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명언 팩트체크] 대처는 "Design or Resign"이란 말을 한 적 없다

  • 기자명 김준일 기자
  • 기사승인 2020.01.2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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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명언들이 판 치고 있다. 뉴스톱은 대표적인 가짜 명언을 모아 왜곡과 날조의 역사를 살피고자 한다. 적게는 몇 년, 많게는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문장들이다. 잘못된 말들이 퍼지는데 대체로 정치인과 언론이 앞장을 섰다. 전혀 출처를 짐작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이들 격언의 진위를 폭로하는 기사 또한 많으나 한번 어긋난 말들의 생명력은 여전히 질기다. 뉴스톱은 시리즈로 가짜명언의 진실을 팩트체크한다.

<가짜명언 팩트체크> 시리즈

① 중립을 지킨 자에게 지옥이 예약? 단테는 그런 말한 적 없다

② 동의하지 않지만 말할 권리를 위해 싸우겠다? 볼테르 발언 아니다

③ 국민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선관위도 속은 명언

④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무한도전이 퍼뜨린 가짜 신채호 명언

⑤ 내 옆으로 와 친구가 되어 다오? 카뮈는 말한 적 없는 '감성명언'

⑥ 유명해지면 똥을 싸도 박수 쳐준다? 한국에서만 쓰이는 앤디 워홀 명언

⑦ 소크라테스 명언으로 알려진 '악법도 법’ 사실인가 아닌가

대처는 "Design or Resign"이란 말을 한 적 없다

‘한 문장이면 누구나 범죄자’ 오용된 괴벨스

각색된 프랑수아 트뤼포의 '시네필 3법칙'

늙어서도 사회주의자라면 머리가 없는 것? 포퍼도 처칠도 한 적 없는 말

⑫ 플라톤이 말한 “정치를 외면한 대가”의 진실

⑬ 권력을 줘보면 인격을 안다? 링컨이 한 말 아니다

⑭ 링컨이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고 말했다?

⑮ 퍼거슨의 '트인낭'은 오역인가

⑯ "케이크를 먹여라" 마리 앙투아네트의 망언?

"Design or Resign." (디자인하지 않으면 사임하라.)

멋져 보이는 이 문장은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흔히 쓰인다. 영국 수상 마가렛 대처가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뉴스톱이 이 문구를 다룬다는게 어떤 의미인지 눈치 빠른 독자들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 문구는 가짜다. 대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왜 이 문구가 한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지, 실제 대처는 저런 말을 했는지 팩트체크 해보자. 

빅카인즈 검색 결과 1990년 이후 은 60차례 언론에 등장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기사 데이터베이스 빅카인즈에서 1990년 1월 1일 이후로 검색한 결과 'Design or Resign'이  처음 쓰인 기사는 2002년 5월 13일자 헤럴드경제 기사 [이제 다시 수출이다]였다.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70년대 말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소집된 영국의 각료회의 석상.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 수상이 느닷없이 각료들을 향해 "Design or Resign"이라고 외쳤다. 디자인을 알든지 아니면 물러나든지 선택하라는 메시지였다. 대처 수상 은 영국병의 원인을 잦은 노사분규와 함께 기업들의 제품 경쟁력 낙후로 봤다. 대처는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지만 제품 경쟁력은 디자인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영국은 제품 디자인에 관한한 지금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2002.5.13 헤럴드경제

기사는 어디에서 이 문구를 인용했는지는 밝히지 않는다. 2개월 뒤 임내규 산자부 차관은 2002년 7월 23일 매일경제 기고에서 이 문구를 인용했다. 내용이 동일해 헤럴드경제 기사를 보고 썼음이 분명하다.

대처 총리는 "디자인을 알든지 아니면 물러나라(Design or Resign)" 고 각료들에게 주문하며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지만 제품경쟁력은 디자인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2002.7.23 매일경제

 

이후 이 문구는 우후죽순 쓰이기 시작했다. 빅카인즈 검색 결과 2002년 이래 2019년까지 대략 60차례 "design or resign"이 언론에 등장했으며 각종 블로그에도 널리 퍼졌다. 이 문구가 특히 자주 사용된 시기는 '디자인 서울'을 내세운 오세훈 서울시장(2006년~2011년) 때다. 임옥기 서울시 디자인기획관은 2011년 11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디자인 혁신을 강조하며 이 문구를 인용했다. 

그러면 마가렛 대처는 이와 비슷한 발언을 하기는 했을까. 구글에서 <Design or Resign>을 검색해도 대처가 이런 말을 했다는 글은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1980년을 전후해 대처의 연설문을 뒤졌지만 역시 찾지 못했다. 이 문구 자체가 서구에서는 보편적으로 쓰이는 말이 아니었다. 페이스북 페이지와 미디엄 블로그가 발견됐지만 거의 존재감이 없는 곳이었다. 

책 <리더는 디자인을 말한다> 67쪽. 마가렛 대처는 1987년 영국 산업연맹 디자인 컨퍼런스 개회사에서 "Design or Decline"이라고 말했다.

답은 책에서 찾을 수 있었다. 2011년 3월에 출간된 책 <리더는 디자인을 말한다>에서 저자 권영걸ㆍ이슬기는 대처가 "Design or Decline"이라고 말했다는 내용을 담았다. 당시 책 소개 기사를 보면 "예를 들어, 마가렛 대처의 격언이라 알려져 수년간 국내에서 종종 인용되었던 'Design ore Resign'이 사실은 'Design or Decline'이라는 말이었다는 것을 조사를 통해 밝혀냈다"고 적혀있다.

마가렛 대처 파운데이션의 연설문에서 이 발언을 찾을 수 있다. 책에 적혀 있던대로 대처는 1987년 5월 1일 영국 산업 디자인 컨퍼런스 개막 연설 도중 "design or decline"이라는 말을 했다.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었다. 

종합하면, 영국 수상 마가렛 대처는 "Design or Resign"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국내에는 1979년 즈음 디자인 혁신을 강조하며 내각에서 이 문구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 문구 자체가 다른 나라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2002년 5월 헤럴드경제가 처음 이 문구를 대처가 사용했다고 보도했고 2011년 이를 바로잡는 책이 나왔지만 여전히 널리 쓰이고 있다. 뉴스톱 김신 팩트체커가 최근 기사 <멘디니는 훌륭한 디자이너지만 '21세기 다빈치'는 아니다>에서 이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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