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개 복제약 이름 체계화하는 '국제일반명'제도 도입되나

  • 기자명 박한슬
  • 기사승인 2019.04.02 07:4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19년 3월 12일 제 39대 약사회장에 김대업 회장이 취임했습니다. 일반 시민들 입장에서 약사회장이 누가 되건 크게 관심을 기울일 부분은 아니지만, 그가 취임사에서 내세운 '국제일반명' 제도는 조금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제일반명 제도는 무엇이고, 해당 제도가 도입된다면 의약품 소비에는 어떤 변화가 생기는 것일까요? 소비자의 입장에서 간략히 짚어보겠습니다.

김대업 39대 대한약사회장.

 

뉴사탄정, 디로탄정, 디르탄정, 디발탄정, 디에스반정, 디오르반정, 디오브이정, 디오테크정, 바라탄정, 바레탄정, 바르반정, 바오탄정, 발데리드정, 발사닌정, 사디반정, 하이든정…

위 이름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전부 다른 약처럼 보이지만, 실은 모두 고혈압 치료에 사용되는 발사르탄(Valsartan)이라는 성분으로 만들어진 제품들입니다.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모두 동일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식약처의 허가과정을 통과한 약들이라 실질적으로 동일한 제품들이죠. 그럼에도 제조사에 따라 제품의 명칭이 다르게 붙은 것인데, 그렇게 허가된 발사르탄을 함유한 제품의 수가 무려 575개나 됩니다. 얼핏 생각하면 제품 수가 많은 것이 뭐가 문제냐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인 상품이라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의약품에서는 지나치게 많은 명칭이 생각보다 큰 문제들을 가져옵니다.

 

약사도 다 못 외울 정도로 많은 ‘제품명’

앞서 설명 드렸던 고혈압약을 복용 중인 환자분이 있다고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환자분들은 의약품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분이 아니시니, 본인이 복용 중인 제품의 성분도 잘 모르시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위에 열거한 제품명(예: 뉴사탄정)으로 본인이 먹는 약을 기억을 하고 계시죠. 그렇게만 알아도 처방 받은 제품을 복용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으니 보통은 문제가 생기지 않는데, 이사를 가는 등 먹던 약을 같은 성분의 다른 제품으로 바꾸는 경우에는 곤란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분명 나는 ‘뉴사탄정’을 먹고 있었는데, 의사가 갑자기 왜 ‘하이든’이라는 다른 약을 주냐며 분통을 터트리는 경우가 왕왕 생기거든요.

Photo by freestocks.org on Unsplash

저런 오해야 설명을 통해 바로잡으면 그만이지만, 더 큰 문제는 그런 설명을 해줘야 할 의사나 약사도 저 많은 제품명을 외우고 있지는 못하다보니 종종 처방 실수나 조제 실수를 한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뉴발사타반정’과 ‘뉴바스트정’은 명칭이 무척 유사하지만 뉴발사타반정은 발사르탄을 함유한 고혈압약이고 뉴바스트정은 아토르바스타틴을 함유한 고지혈증약입니다. 국가시험을 보고 면허를 취득한 사람이면 두 성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이해를 갖고 있겠지만, 그 성분이 포함된 의약품이 서로 엇비슷한 이름으로 수 백 개가 되니 불필요하게 의약품 사용과오(Medication Error)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의약품의 경우는 제품명을 성분명에 따라 단순화하자는 것이 국제일반명제도의 핵심입니다.

 

‘국제일반명’ 제도가 달갑지 않은 제약업계

국제일반명(International Nonproprietary Name, INN)은 세계보건기구(WHO)에서 1950년부터 시행 중인 제도로, 복잡한 화학구조를 가진 약물들을 체계적이고 간단명료하게 명명하기 위해서 개발된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발사르탄(Valsartan)이란 이름이 바로 국제일반명 형태로 정해진 성분명입니다. 앞부분의 Val- 이라는 접두사는 발사르탄이란 물질의 고유 특성에 따라 붙은 것이고, 뒷부분의 –sartan 이라는 어근은 고혈압 약물 중 안지오텐신 Ⅱ 수용체에 작용하는 것들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말입니다. 그래서 로사르탄(Losartan)이나 올메사르탄(Olmesartan) 같은 성분명만 봐도 발사르탄과 동일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고혈압 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이런 원칙에 입각해서, 현재 미국이나 유럽 등의 대부분 국가에서는 제네릭 의약품(복제약)의 명칭을 국제일반명 (또는 성분명) + 회사 명칭 + 약의 형태로만 허가하고 있습니다. 앞서 살펴봤던 발사르탄 성분의 제품들의 명칭을 이 원칙대로 바꿔보면 ‘뉴사탄정’은 ‘오스틴제약-발사르탄정’이 될 것이고, ‘하이든정’은 ‘삼익제약-발사르탄정’으로 바뀌어 회사만 다르지 같은 성분이란 것을 일반 환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원칙을 적용하면 제품의 혼동 문제도 쉽게 해결됩니다. 발음하기도 힘들던 ‘뉴발사타반정’은 ‘안국뉴팜-발사르탄정’이 되는 것이고, ‘뉴바스트정’은 ‘한미약품-아토르바스타틴정’이 되니 의료인 입장에서도 헷갈릴 일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렇지만 제약업계는 이런 조치를 썩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성분명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던 기존 제도 하에서는 환자가 접하는 것은 ‘브랜드’ 뿐입니다. 그러다보니 연구개발 역량이 거의 없는 중소 제약사들도 ‘영업’만 잘 하면 본인들의 제품을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리베이트와 같은 불법적인 영업도 서슴지 않고 행했던 것인데, 한정된 예산을 영업에 많이 투입하면 의약품의 생산과 관리에는 그만큼 돈을 덜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정작 약을 먹는 환자는 이런 것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으니, 비양심적인 일부 의사들과 중소 제약사만 배를 불렸죠. 하지만 성분명이 전면에 등장하면 환자도 나름의 제품 선택권이 생기게 됩니다. 위생상태도 의심되는 구멍가게 수준의 제약회사가 만든 제품을 제품명만 보고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국제일반명 도입, 가능성은?

아직 국제일반명 제도가 도입될지의 여부는 불투명한 상태입니다. 보건의료계, 특히나 약사회에서 처음으로 해당 제도에 대한 추진 의사를 밝혔다는 점이 고무적이긴 하지만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제도인 만큼 쉽게 결론이 날 문제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2018년 말에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국제일반명 정책 심포지엄이 개최된 바 있고, 문재인 대통령도 후보 시절 미래 성장동력 창출을 위해 제약‧바이오산업을 육성하겠다며 ‘국제적 규제기준에 부합하는 합리적 기준을 마련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습니다. ‘영업’에 치중된 국내 제약업계에 변화를 불러올 수 있을지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겠습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의 이슈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