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권의 '구애'에 자극받은 위나라, 요동과 고구려를 침공하다

  • 기자명 안정준
  • 기사승인 2019.03.18 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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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삼국시대' 오나라와 고구려의 운명적ㆍ비극적 만남

2회. '믿음 부족' 오나라와 '애매한 태도' 고구려의 예정된 파국

3회. 손권의 '구애'에 자극받은 위나라, 요동과 고구려를 토벌하다

 

○ 깨어진 손권의 꿈, 곧이어 닥쳐온 요동의 비극

고구려인들이 사굉 등 오나라 사절단의 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그러나 누가보든 남의 나라에 와서 국왕의 접견을 거부하고, 왕이 보낸 사신들을 잡아 인질극을 벌이는 등의 도발적 행각을 벌였다면, 이를 두고 교섭이 원만하게 이루어졌다고 여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순진한’ 손권의 생각은 또 달랐다.

사굉 등이 돌아온 지 2년 뒤인 236년 2월, 손권은 또다시 호위(胡衛)를 대표로 한 오나라 사신단을 고구려에 보냈다. 이쯤 되면 정말 손권의 외교 감각에 큰 문제가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사굉이 일전에 고구려 사행에서 벌어진 일들을 손권에게 정확하게 보고했는지 여부도 의심해봐야겠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손권의 외교적 무능과 신료들과의 소통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손권이 보낸 호위 등의 오나라 사절단이 고구려땅에 발을 내딛은 순간, 그들을 맞이한 것은 온화한 표정의 문관들이 아닌, 갑옷과 투구를 갖춰 입은 굳은 표정의 고구려 병사들이었다.

 

동천왕 10년(236) 봄 2월에 오나라 왕 손권이 사신 호위를 보내 화친하기를 청하였다. (동천)왕은 그 사신을 잡아두었다가, 가을 7월에 목을 베어 머리를 위나라로 보냈다.

 

손권의 ‘맹목적 사랑’은 또 다시 큰 비극을 불러왔다. 이때 고구려가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고 위나라와의 친선으로 방향전환을 하게 된 배경은 234년의 사굉 등이 자행한 무례한 행위들에 대한 일종의 보복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외에도 234년경을 기점으로 동아시아의 정세가 서서히 변동하고 있었던 사실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5차례에 걸친 북벌전을 통해 위나라를 끊임없이 위협했던 촉의 승상 제갈량이 234년에 오장원에서 사망했다. 이후 촉나라는 더 이상 대대적인 북벌을 진행하지 않았고, 오나라 역시 촉나라의 활동이 없는 상황에서 단독으로 북방 정벌을 추진하기는 어려운 상태에 놓였다. 그러자 남쪽으로부터의 위협에 한숨 돌린 위나라가 서서히 동북방의 요동 지역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위나라가 고구려 동천왕에게 사굉 등의 오나라 사절단 일행을 잡아 죽일 것을 요구했던 것 역시 고구려측의 의사를 미리 타진해보고 그 향배를 주목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은 고구려에게도 큰 압박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바로 234년에 오나라가 자랑했던 수군이 위나라에게 크게 패하는 일도 벌어졌다. 천하의 정세는 급격히 위나라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고구려는 오나라 사신인 호위를 몇 개월이나 붙잡아두고서 주변 정세를 계속 살폈던 것 같다. 그리고 강국인 위나라쪽으로 붙는 것이 불가피하는 것, 이에 대한 오나라의 보복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 등을 확인한 동천왕은 잡혀있던 호위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갖다 바치고 충성을 맹세했다. 3년 전 공손연이 했던 것과 다를 게 없는 냉혹한 처신이었다. 이에 대한 오나라의 반응은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후 오나라는 요동이나 동북방 세력들과의 외교 교섭을 다시는 시도하지 않았다.

교과서에 나온 고구려-위 전쟁.

이쯤 되면 요동과의 ‘순애보’를 그린 오나라 손권은 ‘바보’가 되고, 영악하게 자기의 이해득실을 철저하게 챙긴 공손씨 세력과 고구려 동천왕은 ‘승리자’가 되는 스토리 구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요동의 두 세력 역시 결코 행복한 결말을 맞진 못했다.

조비의 장남으로서 위나라의 황제에 오른 명제는 237년에 이르러 그동안 사실상 방치해두었던 요동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일단 위나라에서 요동으로 가는 길목의 여러 이민족들인 오환과 선비족 등을 회유 및 협박하여 공손씨에게 협조하지 못하게 하였다. 여기에 큰 위협을 느낀 공손씨 세력은 다급해졌다. 위나라에 요동의 유명한 인사들 789명을 보내 명제에게 연합 상서를 올리게 하여 공손씨 일가에 대한 용서를 빌기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자신들을 도와줄 세력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공손연이 최후로 도움의 손길을 요청한 곳은 다름 아닌 오나라의 손권이었다. 교섭이 단절된 상태에서 갑작스레 바닷길을 통해 오나라에 사절단을 보내어 손권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고불고 애원하며 원군을 요청했던 것이다. 사람이 뻔뻔하면 못하는 짓이 없다. 그렇게 처절하게 배신당했던 손권이 도움을 달라며 매달리는 ‘돌아온 탕아’를 과연 어떻게 대우했을까. 이전에 당한 것처럼 그 사신들을 당장 잡아서 참수해야 정당한 교환 아닐까.

놀랍게도 손권은 이들을 처벌하라는 주변의 의견을 물리치고 사신들을 정중히 대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쯤 되면 뭐 부처님, 예수님이 따로 없다. 물론 손권도 당시 정세를 위중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즉 요동이 위나라에 완전히 넘어가버리는 상황에 대해 매우 큰 우려를 하였고, 이에 대한 공동 대응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만약 이때 손권이 요동에 원군을 파견하여 함께 위나라 대군을 막아냈다면, 앞에서 서술한 손권의 요동을 향한 ‘순애보’는 드라마처럼 극적으로 완결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당시 오나라는 내부적으로 소수민족들의 반란이 자주 일어나는 등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었다. 게다가 손권이 또다시 독단적으로 요동에서의 전쟁을 추진하기에는 내부적으로 정치적인 반발이 너무도 컸다. 즉 요동으로의 원군 파견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서기 238년, 이제 위나라의 군사행동만 남았다. 명제는 이전에 소규모 지방군을 동원해 요동을 공략했던 것이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촉나라 제갈량의 북벌군을 막아냈던 필승카드인 사마의를 호출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사마의 그 자신도 탁월한 용병술을 가진 명장이었지만, 그가 이끄는 4만여 명의 군대 역시 당시 위나라 최강의 정예 부대였다. 닭 잡는데 소 잡는 칼 쓰는 것 아니냐며 위나라 조정 내에서도 논란이 있었지만, 그만큼 ‘이참에 요동의 불안 요소를 확실하게 제거하자’는 명제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던 결과였다.

드디어 명제의 명을 받은 사마의가 주력 부대를 이끌고 요동으로 출정했다. 그는 공손씨의 정예부대가 집결해있던 요하의 요수현을 우회해 지나쳐서 중심지인 양평을 곧바로 포위 공격했다. 이 작전은 적중했다. 238년 8월 공손연은 그 아들과 함께 위군에게 붙잡혀 목이 잘렸다. 공손씨의 아래에서 벼슬을 했던 관원과 장군 등 2천여 명, 그리고 15세 이상의 장정 7천여 명도 모두 죽음을 당했다. 위군의 사령관이었던 사마의는 공손씨 세력의 중심지였던 양평에 죽은 시체들을 높이 탑처럼 쌓아올려 만든 ‘경관(京觀)’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다시는 반란 세력이 발호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자, 살아남은 주민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였다. 공손씨 세력은 서기 190년에 공손탁이 기반을 닦은 지 약 50여 년 만에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한편 고구려는 위나라의 요구에 따라 병력 1천여 명을 보내 공손씨 세력를 정벌하는데 적극 협력했다. 그러나 위나라는 요동뿐만 아니라 공손씨 세력이 영향력 하에 두었던 한반도 북부 일대까지 모두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급기야 244년에 위나라의 유주자사였던 관구검이 대대적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였고, 동천왕은 맞서 싸웠으나 결국 크게 패하여 저 멀리 동해안 지역(두만강 이북)까지 정신없이 도망쳐야만 했다. 이때 고구려는 위나라 군에 의해 수도 국내성이 함락되면서 수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포로로 끌려가는 대참사를 맞았다. 아직 광개토왕과 장수왕대의 전성기를 누려보기도 훨씬 전인 240년대에 정말 꽝하고 망할 뻔했던 아찔한 순간이었던 셈이다.

관구검기공비(毋丘儉紀功碑). 244년(동천왕 18) 8월에 위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이 고구려 원정에서 승리한 뒤 그 전공을 기념하는 비석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는데, 관구검기공비는 이 때 기록된 석각(石刻)의 일부로 추정된다. 1906년에 길림성 집안시의 소판차령(小板岔嶺)이란 곳에서 도로공사 중에 발견되었다고 전하며, 현재는 심양 요령성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비의 크기는 세로 26.6cm, 가로 26.3cm이며 글씨체는 예서체(隸書體)이다. 사진 출처: 한국역사연구회 홈페이지

 

○ 눈치없는 손권의 '구애', 요동에 '재앙'을 부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공손연과 동천왕의 처신은 오나라의 손권에 비해 약삭빠르고 이기적인 것처럼 보인다. 혹자는 두 세력 모두 ‘의리’를 저버렸다가 결국 천벌을 받았다고 단순히 웃어넘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 동아시아의 거대 제국인 위나라와 이웃하고 있던 요동의 작은 세력들이 생존을 위한 치열한 눈치게임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임을 감안한다면, 공손연, 동천왕의 행위를 꼭 도덕적 잣대로 평가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게다가 재밌는 것은 손권이 적극적으로 요동과 교섭을 시도하고 해상 왕래를 했던 것이 결과적으로 이를 지켜보던 위나라를 크게 자극했다는 사실이다. 원래 요동 공손씨 세력은 위나라를 되도록 자극하지 않으면서 그대로 조용히 지내는 것, 즉 ‘현상유지’를 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눈치 없는 손권이 적극적인 ‘구애’를 통해 군사 연합을 제안하고 나섰고, 공손연에게 매몰찬 거절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옆 동네의 고구려와 또다시 연대를 추진했던 것이다.

이러한 오나라의 적극적인 연대 시도는 위나라 입장에서 요동이라는 지역이 전략적으로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 주된 계기였다. 위나라가 결국 238년경을 전후하여 요동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 원정에 나섰던 것은 오나라와 요동과의 결탁에 의한 동북방으로부터의 위협을 사전에 뿌리 뽑겠다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공손연이나 동천왕이 오나라 손권과 적극 협력하여 군사 행동을 같이 했다면, 멸망 시기를 더 빨리 재촉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결과적으로 손권의 무모한 ‘사랑’은 스스로에게도 잔인한 배신의 칼날로 돌아와 꽂혔을 뿐만 아니라, 상대편인 공손씨와 고구려를 멸망 내지 괴멸 수준으로 몰고 가버리고 말았다. 한마디로 손권은 의도치 않게 사랑했던 모든 것들을 파멸시켜버린 ‘파괴왕’이 돼버린 것이다. 그러니 이 가슴 아픈 비극적 ‘로맨스’에 억지로 선악(善惡) 구도나 인과응보를 그리지는 말자. 단지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냉정하게 되짚어보면서 현재 동아시아의 국제외교상에서 각국 정상들의 ‘웃음’ 뒤에 숨겨진 치열한 이해타산과 그 밑바닥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다양한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이 더해지면 그만인 것이다.

 

안정준 팩트체커는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다. 고구려사 전공으로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구려 낙랑ㆍ대방군 고지 지배 연구', '6세기 고구려의 북위말 유이민 수용과 유인'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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