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은 왜 아벨상 수상자 캐런 울런벡을 '울렌베커'라 잘못 썼나

  • 기자명 박종성
  • 기사승인 2019.03.29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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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수학자 캐런 울런벡(Karen Uhlenbeck, 1942년생)이 여성으로는 최초로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아벨상을 받았다. 그런데 이를 보도한 연합뉴스 기사에서 그를 '울렌베커'라고 부르는 바람에 이 기사를 제공받은 여러 신문이나 방송사에서도 잘못된 표기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울렌벡'으로 그나마 원어에 가까운 표기를 쓴 매체도 있지만 검색되는 기사의 수만 비교하면 '울렌베커'가 월등히 우세하여 생소한 고유명사가 최초로 소개될 때 쓰이는 한글 표기가 가지는 파급력을 잘 보여준다.

연합뉴스는 수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아벨상을 받은 최초의 여성 수학자 캐런 울런벡의 이름을 울렌베커라고 적었다.

수학계의 권위 있는 상 가운데 4년마다 수학자 2~4명에게 수여되는 필즈상(영어: Fields Medal)은 젊은 수학자의 연구를 격려한다는 취지로 40세 미만이라는 나이 제한이 있는 반면 아벨상(노르웨이어: Abelprisen, 영어: Abel Prize)은 처음부터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구상되어 나이 제한 없이 수학자가 일생 동안 쌓아온 업적을 바탕으로 매년 수상자를 선정한다. 노르웨이 정부가 노르웨이 수학자 닐스 헨리크 아벨(Niels Henrik Abel, 1802~29)의 이름을 따서 설립하여 2003년에 최초로 수여했다. 그러니 17년만에 최초로 여성 수상자가 나온 것이다. 1936년에 최초로 수여된 필즈상은 18회째인 2014년에 최초로 여성 수상자인 이란의 마리암 미르자하니(Maryam Mirzakhani مریم میرزاخانی)가 나왔다.

 

울런벡은 혼인 전에 성이 케스쿨라(Keskulla)였으며 아직도 본인의 이름을 Karen Keskulla Uhlenbeck으로 서명한다. 그의 조부는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태어난 에스토니아인이었으며 Keskulla는 에스토니아어 성씨 Kesküla '케스퀼라'의 이형으로 보인다.

 

그는 1965년 미국의 생화학자 올키 울런벡(Olke C. Uhlenbeck)과 결혼하였다. 올키 울런벡의 아버지는 네덜란드 출신의 미국 물리학자 조지 울런벡(George Uhlenbeck)이었다. 네덜란드어로 Uhlenbeck은 [ˈylənbɛk, ˈyləmbɛk] '윌렌벡'으로 발음된다(n이 자음 동화로 [m]으로 발음되는 경우가 많지만 한글 표기에는 반영하지 않는다). 영어로는 [ˈuːl.ən.bɛk] '울런벡'이다. 조지 울런벡은 표준 표기가 심의된 적이 없는데 민간에서는 '울렌벡'이라고 흔히 부른다.

 

네덜란드어에서 개음절의 u, uh는 전설 원순 고모음인 [y] 또는 [yː] '위'로 발음되지만 영어에는 이 모음이 없기 때문에 Uhlenbeck의 경우에는 후설 모음인 [uː] '우'로 흉내낸다.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네덜란드어의 마지막 음절에서만 무강세 모음 [ə]로 발음되는 e를 '어'로 적고 나머지 위치에서는 '에'로 적는데 영어에서는 [ə]를 언제나 '어'로 적기 때문에 '윌렌벡'의 '렌'과 '울런벡'의 '런'의 표기가 갈린다. 민간에서는 철자에 이끌려 '에'로 적지만 표준은 '어'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Valentine [ˈvæl.ən.taɪ̯n]은 '발렌타인'으로 쓰는 경우가 많지만 표준 표기는 '밸런타인'이다. 울런벡의 이름인 Karen도 철자식으로 '카렌'이라고 쓰는 경우가 많지만 영어 여자 이름으로서는 [ˈkæɹ.ən] '캐런'이다.

 

마지막 음절의 e를 '어'로 적는 네덜란드어 표기 규정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여 Uhlenbeck을 '윌렌벅'으로 적은 사례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마지막 음절의 e가 [ə]가 아닌 [ɛ]로 발음되므로 '에'로 적는 것이 적절하다. 네덜란드어의 강세 패턴에서 마지막 음절의 e가 무강세 모음인 [ə]인 경우가 많아서 2005년에 외래어 표기법에 추가된 네덜란드어 표기 규정에서는 마지막 음절의 e를 '어'로 적도록 했지만 Uhlenbeck '윌렌벡'을 비롯하여 Anderlecht [ˈɑndərlɛxt] '안데를레흐트', Utrecht [ˈytrɛxt] '위트레흐트' 등 마지막 음절의 e가 약화되지 않는 경우는 규정에 없더라도 '에'로 적는 것으로 표준 표기가 정해졌다. 다만 Arnhem [ˈɑrn(h)ɛm] '아른험', Enschede [ˈɛnsxəˌdeː] '엔스헤더' 등 약화되지 않는 마지막 음절의 e도 '어'로 적은 것이 표준 표기로 정해진 경우도 있는데 이는 올바른 발음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른헴', '엔스헤데'로 적는 것이 덜 어색하다.

사실 네덜란드어도 독일어나 스웨덴어, 덴마크어, 노르웨이어 등 영어 외 다른 게르만어를 한글로 표기할 때처럼 [ə]로 발음되는 e도 '에'로 통일하면 깔끔할 텐데 외래어 표기법을 필요 이상으로 어렵게 정한 느낌이다. 사실 '울렌벡'과 같은 표기에서 볼 수 있듯 낯선 이름에서는 영어의 e [ə]도 '에'로 표기하려는 경향이 강한데 영어의 경우는 이미 the [ðə] '더'와 같은 표기가 익숙한 이상 현행 규정을 바꾸기는 까다로울 것이다.

영어와 네덜란드어에서는 짧은 모음 뒤의 어말 무성 폐쇄음 [p], [t], [k]를 받침으로 적기 때문에 beck [ˈbɛk]은 '벡'으로 적는다. 하지만 독일어나 스웨덴어의 Beck [ˈbɛk]는 '베크'이다. 모두 발음은 사실상 동일하지만 한글 표기 규정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벡'과 '베크'로 표기가 갈리는 것이다. 외래어 표기법에서 타이어와 베트남어, 말레이인도네시아어를 제외하고 어말 무성 폐쇄음을 받침으로 적는 경우가 있는 것은 영어와 네덜란드어 뿐이다.

긴 모음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u 대신 uh로 쓰는 것은 사실 네덜란드어보다 독일어에서 훨씬 더 흔히 쓰이는 철자이다. 그래서 철자만 보면 Uhlenbeck은 얼핏 독일어식 이름처럼 보인다. 마치 [ˈuːl(ə)nbɛk]로 발음되는 독일어 성씨인 것으로 보고 외래어 표기법을 적용하면 '울렌베크'가 된다. 그런데 왜 '울렌벡', '울렌베크'도 아닌 '울렌베커'로 둔갑했을까? Beck '베크'도 독일어 성씨로 쓰이지만 Becker/Bäcker [ˈbɛkɐ] '베커'가 더 친숙하고 한국어에서도 '크'와 '커'의 발음 차이가 아주 크지 않아서 일어난 혼동일지 모른다. 비슷한 성씨인 Uhlenbecker가 있기는 하지만 이와 헷갈렸을 가능성은 낮다.

통신사에 1분 1초라도 빨리 송고해야 하는 압박에서 나온 실수이겠지만 기사 주인공 이름의 한글 표기만은 조금만 더 신경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글은 필자가 운영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끝소리에도 실렸습니다.

박종성 팩트체커는 현재 정부·언론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 실무소위 위원이다. 한글라이즈의 개발 가운데 언어 부분을 맡고 있다. 언어, 특히 외국어를 한글로 표기하는 문제에 대한 연구를 하며 이에 대한 블로그와 페이스북 활동을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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