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때 룸살롱, 술판, 난리쳤다" 설민석 주장은 무엇이 틀렸나

  • 기자명 정재환
  • 기사승인 2019.02.25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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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3.1운동에 대한 오해와 궁금증을 풀고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기 위한 팩트체크 글이다.

1. 민족대표 33인은 어떻게 독립선언에 참여했나

2·8독립선언을 준비하던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은 민족 지도자들의 의견을 구하는 동시에 지원을 요청하고자 학생대표 중 한 사람인 송계백을 경성(서울)으로 급파하였다. 송계백은 현상윤을 만나 사각모 안에 숨겨온 선언서 초안을 보였고, 학생들의 움직임에 크게 자극받은 현상윤은 선언서 초안을 최린·송진우 등에게 보이고, 1월 20일경 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은 천도교 교주 손병희를 찾아갔다. 오래 전부터 독립 운동의 기회를 모색하고 있던 손병희는 이들과 함께 그 자리에서 독립선언을 결의했다.

이들은 운동을 대중화하기 위해 조선인들에게 신망을 받고 있는 인사들과 접촉을 시작했다. 대한제국시대 구 관료계의 윤용구·한규설·박영효·윤치호 등이 참여를 거부하자, 손병희는 종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운동을 이끌기로 결정했고, 때마침 관서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던 기독교계 인사들과 연결되었다. 2월 11일경 정주의 이승훈이 상경해 최린과 협의하여 천도교와 기독교를 중심으로 거사를 준비하면서 불교 및 유림과도 접촉을 시작했다.

2월 24일 밤 최린이 한용운을 방문하여 진행 상황을 설명하자, 한용운은 흔쾌히 참여 의사를 밝히며 불교계 동지들과 의논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시일이 촉박하고 일제의 감시가 심해 결국 불교계에서는 한용운과 백용성 두 사람만 참여하게 되었다. 불교계 인사들이 대부분 깊은 산 속에 자리한 사찰에 있는 관계로 빨리 협의를 할 수가 없었다고도 한다.

유림과의 연대가 이루어지면 광범위한 민족연합세력 결성을 볼 수 있었으나, 초기에 접촉한 김윤식·윤용구 등은 소극적이었고, 한용운이 거창을 방문하여 지방 유림의 대표격인 곽종석을 만났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성주의 김창숙에게도 성태영을 통해 참여를 요청하였으나, 김창숙은 모친의 병환으로 인해 2월 그믐날에야 서울에 올라올 수 있었다. 김창숙은 시일을 놓쳐 유교계가 참여하지 못한 것을 몹시 애통해했다. 결국 천도교·기독교·불교계 인사들만이 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 해서 모두 33인이었다.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전백 양한묵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흥식 신석구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최린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3월 1일 태화관 독립선언식. 독립기념관 소장

 

2. 민족대표는 왜 태화관으로 장소를 변경했나

2월 28일 오후 5시 손병희 집에서 민족대표 23인이 참석한 가운데 마지막 회의를 열었다. 보성사에서 인쇄된 선언서는 각 종단 조직을 통해 전국에 배달되고 있었고, 이제 남은 것은 거사 당일 행동 계획을 정하는 것 정도였는데, 박희도가 독립선언 장소 변경을 요청하는 안을 내놓았다. 예정대로 민족대표들이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할 경우, 군중심리에 의해 폭동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으니, 장소를 바꾸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는데, 이에 참석자 전원이 찬성하였다. 독립선언 및 운동을 어디까지나 ‘비폭력’으로 실행한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한 결정이었다.(이상은 이정은의 글을 바탕으로 정리)

태화관 사진. 이상은 신현규, '문화융합,명월관요릿집연구' 참고.

 

3. 태화관은 어떤 곳인가

1903년 9월 17일 개관한 요릿집 명월관은 궁내부 주임관(奏任館)과 전선사장(典膳司長)을 지낸 안 순환이 궁중에서 나온 뒤 차린 것이었다. 명월관은 ‘청풍명월(淸風明月)’에서 따온 이름으로, 명사와 한량들에게 편안한 장소와 푸짐한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모토로 했으며, 명월관 본관은 대형 연회를 개최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었고 무대도 설치되어 기생들이 공연을 했다.

당시 명월관은 고급 요리와 유흥을 즐기려는 한량들과 관료배들을 위한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외국사절단을 접대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으며, 결혼식이나 사은회, 회갑연 등이 열리는 곳이었다. 다시 말해 명월관은 음식과 술, 대소 연회, 접빈사, 기생들의 공연 등이 치러지는 복합 문화 공간이었다.

1926년 6월 25일 명월관 본점에서는 3.1운동 당시 발생한 제암리 학살을 세계에 알리고 총독부의 압력에 의해 추방되었다가 6년 만에 다시 조선을 찾은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를 위한 환영식이 열렸다. 그러니까 명월관은 술만(?) 마시는 요즘의 룸살롱과는 다른 곳이었다.

스코필드 박사 환영식(동아일보, 1926.6.27)

태화관은 명월관의 주인 안순환이 1918년 인사동 순화궁을 이완용으로부터 매입해 명월관 별관으로 문을 연 곳으로, 2층 건물에 크고 작은 방이 많아 곧 경성의 부호와 총독부 관리, 친일파 등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3월 1일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곳은 ‘별유천지 6호실’로 태화관 후원 깊숙한 언덕에 자리한 태화정이었다.

 

4. 민족대표들은 대부분 변절했나

2018년 11월 14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5부는 민족대표 33인 폄훼 논란을 일으킨 설민석 씨가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1400만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설 씨의 발언 중 ’민족대표 대부분이 1920년대에 친일로 돌아섰다‘는 대목을 허위로 판단한 것이다. 사전적으로 ‘대부분’은 ‘절반이 훨씬 넘어 전체량에 거의 가까운 정도의 수효나 분량’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부분이라고 하면 민족대표 33인 중 과반수를 변절자로 봐야 하는데, 이는 민족대표의 후손들뿐만 아니라 강의를 접한 이들 대부분에게 충격과 실망을 안겨주었다.

 

민족대표 전원이 친일로부터 자유롭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일부’ 혹은 ‘소수’가 일제 말에 친일행위를 하였다. 해방 이후에 ‘반민특위’가 제대로 활동했다면 친일 문제에 대한 법적·민족적 심판이 이루어졌을 것이고, 친일파들로 인해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왜곡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해방 후 친일파 심판이 실행되지 못한 것은 민족사의 큰 짐으로 남았고, 이 문제를 역사적으로나마 정리하기 위해 ‘민족문제연구소’가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수십 년간 조사 끝에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른 것은 민족대표 33인 중 최린·정춘수·박희도 등 3명이었다.

‘룸살롱에 갔다’, ‘낮에 술판을 벌였다’, ‘인력거 대신 택시를 보내라고 난리를 쳤다’ 등의 표현에 대해서는 ‘허위 사실이 아니다’라는 설 씨측의 주장을 받아들였으나, ‘역사에 대한 정당한 비평의 범위를 일탈했으며, 선조들에 대한 후손들의 합당한 경외와 추모의 감정을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같이 점심을 들었고, 오후 2시가 임박하자 ‘선언식을 갖고 축배를 들고 있다’고 조선총독부에 통고했다. 세부적인 상황에 대한 관련자들의 기록이 서로 달라 당시 상황을 정확히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축배’와 ‘술판’의 차이는 너무나도 엄청나다.

다음은 당시 태화관에 있던 민족대표 중 권동진, 이갑성, 현상윤의 글 가운데 태화관에서의 일을 기록한 대목들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같은 날 벌어진 같은 사건에 대한 기록이지만, 필자가 저마다 본 것, 느낀 것, 기억하는 것, 기록하고 싶어 하는 것 등에서 많은 차이가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권동진의 글에 ‘자동차를 부른 이유’에 대한 설명이 퍽 흥미로운데, 마치 희곡의 한 장면을 묘사하듯이 남긴 권동진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택시를 불러달라고 난리를 쳤다’는 것도 적절한 설명은 아니다. 역사를 비판적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해와 해석과 비평은 독자들의 몫이다.

3·1운동의 회상 / 현상윤

(삼일공감 제20호)

인사동 명월관에서는 오전 11시를 기해 33인이 모여서 독립선언식을 엄숙히 거행하였다. 그와 동시에 사람을 시켜 총독부에 선언서를 송달하고 또 파고다 공원에 회집한 학생들 앞에서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선언서의 낭독을 들은 군중들은 조선독립만세를 목이 쉬도록 연호하면서 동서남북으로 갈라져서 경성시가로 시위행진을 하였다. 경관과 헌병들은 너무도 의외의 사실에 눈이 둥굴해져서 상관은 명령을 내릴 수도 없고 하관은 상관의 명령이 없이 독자적으로 할 수도 없는 모양이어서 길 좌우에서 행진을 물끄러미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겪은 기미년 3월 1일, 3·1 당시를 회상하며 / 이갑성

(3·1정신 통권 7호)

한 시 정각이 조금 지나며 천지가 진동하는 독립 만세 소리가 들려왔다. 일당에 모인 30여 인도 눈물을 흘리면서 독립 만세를 목이 터지라고 불렀다. 모두가 흥분을 못 이겨 앉았다 섰다 하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중략) 우리는 이제 독립선언의 통지를 받고는 우선 우리를 체포하러 올 일경을 피하지 않고 맞이하여 다음 일을 제2회 담당자에게 옮길 따름이다. 세 시가 되어도 일경은 보이지 않고 밖으로부터 하늘이 떠나갈 듯한 만세 소리만 들리었다. 우리가 예정한 대로 3천 리 강산 전역이 독립 만세 소리로 덮인 것이 마음에 갸륵해졌다.

 

민족대표 권동진이 회고하는 기미년 3월 1일 독립선언의 그 순간

(삼일공감 제22호)

약속한 시간인 열 시에 태화관에 이르니 몇 분은 이미 모여 있었다. 긴장하기는 했으나 태연한 표정으로 단정히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요리상이 들어올 때까지 우리는 보통 손과 같이 태연히 상을 받고 앉아서 이미 준비된 선언서와 봉투를 꺼내 하나는 장곡천(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에게 또 하나는 종로서장에게 보내기로 하였다. 장곡천에게는 연락원으로 있던 학생에게 전하기로 하고 종로서장에게는 요리집 인력거꾼을 시켜 전하도록 하였다. 그때 우리는 전하는 이들에게 문 앞에서부터 가지고 온 것이 독립선언서라는 것을 소리치며 알리고 들어가 전해 달라고 부디부디 일러 보내니 그때 시간은 정오가 가까워진 때였다.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들과 군중들은 우리가 장소를 변경한 것을 알고 불같이 나와 달라 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들의 청원을 받아줄 수는 없었다. 이미 우리가 있는 곳과 선언서를 보낸 후였고, 장소를 변경한 것은 먼저 말한 바와 같은 이유에서인지라 그대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요리를 먹기 시작하니 시간은 열두 시를 알렸다.

(중략)

왜경부가 들어와서는 손병희 씨 앞에 와서 마치 대감들 앞에 나선 종놈같이 어름거리며 손을 비비댔다.

“가셔야지요.”

“암! 가야지.”

엄연하고도 위엄이 보이는 날카로운 대답이었다.

“어떻게 가시겠습니까?”

“우리는 붙들려가는 사람이다. 너희는 붙잡아가는 편이다. 네 마음대로 해봐라!”

예리한 칼날과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군중들은 흥분해 이 집에 일어난 일을 알고 싶어 한다. 그대로 우리를 붙들어간다면 폭동이 일어날 것은 눈앞에 보이는 일이다. 너희도 알다시피 우리가 일으킨 독립선언 운동은 무저항이 제1의 목적인 것이니 우리를 다 같이 가도록 하되 자동차를 불러 타고 가도록 하게.”라고 말했다. 분명코 나의 언사는 명령이었다. 다른 동지들도 “그게 좋겠다.”라 동의했다.

“그러겠습니다.”

나는 말을 이었다.

“우리를 너무 경계할 필요는 없다. 우리 33인은 조금도 반항할 의사는 없으며 반항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니 안심하고 차나 빨리 준비하도록 하게!”

그가 어름거리며 나간 후 다시 우리들의 담화는 태연히 계속되었다. 몇 시간이나 지났는지, 아마 3시간이 지났으리라. 먼저 왔던 그가 들어왔다.

“차가 왔는데 가셔야겠습니다.”

그때 태화관을 에워싸고 있는 군중들은 우리들의 체포광경을 보고 놀랐으리라. 대감들의 출입을 모시는 하인들의 형상이다. 우리들이 나오는 것을 본 군중들은 만세를 연달아 부르며 우리가 독립선언서의 장본인들이라는 것을 알자 만세성은 드높은 벽공을 뚫어낼 듯이 높아가며 그칠 줄 모르고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만족하였다. 나는 미소를 띠며 차에 올랐다. 내 차에는 손병희 씨, 오세창 씨 그리고 또 한 사람이 탔다. 우리가 탄 차 좌우에는 사람들이 늘어서 절을 하였으며, 만세 소리는 그칠 줄 모르며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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