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32년간 9차례 등반대...1953년 마침내 '세계의 지붕'에 서다

  • 기자명 탁재형
  • 기사승인 2019.04.29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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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년, 영국의 측량가에 의해 네팔 포카라 북서쪽 50km지점에 위치한 다울라기리(Dhaulagiri) 봉의 높이가 8천미터를 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 전까지 세계 최고봉으로 생각되어지던 남미의 산들은 그 지위를 잃게 되었다. 더 높은 곳으로 향하려는 산악인들의 시선이 히말라야에 쏠렸음은 물론이다. 그 중에는 초인적인 의지와 최신 등반기술로 무장한 산악계의 영웅들도 있었지만, 말도 안되는 몽상가들도 일부 존재했다. 1947년, 캐나다 출신의 모험가 얼 덴맨은 두 명의 셰르파 족 안내인을 고용해 에베레스트로 향했다. 그는 고산 등반에 대한 경험도, 최신식 장비를 살 돈도 없었지만 미지의 세계를 향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그의 열정이 최악의 무모함에서는 살짝 벗어나 있었다는 것이다. 해발 6700m 지점에서 눈폭풍이 몰아쳐 왔을 때, 그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려 자신과 셰르파들의 목숨을 보전했다. 이것이 세계 산악계에 엄청난 공헌으로 기록되리라는 것을 덴맨 자신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시 고산에 대한 경험을 쌓고도 목숨을 부지한 셰르파 중 한 명이, 6년 후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의 정상에 서게 되는 텐징 노르가이였기 때문이다.

8167m로 세계 7위인 다울라기리. 출처: 위키미디어

 

유럽 각국의 등반대에 의해 히말라야 8천미터급 봉우리의 초등 경쟁에 불이 붙게 되는 1950년대를 ‘히말라야의 황금시대’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몇 가지 배경이 있다. 먼저 1920년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산소 호흡 장비는 희박한 대기 속에서의 활동성과 생존성을 비할 바 없이 높여주었다. 다만 19세기부터 이어지는 등산의 페어플레이 정신에 이 장비가 부합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산악인들 사이에 일어났다. 인간이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자연에 맞서는 것이 등산의 본질이라고 보는 측과, ‘인간의 지혜로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이점을 활용하는 것이 왜 나쁜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측의 논쟁은 아직도 산을 찾는 사람들이 직접 답을 찾아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1953년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서게 되는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징 노르가이는 산소 호흡 장비의 도움을 받았다. 이것 이외에도, 피켈과 아이젠, 나일론 재질의 로프와 텐트, 등산복, 항공기를 만드는 경량 금속인 두랄루민을 활용한 가벼운 등반 장비들이 속속 개발되어 정상을 향하는 등반가들의 발걸음을 한층 가볍게 해 주었다. 또한 인간의 신체가 산소부족 상태에서 어떤 변화를 겪게 되며, 이를 완화하기 위해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고소 생리학 역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18세기 말엽부터 꾸준히 더 높은 곳을 향했던 인간의 지식이 축적된 결과였다.

Pixabay로부터 입수된 crazy777님의 이미지 입니다.

1949년, 티베트가 중국에 의해 점령당하며 이 지역을 통해 히말라야로 향하던 루트가 봉쇄되었다. 같은 해, 네팔은 오랜 쇄국을 풀고 국경을 열어 산악인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네팔에서 접근 가능한 히말라야의 남쪽 사면은 곧 유럽 원정대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알프스의 경험을 바탕으로 히말라야에 도전장을 내민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등반대들 중에서 가장 먼저 8천을 넘어 정상을 밟은 팀은 프랑스 원정대였다. 1950년, 모리스 에르조그와 루이 라슈날을 주축으로 한 프랑스 원정대는 사전 정보가 전무한 상황에서 현지 정찰과 루트 개척을 동시에 진행해, 6월 3일 마침내 안나푸르나(8091m) 정상에 섰다. 1개월 이상 걸리던 8천미터급 봉우리에 대한 공략을 18일만에 끝낸 쾌거였다. 이 소식이 히말라야에 도전장을 내민 각국 등반대를 더욱 자극했음은 물론이다.

1921년 최초의 도전이 시작된 이래, 영국인들이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대해 보여준 것은 집요함 그 이상이었다. 1953년까지 32년간 아홉 차례나 등반대를 보냈고,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만 15명이었다. 티베트 영내의 북쪽 사면을 통한 등정 시도가 일곱 번이었고, 중국의 국경 폐쇄 이후로는 네팔 영내의 빙하계곡 사우스 콜을 통한 등정 시도가 이어졌다. 도전이 거듭될 수록 등반대가 다다르는 최고 높이도 점차 높아졌다. 1952년에는 8500미터가 넘는 곳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 해, 스위스 원정팀이 에베레스트 바로 옆에 위치한 봉우리, 로체(8516m)의 능선을 따라 오르다가 에베레스트 쪽으로 방향을 트는 새로운 경로를 개척하지만, 정상에 서는 것에는 실패한다. 그 다음해에 다시 돌아온 영국의 9차 원정대는 이 루트를 활용해 도전을 이어 나가기로 결정했다. 

1953년 에베레스트를 세계 최초로 등정한 에드먼드 힐러리(왼쪽)와 텐징 노르가이

1953년 5월 29일, 마침내 운명의 날이 밝았다. 사흘 전 정상으로 향했던 공격조는 산소 호흡기의 고장으로 정상을 91미터 남겨놓고 돌아왔고, 대기하고 있던 다음 주자들에게 적절한 루트와 공략법을 알려주었다. 원정대장 존 헌트에 의해 다음 공격조로 지명된 사람들은 뉴질랜드에서 건너온 키 195cm의 훤칠한 청년 에드먼드 힐러리와 6년 전, 에베레스트를 6700m까지 오르다가 기상 악화로 돌아온 바 있는 셰르파 족 출신의 텐징 노르가이였다. 29일 아침 6시, 14kg에 달하는 배낭을 메고 마지막 캠프를 떠난 둘은 5시간에 걸친 사투 끝에 정상을 가로막고 있는 최종 장애물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12m에 달하는 이 바위벽은 오늘날 ‘힐러리 스텝’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오전 11시 30분, 최후의 난관을 극복하는 데 성공한 둘은 마침내 세계의 지붕에 섰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는, 둘의 생사를 초월한 파트너쉽이 이끌어낸 결과였다. 남극과 북극 사이, ‘제 3의 극점’을 향한 인류의 줄기찬 도전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기도 했다.

(다음 회에 마지막 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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