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 실린 영화 <아리랑 >사진은 '아리랑 1편' 사진이 아니다

  • 기자명 석지훈
  • 기사승인 2019.05.24 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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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019년은 한국 영화가 탄생한지 꼭 100년을 맞는 해이다.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김도산(金陶山)이 제작한 연쇄극 (連鎖劇, Kino-Drama, 영상이 수록된 연극) [의리적 구토 (義理的 仇討)]가 상영된 지 올해로 꼭 백년을 맞는 것이다. 이에 최근 한국 영화계에서는 옛 한국 영화의 유산을 새롭게 돌아보고자 하는 각종 영화제, 기념사업 등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계획되고 있다.

이처럼 한국 영화의 역사를 다시 회고하는 움직임이 활발한 가운데, 늘 빠지지 않는 이야깃거리 중 하나는 다름 아닌 나운규의 [아리랑] (1926)과 관련된 것이다. [아리랑]은 1950년대 초를 끝으로 국내에서는 그 필름이 세상에서 사라져 현재로서는 영영 볼 수 없는 영화가 되었지만, 지금까지도 간헐적으로 이 영화의 필름을 찾으려는 시도가 국내외에서 계속 되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항온 항습의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쉽사리 산화, 부패해버리는 과거의 질산염 (Nitrate Cellulose) 영화필름의 특성 상 현재까지 이 영화의 필름이 제대로 남아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그림1>질산염 필름의 부패 모습 (Davide Turconi Collection, George Eastman House)

[아리랑]은 물론이거니와, 질산염 필름이 현대의 안전 필름 (Safety Film)으로 대부분 대체된 1950년 이전에 제작된 한국 영화의 가운데 현존하는 영화의 비율이 전체 제작 편수의 5퍼센트도 채 되지 않는 것을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결국 우리에게 있어 이들 영화들의 내용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일제강점기 신문이나 잡지, 혹은 다른 인쇄물 등에 소개된 이들 영화의 스틸사진들 뿐이다. 나운규의 [아리랑]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간 알려져 왔던 [아리랑]의 스틸사진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진이 사실 1926년 영화 [아리랑]의 사진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림2> 영화 <아리랑>의 한 장면이라며 각종 영화 교재 및 교과서에 실린 사진. 하지만 <아리랑> 1편 사진이 아니다.

 

흔히 영화 [아리랑]의 스틸사진이라고 알려진 것 중 가장 유명한 사진은 뭐니뭐니해도 바로 이 사진 [그림 2]으로, 그간 각종 언론 매체의 보도는 물론이고 수많은 책과 심지어 일부 교과서에까지 수록된 바 있는 사진이다. 그 동안 이 사진은 [아리랑]의 하이라이트 장면, 즉 나운규가 연기한 광인 영진이 동생 영희 (신일선 분)를 겁탈하려는 오기호 (주인규 분)를 공격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는 틀린 설명이다. 이 사진은 [아리랑]의 두 번째 속편으로 1936년에 발성영화로 제작된 [아리랑 3편]의 사진이기 때문이다. 아는 [그림 3, 4]에 나온 것처럼 당시의 신문에 명확히 등장한다. 이러한 기초적인 사실이 제대로 확인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무척 놀라운 일이다.

 

<그림3> 조선중앙일보 1936년 2월 6일자 아리랑 3편 전면광고
<그림4> 매일신보 1936년 1월 31일 아리랑 3편 광고

 

그렇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1926년 제작된 아리랑 제 1편의 장면을 수록하고 있는 사진은 무엇 무엇이 있는가를 새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림5> 야마니양행 '아리랑' 일본어 전단
<그림6> 동아일보 1926년 9월 19일자에 실린 <아리랑>의 한 장면

일단 가장 사진 상태가 좋은 것으로는 일본 흥행/배급사인 야마니양행(洋行)이 1920년대 말 일본에 [아리랑]을 배급했을 당시 제작된 홍보 전단에 실린 사진 5장 [그림 5]이 있다. 사진 인쇄 상태도 제일 좋고, 무엇보다 영화의 중요 장면 중 하나인 "열사(熱砂)의 무(舞)"와 "부활(카츄사)" 극 중 극의 모습을 남은 사진, 그리고 영화의 라스트 신, 즉 살인죄로 체포되어 아리랑 고개를 넘어 끌려가는 영진과 그를 배웅하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든 모습을 담은 사진이 제대로 실려있다. 그 다음으로는 이것보다는 인쇄상태가 많이 떨어지지만 당시 신문에 실린 사진 몇 장이 있는데, [동아일보] 1926년 9월 19일자에 실린 사진 [그림 6], [매일신보] 1926년 9월 17일자, 1926년 10월 10일자, 1927년 10월 15일자 (재상영 관련기사)의 사진 [각각 그림 7-9)이 있다.

<그림7> 매일신보 1926년 9월 17일자에 실린 영화 <아리랑>의 한 장면. 가운데 영희 역의 신일선의 모습이 보인다. 현재 알려진 줄거리에 근거해보면 엿장수나 아이들이 등장할 장면이라고는 아마 영화 후반부에 들어있던 마을 축제 장면 밖에 없기 때문에, 아마 그 부분의 장면이 아닌가 싶다.
<그림8> 매일신보 1926년 10월 10일자에 실린 영화 <아리랑>의 한 장면. 나운규의 광인 연기와 분장이 잘 드러난 사진이다.
<그림9> 매일신보 1927년 10월 15일자 기사에 실려 있는 아리랑의 한 장면. 정확한 장면 설명은 없지만, 신일선이 양복 입은 사람을 뿌리치고 있는 장면으로 해석한다면, 영화 후반부 클라이맥스에서 오기호가 영희를 겁탈하려 드는 장면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밖에 출전이 불분명한 사진 한 장 [그림 10]이 하나 더 있는데, 출전이나 사진 설명이 거의 없다시피하지만 분명히 영화 도입부에서 영진을 마을 사람들이 잡아다 결박하는 장면을 담은 것이 분명하다.

<그림10> 출전 불명의 사진. 인쇄 상태를 보건대 아마 신문이나 잡지의 사진인 듯 하지만 현재로서는 정확하게 출전을 파악하기 어렵다. 봉두난발을 하고 있는 나운규의 모습을 보면 틀림없이 1926년 아리랑 1편의 장면이다. 여러 사람들이 영진에게 달려들어 그를 제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걸 보면 이는 아마 영화의 초입부에 나오는 오기호와 영진의 싸움을 말리는 장면이 아닌가 싶다.
<그림11> 2007년 발행 아리랑 우표

 

한편 1926년 영화의 장면을 담은 것이라고 흔히 돌아다니는 또 한 장의 사진 [그림 11]이 있는데, 이는 2007년 3월 한국우정사업본부가 발행한 "한국의 영화" 시리즈 우표 도안으로도 쓰인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당장 정확한 출전을 확인할 수 없지만) 여러가지 정황을 볼 때 1936년 [아리랑 제 3편]의 사진이 거의 확실하다. 아리랑 1편에서 나운규는 영화 내내 말 그대로 미친 사람의 봉두난발 머리를 하고 있는데, 아리랑 3편에서는 상대적으로 정돈된(?)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기 때문이다. [그림 12]. 그리고 1930년에 제작된 영화 아리랑 2편에서는 영화 줄거리 상 주인공 영진이 영화 내내 양복을 입고 돌아다녔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림 13], 이런 사진이 나올 곳이 없다.

<그림12> 매일신보 1936년 5월 16일자에 게제된 <아리랑> 제 3편
<그림13> 매일신보 1930년 2월 11일자 게재 <아리랑> 후편 (2편)

 

<그림 14> 1926년 아리랑 제작 완성 기념사진

앞서 살펴보았듯 한국영화사의 기초적 자료가 거의 대부분 소실되고 제대로 그 내용이 밝혀지지 않은 현실 속에서, 이런 기초적인 자료 출전까지 일일이 바로잡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점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라 할 수 밖에 없다.

필자 석지훈은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한국 근대사로 석사를 받았다. 현재 미국 미시간대학교 (University of Michigan) 아시아문화언어학부 한국학과정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근대 이후 한국의 전통문화와 문화유산 인식의 변모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20세기에 사진, 영상, 음향 매체가 한국의 전통문화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중점으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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