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머이자 소비자로서 '개발사 사정'을 신경써야 한다

  • 기자명 박현우
  • 기사승인 2019.05.13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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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에 “왜 우리가 당신들 사정까지 신경 써야 합니까?”라는 글이 올라왔다. 이 글은 <스타 시티즌>의 개발자 크리스 로버츠가 바이오웨어의 신작이자 망작인 <앤썸>을 변호하며 한 말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게이머들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Gamer don’t quite understand how difficult is to diliver everything flawless" 글은 이 발언이 나온 이유도 설명한다. “지난 2월 출시된 바이오웨어의 신작인 ‘앤섬'이 유저의 비판을 받는 이유가 열악한 환경 때문이며, 게이머들이 이를 이해해 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크리스 로버츠는 헬로게임즈의 ‘노맨즈스카이'도 언급하며, 노맨드스카이 개발팀이 ‘학대'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게임 <앤썸>

인벤 트위터는 이 글을 인용하며 소비자로서의 당연한(?) 권리도 주장한다. “게이머는 정당한 대가를 내고 상품을 구매하는 입장입니다. 왜 우리가 개발사 사정까지 신경써야하죠?” 문장이 길기는 한데 결국 손님은 왕이란 거다. 돈을 지불했는데 게임사 사정이 열악하건 말건 그런 걸 왜 게이머가 신경 써야 하냐는 것. 아주 틀린 주장이라 보기도 힘들지만, 딱히 동의가 되는 주장도 아니다.

글 제목의 “우리가"는 글쓴이를 포함한 게이머, “당신들"은 게임 개발사 및 개발자라고 볼 수 있고 “개발사의 사정"은 개발사의 열악한 환경이다. 즉, 글쓴이를 포함한 게이머는 소비자로서 게임사의 열악한 개발 환경을 일일이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게 이 글의 주요 논지다. 힘들다고 징징대지 말고 어쨌든 결과로 승부하라는 이야기. 한 트위터리안은 이 트윗에 이런 답글을 달았는데, 사실 이 글은 이 트윗만으로도 결론낼 수 있다. “니네가 만약 최저임금도 못 받고 유사 기사써도 구독자들은 알 바 아니다 그지?”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인벤의 글에 동의하지 않는다. 노동권은 그 자체로 중요하지만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를 하며 이 글을 읽는 분들의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 내용은 생략하겠다. 다만 최근 해외 게임업계에서는 <앤썸>을 제작한 바이오웨어나 <모탈 컴뱃 11>을 출시한 네더렐름, <포트나이트>를 서비스하고 있는 에픽게임즈가 노동자들을 일주일에 70시간에 100시간 이상씩 노동시키는 게 다시금 이슈가 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우리가 당신들 사정까지 신경 써야 합니까?”라는 글이 나오니, 한숨이 나올 뿐이다.

나는 “우리가 당신들 사정까지 신경 써야 합니까?”라는 글을 쓴 사람을 비롯해 한국에서 게임 이슈를 다루거나 게임을 직접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의 삶의 질이 충분히 보장되기를 바란다. 노동자의 당연한 인권이 보장되기를 바라고, 내가 사랑하는 매체인 게임을 다루며 혹사 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부차적인 이유가 되겠지만, 업계 종사자들의 삶의 질이 보장될 때 그들이 세상에 내놓는 창작물들이 더 빛나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있다. 수면 시간도 제대로 보장 못 받는 사람이 어떻게 제대로 된 게임을 만들 것이며, 제대로 된 기사를 쓸 것인가.

인권에 관심 없는 분들을 위해 세속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게임의 질을 위해서라도 게이머이자 소비자인 우리들은 게임사의 열악한 환경에 귀를 기울여야한다. 게임을 개발하는 노동자들이 충분한 휴식을 누리지 못하고 충분한 게임 개발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게임 개발은 그 자체로 힘겨운 일이 된다. 이런 일이 장기화되면 게임에 큰 뜻이 있는 인재들은 게임업계에서 탈락되고 업계의 잠재력은 상실된다. 결과적으로 소비자들은 더 많은 게임을 누릴 수 없게 되거나 흔해 빠진 게임들을 접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멀리갈 것도 없이 한국 게임업계는 해외 게이머들이 상상하는 악몽 그 자체다. 스토리 기반 싱글 게임은 완전히 실종됐고, 대형 게임사들은 해외 게임을 카피하거나 모바일 가챠 게임 따위나 만들면서 현금 결제를 유도하고 있다. 넥슨, 넷마블, 엔씨 등 자본에 부족함이 없어 어느정도 리스크를 견딜 수 있는 대형 게임사들은 자동 사냥이 탑재된 모바일 가챠 게임을 만들고 ‘대작' 타이틀을 붙이고 있는데, 이는 한국 게임판의 현실을 더 없이 잘 보여준다. 해외에도 모바일 가챠 게임은 있다. 다만 해외에서는 거대 자본이 투입된 스토리 기반 싱글 게임이 꾸준히 나온다. 그리고 이런 게임들은 게임업계에 매번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다.

반면 한국 게임판은 정체되어있다. 엔씨는 <리니지 M>에 접속을 안해도 게임 캐릭터가 성장하게 해주겠다며 대대적인 홍보를 했고, 언론사들은 이를 혁신이라며 찬양하기 바빴다. 게임을 직접 플레이하지 않고 게임 캐릭터가 성장되게끔 하는 시스템이 한국 게임판에서는 ‘새로운 바람'이다. 이쯤되면 차라리 넷플릭스의 인터렉티브 드라마인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가 더 게임에 가까울 지경인데, 이를 비판하는 언론의 목소리는 찾기 힘들다.

한국 게임사들이 훌륭한 그래픽을 탑재한 방치형 다마고치 게임이나 고퀄리티 빠칭코 게임만 만들게 된 원인이 오로지 열악한 근무 환경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열악한 환경이 새로운 것을 상상하지 못하게 막는 주요한 원인 중 하나라 생각한다. <서든어택 2>를 제작한 넥슨의 개발자들이 당시 지구에 생존해있는 인류가 만든 FPS 게임을 할 시간이 1분이라도 있었다고 상상해보라. 부끄러워서 <서든어택 2> 같은 걸 출시하지도 못했을 거고 “니들이 허접한지 우리가 허접한지는 결과가 말해줄 것이다"라는 우물 안 개구리가 할 법한 발언은 하지도 못했을 거다.

게임 엔진 <프로스트바이트3>

개발 환경은 게임 퀄리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기도 한다. 바이오웨어의 <앤썸>이 지금처럼 명실상부한 망작이 된 이유는 게임 개발 환경이 문자 그대로 열악했기 때문이다(링크). 유통사이자 갑인 EA는 자사의 프로스트바이트 게임 엔진으로 게임 개발을 하게끔 강요했는데 정작 을인 바이오웨어에는 프로스트바이트 엔진을 다룰 수 있는 전문가가 없었다. 프로스트바이트 엔진은 에픽게임즈의 언리얼 엔진과 달리 개발자들에게 친숙하지도 않아서 해당 엔진의 전문가가 필요했지만 <앤썸>의 유통을 책임지고 있는 EA는 프로스트바이트 엔진의 전문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지도 않았다. 당연하게도 게임 개발은 더딜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교훈을 얻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현재 개발이 진행 중인 리스폰의 <스타워즈 제다이: 폴른 오더>는 EA 유통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개발자 친화적인 언리얼 엔진으로 제작되고 있다.

엔진만의 문제가 아니다.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게임을 제작하는 감독이 부재했던 탓에 바이오웨어는 몇 개월간 시간을 낭비했다. 게임 이름인 “앤썸"은 게임 개발자들 본인조차 그 뜻을 모르고(당연히 이 글을 쓰는 나도 모른다), <앤썸>의 가장 인상적인 시스템 중 하나인 비행 시스템은 경영진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급하게 게임에 탑재됐다. 개발 환경이 다르고 제대로 된 감독만 스튜디오에 있었다면 <앤썸>이 어떤 모습이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코타쿠가 바이오웨어의 직원들을 인터뷰하고 <앤썸>의 뒷 이야기를 기사로 푼 이유는 코타쿠가 게임 전문 매체이기 때문이다. 게임 전문 매체가 바이오웨어라는 게임사의 사정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다루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는 언론의 당연한 사명이고, <앤썸>의 트레일러를 보고 큰 기대를 품었지만 결과물에 실망했던 게이머들의 최대 관심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벤은 바이오웨어의 사정을 이야기한 크리스 로버츠의 말을 인용하며 “왜 우리가 당신들 사정까지 신경 써야 합니까?”라고 했다. 신경을 좀 썼으면 좋겠다. 스스로를 “기자"라고 소개하면서 “기자수첩" 카테고리에 이 글을 썼잖나? 기자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때조차 신경을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다. 요즘 그런 기자가 워낙 귀하기는 하지만, 기자라면 그 길을 지향해야하지 않겠나. 만약의 경우이지만, 아마 대부분의 기자들은 인벤의 기자들이 열악한 환경에 처해있는 게 알려진다면 언제든 나서서 뉴스로 만들어줄 거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왜 우리가 당신들 사정까지 신경 써야 합니까?”라고 말하지 않을 거다. 인벤도 그래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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