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집트 무덤이 '피라미드'는 아니다

  • 기자명 곽민수
  • 기사승인 2019.04.30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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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탕카멘의 피라미드’, 이 말이 어색하다고 느끼신다면 이 글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미 다 알고 계신 것이니 더이상 이 글을 읽으실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응? 뭐가 이상한거지?’ 혹은 ‘투탕카멘이 누구더라’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신다면 이 글을 한번 쯤은 읽어 보실 만하다.

‘고대 이집트’하면 누구나 반사적으로 거의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피라미드이고, 이 피라미드는 분명히 고대 이집트의 가장 대표적인 왕묘 형식이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의 모든 무덤이 피라미드인 것은 아닐 뿐더러, 모든 왕묘가 피라미드인 것도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피라미드는 3000여년의 고대 이집트 역사 속에서 특정 시기에만 왕묘로 사용되었다. 

최초의 피라미드는 기원전 2650년 경에 만들어진, 고왕국 3왕조 시대의 파라오인 조세르(Djoser)의 피라미드(사진 1)다. 이때에 이 파리미드의 설계와 건축을 담당했던 이가 임호텝(Imhotep)이라는 인물인데, 이 사람의 이름은 고대 이집트를 모티브로 한 영화 <미이라>에서 사용되기도 했다.

 

<사진 1> 계단식 피라미드, 사진 출처 : 곽민수

 

이후 4왕조 시대를 연 스네페루(Sneferu, 기원전 2600년 경 재위)는 계단식 피라미드가 아닌 온전한 형태의 피라미드(사진 2)를 짓기 시작한다.  그런데 새로운 도전에 나섰던 스네페루의 건축가들은 건축 과정에서 공학적인 어려움을 겪는다. 이대로 짓다가는 피라미드가 붕괴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그들은 짓고 있던 피라미드 상단부의 경사각을 54도에서 43도로 낮췄다. 그렇게 외부 경사각이 굴절되어 있는 묘한 형태의 ‘굴절 피라미드’가 탄생했다. 

 

이렇게 굴절 피라미드 건설을 통하여 공학적 경험을 쌓은 파라오의 건축가들은, 곧  온전한 형태의 피라미드(사진 3)를 완성해낸다. 그것이 오늘날 ‘붉은 피라미드’라고 불리는 피라미드다. 그러나 이 붉은 피라미드의 외부 경사각은 그 각도가 43도에 지나지 않는, 완만한 경사다. 

<사진 2> 굴절 피라미드, 사진 출처 : 곽민수
<사진 3> 붉은 피라미드, 사진 출처 : 곽민수

 

스네페루의 아들인 쿠푸(Khufu)는 조금 더 대담한 프로젝트(사진4)를 시도했다.  그는 아버지가 지었던 피라미드보다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가파른 경사각을 갖고 있는 피라미드를 건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에 활약했던 건축가는, 조세르 치하에서 활약했던 임호텝보다는 훨씬 덜 알려져 있는데, 헤미우누(Hemiunu)라는 인물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인물을 헤몬(Hemon)이라고 불렀다. 결국 쿠푸와 헤미우누가 지은 대피라미드는  밑변의 길이가 230미터, 높이는 146미터나 되고, 경사각 역시도 52도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구조물로 완성되었다.

 

<사진 4> 대피라미드, 사진 출처 : 곽민수

 

쿠푸 시대  이후에도 피라미드는 꾸준히 왕묘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2500년대의 파라오인 쿠푸의 아들인 카프라(Khafra)와 손자인 멘카우라(Menkhaura)는 대피라미드 옆에 바로 옆에 자신의 파리미드를 지어서 ‘기자 피라미드군’(사진 5)을 완성하였다. 고왕국 시대에 해당되는 5, 6왕조 시대(기원전 2400년대 - 2181년 경)에도 피라미드(사진 6~7)는 계속해서 왕묘로 지어졌고, 훨씬 후대인 중왕국 시대의 12왕조 시절(기원전 1991년 – 1802년 경)의 파라오들도 열심히 피라미드(사진 8)를 지었다. 그러나 피라미드의 건축은 쿠푸 시대 이후로 더 발전하기는 커녕, 오히려 급속하게 퇴보하여 기자 지역에 피라미드가 지어지던 시대 이후의 지어진 어떠한 피라미드도 대피라미드 정도의 규모와 견고함을 성취하지는 못했다.

 

<사진 5> 카이로의 시타델에서 바라본 기자 피라미드군, 사진 출처 : 곽민수
<사진 6> 5왕조 시대 파라오 우나스의 피라미드, 사진 출처: 곽민수
<사진 7> 아부시르의 5~6왕조 시대 피라미드군, 사진 출처: 곽민수
<사진 8> 12왕조 시대 아메넴헤트 3세의 피라미드. 사진출처: 곽민수

 

12왕조 시대 이후에는 더 이상 피라미드가 왕묘로 사용되지 않았다. 왜 파라오들이 피라미드 건설을 포기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 가운데는 완전히 드러나는 피라미드와는 달리 쉽게 찾기 힘든 방식으로 무덤을 만들어 무덤의 도굴을 피하고자 했던 의도도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의도는 오늘날 ‘왕들의 계곡’(사진 9)이라고 불리는, 외부에 노출되어 있지 않은 지역에 왕묘를 짓기 시작한 신왕국 18왕조 시대의 파라오 투트모스 1세(Thutmose I, 기원전 1506-1493년 경 재위)의 선택에서 엿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왕국 시대 18왕조의 파라오인 투탕카멘(Tutankhamen, 기원전 1332-1323년 경 재위) 역시도 피라미드를 자신의 무덤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 만들어지던 왕묘들은 대략 암굴묘(rock-cut tomb) 정도로 부르는 수 있는 형식의 무덤이다. 이 형식의 무덤은 바위 산을 깊게 파고 들어간 통로와 여러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투탕카멘의 무덤(사진 10)은 이런 암굴묘 형식의 왕묘들 가운데서도 가장 작은 축에 속하는 것이다. 투탕카멘 뿐만이 아니라, 투탕카멘 만큼이나 유명한 람세스 2세(Ramesses II)나, 유명세는 이들 둘 보다 좀 덜하지만 그래도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아케나텐(Akhenaten), 하트셉수트(Hatshepsut) 같은 유명 파라오들도 모두 다 피라미드가 아닌 암굴묘(사진 11)를 자신의 무덤으로 사용했다. 

 

<사진 9> 왕들의 계곡 전경, 사진 출처: 곽민수
<사진 10> 투탕카멘 무덤 입구, 사진 출처: 곽민수
<사진 11> ‘암굴묘’의 구조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람세스 2세의 무덤 도면, 사진 출처: Theban MappingProject

 

이에 반하여  앞서서 언급한 조세르, 스네페루, 쿠푸나 우나스, 테티, 니우세레, 네페르카레 같은 피라미드를 무덤으로 사용한 파라오들의 이름은 이집트학에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이들에게는 아마도 꽤나 생소할 것이다.  그러나 피라미드가 주는 인상이 워낙 강렬하기 때문인지, '이집트의 왕묘 = 피라미드', 더 나아가 '이집트의 무덤 = 피라미드'와 같은 이해는 우리 주변에서 계속해서 강력한 ‘인식의 프레임’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한국 언론들은 이집트 고고학 소식을 보도할 때에 종종 이와 관련된 실수를 한다. 두 가지 사례만 들어보자.

 

지난해 연말, 이집트 고고부(Ministry of Antiquities)는 사카라에서 보존 상태가 훌륭한 고왕국 시대 무덤을 발굴했다고 발표를 했다. 이 소식을 보도한 2018년 12월 16일자, 뉴시스 기사의 제목은 ‘이집트 기자에서 4400년된 온전한 피라미드 발견’이고, 이 기사는 “이집트 문화재부는 기자지역 피라미드 지구 부근의 사카라 네크로폴리스에서 5대왕조시대 왕실사제의 ‘예외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는’ 피라미드 무덤을 발견했다고 15일(현지시간) 발표했다.”, 이런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이 제목과 문장은 사실관계의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때에 발굴된  무덤은 고왕국 시대의 것은 맞지만 피라미드는 아니기 때문이다. 고왕국 시대의 귀족 계층은 마스타바(mastaba) 형식이나 암굴묘로 자신의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 보도에서 다루고 있는 왕실 사제 와흐트예(Wahtye)의 무덤은 암굴묘에 해당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시스는 이 무덤을 피라미드라고 칭했다. 앞서서 설명한 것처럼 피라미드는 고왕국 시대와 중왕국 시대 일부 시기에 왕묘로 사용된 무덤 형식이고, 이집트 역사를 통틀어서 피라미드가 왕묘 이외의 개인의 무덤으로 사용된 예는, 지방 호족들이 이집트가 통일되지 않았던 중간기 동안에 사용한 소형 피라미드를 제외하고는 없다. 대신 신왕국 시대가 되면 일반 귀족 계층이 자신의 무덤 예배소 상부에 피라미드 형태의 조형물을 설치한 경우들은 있다.

<사진 12> 뉴시스 기사 캡처

 

연합뉴스TV의 경우에는 같은 소식에 대해 직접 특파원이 현장에 나가 취재한 내용으로 1분 40초 짜리 꼭지를 만들어서 보도했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뉴스 영상에서는 사카라에 있는 조세르(Djoser)의 계단식 피라미드(Step Pyramid)가 가장 먼저 화면에 등장하고, 피라미드 경내로 들어서는 회랑을 비롯한 이 파리미드의 부속 구조물들도 중간중간에 화면에 등장한다. 더군다나 이와 같은 영상에 “드넓은 사막 한 가운데 피라미드가 우뚝 솟아 있습니다. 내부 벽면에는 사람 모습을 한 거대 조각상과 그림들이 가득합니다.”와 같은 멘트가 덧붙여진다. 이런 구성은 마치 이번에 발굴된 무덤이 계단식 피라미드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만약 이것이 실수라면, 특파원이 직접 현장을 찾아 취재까지 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실수라 할 수 있다. 또 만약 의도적으로 조세르의 피라미드를 뉴스 영상에 삽입한 것이라면, 이것은 전적으로 시청자들을 기만하는 행위인 만큼 크게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사진 13> 연합뉴스 TV 화면 캡처

 

한국 언론의 이집트 고고학 관련 보도에 등장하는 오류는, 예컨대 위에서 다룬 이집트의 무덤을 무조건 피라미드라 칭하는 실수 같은 것들은 오래도록 꾸준히 재생산되고 있다. 이집트학과 관련된 학문적 저변이 전혀 없는 한국에서 어쩌면 이런 실수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언론보도에 있어서 정확성은 생명과도 같은 것임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반복되는 실수에 대해서는 진지한 문제인식을 갖고 차근차근 성찰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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