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명언들이 판 치고 있다. 뉴스톱은 대표적인 가짜 명언을 모아 왜곡과 날조의 역사를 살피고자 한다. 적게는 몇 년, 많게는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문장들이다. 잘못된 말들이 퍼지는데 대체로 정치인과 언론이 앞장을 섰다. 전혀 출처를 짐작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이들 격언의 진위를 폭로하는 기사 또한 많으나 한번 어긋난 말들의 생명력은 여전히 질기다. 뉴스톱은 시리즈로 가짜명언의 진실을 팩트체크한다.
<가짜명언 팩트체크> 시리즈
① 중립을 지킨 자에게 지옥이 예약? 단테는 그런 말한 적 없다
② 동의하지 않지만 말할 권리를 위해 싸우겠다? 볼테르 발언 아니다
③ 국민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선관위도 속은 명언
④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무한도전이 퍼뜨린 가짜 신채호 명언
⑤ 내 옆으로 와 친구가 되어 다오? 카뮈는 말한 적 없는 '감성명언'
⑥ 유명해지면 똥을 싸도 박수 쳐준다? 한국에서만 쓰이는 앤디 워홀 명언
⑦ 소크라테스 명언으로 알려진 '악법도 법’ 사실인가 아닌가
⑧ 대처는 "Design or Resign"이란 말을 한 적 없다
⑪ 늙어서도 사회주의자라면 머리가 없는 것? 포퍼도 처칠도 한 적 없는 말
"Design or Resign." (디자인하지 않으면 사임하라.)
멋져 보이는 이 문장은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흔히 쓰인다. 영국 수상 마가렛 대처가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뉴스톱이 이 문구를 다룬다는게 어떤 의미인지 눈치 빠른 독자들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 문구는 가짜다. 대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왜 이 문구가 한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지, 실제 대처는 저런 말을 했는지 팩트체크 해보자.
한국언론진흥재단 기사 데이터베이스 빅카인즈에서 1990년 1월 1일 이후로 검색한 결과 'Design or Resign'이 처음 쓰인 기사는 2002년 5월 13일자 헤럴드경제 기사 [이제 다시 수출이다]였다.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70년대 말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소집된 영국의 각료회의 석상.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 수상이 느닷없이 각료들을 향해 "Design or Resign"이라고 외쳤다. 디자인을 알든지 아니면 물러나든지 선택하라는 메시지였다. 대처 수상 은 영국병의 원인을 잦은 노사분규와 함께 기업들의 제품 경쟁력 낙후로 봤다. 대처는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지만 제품 경쟁력은 디자인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영국은 제품 디자인에 관한한 지금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2002.5.13 헤럴드경제
기사는 어디에서 이 문구를 인용했는지는 밝히지 않는다. 2개월 뒤 임내규 산자부 차관은 2002년 7월 23일 매일경제 기고에서 이 문구를 인용했다. 내용이 동일해 헤럴드경제 기사를 보고 썼음이 분명하다.
대처 총리는 "디자인을 알든지 아니면 물러나라(Design or Resign)" 고 각료들에게 주문하며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지만 제품경쟁력은 디자인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2002.7.23 매일경제
이후 이 문구는 우후죽순 쓰이기 시작했다. 빅카인즈 검색 결과 2002년 이래 2019년까지 대략 60차례 "design or resign"이 언론에 등장했으며 각종 블로그에도 널리 퍼졌다. 이 문구가 특히 자주 사용된 시기는 '디자인 서울'을 내세운 오세훈 서울시장(2006년~2011년) 때다. 임옥기 서울시 디자인기획관은 2011년 11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디자인 혁신을 강조하며 이 문구를 인용했다.
그러면 마가렛 대처는 이와 비슷한 발언을 하기는 했을까. 구글에서 <Design or Resign>을 검색해도 대처가 이런 말을 했다는 글은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1980년을 전후해 대처의 연설문을 뒤졌지만 역시 찾지 못했다. 이 문구 자체가 서구에서는 보편적으로 쓰이는 말이 아니었다. 페이스북 페이지와 미디엄 블로그가 발견됐지만 거의 존재감이 없는 곳이었다.
답은 책에서 찾을 수 있었다. 2011년 3월에 출간된 책 <리더는 디자인을 말한다>에서 저자 권영걸ㆍ이슬기는 대처가 "Design or Decline"이라고 말했다는 내용을 담았다. 당시 책 소개 기사를 보면 "예를 들어, 마가렛 대처의 격언이라 알려져 수년간 국내에서 종종 인용되었던 'Design ore Resign'이 사실은 'Design or Decline'이라는 말이었다는 것을 조사를 통해 밝혀냈다"고 적혀있다.
마가렛 대처 파운데이션의 연설문에서 이 발언을 찾을 수 있다. 책에 적혀 있던대로 대처는 1987년 5월 1일 영국 산업 디자인 컨퍼런스 개막 연설 도중 "design or decline"이라는 말을 했다.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었다.
종합하면, 영국 수상 마가렛 대처는 "Design or Resign"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국내에는 1979년 즈음 디자인 혁신을 강조하며 내각에서 이 문구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 문구 자체가 다른 나라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2002년 5월 헤럴드경제가 처음 이 문구를 대처가 사용했다고 보도했고 2011년 이를 바로잡는 책이 나왔지만 여전히 널리 쓰이고 있다. 뉴스톱 김신 팩트체커가 최근 기사 <멘디니는 훌륭한 디자이너지만 '21세기 다빈치'는 아니다>에서 이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