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호세 시의회가 국제공항에 '무지개 깃발'을 세우는 이유

  • 기자명 황장석
  • 기사승인 2019.04.29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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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 도시 산호세(San Jose) 시의회가 빠르면 다음달 산호세 국제공항(Norman Y. Mineta San Jose International Airport) 청사 내에 들어서는 패스트푸드 매장 근처에 무지개 깃발을 세우기로 했다. 해당 패스트푸드 매장이 들어서는데 반대하는 성소수자(LGBTQ) 그룹을 감안한 조치였다. 패스트푸드 매장 하나 들어서는데 왜 성소수자 그룹이 반발하게 됐을까.

산호세 시의 한 칙필레이 매장. 촬영: 황장석

인기 치킨버거 체인과 성소수자 차별?

성소수자 그룹은 얼마 전 산호세 국제공항에서 시위를 했다. 다음달 공항에 들어설 예정인 칙필레이(Chick-Fil-A) 매장 오픈을 허가해선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칙필레이는 미국 전역에 2100개가 넘는 매장이 있는 패스트푸드 체인이다. 대표메뉴는 프라이드 치킨 샌드위치(치킨버거). 칙필레이는 ‘치킨(chicken)+필레이(fillet)’의 합성어이자 A 등급의 치킨버거라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 4월 9일 열린 산호세 시의회 회의 동영상을 살펴보면, 시의회는 지난해 3월 산호세 공항 음식점 사업을 총괄하는 사업자와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 내용엔 쉐이크쉑(Shake Shack) 등 다른 음식점들과 함께 칙필레이 매장을 연다는 계획이 들어 있었다. 계약 체결 당시까지만 해도 결정권자인 시의회는 아무런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 계약 체결 사실이 알려지면서 성소수자 그룹을 중심으로 거센 반발이 시작됐다. 칙필레이는 성소수자에게 적대적인 회사이기 때문에 사적인 시설이 아닌 공공시설인 공항에 매장을 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성서의 가족 개념' 지지하는 회사

뉴욕타임즈 보도를 인용하면, 성소수자 그룹이 전면에서 칙필레이 반대에 나선 건 2011~2012년의 일이다. 창업자 트루엣 캐이시(S. Truett Cathy, 1921-2014)가 설립한 자선단체가 동성결혼에 반대하는 단체들에 수백만달러에 달하는 거액을 기부해온 사실이 알려졌다. 또 창업자의 아들 댄 캐이시(Dan T. Cathy) 최고운영책임자(COO)가 기독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칙필레이는 성서의 가족 개념을 지지한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더욱 커졌다. 댄 캐이시 COO의 발언은 이성 간의 결합으로 이뤄진 부부를 중심으로 하는 가족이 ‘성서에서 말하는 가족’이라는 의미였다.

칙필레이 웹사이트에서 창업자를 소개한 글을 보면 “그는 65년을 함께 한 아내와 더불어 성서의 원칙과 가족이 중심이 된 삶을 살았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칙필레이는 주식시장에 상장한 기업이 아니라 지금도 가족이 소유한 기업이다. 일반인이 주식을 사고 팔 수 있는 상장 기업과 달리 많은 주주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회사를 운영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칙필레이는 일요일엔 종교적인 이유에서 모든 매장 문을 닫는다.

 

산호세 시의 ‘무지개 깃발 타협’

4월 9일 열린 산호세 시의회 회의에서 시의회 의장을 겸하는 산호세 시장과 시의원들은 만장일치 표결로 칙필레이 매장 근처에 무지개 깃발과 트랜스젠더 깃발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매장은 예정대로 열도록 했다. 회의 과정을 살펴보면 시의원들이 아예 계약을 취소할 수 없느냐고 시 담당자에게 여러 차례 질의한다. 시의회에 나와 발언한 주민들도 있었다. 스스로를 성소수자라고 밝힌 한 주민은 “산호세 공항은 이곳을 통해 산호세, 실리콘밸리를 찾는 사람들의 첫 인상과 마지막 추억을 남기는 곳이다. 여기는 다양성이 숨 쉬는 공간이다. 수익을 성소수자에 적대적인 단체에 기부하는 회사 매장이 들어서는데 찬성할 수 없다”고 발언했다. 다른 주민은 “부디 우리 시에 증오를 불러오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계약 취소는 선택 가능한 옵션이 아니었다. 지난해 3월 아무 문제없이 허락해 놓고 이제와서 성소수자 그룹이 거세게 반대하니 취소하겠다고 하면 법적 문제를 불러일으킨다는 말이 나왔다. 결국 무지개 깃발을 세우는 타협안을 만장일치 의결했다. 타협안은 그동안 공개적으로 게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정치활동을 해온 켄 이거(Ken Yeager) 전 산호세 시의원이 제안한 것이었다.

산호세 시와 달리 텍사스주에 있는 샌앤토니오 국제공항, 뉴욕주에 있는 버팔로 나이애가라 국제공항 등은 같은 이유로 칙필레이 매장을 아예 열지 못하게 막았다. 다만 NBC 뉴스 보도를 보면, 계약 체결이 이뤄지기 전 해당 주의회, 시의회 차원에서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계약을 체결한 뒤 문제가 불거지면서 뒤늦게 수습에 나선 산호세 시의회와는 다른 경우였다.

산호세 칙필레이 영업시간을 알린 매장 외부. 일요일은 종교적인 이유로 영업을 안한다. 촬영: 황장석

지난 15일 산호세에 있는 한 칙필레이 매장을 찾았다. 점심시간이라 많은 사람들이 주문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칙필레이 매장에 와 본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 대표 메뉴라는 치킨샌드위치와 음료를 주문했다. 대단한 맛은 아니었지만 하나에 5달러가 안 되는 치킨샌드위치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매장 안을 살펴보는데 성소수자에게 적대적인 느낌은 감지되지 않았다. 다들 평화롭게 점심을 즐기고 있었다. 누군가 가져다 놓은 무지개 깃발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정문 유리창에 붙여진 영업시간 안내에 ‘일요일은 휴업’이라고 써 놓은 문구가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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