로 국민을 호도하고 있다"고 정부를 비판했습니다.  

국제노동기구가 보낸 공문을 두고 '의견조회(고용노동부)'라는 주장과 '긴급개입(노동계)'이라는 의견이 대치되고 있는 겁니다. 공문의 표현을 둘러싼 의견대립은 온라인 커뮤니티 등으로 확산(아래 사진 참고)됐습니다. <뉴스톱>이 논란의 쟁점을 정리했습니다.

 

▲국제노동기구의 'Intervention' 표현을 둘러싼 논란이 인터넷에서 확산되고 있다. 사진=네이버 view

◈ 국제노동기구의 Intervention, 의견조회? (긴급)개입?

▲화물연대 총파업 일지. 사진=뉴스톱 정리

먼저 화물연대의 파업 일지(위 사진 참고)를 살펴보겠습니다. 화물연대는 지난 달 24일 안전운임제 일몰제 폐지를 요구하며 총파업에 돌입한 이후, 28일 국제노동기구에 '긴급개입'을 요청했습니다. 정부가 '업무개시명령' 카드를 꺼내들자 국제기구에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국제노동기구는 노동계로부터 개입 요청을 받았다며 2일 정부(고용노동부)에 공문을 보냈습니다. 

고용노동부가 원본을 공개하지 않은 채 국제노동기구가 '개입'이 아닌 의견을 조회했을 뿐이라고 연일 주장하자, 화물연대는 4일 원본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를 공개했습니다. 이들은 ILO 국제노동기준국 '카렌 커티스(Karen Curtis)' 부국장이 2일 화물연대에 보낸 공문을 공개(아래 사진 참고)하며, "국제노동기구(ILO)가 한국 정부에 대한 긴급개입 절차를 개시했다"고 언급했습니다.

▲국제노동기구가 지난 2일 화물연대에 보낸 서한 원문, 사진=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 본부

노조가 공개한 서한(위 사진 참고)은 국제노동기구가 우리 정부에 보낸 공문의 원본이 아닙니다. 지난 달 28일 국제운수노련과 화물연대 등이 국제노동기구에 개입을 요청한 서한을 '접수했다'고 밝힌 문서입니다. 화물연대는 해당 문서의 원본을 번역해 보도자료에 함께 실었습니다(아래 사진 참고).

▲화물연대는 국제노동기구가 보낸 문서를 번역했다. 사진=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 본부

화물연대가 강조하는 부분은 빨간색 상자(위 사진 참고) 안에 적힌 내용입니다. 원본과 노조의 번역문을 살펴보면, 국제노동기구가 정부에 보낸 서한 전문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들이 정부에 '입장'을 전달했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입장은 '결사의 자유 기준 및 원칙과 관련한 감시감독기구의 입장'입니다. 화물연대는 "ILO가 정부를 상대로 긴급개입 개시 공문을 발송하면서 기존 입장을 첨부하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노조가 보도자료를 발표한 4일, 정부도 반박자료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고용노동부는 "국제노동기구의 개입은 공식적인 감독기구에 의한 감독절차는 아니"라면서 "그간의 통상적인 의견조회와 다르지 않다"고 반박했습니다. 이러한 정부의 주장을 비판하는 언론 보도가 나오자, 6일에는 "서한에서 사무국은 한국정부의 조치가 결사의 자유를 침해했거나 관련 협약을 위반했다는 점을 명시한 바가 없다"며 "노동계의 개입 요청에 따른 접수 사실을 알리면서 관련 감독기구의 기존 판단을 알려준 것일 뿐"이라고 재차 강조했습니다. 

 

◈ 국제노동기구..."진정이나 이의가 접수될 때는 '특별 감독절차' 진행"

국제노동기구(ILO, 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는 노동인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19년 설립됐습니다. 현재 187개 회원국이 노동문제를 논의하고 있고, 우리나라는 1991년에 회원국으로 가입했습니다.

1998년 국제노동기구 총회에서 <ILO 근로자 기본권 선언(노동 기본원칙과 권리 선언)>이 이뤄진 이후, 4개 분야의 8개 협약(아래 참고)이 '핵심협약'으로 지정됐습니다.

① 아동노동금지

② 성ㆍ출신에 따른 고용차별 금지

③ 강제노동 금지

④ 결사의 자유 보호

그 중 이번 논란의 쟁점이 된 '결사의 자유 보호 협약(제87호ㆍ제98호)'은 자유로운 노사단체 설립과 가입 및 활동 등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사법정책연구원이 지난 4월에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2021년 2월 국회 동의를 통과해 그 해 협약을 비준했습니다. 이로써 우리 정부는 국내적으로 협약을 이행할 국제법적 의무를 부담하게 됐습니다. 

한편 국제노동기구는 세 개의 상설기구(총회ㆍ이사회ㆍ사무국)로 이뤄져 있습니다. 총회와 이사회 및 산하 위원회는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지만, 이번에 우리 정부에 공문을 보낸 사무국은 의결권이 없습니다. 이사회의 감독 하에 활동을 지원하는 '행정조직'이기 때문입니다. 

사법정책연구원에 따르면 ILO 체제 내에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판결(judge)'을 선고할 수 있는 국제사법기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회원국이 국제노동기준을 스스로 준수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이행감독절차'를 구축했습니다.

이 절차는 '정기절차'와 '특별절차'로 나뉩니다. 정기절차가 회원국이 정기적으로 제출하는 국가보고서에 대한 심사절차인 반면, 특별 감독절차는 회원국에 진정이나 이의가 접수될 때 진행(아래 사진 참고)됩니다.

▲ILO 기본 협약인 '결사의 자유' 위반에 관한 특별절차. 회원국에 '진정'이나 '이의'가 접수될 때 이뤄진다. 사진=국회입법조사처 <ILO 핵심협약의 비준현황과 과제(2020.06)>

국가인권위원회와 국회가 2017년 공동으로 공개한 토론회 자료를 살펴보면, ILO는 기본협약인 '결사의 자유'에 관해서는 <결사의 자유위원회>와 <사실조사 및 조정위원회>를 설립해 협약 이행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회원국의 노사단체로부터 결사의 자유 원칙이 위반됐다는 주장이 접수되면, ILO가 검토한 이후 정부에 권고안 실행을 요구합니다. 

이번에 노동계가 ILO에 긴급개입을 요청한 것은 의결권을 가진 위원회(결사의 자유위원회 등)를 거친 조치가 아닙니다. 정식으로 이뤄지는 '특별 감독절차'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결사의 자유위원회>를 거친 특별 감독절차는 통상 2년이 소요되기 때문에, 이를 기다릴 수 없을 만큼 신속한 행동이 필요할 때 사무총장이 직권으로 긴급개입에 나섭니다. 이러한 이유로 고용노동부가 해명자료에서 "개입은 <결사의 자유위원회> 등 공식적인 감독기구에 의한 감독절차가 아니"라고 밝힌 것입니다. 

 

◈ 고용노동부 "정보공개법에 따른 비공개 자료...원본 제공 어려워"

ILO가 정부에 보낸 공문의 제목인 'Intervention(인터벤션)'에 대해서는 여전히 해석이 갈립니다. 윤애림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책임연구원은 7일 TBS 라디오 <신장식의 신장개업>에서 추경호 장관이 "정부 측 의견을 조회한 거다"라는 취지로 답변했다는 인터뷰 진행자의 발언에, "전혀 아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면서 "ILO 사무총장의 개인적인 의사 표명이 아니라 그동안의 ILO의 감독기구의 판단 내용을 다시 한번 환기시켜 준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뉴스톱>은 ILO의 서한 전문을 통해 맥락을 파악하고자 고용노동부에 원본 공개를 요청했으나, 고용노동부 국제협력 담당자는 "정보공개법(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 제9조 1항 2호에 따른 비공개 자료로 관리하고 있어서 원본 제공이 어렵다"고 답했습니다. 해당 조항은 '국가안전보장ㆍ국방ㆍ통일ㆍ외교관계 등에 관한 사항으로서 공개될 경우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정보'를 비공개 대상으로 규정했습니다.

'긴급 개입'이라는 표현이 문서에 포함됐는지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는 "서한의 명칭 제목이 'Intervention(인터벤션)'이라고 돼 있다"며, "업무복귀명령이 근로자의 결사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본 사례를 참고하기를 바란다고 명시했다"고 밝혔습니다. 또 "사무국이 의견을 표시할 때 '우려'나 '심각한'과 같은 주관적인 단어를 쓰는데 이번 서한에는 그러한 표현은 없었다"고 강조했습니다. 

고용노동부와 노동계가 국제노동기구의 서한을 두고 대립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2013년 박근혜 정부 당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해직자 9명이 가입돼 있다는 이유로 고용노동부는 '법외노조(법률상 노조가 아님)'를 통보했습니다. 당시 국제노동기구가 정부의 결정에 '긴급 개입'에 나섰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자, 고용노동부는 그 해 8월10월 'Intervention'이 개입이 아닌 '의견조회'에 가깝다고 반박(아래 사진 참고)했습니다. 

 

고용노동부가 지난 2013년 10월 "ILO가 한국 정부에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해직자의 조합원 권리를 인정하라며 서면으로 긴급개입을 통지했다"는 언론보도에 반박하는 보도자료를 냈다. 당시 고용노동부는 Intervention이라는 단어가 '의견조회'에 가깝다며, 공식적인 감독 절차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사진=고용노동부 보도자료
▲고용노동부가 지난 2013년 10월 "ILO가 한국 정부에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해직자의 조합원 권리를 인정하라며 서면으로 긴급개입을 통지했다"는 언론보도에 반박하는 보도자료를 냈다. 당시 고용노동부는 Intervention이라는 단어가 '의견조회'에 가깝다며, 공식적인 감독 절차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사진=고용노동부 보도자료

고용노동부가 2013년에 낸 보도자료를 살펴보면, 이번에 발표한 반박자료의 문구와 유사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에 이어 윤석열 정부에서도 같은 이유로 국제노동기구의 Intervention 문서는 '의견조회'에 불과하다고 해명하고 있습니다.

한편 정부가 화물연대를 상대로 긴장을 높이자 국제노동기구는 "정부가 사태를 진정시켜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7일 열린 국제노동기구 아태(아시아ㆍ태평양) 총회 본회의에서 국제노동기구 사무총장 '질베르 웅보(Gilbert Houngbo)'는 "한국 정부에 '정부가 긴장을 높이지 말고 사태를 진정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며 "사회적 대화로 잘 해결할 수 있도록 국제노동기구가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 안전운임제 3년 연장...대통령실 "화물연대에 달려 있어"

정부는 파업 종료에도 '법과 원칙' 기조를 강조하며 화물연대를 압박하고 나섰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9일 경제 5단체장들과 가진 비공개 만찬에서도 "앞으로도 모든 것에 있어서 법과 원칙에 따라 할 테니 기업들은 걱정하지 말고 투자와 고용 측면에서 잘 도와달라"고 말했습니다. 경제단체장들이 화물연대의 파업 종료를 두고 "정부가 법과 원칙을 잘 지켜서 해결됐다"고 말한 뒤 이뤄진 발언이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달 29일 화물연대의 파업에 첫 업무개시명령을 내렸다. (YTN 방송영상 갈무리)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달 29일 화물연대의 파업에 첫 업무개시명령을 내렸다. (YTN 방송영상 갈무리)

'법과 원칙'으로 재계를 돕겠다고 시사한 것과 함께 정부는 이번 파업의 불씨가 된 '안전운임제 3년 연장안'에 대해서도 "화물연대에 달려 있다"고 밝혔습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11일 <동아일보>에 "화물연대가 파업을 접은 이후에도 '안전운임제 사수'를 주장하고 있는데 제도 개선을 위한 틀을 만들 생각 없이 같은 주장만 반복하면 받아들일 수 없다"며 "화물연대뿐 아니라 이해관계자가 모여서 새로운 제도를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을 전했습니다. 국토교통부가 화물연대에 파업 철회를 조건으로 내건 '안전운임제 일몰제 3년 연장'이 엎어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고용노동부의 주장대로 화물연대가 국제노동기구에 요청한 '긴급 개입' 절차는 공식 감독기구에 의한 감독 절차가 아닙니다. 우리 정부에 서한을 보낸 사무국은 의결권이 없는 행정 조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부가 국제노동기구의 문서 전달을 '의견조회'로 해석한 것을 두고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고용노동부는 협약이 비준되기 이전인 2020년 9월에 자료집을 통해 "핵심협약 비준은 우리나라가 수십 년 간 해온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며, '자율과 책임의 노사관계'를 위한 일"이라고 홍보했습니다. 정부가 지난해 핵심협약인 '결사의 자유 보호 협약'을 비준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한 만큼, 국제노동기구의 공문을 무겁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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