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산을 오르기 시작한 건 불과 200여년 전이었다

  • 기자명 탁재형
  • 기사승인 2019.02.27 07:1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몇 주 전, 산에 종종 다니는 대학 동창이 사람들을 모아 네팔 히말라야의 랑탕 계곡으로 트레킹을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현직에 오르기 전, 야인 신분으로 찾았던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2015년 네팔 대지진 때 심각한 피해를 입긴 했지만, 외려 다른 트레킹 코스보다는 완만하고 길이 잘 닦여 있는 편이라 난이도 면에서 비교적 만만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동창 일행은 수십 년 만이라는 눈보라에 고립되어, 해발 3,750m에 위치한 산장에서 며칠을 버틴 끝에 헬리콥터를 타고 귀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공위성을 통한 일기예보가 일상화되고, 3천미터가 넘는 고산 지역에서 인간의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낱낱이 알려져 있는 요즘에도 당장 한 시간 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곳이 산이다. 그런 불확실성에 맞서, 자신의 존재를 붙드는 지구의 힘에 맞서 눈앞에 버티고 선 봉우리를 향해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등반이라는 행위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세계를 알아버린 걸까.

 

<영상앨범 산>이라는 다큐멘터리의 촬영을 위해 2006년 몽골 동북부의 뭉크하이르항 지역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산악 전문가와 함께 4천미터짜리 봉우리를 등정하기 위해 나섰는데, 길안내를 맡았던 라마승이 3분의 1도 안 올라간 시점에서 낭떠러지 끝에 앉아 염불 몇줄을 외우더니만 휘적휘적 내려가 버렸다. 산신을 노하게 하면 큰 벌을 받으니 이 위쪽으로는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것은 물론, 용변도 보지 말라는 경고를 남긴 채였다. 우리가 대동했던 현지인 포터들도 이렇게 높은 곳까지 와본 경험은 처음이라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때까지도, 몽골 사람들에게 산이라는 것은 경외와 기도의 대상일 뿐이지 등반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네 조상을 포함한 옛사람들의 산에 대한 인식은 이와 대동소이했다. 그래서, 기록들을 뒤져보면 등반과 대단히 유사해 보이는 많은 활동들이 대부분 종교적인 열정, 군사적 목적 또는 특정 위치에서만 구할 수 있는 자원을 채취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등반’이라 부를 수 있는, 산을 오르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행위들은 자연의 비밀을 밝히는 데 대한 열정이 종교를 대체하기 시작한 18세기 중반에 와서나 성행하기 시작했다. 그 시초에는 스위스의 한 지질학자가 내건 상금이 있었다.

오라스 베네딕트 소쉬르 출처: wikipedia

 

제네바의 부유한 귀족 가문 출신인 오라스 베네딕트 소쉬르(1740-1799)는 알프스의 장엄함에 영혼을 빼앗긴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열 네살이 되던 해에 대학에 들어가 19세 때 철학박사 학위를 받을 정도의 수재였다. 일찍부터 스위스 곳곳의 산을 오르는 것을 즐겼던 그는 1760년, 샤모니로 떠나는 원정대에 참여한다. 이 트레킹 도중 그는 몽블랑(4,807m)과 마주치게 되는데, 이 만남은 그의 삶을, 아니 등반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꿔 놓는다. 봉우리의 풍광이 자아내는 자연을 향한 경외감, 그리고 과학자로서의 호기심에 휩싸여 그는 이 산을 처음 올라가는 사람들에게 막대한 상금을 주겠노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당시엔 유럽 사람들조차 필자가 2005년 몽골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산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단 3천미터가 넘는 고산 지대를 경험해 본 사람들이 거의 없었기에, 중세적이기 이를 데 없는 전설만이 횡행했다. 용이라던가, 악마라던가 하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높은 곳을 꺼리도록 만드는 안전 펜스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근대 등산의 아버지로 불리는 자크 발마(왼쪽)와 베네딕트 소쉬르 동상. 출처: wikimedia

소쉬르의 선언으로부터 26년이 지났을 무렵, 비로소 그 상금을 타간 이가 나타났다. 샤모니에 사는 수정채취업자 자크 발마와 의사였던 미셸 파카르가 그 주인공이다. 돈에 대한 열정이 미신을 이긴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호기심과 모험심이 그들로 하여금 상금을 타게 만든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 때부터 본격적인 알프스 등반의 황금기가 시작된 것임은 확실하다. 등반을 뜻하는 영어 단어가 ‘알피니즘’이 된 것은 이 때부터 알프스의 고봉들을 경쟁적으로 정복해 나가기 시작했던 많은 ‘알피니스트’들 덕분이다.

 베네딕트 소쉬르가 1787년 몽블랑 재등에 나섰을 때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소쉬르는 결코, 부를 이용해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려 놓고 자신은 뒤에서 그걸 보며 즐기는 타입의 인간은 아니었다. 바로 다음해인 1787년, 그 자신이 몽블랑에 올라 세 번째 등정자로 기록된다. 18명의 가이드를 대동한 그는,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과학 측정 기구 여러 개를 정상까지 운반해, 4시간 반을 머물며 실험에 열중한다. 이 원정으로 그는, 이전까진 추측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지질학적 사실들을 증명해 냈다. 이러한 등정의 성공에 영감을 얻은 모험가, 예술가, 과학자들의 발걸음이 알프스를 넘어 지구 반대편의 산봉우리까지 도달하게 된 것은 불과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다음회에서 계속)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의 이슈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