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3.1운동' 무차별 총칼 진압 속 1천명이 만세 불렀다

  • 기자명 정재환
  • 기사승인 2019.03.08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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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크게 바꾼 역사의 현장에는 학생들이 있었다. 3.1운동은 1918년부터 준비되고 있었지만, 불을 댕긴 것은 도쿄에 있던 조선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었고,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를 이끈 것도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은 시위를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에 선언서를 배포하는 막중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강이남에서 가장 먼저 만세소리가 터져 나온 군산의 3.1운동을 촉발한 것도 당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군산 영명학교 출신 김병수였다.

2월 25일 김병수는 민족대표 이갑성으로부터 군산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선언서 배달과 만세운동 전파의 중책을 맡은 김병수는 200여 장의 「독립선언서」를 들고 자신의 모교가 있는 군산으로 향했다. 군산에는 1902년 1월 미국 예수교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 전킨(Junckin, W. M., 한국명 전위렴)이 설립한 영명학교가 있었다. 교회는 선교와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세웠지만, 조선인 학생들에게 영명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신학문과 문명을 만나는 창구였으며 일경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가며 조선의 독립을 꿈꾸는 장소였다.

영명학교 1910년대 모습. 이곳에서 교사 박연세를 중심으로 군산지역의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사진 출처: 한국향토문화 전자대전)

 

군산에 도착한 김병수는 즉시 자신의 은사인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를 만나 서울에서 준비되고 있는 만세운동 계획을 설명했고, 박연세는 동료 교사들과 함께 군산의 만세운동 준비에 착수했다. 박연세는 영명의 동료 교사인 이두열, 김수영과 함께 멜볼딘여학교 교사인 고석주와 군산예수병원 직원들을 포섭하였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군산 장날인 3월 6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2월 28일 김병수에게서 독립선언서 95장을 넘겨받은 박연세 등은 영명학교 지하실에서 독립선언문을 등사하였고, 멜볼딘여학교에서는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거사일까지는 모든 것이 비밀에 붙여져야 했지만, 불행하게도 전날인 3월 5일 냄새를 맡은 일경 10명이 영명과 멜볼딘을 급습하였다. 선언서를 찍어내던 등사기와 선언서, 태극기 등이 발각되었고, 박연세·이두열 등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수갑이 채워진 체 끌려가는 선생님들을 지키기 위해 영명의 학생들이 용감하게 일경의 앞을 가로막으며 저항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만세운동을 선두에서 준비하던 교사들이 끌려가자, 2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영명의 교사 김윤실이 긴급 학생회 임원회의를 소집하여 당일인 3월 5일 시위를 감행하기로 했다. 만세운동이 좌절될 수도 있는 위기의 상황이었지만, 만세운동 주모 교사들이 체포된 상황에서 내린 용기 있는 결단이었다.

전세종·양기철·송기옥·이도준·홍천경·고준명·유복섭·강규언·강인성 등 영명 학생들을 비롯해 멜볼딘의 학생 100명과 교사 및 예수병원 직원 40명 등 140여 명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손에 들고 운동장에 모였다. 교사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한목소리로 만세를 외치며 군산 시내로 나갔다. 지난 10년간 일제의 폭압적인 통치에 억눌렸던 조선인들의 민족감정이 일시에 폭발했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학생들을 바라보던 거리의 군중들이 행렬에 가세하였고, 순식간에 5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군산경찰서까지 진출했다.

1919년 3월 5일. 영명과 멜볼딘 학생들이 학생복과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고 있다. (군산3.1운동100주년기념관 전시 일각)

대규모의 만세시위에 당황한 경찰은 익산의 헌병대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출동한 헌병대가 비무장의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는 순간 대열의 앞을 이끌던 시위대 3~4명이 땅바닥에 쓰러졌다. 곳곳에서 ‘악’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고, 군중들은 반사적으로 죽음의 공포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이 날 만세운동 현장에서 검거된 사람은 고석주 교사 등 90여 명으로 대부분 영명과 멜볼딘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었다.

단 한 차례의 시위였지만 조선인들이 치른 희생은 너무나도 엄청났다. 그러나 만세운동의 불은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았다. 만세시위에 대한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진압은 오히려 조선인들의 분노에 불을 댕겼다. 창영학교 교사 엄창섭은 3월 10일 강경 장날 청포리교회 교인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였고, 익산 남전교회 장로였던 문용기는 4월 4일 익산 남전교회 교인 및 도남학교 학생들 150여 명과 함께 익산 솜리 장날에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펼쳤다.

익산 솜리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이끌다 두 팔이 잘려 숨진 문용기 열사의 혈의(독립기념관 소장)

만세시위 참가자들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허리춤과 바지 속에 감춘 채 솜리 장터에 모여 장터에 나온 군중들 300여 명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만세소리에 고무된 사람들로 시위대는 삽시간에 1,000여 명으로 불어났고, 시위대가 거리 행진을 시작하자, 일제는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 등 수백 명을 동원하여 창검과 총·곤봉·갈고리를 휘두르며 무차별 진압을 강행하였다.

당시 문용기 열사는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대의 선두를 이끌고 있었는데, 소리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문 열사를 제지하는 헌병대원의 장검이 허공을 가르고 그의 팔을 갈랐다. 오른팔에 치명상을 입은 문 열사는 왼손으로 태극기를 집어 들고 계속 만세를 불렀다. 이번에는 헌병대원의 장검이 열사의 왼팔을 갈랐지만, 열사는 굴하지 않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격분한 헌병대원이 마구 휘두른 칼에 목숨을 잃었다.

문 열사의 마지막 순간을 옆에서 지켜보던 박영문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그 역시 헌병의 칼을 피할 수 없었다. 연거푸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연거푸 헌병의 칼에 찔리며 박 열사는 피어보지도 못한 꽃다운 16살 청춘으로 생을 마감했다. 신덕리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장경춘과 박도현도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이리 사람 이충규도 그 자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죽어갔다. 솜리 장터에 울려 퍼진 ‘대한민국만세’는 이들이 남긴 마지막 유언이었다. 6명이 목숨을 잃었고, 중경상을 입은 이들도 20명이 넘었으며, 김치옥을 비롯한 39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군산3.1운동을 이끈 3인의 열사.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1883년생), 문용기(1878년생), 군산지역에 선언서를 전달한 김병수는 1898년생으로 1919년 당시 22세였다. (군산3.1운동100주년기념관)

3.1만세운동은 일원화·대중화·비폭력시위를 모토로 계획되었다. 태화관에서 선언식을 마친 민족대표들은 모두 일경에 체포되었지만, 선언서는 만세 소리와 함께 전국 각 지역과 해외로 전달되었다. 군산지역에 선언서를 전달한 김병수, 군산 만세운동을 기획한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 좌초의 위기에서 불씨를 살린 교사 김윤실, 3월 5일 거리 시위의 중심이 되었던 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 학생들, 3월 10일 강경 장날의 만세운동을 이끈 창영학교 교사 엄창섭, 4월 4일 솜리 만세운동을 이끌다 장렬히 순국한 문용기, 박영남, 영명학교에서 본정에 이르는 거리 행진에 참가한 이름을 알 수 없는 조선인들, 장보러 나왔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용감한 조선인들... 그들 모두가 군산 만세운동의 주역이었다.

(이 글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송현강·전병호의 글과 전주대 김은수 교수의 전북CBS라디오 대담을 바탕으로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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