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스티븐스 처단' 장인환·전명운 재판 통역을 거부했다

  • 기자명 정재환
  • 기사승인 2019.06.03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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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 유리하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은 스티븐스를 처단한 장인환은 검사 앞에서도 당당했다. 한국을 일본에 팔아먹은 스티븐스 처단은 한국인으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티븐스 저격에 나섰다가 권총 불발로 실패한 전명운 역시 ‘한국인들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환영하고 있다는 스티븐스의 말에 격분해 그를 죽이고 자신도 자결할 생각으로 거사했다’고 진술했다.

피격 이후 스티븐스는 병원을 세 차례나 옮기며 치료를 받았다. 오른쪽 어깨 아래 폐 부위에 한 발, 복부 아래쪽에 한 발, 모두 두 발의 총상을 입었지만, ‘일본이 한국에서 매우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는 앵무새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스티븐스는 탄환제거수술을 받으면 회복될 것으로 낙관했지만, 운명은 그의 기대를 비껴가 1908년 3월 25일 오후 11시 10분 성 프란시스(St. Francis)병원에서 복부 탄환제거수술을 받다가 사망했다.

스티븐스가 사망하자 일본의 각 신문은 그가 한국의 괴한에 저격되어 순사했다고 보도하면서 일본 황제가 슬퍼하며, 특히 이토 히로부미는 ‘누워 앓는다.’고 보도했다. 일본 정부는 조의를 전달하고 스티븐스에게 ‘욱일대수장’을 수여하여 친일외교의 공로를 치하했으며, 병원치료비, 장례비 등은 물론 특별은사금으로 일본 정부에서 15만 원, 한국 정부에서 5만 원, 모두 20만 원의 보상금 지불을 결정했다. 

장인환과 전명운이 스티븐스를 처단한 사건은 미주에 살고 있는 8천 한국교민들에게 항일독립정신을 고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한인 사회는 공판투쟁을 통해 일제의 한국 침략을 규탄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미국의 주류 여론은 ‘황인종이 백주대낮에 백인을 살해한 사건’에 대해 격분했지만, 의거의 발생과 공판진행이 미국 내에서 일본노동자배척운동이 벌어졌던 시기와 겹쳐 미국민의 동정을 얻을 수도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지는 ‘스티븐스는 한국의 공적이다’라는 글에서 장과 전을 애국지사라 칭했으며, 사건 현장을 목격한 한 미국 여성은 ‘이 사람이 비록 황인종이나 자기 나라를 위하여 신명을 바치니 누구든지 국민된 자는 제 나라를 위해 이 사람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며 장인환의 애국독립정신을 크게 찬양했다.

샌프란시스코의 한국교민들은 장인환재판후원회를 조직하여 의연금 모금을 시작했다. 후원회의 송종익은 장인환의 거사를 한국의 자유를 위한 전쟁이라 단정하면서 한국의 자유해방을 위해 궐기할 것을 역설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던 <해조신문> 또한 장인환의 검거기사를 상세하게 찬양 보도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교민들에게 의연금 모금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공판투쟁을 위한 의연금은 미주본토와 하와이의 한인사회는 물론 멕시코·연해주·만주·중국·일본 등지의 동포사회에서 계속 답지하여 그 금액이 7,390달러에 이르렀으며, 장인환재판이 단순한 흉악범죄가 아니고 자유와 독립을 위한 매국노사살사건이라는 점에 공감해 한국교민회를 찾아와 의연금 10원을 기탁한 중국인도 있었다.

3월 27일 장인환은 계획에 의한 일급모살혐의로 기소되었다. 장인환사건의 담당판사는 캐롤 쿡(Carrol Cook), 담당검사는 랭돈(W.H. Langdon). 무료변호인은 나단 코그란(Nathan C. Coghlan), 로버트 페랄(Robert Ferral), 존 바렛트(John Barret) 등이었다. 경찰서 심문 때 통역은 양삼주 목사가 담당하다가 법정으로 이송된 후에는 하버드대학에서 수학 중이던 이승만을 초청하였다. 이승만은 샌프란시스코까지 왔었으나 거절했고, 결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수학 중이던 신흥우가 담당하게 되었다.

일본 측은 장인환을 제1급 살인범으로 사형에 처해야만 미주에서의 한국독립운동을 발본색원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재판비용에 5,000달러를 투입했다. 고액의 수임료를 지불하여 나이트((S. Knight)를 변호인으로 지정하고, 한국어에 능통한 호놀룰루 일본총영사관 이시카와(市川季作) 서기관을 초빙하고 재한 미국인 목사 존즈(George H. Jones)를 증인으로 채택하는 등 승소에 총력을 집중했다.

1908년 5월 4일 제1회 공판에서 샌프란시스코지방검사 랭돈은 장인환을 고살죄로 구형했다. 살인미수죄로 기소된 전명운은 장인환과 공모사실을 완강히 부인하여 구속 기소된 지 97일 만인 1908년 6월 27일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보석되었고, 이후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했다. 전명운의 망명에 당황한 일본은 러시아 정부에 죄인인도를 요구했지만, 전명운은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이치곤 집에 은신했다.

12월 7일부터 시작된 최종심에서 장인환의 변호인은 순간적인 정신 발작으로 인한 정치광의 소행이므로 정당한 살인이며, 스티븐스 사망 원인은 외과의가 탄환제거수술을 잘못한 탓이라고 주장했고, 원고 측 변호인 나이트는 장인환의 정신 상태가 지극히 정상이고 계획적인 고살행위이므로 모살죄로 사형을 구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2월 23일 쿡 판사는 장인환에게 애국적인 발광환상에 의한 고살죄를 적용하여 2급 살인죄를 선고했으며, 1909년 1월 2일 캘리포니아주 고등법원에서 열린 형기선고공판에서 쿡 판사는 25년 금고형을 선고했다.

샌퀜틴(San Quentin)교도소에 수감된 장인환은 1914년부터 4차례의 가석방신청서를 제출한 끝에 1919년 1월 10일 가출옥되었다. 장인환은 가석방 성명서를 통해 다시 한 번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면서 스티븐스 처단은 조국과 국민을 위한 일이었다고 했으며, 버클리 변호사는 “애국심이란 인간에게 가장 훌륭한 속성이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이 같은 살인행위는 전적으로 열렬한 애국심의 충동의 결과로 발생한 것”이라며 장인환의 완전 무죄를 호소했다. 장인환이 법률적으로 완전 자유인이 된 것은 1924년 4월 10일이었다.

 

장인환재판후원회의 초청을 받고 샌프란시스코까지 갔던 이승만은 왜 후원회의 통역 요청을 거절하고 돌아갔을까?

이승만은 처음엔 항일무력투쟁을 반대했으며 윤봉길 의거에 대해서도 부정적 의견을 보였다. 민족문제연구소 제작, <백년전쟁> 화면 캡처

1904년 말 도미 이후 학업과 정치 활동을 병행하던 이승만은 1905년 8월 4일 오이스터베이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한미수호조약에 따라 한국의 독립을 지켜달라고 호소했지만, 미국은 이미 7월 31일 도쿄에서 가츠라-테프트밀약을 체결하여 한국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을 인정한 상태였기에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지만,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 등이 이승만의 외교 활동을 소개함으로써 한인 사회에 이름을 크게 알렸다.

1908년 7월 11일 이승만은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전권대표 자격으로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개최된 애국동지회에 참석했다. 덴버회의에는 40명 이상의 대표가 콜로라도, 네브라스카, 뉴욕, 텍사스 등지에서 모였는데, 회의에서 이승만이 의장으로 선출된 것은 한인 사회에서 이승만의 명성이 높았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무력투쟁론자인 박용만이 군사학교 설치를 위해 소집한 회의에서 교육·출판 활동을 통한 점진주의적 결의가 채택된 것은 이승만의 독립 운동 방략이 반영된 결과였다.

덴버회의 직후 이승만은 스티븐스사건의 통역을 의뢰받았지만, 학생 신분이며 기독교도로서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했고, 한인 사회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우남이승만연구』의 저자 정병준 교수에 따르면, 이승만은 덴버회의와 스티븐스사건을 통해 기독교 교육·출판 등에 의한 점진적 실력양성운동에 대한 지향성과 한국인들의 정서보다는 미국인들의 여론을 중시하고 추종하는 종미성향을 드러냈던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2년 공개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에서 이승만이 통역 요청을 거절한 이유가 장전사건을 바라보는 이승만의 근본적인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지적했다.

 

 

이승만은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을 때도 나라의 명예를 더럽힌 암살자에 불과하다고 비난했으며 국내 의병투쟁까지도 어리석은 짓으로 비판하는 발언을 거듭했다. 장인환·전명운의 변호 통역을 하지 않은 것은 무장독립노선을 부정하는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을 대적하려면 내가 먼저 준비할 일(우남)」
(일본이) 미국인 스티븐을 고용하여 미국인으로 미국인을 대적하게 만들었으며, 금년에 이르러는 상항(샌프란시스코)에 일본아이 학교에 관계한 일로 인연하여 시비 생긴 이후로 미국에서 일인을 대하야 감정이 날로 생기는 때를 당하야 스티븐을 이 나라에 보내어 인심을 돌리며 정부공론을 사려 하다가 마침내 불행한 결과에 이르렀으나, 일본의 전후 행사함이 속으로 준비하면서도 밖으로 정의를 얻는 것이 항상 전력하는 정책이라.
- 『공립신보』, 1908.8.12.(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사신문)

 

1910년 여름 이승만은 헤이스팅스에서 기독교 부흥집회를 열어 하루에 3차례씩 설교와 찬송 시간을 가졌다. 이승만은 군사훈련 대신에 이러한 종교 활동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스티븐스를 저격살해한 장인환과 전명운, 또 이등박문을 하얼빈에서 살해한 안중근은 일국의 명예를 더럽힌 범죄적 암살자에 불과하다.
② 일본과 같은 강대국을 군사적으로 저항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꿈에 지나지 않는다.

 

Dae-Sook, Suh(edited),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Center for Korean Studies, University of Hawaii, Paper No.13, 1987, 185~186.

 

*이 글은 김원모의 「장인환의 스티븐즈 사살사건 연구」, 윤병석의 「이상설의 유문과 이준·장인환·전명운의 의열」, 정병준의 『우남이승만연구』, 민족문제연구소의 『백년전쟁』을 참고로 작성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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