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019년은 한국 영화가 탄생한지 꼭 100년을 맞는 해이다.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김도산(金陶山)이 제작한 연쇄극 (連鎖劇, Kino-Drama, 영상이 수록된 연극) [의리적 구토 (義理的 仇討)]가 상영된 지 올해로 꼭 백년을 맞는 것이다. 이에 최근 한국 영화계에서는 옛 한국 영화의 유산을 새롭게 돌아보고자 하는 각종 영화제, 기념사업 등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계획되고 있다.
이처럼 한국 영화의 역사를 다시 회고하는 움직임이 활발한 가운데, 늘 빠지지 않는 이야깃거리 중 하나는 다름 아닌 나운규의 [아리랑] (1926)과 관련된 것이다. [아리랑]은 1950년대 초를 끝으로 국내에서는 그 필름이 세상에서 사라져 현재로서는 영영 볼 수 없는 영화가 되었지만, 지금까지도 간헐적으로 이 영화의 필름을 찾으려는 시도가 국내외에서 계속 되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항온 항습의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쉽사리 산화, 부패해버리는 과거의 질산염 (Nitrate Cellulose) 영화필름의 특성 상 현재까지 이 영화의 필름이 제대로 남아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아리랑]은 물론이거니와, 질산염 필름이 현대의 안전 필름 (Safety Film)으로 대부분 대체된 1950년 이전에 제작된 한국 영화의 가운데 현존하는 영화의 비율이 전체 제작 편수의 5퍼센트도 채 되지 않는 것을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결국 우리에게 있어 이들 영화들의 내용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일제강점기 신문이나 잡지, 혹은 다른 인쇄물 등에 소개된 이들 영화의 스틸사진들 뿐이다. 나운규의 [아리랑]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간 알려져 왔던 [아리랑]의 스틸사진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진이 사실 1926년 영화 [아리랑]의 사진이 아니라는 점이다.
흔히 영화 [아리랑]의 스틸사진이라고 알려진 것 중 가장 유명한 사진은 뭐니뭐니해도 바로 이 사진 [그림 2]으로, 그간 각종 언론 매체의 보도는 물론이고 수많은 책과 심지어 일부 교과서에까지 수록된 바 있는 사진이다. 그 동안 이 사진은 [아리랑]의 하이라이트 장면, 즉 나운규가 연기한 광인 영진이 동생 영희 (신일선 분)를 겁탈하려는 오기호 (주인규 분)를 공격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는 틀린 설명이다. 이 사진은 [아리랑]의 두 번째 속편으로 1936년에 발성영화로 제작된 [아리랑 3편]의 사진이기 때문이다. 아는 [그림 3, 4]에 나온 것처럼 당시의 신문에 명확히 등장한다. 이러한 기초적인 사실이 제대로 확인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무척 놀라운 일이다.
그렇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1926년 제작된 아리랑 제 1편의 장면을 수록하고 있는 사진은 무엇 무엇이 있는가를 새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일단 가장 사진 상태가 좋은 것으로는 일본 흥행/배급사인 야마니양행(洋行)이 1920년대 말 일본에 [아리랑]을 배급했을 당시 제작된 홍보 전단에 실린 사진 5장 [그림 5]이 있다. 사진 인쇄 상태도 제일 좋고, 무엇보다 영화의 중요 장면 중 하나인 "열사(熱砂)의 무(舞)"와 "부활(카츄사)" 극 중 극의 모습을 남은 사진, 그리고 영화의 라스트 신, 즉 살인죄로 체포되어 아리랑 고개를 넘어 끌려가는 영진과 그를 배웅하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든 모습을 담은 사진이 제대로 실려있다. 그 다음으로는 이것보다는 인쇄상태가 많이 떨어지지만 당시 신문에 실린 사진 몇 장이 있는데, [동아일보] 1926년 9월 19일자에 실린 사진 [그림 6], [매일신보] 1926년 9월 17일자, 1926년 10월 10일자, 1927년 10월 15일자 (재상영 관련기사)의 사진 [각각 그림 7-9)이 있다.
이 밖에 출전이 불분명한 사진 한 장 [그림 10]이 하나 더 있는데, 출전이나 사진 설명이 거의 없다시피하지만 분명히 영화 도입부에서 영진을 마을 사람들이 잡아다 결박하는 장면을 담은 것이 분명하다.
한편 1926년 영화의 장면을 담은 것이라고 흔히 돌아다니는 또 한 장의 사진 [그림 11]이 있는데, 이는 2007년 3월 한국우정사업본부가 발행한 "한국의 영화" 시리즈 우표 도안으로도 쓰인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당장 정확한 출전을 확인할 수 없지만) 여러가지 정황을 볼 때 1936년 [아리랑 제 3편]의 사진이 거의 확실하다. 아리랑 1편에서 나운규는 영화 내내 말 그대로 미친 사람의 봉두난발 머리를 하고 있는데, 아리랑 3편에서는 상대적으로 정돈된(?)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기 때문이다. [그림 12]. 그리고 1930년에 제작된 영화 아리랑 2편에서는 영화 줄거리 상 주인공 영진이 영화 내내 양복을 입고 돌아다녔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림 13], 이런 사진이 나올 곳이 없다.
앞서 살펴보았듯 한국영화사의 기초적 자료가 거의 대부분 소실되고 제대로 그 내용이 밝혀지지 않은 현실 속에서, 이런 기초적인 자료 출전까지 일일이 바로잡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점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라 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