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전범' 폰 브라운이 미국 아폴로계획 총책임자가 된 이유

  • 기자명 박재용
  • 기사승인 2019.04.17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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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구 소련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발사합니다. 당시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이 냉전을 벌이던 시기였지요. 우주를 향한 경쟁에서 소련이 미국을 추월한 순간입니다. 그리고 다시 소련은 최초로 인간을 로켓에 태워 우주로 보냅니다. 유리 가가린이었죠. 그는 소련의 국민 영웅이 됩니다.

반대로 미국은 난리가 났지요. 당시 세계 최강의 강대국이자 최고의 과학기술을 자랑하고 있다가 한 방 크게 먹었던 겁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미국은 당시 여기저기 나눠져 있던 로켓 개발 팀들을 모두 모아 NASA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그 총책임자는 베르너 폰 브라운이었습니다.

베르너 폰 브라운

정식 이름이 베르너 마그누스 막시밀리안 프라이헤어 폰 브라운Wernher Magnus Maximilian Freiherr von Braun인 이 사람은 그러나 독일의 전쟁범죄자 즉 전범이었습니다. 히틀러 치하에서 악명을 떨쳤던 나치친위대SS 출신입니다. 그렇다고 뭐 학살을 했다든지 그런 것은 아니고요. 2차 대전 당시 연합군에게 충격을 주었던 V2로켓의 개발자였지요. 1912년 독일 제국의 포젠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과학에 심취한 인물이었습니다. 겨우 12살에 장난감 수레에 불꽃을 붙였는데 시장에서 폭발해 난리가 나기도 했으니까요. 14살 생일에 어머니에게 선물 받은 천체망원경이 계기가 되어 우주에 대한 꿈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우주로 나가겠다는 일념으로 로켓을 연구하기 시작하지요. 베를린 기술대학에 입학해서도 우주비행 동호회에 가입합니다. 그리고 베를린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그리고 당시 날고 기는 기술자와 과학자들 사이에서 로켓에 관해선 최고의 권위자로 손꼽혔습니다. 열심히 로켓을 만들지요. 뭐 여기까지야 그냥 우주 덕후의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때 쯤 나치가 정권을 잡습니다. 그리고 민간에서의 로켓 개발을 전면 금지시키지요. 대신 군사 기지 한 곳에 거대한 로켓 실험단지를 만듭니다. 로켓 연구를 위해선 군사 기지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폰 브라운은 기꺼이 그 곳의 책임자가 되어 로켓 개발을 더 가열하게 하고 마침내 V2로켓을 개발하기에 이릅니다. 패전의 기운이 짙어가던 1944년 V2로켓은 영국 공습에 쓰입니다. 이미 제공권을 상실한 독일이 쓸 수 있는 마지막 무기였지요. 그러나 로켓으로도 이미 기운 전세를 돌이킬 수 없었고, 1945년 독일은 패망합니다.

 

그런데 미국의 대응이 웃깁니다. 폰 브라운은 누가 봐도 확실한 전범(戰犯)입니다. 1932년 나치당에 가입하고 1940년 그 유명한 나치 무장친위대SS의 장교가 되었죠. 그의 최종 계급은 무장친위대 소령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구속해서 재판에 넘긴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네 나라에 데려가선 미 육군의 로켓 개발 책임자로 앉힙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로켓 기술은 단연 발군이었습니다. 당시 독일의 로켓 기지를 조사한 미군의 보고서에 따르면 독일의 로켓 기술이 미국보다 적어도 25년 이상 앞서있다고 평가했을 정도였으니까요. 탐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요. 그 독일의 로켓 연구소를 점령한 것은 미국이 아니라 구 소련, 지금의 러시아였지요. 그 곳의 로켓들도 소련이 싹 쓸어갑니다. 하지만 그 로켓을 개발했던 사람들은 폰 브라운을 따라 로켓 기지를 탈출하여 미리 기다리고 있던 미군 특수조직에 항복합니다. 결국 폰 브라운이 소련대신 미국을 선택한 거라고 봐야할 겁니다. 사실 미국으로서는 다행이라고 여길 정도였습니다.

2차 대전의 전황이 연합군의 승리로 귀결될 조짐이 보이자 미국은 소련을 다음의 주적으로 생각합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2차 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미소 냉전이 시작되지요. 따라서 독일의 우수한 과학자와 기술자 그리고 여러 자원을 소련보다 먼저 확보하기 위해 종전 전부터 여러 가지 공작을 펼칩니다.

그래서 전범이 되어야 할 이가 로켓 개발 책임자가 된 것입니다. 물론 폰 브라운과 그의 동료들이 처음부터 중용되지는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2차 대전 당시의 독일 군대 소속이었으니 미국과 미군 내에서도 그에 대한 경계와 내침이 없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소련이 인공위성을 먼저 쏘아 올리자 상황이 일변하고 맙니다. 당시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등으로 나눠져 있던 로켓 개발 팀들이 모두 통합되어 NASA가 되고 폰 브라운이 개발 총책임자가 되었지요. 결국 그의 주도하에 엄청난 인력과 자금이 투입되어 미국은 소련을 제치고 최초로 달에 사람을 보내게 됩니다. 1969년의 일이었지요.

폰 브라운의 2차 대전 당시의 행적에 대해선 여러 가지로 설왕설래가 있습니다. 나치에 적극적으로 부역을 했다는 주장에서부터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주장까지 다양하지요. 특히나 로켓 개발과 제작 과정에서 포로와 죄수를 강제 노동시켰고 이 과정에서 희생된 이가 1만 명에서 최대 2만 명에 이른다는 것은 가장 크게 논란이 되는 부분입니다. 폰 브라운 자신은 강제 노동에 대해 자신이 책임자가 아니라고 하지만, 좋게 봐도 알고는 있었고 묵인하였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아폴로 계획을 성공시킨 새턴-V 로켓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베르너 폰 브라운

많은 이들이 폰 브라운을 현대 로켓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2차 대전 이후 개발된 소련과 미국의 로켓은 모두 그가 개발한 V2로켓을 기본으로 해서 만든 것이지요.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그의 행적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져야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로켓 개발과 우주 여행이라는 자신의 개인적 목표를 위해서라면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아도 좋은 것일까요? 나치에 대한 협력도 결국은 로켓 개발을 위해서라면 누구하고도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그의 판단에 따른 것이니 책임을 면할 순 없습니다. 그는 스스로 말했습니다. ‘나는 공식적으로 국가사회주의당(나치)에 들길 요구 당했다. 그 요구를 거절하는 것은 내가 내 인생의 일을 단념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나는 가입을 결정했다... 1940년 봄 한 대령이 나를 SS(나치 친위대)에 가입시키기 위해 왔다고 했다. 군 상사 도른베르거를 불렀다. 그는 만약 내가 공동연구를 계속하길 원한다면 가입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고 했다.’

결국 그는 로켓 개발이라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나치에 가입하고 심지어 친위대에도 가입합니다. 더구나 그는 미국에 간 뒤 자신의 친위대 경력과 나치와 관련된 사항에 대해 변명으로만 일관하고 한 번도 사과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생 자기가 하고 싶은 로켓에 대한 연구를 실컷 하다가 죽었지만, 그 과정에서 로켓을 개발하다 죽은 포로와 죄수들, 그리고 V2로켓에 사망한 영국의 민간인들에겐 어떠한 사죄도 하지 않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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