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는 <천부경>을 위조라고 분명히 말했다

  • 기자명 이문영
  • 기사승인 2019.05.17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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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컬럼 <천부경 ‘모순’이 환단고기 ‘위작’을 입증하다>에서 밝힌 바와 같이 <천부경>은 1913년 단군교 정훈모 교주의 글 <단군교종령>에서 그 이름이 처음 나왔고, 이후 1920년 정병훈의 <정신철학통편>에 전문이 처음 소개되었다. 이후 단군교에서는 1921년에 기관지 <단탁>을 통해 <천부경>이 1916년 가을에 묘향산 석벽에서 발견되어 1917년 1월 10일에 단군교로 보내져왔으며 보낸 사람은 계연수라고 주장했다. 그후 애류 권덕규를 비롯해 여러 학자들이 천부경에 대한 글을 쓰면서 관심이 급증되었다. 단재 신채호는 이런 현상에 일침을 가한 바 있었다.

신채호는 동아일보에 연재하고 있던 <삼국지동이열전교정-조선사 연구초>를 통해서 이와같이 이야기했다.

 

역사를 연구하랴면 사적(史的) 재료의 수집도 필요하거니와 그 재료에 대한 선택이 더욱 필요한 자(者)라. 고물이 산같이 쌓였을지라도 고물에 대한 학식이 없으면 일본의 관영통보(寬永通寶)가 기자(箕子)의 유물도 되며 십만 책의 장서루(藏書樓) 속에서 좌와할지라도 서적의 진위와 그 내용의 진가를 판정할 안목이 없으며 후인 위조의 천부경 등도 단군왕검의 성언(聖言)이 되는 것이다. (동아일보 1925년 1월 26일자)

1925년 1월 26일자 동아일보 <삼국지동이열전교정-조선조 연구초> 기사. 단재 신채호는 천부경이 위조됐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신채호는 확실하게 “후인 위조의 천부경”이라고 써서 <천부경>이 위서임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도 유사역사학 쪽에서는 신채호가 후일 이런 견해를 철회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 근거는 <조선상고사>다. <조선상고사> 제1편 총론 중 ‘4. 사료의 수집과 선택에 대한 상확 4) 위서의 변별과 선택에 대하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아국은 고대에 진서(珍書)를 분기(焚棄)한 때(이조 태종의 분서같은)는 있었으나 위서를 조작한 일은 없었다. 근일에 와서 <천부경>, <삼일신고> 등이 처음 출현하였으나, 누구의 변박이 없이 고서로 신인(信認)할 이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국 서적은 각씨의 족보 중 그 선조의 사(事)를 혹 위조한 것이 있는 이외에는 그리 진위의 변별에 애쓸 것이 없거니와, 다음 접양된 인국인 지나·일본 양국은 종고로 교제가 빈번함을 따라서 우리 역사에 참고될 서적이 적지 않다. 그러나 위서 많기로는 지나 같은 나라가 없을 것이다. 위서를 변인(辨認)치 못하면, 인증치 않을 기록을 아사(我史)에 인증하는 착오가 있다. (조선일보 1931년 6월 18일)

 

위 글을 가지고 유사역사가들은 신채호가 1925년에는 <천부경>을 위서라고 생각했지만 1931년에는 생각이 바뀌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글의 첫 문장은 우리나라 ‘고대’에 위서를 만든 적이 없다는 말이며, 그 뒷문장은 ‘근일에 와서’라고 하여 고대와 분리해 놓고 있다. 저 말이 <천부경>이 단군의 말씀이라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는 없다. ‘고서로 신인할 이가 없게 된 것’이라는 말은 고서가 아니라는 말과 동일한 뜻이기 때문이다. 저 두 문장은 서로 잘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유사역사학에서는 자기들 편하게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문장에서 우리나라 서적 중에 족보에 위조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족보 이외의 고서는 진위의 변별에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천부경>과 같은 근일에 와서 출현한 문서에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장이 좋지 못해서 이런 오해를 일으킨 것이다. 이처럼 문장이 가다듬어지지 않은 것에 다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알아보자.

 

<조선상고사> 연재는 신채호의 뜻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이야기는 <조선상고사> 연재가 신채호의 뜻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앞서 문장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렇게 문장이 좋지 않은 것은 <조선상고사> 원고 자체에 있었다. 이 원고는 신채호가 직접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것이 아니었다. 아직 미완성된 원고였고 누군가 가필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글이 조선일보에 연재되고 있을 때 신채호는 여순 감옥에 수감된 상태였다. 엄혹한 일제의 감옥 안에서 그가 글을 작성해서 조선일보에 보냈을 수는 없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신채호와 절친했던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이 1936년 3월 1일자 조선일보에 신채호를 기리며 쓴 ‘조선 역사학의 선구자인 신단재 학설의 비판(2)’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는 가친이 그의 원고를 청하여 온 것인바 나도 일찍이 그 원고까지 본 일이 있고 <조선사(朝鮮史)>는 그가 초(抄)하다가 던지고 간 원고를 모씨가 정리하여 본보에 연재하던 것이라는데 그조차 끝을 맺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조선사>는 모씨의 가필이 어느 정도 미쳤을까? 필자의 본의를 과연 손상함이 없었을까 등의 의문이 떠오르는 터로 그의 저작 중 완전히 신빙할 만한 것은 <조선사연구초> 일권(一卷)에 한한다고 보아서 무방하다.

 

위 글에 나오는 <조선사>가 지금의 <조선상고사>다. 신채호는 한국사 전체를 다 쓸 생각이 있었지만 불행히도 수감 중 사망(1936년 2월 18일)하여 고대사 저술밖에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해방 후에 <조선상고사>라는 이름으로 책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위 글에서 홍기문은 조선일보에 연재된 신채호의 글에 의문을 갖고 있으며, 신채호의 저작 중 완전히 신빙할 만한 것은 <조선사연구초>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로 <천부경>을 후인 위조라고 쓴 그 책이다.

 

<조선상고사> 연재 중단을 요구했던 신채호

 

신채호는 조선일보에 자신의 글이 실리는 것을 중단해달라고 요청했었다. 신채호는 자신의 글을 완벽한 상태로 발표하고 싶어했다. 그의 글에서 오탈자가 발견되는 바람에 불같이 화를 내며 연재를 중단시켰던 일화도 있을 정도다. 그런데 자신이 직접 기고한 것도 아니고 확인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글이 연재되고 있다는 것은 신채호의 성격으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1931년 11월 16일에 조선일보 기자 신영우는 여순 감옥에서 신채호를 면회했다. 이 자리에서 신영우는,

“선생이 오랫동안 노력하여 저작한 역사가 조선일보 지상에 매일 계속 발표됨을 아십니까?”

라고 물었다. 신채호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 알기는 알았습니다마는 그 발표를 중지시켜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비록 큰 노력을 하여서 지은 것이라 하나, 그것이 단정적 연구가 되어서 도저히 자신이 없고, 완벽된 것이라고는 믿지 아니합니다. 돌아가시면 그 발표를 곧 중지시켜 주십시오. 만일 내가 10년의 고역을 무사히 마치고 나가게 된다면 다시 정정하여 발표하고자 합니다.”

신영우는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는 신채호를 달래려 이렇게 말했다.

“그와 같이 겸손하여 말씀하지마는 그것이 한 번 발표되자 조선에서는 큰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신채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것을 지을 때에는 결코 그와 같이 속히 발표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좀 더 깊이 연구하여 내가 자신이 생기기 전에는 발표하고자 아니할 것이 중도에 이러한 처지에 당하여 연구가 중단되었으나, 다행히 건강한 몸으로 다시 지상에 나가게 된다면 다시 계속 연구하여 발표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채호의 이런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윤재가 전하는 신채호와 <조선상고사>

 

이제 <조선상고사>가 연재되던 때 쓰인 글이 아니라는 것은 모두 이해했을 것이다. 그럼 이 글은 언제 쓰인 것일까? 신채호 사망 후에 그를 기리며 이윤재가 1936년에 쓴 글 <북경시대의 단재>를 보면 신채호의 성격과 <조선상고사> 집필 시기를 대충 알 수 있게 된다.

이윤재는 신채호가 북경에 있을 때 만나서 조선사 집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자 신채호는 원고 뭉치를 꺼내서 보여주며 수년 전부터 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모두 다섯 책으로 첫째 권은 <조선사통론(朝鮮史通論)>, 둘째 권은 <문화편>, 셋째 권은 <사상변천편>, 넷째 권은 <강역고(疆域考)>, 다섯째 권은 <인물고(人物考)>, 이밖에 또 부록이 있는 모양이었다고 했다. 이윤재는 크게 기뻐서 얼른 출판하자고 말했다. 신채호는 거절했다.

“아직 더 보수할 것이 있으니 다 끝난 다음에 하려고 합니다.”

“이것을 수정하는 때이면 이왕이면 철자법(綴字法)까지 다 고쳐서 했으면 어떨까요.”

“물론 좋지요. 그것을랑 선생이 맡아서 전부 고쳐 주시오.”

이윤재는 원고를 가지고 갈 생각으로 조선으로 가서 인쇄를 하자고 말했다.

“그런데 인쇄는 내지(內地)에 들여다가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 조선문(朝鮮文) 활자가 있으니 인쇄하기 편리한 것이요, 다음으로 해외의 출판물이 조선으로 들어가는 것은 취체(取締)가 심하니 조선 안에서 발행되어야 널리 보급될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신채호는 역시 거절했다.

“그것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는 석판인쇄(石版印刷)가 연판인쇄(鉛版印刷)보다 값이 싸니 인쇄비가 훨씬 덜 들 것이요, 아무리 그네들의 취체가 심하다기로 선언서나 격문이 아니요. 단순히 학술로 된 서적까지 그렇게 할 리가 있겠습니까.”

결국 이윤재는 출판비를 힘닿는 데까지 보태겠다고 말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도 형편이 여의치 않아 출판비를 만들지 못했다. 이윤재는 조선일보 연재되던 글에 대해서는,

 

선생의 입옥(入獄) 후에도 그 장서 전부가 천진(天津) 모(某)씨에게 임치(任置)되어 있다 하니 그 원고도 아마 그 속에 있을 것같이 생각된다.

 

라고 추측했다. 신채호는 1920년대 북경에 있었고 이 무렵에 이미 원고를 써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상고사>는 <조선사연구초>보다 먼저 쓰였다!

 

<조선상고사> 안에 이 글을 언제 썼는지 알 수 있는 단서가 들어있다. 바로 그 문제의 <천부경>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4챕터에 같이 있다.

 

거금(距今) 16년 전에 국치에 발분하여 비로소 <동국통감>을 열독하면서 사평체(史評體)에 가까운 <독사신론>을 지어 대한매일신보 지상에 발포(發布)하며...

 

신채호가 <독사신론>을 발표한 해는 1908년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국치’는 한일강제병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1905년의 을사늑약을 말하는 것이다. 신채호는 1908년부터 16년 후에 <조선상고사> 총론편을 쓴 것이다. 그 해는 1924년이 된다. (만일 1905년부터 16년 후라면 1921년이 된다.)

그리고 신채호가 직접 확인하고 본인의 저작으로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조선사연구초>에서 천부경이 후인 위조라고 말한 때는 1925년이다. 신채호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정말 유사역사학 주장처럼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는 <천부경>을 진짜라고 인정했다면 그 생각은 <조선사연구초> 쓸 때 변한 것이 된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다. 신채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천부경>을 위서라고 생각했다. 그의 저작물 중 어디에도 <천부경>을 인용한 바가 없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유사역사학 쪽이 얼마나 사실 관계 확인을 게을리하고 견강부회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내용들은 <단재 신채호 전집>에 모두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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