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화폐이론에 따르면 통화발행권은 민간은행이 갖고 있다

  • 기자명 전용복
  • 기사승인 2019.05.01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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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화폐이론> 시리즈

 

이 칼럼은 칼럼답지 않게 길다. 독자들께 미리 양해를 구한다. MMT의 정책 제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대 통화금융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우선 이해해야 한다. 예컨대, ‘재정적자는 위험하다’는 통념은 이를 오해한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화폐금융에 대한 주류 경제담론 혹은 경제학 교과서 모델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로부터 도출되는 정책적 함의도 틀렸다. MMT 지지자들은 이를 강조하여 MMT를 이론이라기보다는 제대로 된 현실 ‘묘사’로 이해되길 바라기도 한다. 현대 통화금융 시스템의 작동원리에 대한 MMT의 설명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소위 ‘포스트-케인지언’ 경제학이라 부르는 경제학파가 수 십 년 전부터 주장한 이론이기도 한다. 다만 무시되어 왔을 뿐이다.

 

주류 경제학이 들려주는 우화

우선 주류 경제학이 통화공급 과정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부터 살펴보자. 아래 그림은 우리나라 중앙은행인 한국은행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이다. 일반 시민 대상 경제교육 목적으로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을 읽어보자. 우선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화폐를 발행하여’ A은행이 보유한 100만 원어치의 채권을 구매한다. 돈을 갖게 된 이 은행은 자신의 고객 김씨에게 대출하여 이자수익을 얻고자 한다. A은행 입장에서는 이 100만 원 전부를 대출할 때 이자수익이 가장 크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예금액의 일정 비율을 따로 떼어 한국은행에 맡겨두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지급준비금이라 부르는데, 고객이 예금을 찾으러 오면 내주기 위해 비축해 두는 돈으로 이해된다(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법정지급준비율 제도를 폐지한 나라도 있다). 법정지급준비율을 10%로 가정하면, A은행은 김씨에게 90만 원을 대출하고, 10만 원은 중앙은행에 지급준비금으로 예치한다.

 

<그림 1> 주류 경제학의 신용창조 과정. 출처: 한국은행-경제교육, “통화는 누가 어떻게 공급하나?”

 

90만 원을 대출받은 김씨는 자신의 B은행 계좌에 이 돈은 입금한다. 이것도 예금이다. B은행은 다시 김씨의 예금 90만 원의 10%인 9만 원을 지급준비금으로 남겨두고 81만 원을 고객 이씨에게 대출한다. 다시 이씨는 대출받은 81만 원을 자신의 거래은행인 C은행에 예금하고, C은행은 고객 박씨에게 그 90%인 72.9만 원을 대출하고 등등. 이러한 대출과 예금이 무한히 반복된다면, 최초 한국은행이 공급한 100만 원은 은행권 전체적으로 1,000만 원의 예금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한국은행이 공급한 100만 원이 시중 은행들의 대출과정을 통해 1,000만 원의 예금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신용창조’ 과정이라 부른다. 물론 법으로 정해진 의무지급준비율을 낮추면 총 예금액은 더 커질 것이다.

 

이와 같은 주류 경제학의 통화공급 과정은 다음과 같은 정책적 함의를 갖는다. 첫째, ‘궁극적으로’ 통화공급을 통제하는 것은 중앙은행이다. 중앙은행이 ‘최초의 통화’를 공급하지 않으면, 시중은행들은 신용창조활동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또는 법정 의무지급준비율을 올리거나 내려서 시중의 통화량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둘째, 시중 은행의 역할은 매우 수동적인 금융중개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설명에서 따르면 은행들은 단순히 수취한 예금을 빌리려는 사람에게 대부하는 중개 역할만 한다. 그 결과로, 셋째, 은행이 대출하기 위해서는 미리 예금을 받아 놓고 있어야 한다. 저축(예금)을 유치하지 못하면 대출도 불가능하다. 저축이 경제성장을 촉진한다는 흔한 캠페인도 이 관념을 표현하는 것이다.

 

Money? What money?

과연 이것이 실제 현실을 잘 묘사하는 것일까? 복잡한 경제현상의 본질을 설명하고 이론으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단순화 가정이 필수적이다. 이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위 이론은 완전히 현실을 호도하는 것이다. 이를 아래 <그림 2>를 참조하여 현실을 설명해보자. 이 그림은 현대 화폐금융 시스템의 구조를 단순화한 그림이다. 현대 화폐금융 시스템은 가계와 기업으로 구성되는 민간경제, 민간은행, 그리고 한국은행(중앙은행)과 정부로 구성되는 정부부문 등 세 경제주체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 2> 금융통화 시스템의 구조

우선 지적할 점은 <그림 1>과 같은 설명에서는 화폐의 종류를 구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계와 기업 등 민간부문은 민간은행하고만 거래할 수 있다. 민간은행은 중앙은행 및 정부와도 거래한다. 이러한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각각에 사용하는 화폐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 구분하면 상당히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가계와 기업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통화는 민간은행이 창조한 신용화폐이고, 예금의 형태로 존재한다. 반면, 민간은행들이 중앙은행이나 정부와 거래할 때 사용하는 화폐는 ‘지급준비금’이라 불리는 중앙은행 발행 화폐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중앙은행 발행 화폐는 지폐와 동전(이하 ‘현금’이라 부른다)뿐이고, 그 비중도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이 공개한 최신의 자료에 따르면 2019년 2월 말 기준 현금 발행 총액은 118.6조 원이었다. 이에 반해 민간은행(금융권 전체)가 발행하는 금융수단들까지 포함하는 통화량 지표는 이보다 압도적으로 크다. M2는 2737.6조 원, 가장 포괄적인 통화량 지표인 광의유동성 지표 L은 4900.8조 원에 달했다.

 

통화량 지표에 관한 보충설명
무엇을 화폐, 즉 돈으로 간주할 것인지에 대해 합의된 견해는 없다. 하지만 민간의 금융수단(현금도 일종의 금융수단이다) 대부분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금과 유사하게 쓰인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정도란 유동성 정도를 말한다. 예컨대, 현금은 거의 모든 거래에서 즉시 사용 가능하므로 가장 유동성이 가장 높은 금융수단이다. 반면, 정기적금은 만기까지 기다려야 사용 가능하고, 만기 전에 사용하려면 일정 수수료(혹은 페널티)를 물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기적금은 유동성이 떨어지는 금융수단 혹은 화폐라 할 수 있다. 통화지표란 유동성 정도에 따라 금융수단을 분류하고, 각 부류의 양을 측정하는 지표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대부분의 금융수단이 현금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므로 이를 ‘통화’량 지표라 부르는 것이다. 다음은 우리나라 분류기준이긴 하지만, IMF의 기준을 따르고 있으므로, 국제 공용 지표로 봐도 무방하다. ①본원통화는 한국은행만이 발행 할 수 있는 화폐로, 유통중인 지폐와 동전(현금통화), 그리고 금융기관들이 한국은행에 예치한 원화 예치금(지급준비금이라 부른다)을 포함한다. ②M1(협의통화) 지표는 현금, 요구불예금, 수시 입출식 저축성 예금을 합한 금액이다(단, 동 금융수단의 예금취급기관간 상호 거래분은 제외한다. 이하 통화량 지표도 동일하다). ③M2(광의통화)는 M1에 정기예금, 적금 및 부금, 시장형 금융상품(CD, RP, 표지어음), 실적 배당형 금융상품, 금융채, 기타(투신증권저축, 종금사 발행어음) 등 만기 2년 이하 금융상품 등을 추가한 지표이다. ④Lf(금융기관유동성)은 M2에 M2 구성항목 중 만기 2년 이상 금융수단, 증권금융예수금, 생명보험사의 보험준비계약금 등을 포함하여 계산한 금액이다. ⑤L(광의유동성)은 가장 포괄적인 통화량 지표로 Lf에 국공채, 회사채, 자산유동화증권, CP 등을 포함한다.

 

무엇을 화폐 혹은 통화라 할 것인가를 두고 지루하고 비생산적인 논쟁이 전개되어 왔다. 이런 학술적 논쟁을 무시하고 실용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민간에서 유통되는 금융수단 모두가 약간의 절차를 거치면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화폐라 부를 수 있다. 현금만을 돈으로 생각하는 일반인의 통념과는 다소 다르다. 예컨대, 흔히 예금은 ‘돈’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인터넷쇼핑 등 일상적인 소비활동에서부터 주택거래까지 거의 모든 거래에 즉시 사용할 수 있다. 가장 포괄적인 통화 지표인 광의유동성 지표에만 포함되어 있는 회사채를 예로 들면, 이것도 쉽게 예금으로 전환하여 어디에서나 지불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저축(가치저장)수단이기도 하고, 모두 일국의 통화단위로 가치가 매겨져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들 모두가 화폐라 할 수 있다. 화폐의 선험적 정의보다 더 중요한 점은 모든 금융수단들이 실물경제와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상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민간은행들 포함 금융권 전체가 발행하는 금융수단 모두를 화폐로 간주할 때, 한국은행이 발행한 현금 유통량은 M2 대비 4.3%, L 대비 2.4%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통화발행의 주요 주체는 한국은행(중앙은행)이 아니라 민간은행과 금융기관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돈’은 민간기업인 은행이 무(無)에서 창조한다

그렇다면 주류 경제학의 설명에서 첫 번째 결론, 즉 한국은행(중앙은행)이 이러한 통화량 지표를 통제할 수 있는가? 다른 말로 한국은행이 본원통화 발행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켜 민간이 사용하는 나머지 96% 이상의 통화량을 조절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가능하다. 이는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기도 하고, 현실 그대로이다. 왜 그런지 살펴보자.

 

중앙은행이 통화량을 통제하고자 할 때, 그 목적은 통화량 관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통화량 통제는 그 수단에 지나지 않고, 물가안정, 금융안정성, 혹은 실물경제의 성장 등이 최종 목표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다음의 두 가지 양적 관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첫째, 중앙은행이 스스로 직접 발행하는 본원통화량과 여러 통화지표 사이에, 둘째, 타겟으로 삼는 통화지표와 궁극적 목표 사이에, 안정적인 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 예컨대, 본원통화 발행이 5% 증가하면 M2가 10% 증가하고, 그에 따라 경제성장률도 10% 증가한다거나, 그 반대의 관계도 성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본원통화량과 M2 지표 사이의 관계에만 집중해보자. 다음 그림들은 한국, 일본, 미국의 본원통화량과 M2 지표의 관계를 보여주는 그래프이다. 엄격한 통계적 분석 없이 육안으로도 두 변수의 변화율 사이에 일관되고 안정적인 관계가 없음을 확인할 수 없다. 민간은행들은 중앙은행이 공급하는 본원통화량과 무관하게 자신의 통화를 발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앙은행의 민간 통화량 통제 능력은 매우 미약하다 할 수 있다.

 

<그림 3> 한국의 본원통화량과 M2. 출처: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그림 4> 일본의 본원통화량과 M2. 출처: Federal Reserve Bank of St. Louis, Economic Data
<그림 5> 미국의 본원통화량과 M2. 출처: Federal Reserve Bank of St. Louis, Economic Data

 

일본과 미국의 예(그림 4, 5), 시기적으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의 경우, 특히 이 사실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일본과 미국(2008년 위기 이후)의 중앙은행은 경제와 금융 침체를 극복하고자 대규모 본원통화를 공급했다. 하지만 민간은행들에서는 그림 1과 같은 과정이 일어나지 않아다. 미국의 예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2008년 금융위기가 ‘위기’였던 이유는 은행들이 보유한 자산이 대규모로 부실화(빌려준 돈을 상환받기 어려운 상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면 은행은 파산해야 한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준(Fed)은 이를 막기 위해 지급준비금을 대량으로 발행하여 그 부실자산들을 매입해 주었다. 그 결과 민간은행들은 대규모 지급준비금을 갖게 되었다. 주류 경제학의 설명대로라면 중앙은행이 통화를 공급했으므로 그것이 대출되어 몇 배의 예금(M2)이 창조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그림 5). 대신 그림 6이 보여주는 것처럼 미국의 은행들은 그 돈을 그냥 연준에 저축해 두었다. 이것을 초과지급준비금이라 부른다. 그렇게 한 여러 이유들이 있었지만, 이 사례는 민간이 사용하는 돈(예금)을 발행하는 일이 민간은행들의 결정에 달렸음을 잘 보여준다. 앞으로 차차 보겠지만, 이 사실은 ‘통화량이 증가하면 인플레이션이 높아진다’는 통념이 비현실적임을 함축한다.

 

<그림 6> 미국 은행들이 보유하는 초과지급준비금. 출처: Federal Reserve Bank of St. Louis

 

1970-80년대 잠시 통화량 목표제를 시행하다 폐지한 이유도 중앙은행이 타겟 통화량을 통제할 수 없음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필자가 아는 한, 현재 통화량 목표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없다. 중앙은행이 통화량을 통제할 수 없는 이유는 영국의 저명한 금융경제학자(Charles Goodhart)의 이름을 딴 ‘굿하트의 법칙’(Goodhart’s Law)(Goodhart, 1975)으로 설명되곤 한다(또한 Lucas Critique(1976)도 유사한 주장이다). 이에 따르면, 통제하고자 하는 통화량 지표를 정하고 그에 포함되는 ‘화폐의 종류’를 정의하는 순간, 그 통화량 지표는 예전처럼 작동하지 않는다. 전문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통화의 수요가 매우 불안정하다. 금융기관들이 규제를 피하기 위해 규제대상이 아닌 다른 형태의 금융수단 혹은 화폐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주류 경제학은 은행과 금융기관들의 이러한 금융상품 발명활동을 ‘금융혁신’이라 부르고, 규제를 풀어 오히려 부추겼다. 그 극단적인 예가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주범이었던 MBS 등 자산유동화증권들이었다.

 

이 모두는 은행들이 단순한 금융중개기관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림 1과 같은 주류 경제학의 설명은 현실과 맞지 않다. 은행들은 수동적으로 수취한 예금을 모아 차입자에게 대부하는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 은행들은 누구에게 얼마만큼 대출할지를 스스로 결정한다. 민간은행들의 대출과 예금 창조활동은 중앙은행이 제공하는 지급준비금의 양과 별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은행들은 ‘화폐를 스스로 창조’하여 대부하기 때문이다. 또한 대부분의 대출은 수취한 예금과 무관하게 창조된다. 은행의 대출은 자신의 대차대조표에 자산(대출채권)과 부채(예금)을 동시에 기입하여 이루어진다. 대출이 예금을 창조하고, 예금이 바로 민간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화폐를 구성하는 것이다. 즉, 은행들은 무(無)에서 신용을 창조하여 대부하고, 이자수익을 올린다. 이는 수많은 세계의 중앙은행 관계자들도 공식, 비공식적으로 증언한 바이기도 하다(대표적으로 Federal Reserve Bank of Chicago(1992), Modern Money Mechanics: A Workbook on Bank Reserves and Deposit Expansion(3판, 초판은 1965년 발행); Deutsche Bundesbank, The Role of Banks, non-banks and the central bank in the money creation process, Monthly Report, April 2017; Bank of England, Money Creation in the Modern Economy, Quarterly Bulletin 2014 Q1; 기타 여러 나라 중앙은행장들의 증언에 대해서는 Ryan-Collins et al.(2012), Where Does Money Come From?, New Economic Foundation, p.17 참조; 그 외에도 중앙은행장들의 이러한 증언은 수 없이 많다). 

 

예를 통해 이 과정을 설명해보자. 김씨가 A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최씨로부터 아파트를 매입한다고 하자. 김씨는 A은행에 매입하고자 하는 아파트를 담보로 제공하고 2억 원을 대출 받는다. 이때 A은행은 대출금을 김씨에게 현금으로 주지 않는다. ‘예금’의 형태, 즉 김씨의 계좌를 개설하고 잔고 숫자를 입력해 주는 방식으로 대출금을 지급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김씨에 대한 대출로 A은행의 자산이 ‘대출채권’ 명목으로 2억이 증가했다. 김씨는 이 돈을 언제든 인출할 수 있으므로 A은행에게 이는 ‘예금’, 즉 ‘부채’로 기록된다. 이때 A은행이 대출한 2억 원은 한국은행이나 일반 저축자들로부터 사전에 빌린 돈이 아니다. 단순히 은행의 장부에 기입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이 글을 매우 신중히 읽고 있는 독자라면 즉시 의문을 제시할 것이다. 분명 은행들은 예금을 수취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 하지만 설사 김씨가 대출받은 그 돈이 다른 예금자의 저축이라 하더라도 ‘은행이 무(無)에서 신용을 창조하여 대출하고, 이 대출이 곧 예금이고, 이 예금이 민간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돈을 구성한다’는 명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김씨가 A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은 2억 원이, 박씨의 예금이라 하더라도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박씨도 그 돈을 다른 누군가로부터 받은 것이고, 그 누군가도 다른 누군가에게 받은 것일 것이다. 이렇게 최초의 예금자를 추적해 보면 그것은 결국 어는 민간은행이 될 것이다. 문제를 단순화하여 은행 시스템 전체를 하나로 간주하고, 민간경제부문 전체를 하나로 간주하여 생각해보면 답은 더욱 명확해진다. 민간부문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화폐는 은행이 대출을 통해 발행된 것이다. 경제 전체로 보면, 은행은 다른 누군가의 예금을 대출하는 것이 아니다. 은행의 대출이 예금을 창조한다. 그리고 그 대출은 단순히 장부에 기입함으로써 창조되는 것이다.

 

또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 만약 은행이 스스로 창조한 신용이 아니라 예금자의 저축을 대출해주는 것이라면, 새로운 대출을 하더라도 대차대조표의 자산과 부채 총액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 예컨대, A은행이 예금 100만 원을 수신하면 대차대조표상에는 자산과 부채가 똑같이 100만 원씩 증가한다. 이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대출해 주는 것이라면, 이 100만 원의 채권자/채무자만 바뀔 뿐, 총액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은행이 대출을 행하면 기존의 자산과 부채는 그대로인 채, 새 자산과 부채가 추가로 기록된다. 실제로도 은행은 이렇게 증가한 액수의 자산을 활용한다. 은행은 기존의 예금을 대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창조하여 대출하는 것이다. 경제 전체적으로도 대출이 상환될 때만 예금이 사라진다. 이는 마치 개인간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거래에서 채무자가 빚을 상환하면 차용증서가 폐기되는 원리와 같다. 대출과 예금은 민간은행이 발행하는 차용증서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예금이란 노동이나 기업활동을 통해 발생한 소득이 저축되어 있는 것이라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기업활동과 노동이 더 많은 가치를 창조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다루는 문제는 기업활동이나 노동을 통해 가치의 양이 증가하는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창조된 가치를 표현하고, 교환하며, 저장하는 수단인 ‘돈’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일을 열심히 하고 사업이 번성해서 가치가 증가했다면, 이를 대표하는 ‘돈’(예금)도 증가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돈(예금)은 어디서 온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 답은 민간은행이 이자를 대가로 받고 그것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금 보유자가 대출받은 적이 없다 하더라도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나의 저축은 누군가 나에게 지불했음을 의미하고, 그 누군가는 나에게 지불하기 위한 수단(돈=화폐=예금)을 은행으로 제공받았던 것이다.

 

또 하나의 의문은 우리는 어떻게 해서 한국은행 발행 화폐, 즉 현금을 사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앞서 2019년 2월말 기준 118.6조 원의 현금(지폐와 동전)이 유통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민간부문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돈은 민간은행이 대출을 통해 창조한 예금(화폐)라 말하고 있다. 모순적이지 않은가? 민간은행들이 화폐를 발행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은행이 발행한 화폐(그림 1에서 A은행의 예금)를 민간은행이 중개하여 유통시키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 중앙은행 발행 화폐가 우리 손에 쥐어지는 것도 민간은행이 창조한 예금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중앙은행과 직접 거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은행에 인출 가능한 예금을 보유하고 있으면, 해당 은행에 현금 인출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면 그 은행은 한국은행으로부터 현금을 구매한다. 다만 민간은행은 중앙은행으로부터 현금을 매입하기 위해 자신이 발행한 화폐, 즉 예금(대출)을 사용할 수 없다. 대신 민간은행은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지급준비금을 한국은행에 제시하고 현금을 인도받게 된다. 이때 중앙은행이 전산망의 숫자로 발행한 지급준비금이 현금이라는 실물로 나타나 우리에게 전달된다(지급준비금의 용도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지급준비금을 발행하면서 중앙은행 혹은 국가가 보장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금이나 귀금속 또는 어떤 현물이 아니라 그저 현금(지폐)을 인쇄해 주겠다는 것. 금으로 바꿔주던 옛날의 화폐와 대비하여 이를 불태환지폐(fiat money)라 부른다.

 

이 과정을 달리 보면, 예금이라 부르든 신용화폐라 부르든 민간통화 공급은 신용도가 높은 대출수요가 견인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민간은행은 그저 장부 기입만으로 대출과 예금을 창조하므로 통화창조 능력에 (이론적인) 제약이 없다고 하더라도, 수요가 없으면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통화량이 늘어나면 인플레이션이 일어난다’는 흔한 통념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이 문제는 네 번째 칼럼에서 보다 자세히 다룬다)

 

지급준비금은 은행대출을 실질적으로 제약할까

일부 주류 경제학은 이렇게 민간은행들이 스스로 대출과 예금을 창조하여 민간부문이 사용하는 통화를 공급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의무지급준비금 제도가 존재하기 때문에 은행들은 여전히 중앙은행의 통제 하에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민간은행이 대출을 통해 예금을 창조하면, 이 예금에 지급준비율 요건이 부과된다. 대출을 늘리려면 그에 상응하는 지급준비금을 추가로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 지급준비금은 중앙은행만이 발행하므로 은행들의 신용창조 활동은 여전히 중앙은행 화폐(지급준비금)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급준비금 제약 주장은 형식적으로는 맞지만, ‘실질적으로는’ 맞지 않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위의 예로 돌아가 보자. A은행이 김씨에게 2억 원의 예금(대출)을 창조해 주게 되면 추가 지급준비금을 마련해야 한다. 예컨대 법정 의무지급준비율이 10%라 하면 A은행은 2,000만 원의 지급준비금을 마련해야 한다. 이것이 지급준비금의 첫 번째 용도이다.

 

지급준비금의 용도 보충설명
각 국의 제도에 따라 지급준비금 제도를 운영하는 방법은 상이하지만 원리는 동일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필요 지급준비금은 월별로 지난달 은행들의 영업활동을 반영하여 필요 지급준비금을 계산하게 되는데 매달 1일부터 말일까지를 대상으로 한다(계산기간). 은행들은 매달 두 번째 수요일(매달 두 번째 목요일을 지급준비일이라 부른다)까지 이 필요 지급준비금을 준비하여 다음 달 수요일까지 보유해야 한다(지준 적립기간).

이 외도 지급준비금이 필요한 이유는 크게 보아 두 가지가 더 있다.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지급준비금이 은행의 활동에 ‘실질적인’ 제약조건인지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지급준비금의 나머지 용도도 미리 살펴 보는게 좋겠다. 지급준비금의 두 번째 용도는 은행간 지급결제 수단이다. 앞의 예를 통해 설명해 보자. 김씨가 아파트 매입을 위해 A은행으로부터 2억 원을 대출(예금) 받았다. 이제 이 돈을 최씨에게 전달해야 하는데, 최씨는 자신의 B은행 계좌로 송금해 줄 것을 요청한다고 해 보자(자기앞 수표의 경우도 동일하다). 우리의 경험에서는 이런 이체거래가 매우 간단히 이루어지지만, 은행 시스템 전체적으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모든 은행들은 한국은행에 계좌를 개설해 놓고 있다. 일부 비은행 금융기관들과 정부도 그러하다. 그런데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 계좌를 통해 오고가는 돈은 민간은행이 창조한 예금이 아니다. 여기서는 반드시 한국은행 발행 화폐인 지급준비금이 사용되어야 한다. 은행의 의무지급준비금도 이 계좌에 예치해 둔다. 그림 2를 설명하면서 지적했듯, 은행간 거래에서도, 개별 민간은행과 한국은행 사이의 거래에서도, 또 한국은행과 정부 사이의 거래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들 사이의 거래는 이 한국은행 계좌를 통해 이루어지고, 그 관리의 권한과 책임도 한국은행은행이 갖고 있다. 이를 지급결제제도라 부른다.

 

우리의 예로 돌아가 보자. 김씨가 A은행에 자신의 계좌에 있는 2억 원의 예금을 최씨의 B은행 계좌로 이체해 줄 것을 요청하면, A은행은 지급결제 시스템을 통해 한국은행 계좌에 예치해둔 지급준비금을 B은행의 지급준비금 계좌에 이체한다. 이것이 지급준비금의 두 번째 용도이다. 은행간 지급결제 수단인 것이다. 은행들이 지급준비금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의무지급준비금 요건을 맞추기 위함도 있지만, 일상적 영업활동인 지급결제 수단의 필요가 더 큰 이유일 수도 있겠다. 이체 결과 A은행의 자산 중 지급준비금이 감소하고, 부채에서는 김씨의 예금이 사라진다. 반면 B은행에서는 지급준비금 자산이 증가하고 김씨로부터 전달된 최씨의 예금이 부채로 기록되어, 자산과 부채가 일치하게 된다. 예금의 이체는 지급준비금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대출을 통해 창조된 예금은 인출되거나 다른 은행으로 이체되더라도, 은행 시스템 전체로 보면 소멸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대출이 상환될 때에만 예금(화폐)도 소멸한다. 그럼 상환에 사용되는 예금(화폐)는 어디서 오는가? 어느 민간은행일 것이다. 따라서 경제 전체로 보면 민간부문이 사용하는 약 94%의 ‘돈’은 민간은행이 제공한 것이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이자를 주고 빌려 쓰는 것이다.

 

A은행의 한국은행 계좌 잔고(지급준비금)가 부족하면 어떻게 될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다른 은행으로부터 지급준비금을 빌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의 발행기관인 한국은행으로부터 직접 빌리는 것이다. 한국은행에 지급준비금이 부족할 수는 없다. 한국은행은 지급준비금 발행의 주체이고, 전산망에 키보드를 두드려 숫자를 입력하기만 하면 발행되기 때문이다. 

 

지급준비금 발행 보충설명
우리나라 중앙은행장이 이런 증언을 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미국의 전 중앙은행장 벤 버냉케는 매우 분명하게 이렇게 설명했다. 미국에서 2008년 말 금융위기가 발생하고 양적완화정책이 한창이던 2009년 3월 15일, 그는 미국 CBS의 토크쇼 ‘60 Minutes’(진행 Scott Pelley)에 출연했다. Fed가 민간은행에 지출하고 있는 엄청나 양의 돈이 세금으로 걷은 돈이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것은 세금으로 걷은 돈이 아닙니다. 은행들은 Fed에 계좌를 개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일반 상업은행들에 가지고 있는 계좌와 거의 흡사합니다. 그래서, Fed가 어떤 은행에 돈을 빌려주기 위해서, 우리는 간단히 컴퓨터를 사용해 Fed에 개설해 놓은 그 은행의 계좌에 그 액수만큼 채워줍니다. 이것은 돈을 빌린다(borrowing)기보다는 돈을 찍어낸다(printing money)는 말과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자가 재차 돈을 찍어내고 있나요? 라고 묻자, 그는 “글쎄요, 사실상 그런 셈이죠(well, effectively)”라고 답했다. (이 내용은 홍기빈 역, 『균형재정론은 틀렸다: 화폐의 비밀과 현대화폐이론』, 416~417쪽에도 소개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그가 의회에서도 했던 유사한 증언을 추가로 포함하고 있다)

 

현실에서 은행들은 한국은행으로부터 차입을 매우 꺼려한다. 왜냐하면 은행들이 자신의 평판 혹은 신용이 낮아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다른 은행들이 해당 은행과의 거래를 꺼리고, 그래서 한국은행으로부터 빌려야 할 만큼 해당 은행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금융시장이 불안정할 때 집중적인 타격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금시장에서 지급준비금을 구하려는 수요는 많은데 은행 시스템 전체에 여유 지급준비금이 부족해지면 어떻게 될까? 지급준비금이 부족해진 은행은 지급결제와 의무지급준비율을 맞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지급준비금을 빌리려 할 것이고, 이 과정에서 자본시장에서 금리가 급등할 수 있다. 일반 상품들도 공급이 부족하면 가격이 급등하듯, 지급준비금 시장에서도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면 그 가격인 금리가 오른다. 더구나 금융시장의 변화는 매우 빠르다. 이에 대해 중앙은행은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그대로 방치할 수 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통화정책 체계와 과정을 다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을 비롯해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정책금리(기준금리)를 통화정책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앞서 말한 대로 통화량 목표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목표를 금리로 바꾼 것이다. 금리 목표제란 타겟으로 삼는 시장금리(우리나라는 7일물 RP 금리)를 목표금리(기준금리)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기준금리가 정해지면 타겟 금리부터 시작하여 순차적으로 초단기 콜금리와 기타 장단기금리, 예금과 대출 금리, 그리고 (어쩌면) 실물경제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기준금리를 정하고 그것을 ‘방어’하는 것이 현대 통화정책의 핵심이다. 이것이 실패하게 되면 금융시장은 매우 빠른 속도로 혼란에 빠지게 되고, 심하면 금융위기로 비화될 수도 있다.

 

기준금리 역할을 하는 7일물 RP금리가 오를 기미가 보이면 시장에 지급준비금을 공급하고, 내릴 것 같으면 한국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채권을 팔아 지급준비금을 흡수하여, 그 수요와 공급을 맞춘다. 이것을 공개시장운영이라 부른다. 중앙은행이 지급준비금 발행과 흡수 역량은 이론적으로 무한하다. 왜냐하면 중앙은행이 지급준비금을 독점적으로 발행할 뿐만 아니라, 지급준비금 발행에 제약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전산망에 숫자를 입력하는 방식으로 지급준비금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의 지급준비금 발행 능력은 기준금리를 변경할 때 극적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지급준비금의 추가적 공급 없이 기준금리를 내리겠다는 선언만으로도 타켓 금리는 즉시 그 수준으로 내려간다. 민간 금융기관들이 타겟 금리를 변경하지 않고 현재 금리를 고수하게 되면, 결국 손해를 볼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기준금리 수준으로 떨어질 때까지 중앙은행이 지급준비금을 충분히 공급할 의지와 능력이 있임을 민간은행들과 금융기관들도 잘 알고 있다. 이 때문에, 중앙은행이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알아서 조정되는 것이다.

 

기준금리 방어의 실패가 어떻게 금융시장 혼란을 야기하게 될지 한 가계 예를 통해 살펴보자. 최근 ‘RP레버리지펀드’라는 금융투자상품이 급속도로 성장했다는 보도가 있다. 저금리 시대에 여타 투자수단보다 더 높은 금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라는데, 그 작동원리는 이렇다. 일단 ①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예컨대 1년 만기이고 금리 2%의 국공채를 매입한다. RP레버리지펀드는 여기서 발생하는 이자수익에 만족하지 않는다. ②매입한 국공채를 담보로 만기 1일 혹은 1주일의 초단기 자금을 빌리고 갚기를 1년 동안 반복한다(이때 사용되는 방법이 RP 거래이다). ③이렇게 빌린 자금으로 수익(3%)이 나는 다른 곳에 투자한다. ②와 ③을 3~4번 반복하여 투자 원금의 몇 배로 레버리지를 확대한다. 본질적으로 이는 이자가 낮은 초단기 자금을 빌려 이자가 높은 장기로 투자하는 전략이다. 초단기 자금은 1년 금리로 환산해도 장기채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예컨대 1.5%)하기 때문이다. 그럼 이 펀드의 1년 후 수익률을 계산해보자. 우선 애초 매입한 국공채로부터 2%의 이자수입을 얻을 수 있다. 두 번째로 레버리지 3배를 가정하면 레버리지 투자로부터 얻은 수익 9%(3%*3배). 마지막으로 초단기 RP 거래 이자비용은 4.5%(1.5%*3배)이다. 종합하면 총순이익은 6.5%(2+9-4.5)에 달한다.

 

이와 같이 RP를 이용한 레버리지 투자는 초단기금리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것이란 전망에 기초한다. 그런데 이 초단기 금리는 다시 기준금리에 직접 연동되어 변화한다. 여기서 예로 사용하고 있는 레포펀드 뿐만 아니라 금융상품의 큰 부분이 안정적 장단기 금리를 기초로 만들어져 있다. 만약 어떤 이유로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방어가 실패하고 초단기 금리가 크게 상승하기라도 한다면, 이와 같은 금융상품을 거래하는 금융기관들은 큰 타격(손실)을 받을 수밖에 없고, 심한 경우 금융위기가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앙은행은 타겟 금리의 급격한 변동을 절대 방관할 수 없다. 은행간 시장에 지급준비금이 부족하여 기준금리가 상승하면, 중앙은행은 ‘알아서’ 시장에 필요한 지급준비금을 공급할 수밖에 없다.

 

본래 질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지급준비금은 민간은행들의 대출에 대한 제약조건이 될 수 있는가? 다른 말로, 중앙은행은 지급준비금 공급을 임의로 줄이거나 중단하여 민간은행들을 규율할 수 있는가? 형식적으로 보면 그렇다. 중앙은행만이 지급준비금 발행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간은행의 지급준비금 요구를 자의적으로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제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무지급준비율 규정은 민간은행들의 대출활동을 규제하는데 실효성이 없다.

 

그렇다면 민간은행들의 통화공급 행태를 규제할 수단이 없다는 말인가

‘자본주의 경제에 통화공급을 결정하는 것은 중앙은행이 아니라 민간은행들’이라는 사실은 세계 영국은행(Bank of England)이 설립된 1694년부터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이후 민간은행들의 과도한 통화공급(혹은 특정부문으로의 집중)으로 금융ㆍ경제위기가 반복되자, 다양한 방법으로 민간은행들의 대출과 그에 따른 통화공급 활동을 통제하고자 했다. 가장 최근의 규제 방식으로 BIS가 정한 ‘자기자본비율’ 또는 ‘BIS비율’이라는 것이 있다. BIS(Bank of International Settlement, 우리말로는 흔히 ‘국제결제은행’으로 번역하여 부르기도 한다)는 ‘세계 중앙은행 연합회’ 정도의 국제금융기구이다. BIS가 정하는 규칙은 형식적으로는 각국 은행들에 직접적인 강제력이 없다. 하지만 이 기구의 권고를 무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시장’의 신용평가가 낮아져 불이익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나라에서 BIS의 권고를 수용하여 국내 금융감독규제에 적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금융당국도 BIS의 권고를 수용하여 민간은행들로 하여금 BIS비율(이 규칙을 최조로 정한 것이 ‘바젤협약(1988)’이다)을 충족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BIS는 자기자본비율 8%를 준수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자기자본비율이란 ‘자산 대비 자기자본’의 비율((자기자본/자산총액)*100%)을 의미한다. 가상의 예를 통해 이를 설명해 보자. 1억 원 어치의 주식을 발행해 자금을 모아 ‘뻥은행’이라는 민간은행을 설립했다고 하자. 그럼 이 ‘뻥은행’의 자기자본은 1억 원이 된다. 앞서 설명 한 것처럼, ‘뻥은행’도 일단 설립허가만 받으면, 무(無)에서 신용을 창조해 대출(예금)하고 이자수익을 얻을 수 있다. 첫 해에 ‘뻥은행’은 갑, 을, 병이라는 세 고객에게 각각 10억 원씩 총 30억 원을 대출했다고 하자. 그럼 이제 ‘뻥은행’의 자산(대출채권) 총액은 30억 원이 된다. 이때 BIS비율은 자기자본 1억 원을 자산 30억 원으로 나눈 3.33%가 되는 것이다. BIS비율 기준은 8%이므로, 현재 ‘뻥은행’은 자기자본비율 규정을 심각하게 위반한 것이 된다. 즉 너무 ‘과도하게’ 대출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BIS비율 규제의 본래 취지는 ‘예금자 보호’와 금융안정성 강화였다. 즉 자산(대출채권)이 부도나면 은행의 자산은 줄어들지만, 부채는 그대로 남게 된다. 손실을 은행의 자기돈(자기자본)으로 지급할 수 있도록 보장하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손실이 예금자에게 피해가 되기 때문이다. 은행이 자기자본으로 손실을 메꾸지 못하면 예금자에게 그 피해가 전가됨은 물론이고, 경제 전체에도 심한 충격을 줄 수 있다. 그래서 이는 금융안정성 조건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이러한 취지에서 보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자산이란 ‘부도 날 수도 있는 자산’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BIS비율 계산을 위한 자산총액도 이 ‘손실 가능성이 있는 금액’을 사용해야 한다.

 

문제를 간단히 하기 위해, ‘뻥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은 갑, 을, 병 모두 각기 50% 부도확률이 있다고 하자. 그럼 손실 가능성이 있는 자산의 규모는 총 15억 원이 된다. 그럼 뻥은행이 구비해야 하는 자기자본은 1.2억 원(15억 원의 8%)이다. 자기자본비율로 계산하면 6.67%로 여전히 8% 규정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뻥은행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다(실제로 대부분의 은행들이 이렇게 한다). 첫째, 자산의 일부를 다른 금융기관에 매각하거나 대출을 회수하는 것이다. 가장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지만 그만큼 은행의 수익이 줄어들 것이다. 둘째, 50% 부도위험이 있는 현재의 대출채권을 부도위험(확률)이 더 작은 다른 자산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또는 BIS비율 규제 대상이 아닌 금융 자회사를 설립하고 그 회사에 위험이 있는 대출채권을 팔아넘기는 것이다(2008년 서브프라임 위기로 밝혀진 것처럼, 그때까지 미국의 은행들이 이 방법을 애용했다. 수많은 주류 경제학들과 정책결정자, 금융시장 관계자들은 이를 ‘금융혁신’이라 칭송했다. 그 결과가 규제완화와 파국이었다).

 

여기까지는 BIS비율의 분모인 자산 ‘조정’을 통한 대응방법이다. 분자인 자기자본을 조정하는 방법도 있다. 셋째, 주식을 더 발행하거나 기존 주주들로부터 추가 투자를 받아 자기자본을 확충하는 방법이다. 넷째, 대출한 30억 원(기존 자산)으로부터 들어 온 이윤을 주주들에게 나누어주지 않고 은행에 남기는 것이다. 이것을 유보이윤이라 부르는데, 이는 자기자본으로 계산된다. 따라서 이윤을 많이 내거나 배당을 적게 하면, 은행의 신용창조(대출) 능력이 확대된다. 다섯째, 우리의 예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대손충당금(손실을 예상하고 미리 적립해 두는 돈으로 자기자본에 계상한다)을 많이 쌓아 두는 방법이 있다. 물론 이렇게 되면 이윤이 작아져 유보이윤도 작아지므로, 결국 이윤을 적립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낳는다. 여섯째, 장기후순위채권 등 주식은 아니지만 자기자본으로 계상되는 채권이나 우선주를 발행한다. 앞에서 우리는 민간부문이 사용하는 모든 금융수단은 민간은행들이 무에서 창조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은행들이 자기자본 확충을 위해 발행하는 채권을 매입하는 자금도 은행 시스템으로부터 공급된다. 물론 이는 무(無)에서 창조되어 공급되는 자금이다. 은행 시스템 전체로 보면 이 방법은 우리나라 재벌집단 기업들처럼 ‘상호출자’를 통해 자기자본을 부풀리는 수법으로 볼 수도 있다. 그래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규제를 강화하고자 도입된 바젤 III 규제에는 이러한 행위를 억제하려는 규정들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일반 주식(보통주)으로 조달된 자기자본이 4.5%는 되어야 한다는 규정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이론적으로 심각한 제약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모든 자기자본 확충 자금들이 민간은행이 무에서 창조하여 공급되기 때문이다. 뻥은행이 보통주를 발행한다 하더라도, 그 자금은 민간은행으로부터 나온다.

 

자기자본비율 이외에도 은행의 (무모한) 신용창조 능력을 억제하려는 다른 규제가 있기는 하다. 2009년 G-20 재무장관회담, 그리고 바젤은행감독위원회가 2018년부터 시행하도록 권고한 ‘레버리지 비율’ 규제라는 것이 있다. 이는 본질적으로 BIS비율의 역수와 매우 유사하다. 따라서 앞의 자기자본비율 규제가 갖는 한계와 유사한 한계를 갖는다. 또 하나의 예로 유동성 규제도 있다. 유동성 커버리지 비율(liquidity coverage ratio, 약칭 LCR) 규제가 그것이다. 우리나라 LCR 규정은 100%인데, 이는 향후 1개월간 예상되는 순현금유출(현금유출-현금유입)에 대비하여 그 이상의 고유동성자산(즉시 매도하여 현금으로 전환할 수 있는 자산)을 보유하라는 규정이다. 은행들의 신용창조 활동 억제라는 측면에서 그 효과성이 아직 검증된 적은 없지만, 이 역시 무력할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앞서 말한 ‘굿하트의 법칙’이 작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통화공급을 민간은행에 맞기면 생기는 일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민간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통화공급을 민간은행이 결정하고, 중앙은행이나 금융당국이 이를 통제할 수 없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문제라는 것인가? 첫째, 금융위기의 가능성이 커진다. 단언컨대, 자본주의 역사상 대부분의 금융위기와 경제위기는 민간은행의 과오로부터 발생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와 그에 뒤이은 경기침체를 상기하자. 민간은행들이 통화발행권을 보유하게 되면, 공공의 이익보다는 금융기관 및 그 이해당사자들의 이익을 목적으로 영업한다. 그리고 개별 은행의 최선이 금융 전체, 그리고 전체 경제의 최선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것이 큰 문제를 일으킨다.

 

둘째, 민간 실물부문이 사용하는 통화를 민간은행이 공급하게 되면 왜곡된 경제구조가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대표적으로 부동산 버블이 그것이다. 주류 경제학에 따르면, 금융시장은 시장규율에 따라 움직이고, 또 이것이 바람직하다. 은행의 통화공급(대출=신용창조)도 그렇다. 시장의 규율이란 가격에 의한 조정을 말한다. 금융에서 가격이란 금리이다. 높은 금리를 제시하는 곳에 더 많은 대출과 통화가 공급될 것이다. 이에 주류 경제학은 높은 금리를 제시하는 측이 투자를 통해 그 이상의 수익을 낼 확신이 있기 때문에 높은 금리에도 대출받고자 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수익이 높은 곳에 투자하는 것이 곧 효율적인 경제이다. 그래서 자유로운 금융활동이 허용되면 더 수익성 있는 곳으로 자금이 흘러가므로, 경제 전체적으로 최대의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은행들은 무작정 높은 금리 순으로 대출하지 않는다. 대신 은행들은 일정정도의 마진을 확보할 수 있는 대출금리를 미리 결정하고, 대출을 신청하는 고객의 신용을 평가하여 상환 가능성이 큰 고객들에게 대출을 ‘할당’한다. 정보의 불완전성과 비대칭성,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들 때문에 그렇다. 만약 높은 금리 순으로 대출을 결정할 경우, (극단적인 예로) 상환 의사가 애초부터 전혀 없는 고객이 비상식적으로 높은 금리를 제시하며 대출을 신청할 때, 이를 예방할 방법이 없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고객이 제시하는 금리가 대출금리가 된다면, 성실하고 신용도 높은 고객들은 대출받기를 포기하고 시장을 떠날 것이다. 그 결과 은행은 미상환 대출이 쌓여 머지않아 파산할 것이다. 따라서 대출 결정의 더 중요한 요인은 높은 금리가 아니라 고객의 신용도이다. 이 모두는 고객에 대해 잘 알지 못하거나(정보의 불완전성) 고객만 알고 은행은 모르는 속사정(정보의 비대칭성)으로부터 발생하는 문제이다.

 

정보의 문제로 은행은 상환 가능성 중심으로 통화공급을 임의적으로 할당한다. 상환 확률을 높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출액 이상의 가치를 갖는 담보를 확보하는 것이다. 부동산이 대표적인 담보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부동산 가격이 20% 이상 하락한 경험이 없다. 이를 기준으로 판단하면, 현재 평가액의 80%까지 대출하더라도 은행은 손실을 볼 확률이 거의 없게 된다. 반대로 중소기업처럼 담보가 부족하고 사업의 불확실성이 큰 경우 대출받기가 어려워진다. 이는 생산영역에서 발생하는 혁신을 크게 제약할 가능성이 크다. 그 결과 경제 전체적으로 비효율이 유발될 수 있다. 은행들의 과도한 부동산 대출 선호가 부동산 거품과 붕괴를 낳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다. 이것이 함축하는 바, 민간은행들은 통화발행의 권한뿐만 아니라 그것을 누구에게 어떻게 할당할지를 결정하는 권한까지 행사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화폐는 그 본성상 공공재이고, 또 그래야 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경제에서 화폐는 누구나 사용하는 것이고, 화폐 없이는 실물경제도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공공재의 공급을 사익추구가 목표인 민간기업에 맡겨야 할까? 앞서 밝힌 것처럼, 통화를 민간은행이 공급하게 됨으로써 모든 돈은 ‘빚’이 되고 이자를 지불해야 한다. 민간은행이 공짜로 대출해줄 리는 없기 때문이다. 민간은행이 통화공급을 독점하게 되면 이자 지급을 위한 돈도 민간은행으로부터 구해야 한다. 이자를 지불하기 위해 또 빚을 내야 하는 것이다. 그 결과 화폐를 얻기 위한 무한경쟁이 펼쳐진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성실한 노동은 가치를 창조하고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우수한 기업가의 혁신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건전하고 소중한 가치를 생산하고 교환하는 수단을 왜 민간은행에게 이자(비용)를 지급하고 빌려 써야만 하는 것일까? 불가결한 필연적 이유가 있는 것일까? 경제 발전의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결과일까? 그렇지 않다. 이는 경제적 진화가 낳은 자연적 결과가 아니다. 제도가 그렇게 설정되어 있을 뿐이다. 그 제도는 인간이 임으로 고안한 것이고, 그런 고안의 이면에 경제적으로 불가피한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정부도 일반 공공재처럼 이자를 물지 않아도 되는 통화를 공급할 수 있다. 또한 통화를 사회 전체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할당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투기용 대출보다는 생산적 대출이 늘어날 것이고, 사회는 보다 풍요로워지고 금융위기와 같은 주기적 재앙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금융위기가 발생하면 공장이 멈추고 경제가 침체된다. 그것은 공장의 위기가 아니라 은행의 위기인데도 그렇다. 은행들이 위기에 처하면 통화공급을 중단하기 때문이다. 통화공급을 민간은행에 맡긴 결과이다. 주기적인 금융위기가 공장위기로 전화되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이미 중앙은행들은 자신의 통화를 발행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본 것처럼, 중앙은행 통화는 민간경제(공장)이 사용할 수 없다. 민간경제는 은행이 제공하는 통화만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정부가 화폐를 공공재로 공급한다면, 은행들은 망할 것이다. 하지만 경제 전체에게는 더 큰 이익이 될 수도 있다(정부가 무상으로 화폐를 공급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예컨대 엔렌 브라운 저, 『달러: 사악한 화폐의 탄생과 금융 몰락의 진실』(원제는 “Web of Debt: The Shocking Truth about Our Money System and How We Can Break Free”)를 참조할 수 있다. 또한 세계 공공은행(public bank)의 역사와 운동들도 참조할 만하다. 특히 1939-1974년 사이 캐나다은행이 정부에 무료의 통화를 공급하여 경제발전에 쓰도록 했던 역사와 이와 관련한 최근 소송사건도 참고할 만하다).

 

MMT의 무엇이 새로운가

현 제도 하에서 중앙은행뿐만 아니라 정부도 지급준비금만 사용한다. 정부의 조세 및 정부지출이 지급준비금을 이용해 수행된다는 점은 강조되거나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것이 MMT의 통찰이 강조하는 지급준비금의 세 번째 역할이다. 정부무문은 철저히 지급준비금만 사용하고, 민간부문은 철저히 민간은행이 발행하는 통화를 사용하게 됨으로써, 통화재정정책에도 큰 제약이 존재한다. 하지만 주류 경제학은 이런 제약은 무시하고, 지급준비금과 민간통화로 구분되어지는 화폐의 이원화 구조를 무시함으로써 재정정책의 위험성을 과장해 왔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현대 금융제도와 민간은행들의 행태를 설명하는 이론은 MMT에게만 독특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케인즈 이래로 수 십 년 동안 발전해 온 포스트 케인지언 경제학과 대부분 공통된 견해를 갖고 있다. 하지만 정부정책, 특히 재정정책과 금융정책의 금융적 속성과 제약조건,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연구는 MMT의 고유한 특징이다. 이것이 다음 칼럼의 주제이다.

전용복 팩트체커는 2010년부터 경성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08년 미국 University of Utah에서 수요측 요인으로 중국경제의 빠른 성장을 설명하는 논문을 작성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학에서 가르치는 주류 경제학 대부분이 현실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고 믿으며, 대안적 경제이론을 탐구해 왔다. 특히 대안적 경제성장론, 화폐ㆍ금융론, 재정정책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추신:

지난 글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분배된 소득 중 일부가 사용되지 않고 저축되면, 생산물이 팔리지 않아 수요부족 문제가 발생한다. 실제로 자본주의 경제의 역사에서 수요부족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이 첫 번째 칼럼이 게재되고 어느 독자께서 페이스북을 통해 한 가지 비판적 의견을 주셨다. 그 독자는 “은행의 역할에 대한 고려가 빠져있다, 저축이 발생하면 은행을 통해 투자에 사용”되므로 수요부족 문제는 없다고 지적했다. 이 독자의 주장이 정확히 주류 신고전파 경제학 교과서에 쓰여 있는 그대로이다. 저축이 투자보다 크게 되면(즉 실물 생산물에 대한 수요가 부족해지면), 이자율이 즉각적으로 하락한다. 낮아진 이자율로 인해 저축은 감소하고 투자는 증가하게 된다. 저축과 투자가 일치할 때까지, 즉 수요부족 문제가 투자를 통해 해소될 때까지, 이자율 하락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대부자금론(loanable fund theory)라 부른다. 저축과 투자로 표현되는 ‘자본시장’이 잘 작동한다면 수요부족, 실업 같은 ‘경제적 불균형’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주류 경제학이 왜 그리도 시장을 신봉하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가설이 성립하려면 우선 저축과 투자 모두가 이자율의 함수여야 하고, 그것도 저축과 투자가 이자율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과연 그러한가? 이에 답하기 위해, 본 칼럼과 직접 관련된 몇 가지 논점만 상기하고자 한다. 첫째, 이자율은 저축과 투자에 의해 결정되는 가격 변수가 아니다. 둘째, 투자자금은 저축을 통해 공급되는 것이 아니다. 투자자금은 저축과 무관하게 민간은행이 신용을 창조하여 공급한다. 셋째, 금리는 시장 조정 기제가 아니라 정책변수이다. 시장금리는 기준금리에 가산금리를 더해 결정되므로 추세적으로 기준금리를 추종하며 변화한다. 기준금리는 정책변수로서 경제 외부에서 중앙은행이 결정한다(현대 통화정책 체계는 금리 목표제임을 기억하자). 종합하면, 이자율 변화는 저축과 투자를 일치시키는 가격변수가 아니고, 거시경제적 균형을 달성하는 기제도 아니다. 가장 일반적으로 말해, 설사 이자율 조정으로 거시경제적 균형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그 균형에서의 생산수준이 완전고용을 보장할 이유는 전혀 없다. 통화공급 과정의 ‘실제’에 대한 이번 칼럼이 그 독자의 비판에 대한 답이 되길 바란다.

필자 전용복은 2010년부터 경성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08년 미국 University of Utah에서 수요측 요인으로 중국경제의 빠른 성장을 설명하는 논문을 작성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학에서 가르치는 주류 경제학 대부분이 현실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고 믿으며, 대안적 경제이론을 탐구해 왔다. 특히 대안적 경제성장론, 화폐ㆍ금융론, 재정정책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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