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착왜구’ 논쟁이 최근 불거졌습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별명으로 '토착왜구'란 단어가 인터넷에서 사용되기 시작했고, 급기야 정치권 논평에서 이 단어가 나왔습니다. 자유한국당측이 고발의사를 밝히자, 오히려 반색하는 분위기입니다. 민주평화당은 '토착왜구 사실관계 입증에 혼신을 다하겠다'는 논평을 내기도 했습니다.
궁금증이 불거질 수밖에 없습니다. 토착왜구란 단어는 원래 쓰이던 용어일까요. 토착왜구란 단어가 사용됐다면 언제부터 사용됐을까요. 이를 두고 방송과 온라인에서 설왕설래하고 있습니다. 일단 최근 KBS에서 확인한 내용부터 보겠습니다.
'토왜'가 처음 등장한 것은 <정암사고>가 맞나
KBS는 토착왜구란 단어의 기원은 '토왜'라는 말이며 일제시대 책 <정암사고>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정말 이 주장이 사실일까요. KBS방송 내용을 짚어봅니다. 이태현 선생의 유고문집 정암사고에 실린 글에서 토왜가 등장하는 것은, '수애십조죄문'(數倭十條罪文) 중 10번째 항목입니다. 이렇게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암사고>의 '수애십조죄문'에서 토애를 언급한 글의 시점은 불분명합니다. 정암 이태현 선생은 1910년생이며 1942년에 항일자결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정암사고>는 유고문집입니다. <정암사고>에서 처음 '토왜'라는 단어가 사용됐다면, '토왜'는 추정컨대 1920년대 이후 사용됐다고 봐야 합니다. 이태현 선생이 최소한 10살은 넘어야 이런 글을 썼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태현 선생이 태어난 1910년 이전에 이미 '토왜'가 공공연히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역사학자 전우용은 자신의 페이스북 담벼락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910년 대한매일신보에는 ‘토왜천지(土倭天地)’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이 글에서는 먼저 토왜를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인종(人種)’으로 규정하고, 토왜를 다음과 같이 분류했습니다.
(1) 뜬구름같은 영화를 얻고자 일본과 이런저런 조약을 체결하고 그 틈에서 몰래 사익을 얻는 자. 일본의 앞잡이 노릇하는 고위 관료층이 이에 해당합니다.
(2) 암암리에 흉계를 숨기고 터무니없는 말로 일본을 위해 선동하는 자. 일본의 침략 행위와 내정 간섭을 지지한 정치인, 언론인이 이에 해당합니다.
(3) 일본군에 의지하여 각 지방에 출몰하며 남의 재산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자. 친일단체 일진회 회원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4) 저들의 왜구 짓에 대해 원망하는 기색을 드러내면 온갖 거짓말을 날조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독을 퍼뜨리는 자.
토왜들을 지지하고 애국자들을 모험하는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시정잡배가 이에 해당합니다.
대한매일신보의 '토왜천지' 관련 사실을 짚어보겠습니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국한문, 1910.06.22)에 "土倭天地" 제하에 실린 글은 아래와 같습니다. 기사 안의 내용중 일부는 현재의 한글 표기법으로 옮겼습니다.
국문 대한매일신보(1910.06.22)는 시사만평에 아래와 같이 보도하였습니다. 토왜라는 단어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토왜' 표현은 1910년 이전인 1908년
1910년은 한일병합(경술국치)이 있었던 해입니다. 한일강제병합 즈음해서 친일매국 일파 문제를 지적하는 글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다. 그런데 이보다 앞선 시점에 이미 '토왜'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이 확인됐습니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국문판과 국한문 혼용판, 1908년 4월 5일자입니다. 국한문 혼용판에는, 淸潔方針(청결방침)제하의 글에 토왜가 등장합니다. 일진회(一進會)를 비판하며 토왜(土倭)로 부르고 있습니다.
같은 해에 발행한 대한매일신보(국문, 1908년 11월 26일)는 시사평론에 "나라일을 근심키로 깊은밤에 잠 안오니 유지사" 제하의 글에서 토왜를 언급합니다.
같은 날짜의 국한문 혼용 大韓每日申報(대한매일신보, 1908.11.26) 는 "巡撿叢寃"(순검총원), 제하의 기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먹고 살아야 하여, 일본인 종놈이라 비난받고, 일인 경찰에에게 차별당하고, 백성에게 무시당하고, 토왜라 불려도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다며 푸념을 늘어놓는 순경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이런 장면은 아무래도 1905년 11월 을사늑약 이후의 경성을 중심으로 한 풍경으로 보입니다.
大韓每日申報(대한매일신보, 국한문, 1910.06.21.)의 "筆下尖峰" 제하의 기사입니다.
대한매일신보(국한문, 1910.06.21)는 "연기군에서는 어떤 잡류가 청년들에게 일채를 얻어주고" 제하의 기사를 올립니다. 물론 위의 국한문 혼용판의 같은 내용의 한글판 기사입니다.
해방정국에서도 '토왜' 관용어로 사용
해방 정국에서도 '토왜'는 친일파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東光新聞(동광신문, 1947년 04월 02일)은 "親日派와 그 處罰問題"(친일파와 그 처벌문제) 연재글에서, "汎博한 土倭規定은 千不當萬不當事"(범박한 토왜규정은 천부당만부당 - 너무 폭넓게 친일파를 규정하는 것은 천번 만번 옳지 않다) 제하의 기사를 실었습니다. 친일파 규정을 너무 넓게 잡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기사에서 '토왜'는 일본 앞잡이, 친일파를 뜻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토왜'가 '토착왜구'로 풀어서 다시 사용되는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토왜 표현은 역사학자 전우용 선생이 언급한 1910년 대한매일신보 보도 보다 앞선 시점, 최소한 1908년 4월 이전부터 관용어로 사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KBS 방송 보도 내용은 적절하지 못했습니다.
문득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하는 가짜왜구가 떠오릅니다. '가왜(假倭)'로 불렀습니다. "왜구(倭寇)를 가장하여 중국이나 조선 해변을 약탈하던 가짜 왜구(倭寇). 당시 해변에 살던 불한당이 간혹 무리를 지어 가왜구(假倭寇) 행세"를 한 이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물론 조선인인척 꾸며대던 가짜조선인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난 역사 속에 존재하던 가왜, 일본 본토의 왜구를 뜻하는 본토왜구, 그리고 토왜(토착) 그리고 최근의 토착왜구 논쟁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떠올려야 하는 것일까요?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친일, 친일반민족행위에 얽힌 평가와 청산이 마무리되지 않은 후유증이 아직도 한국 사회에 가득한 것은 아닐까요?
*이 글은 필자가 운영하는 홈페이지 드림투게더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