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과학을 구별하는 문제, 과학자들이 나서야 한다

  • 기자명 김우재
  • 기사승인 2019.06.06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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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과학과 유사과학 혹은 과학과 비과학을 나누는 경계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는 자신의 연구에만 몰두하면서, 유사과학이 공공의 영역에 침투해도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과학자들에게 분노를 느끼지만,  동시에 과학자는 원래 자신의 연구에 몰두함으로써 사회에 기여하는게 옳다는 생각도 한다. 과학사회학자들은 흔히 과학자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곤 한다. 과학자들이 스스로 사회적 책임을 지려 하는 걸 막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모든 회사원들에게 내부고발자가 되라고 강요할 수 없듯이, 과학자 모두에게 내부고발자에 준하는 준엄한 방식으로 사회적 책임을 지라고 강요할수도 없다. 과학자 중 누구도, 사회학자에게 사회적 책임을 지라고 강요하지 않는 것처럼, 사회학자 누구도 과학자에게 사회적 책임을 지라고 강요할 수 없다. 물론 과학자나 사회학자 모두 권력을 가진 정치인과 막대한 부를 지닌 재벌에게 사회적 책임을 강요할 수는 있다. 하지만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게 사회적 책임을 강요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그 집단의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그런 길을 선택한 경우이거나, 혹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 집단이 사회에서 충분히 강한 권력을 쥐고 있을 경우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한국 과학사회학자들이 지난 20여년 간 줄곧 주장해 온, '과학기술의 민주화'라는 구호가 조잡한 서구의 이론과 사례들을 억지로 한국 상황에 끼워맞춘 설익은 작업이라고 생각한다(대표적인 주장은 김환석의 논문 「과학기술 민주화의 이론과 실천」을 참고).

 

구획문제란, 과학철학이라는 학문에서 기원한 개념으로, 과학과 사이비과학을 구획할 수 있는 기준에 대한 탐구를 뜻한다. 구획문제는 이미 한국의 논객들 사이에서도 자주 다루어지곤 했는데, 오래전 과학전쟁이 한국에 수입되었을 때 '김환석-오세정'의 짧은 논쟁이 구획문제를 둘러싼 구세대 과학사회학자와 구세대 과학자의 논점을 잘 보여주고, 이보다 더 치열하고 수준 높은 논쟁은 기술사회학자인 홍성욱과 물리학을 전공하고 경제학자로 활동했던 양신규 사이의 길고 오래된 논쟁을 들 수 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면, 지금은 방송인이 된 논객 진중권이 안티조선 운동의 초창기에 과학철학에 관한 수 많은 논쟁에 뛰어들며 구획 문제에도 관심을 보인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교수신문 <국내외 '과학 전쟁'에 대한 해부> 참고)

 

과학자들은 구획 문제 자체에 별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진짜로 그렇다. 굳이 그 이유를 이야기하자면, 과학자가 직업적 훈련을 받는 과정에서,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단 한번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 대학교 생물학과의 교과목은 일반생물학, 진화생물학, 분자생물학, 생태학 등의 전공필수 과목으로 구성되지, 과학학개론, 과학기술학, 과학사, 과학철학 등의 교양과목을 듣는건 과학자의 선택이지 의무는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의 과학자는 오히려 구획 문제와 같은 인문학적 물음에서 비껴서 있는 게 낫다. 아주 협소한 연구주제를 다루는 과학자가, 제대로 된 필로로기와 읽고 쓰기 훈련도 없이, 인문학 논쟁에 뛰어드는 것처럼 꼴사나운 모습은 없으며, 그런 경우에 그들의 모습은 대체로 무식한 황소처럼 보이기 일쑤다. 과학의 역사와 철학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울 시간과 인내가 없는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에 더 치열하게 매달리는 편이 낫다.

 

과학철학자들

누군가 과학과 사이비과학의 경계에 대해 논쟁할 때, 대개의 경우 등장인물들은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가장 자주 그리고 많이 등장하는 철학자는 칼 포퍼 Karl Popper다. 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던 초창기 과학철학자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시작된 빈 학단과 교류했고, 비트겐슈타인과의 부지깽이 일화로 더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반증가능성'을 과학과 사이비과학의 경계로 삼으려 했고, 그 덕분에 한 때 다윈의 진화론은 포퍼에 의해 사이비과학으로 몰리기도 했다.

 

두 번째 등장하는 과학철학자는 대학생들의 필독서이지만 거의 대부분 의미 없이 읽어버리는 책, <과학혁명의 구조>의 주인공인 토마스 쿤 Thomas Kuhn이다(실제로 이 책을 초기에 번역한 김명자의 번역은 엉망이라, 책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원서와 대조해야 했다. 그는 김대중 정부 시절 환경부 장관을 지내고, 이후 과총 회장까지 지냈지만, 그가 과학계를 위해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최근엔 홍성욱 교수가 김명자의 허락을 받아 재개정판을 냈다).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으로 과학자사회의 움직임을 분석했는데, 과학이 점진적으로 발전한다는 기존의 개념을 깨고, 퍼즐풀이에 몰두하던 과학자사회가 이상현상이 축적되면서 어느 순간 완전히 새로운 이론을 향해 마치 개종하듯 의견을 바꾼다는 패러다임 쉬프트를 주장했다. 물리학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던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은 쿤주의자들처럼 과학적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쿤 때문에 과학사회학의 한 조류가 과학을 다른 학문과 하등 다르지 않다고 폄하하는 일이 벌어진건 사실이다. 그런 이들이 속했던 학문의 흐름을 흔히 스트롱프로그램이라고 부르고이들 덕분에 1990년대 중반 전세계는 과학자/과학철학자 진영와 과학사회학자/인문학자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그걸 과학전쟁 Science War라고 부른다('과학전쟁'을 넘어서-과학사회학의 발전방향 모색」 참고)

 

구획 문제 논쟁에 자주 등장하지만, 깊은 인상을 남기지 않는 철학자가 임레 라카토슈 Imre Lakatos다. 그는 포퍼와 쿤의 논의에서 한발 더 나아가, 과학과 사이비과학의 구획으로 '연구프로그램' 같은 구체적 현실에서 나온 개념들을 덧붙혔다. 라카토슈의 친구이자 포퍼의 제자였던 폴 파이어아벤트 Paul Feyerabend는 아나키즘적 과학철학을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방법에의 도전 Against Methods>이라는 책을 통해, "무엇이던 상관없다 Anything goes"라는 말로, 과학을 과학으로 만드는 방법론 자체에 어떤 법칙 같은걸 세우던 포퍼의 시도를 철저히 거부했다(파이어아벤트의 아나키즘적 인식론」 참고). 그는 졸업하자마자 포퍼를 피해 유럽으로 달아났는데, 포퍼는 그런 못된 제자를 위해 몰래 유럽 대학에 편지를 써 그를 교수로 만들어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 외 다양한 과학철학자들이 다수 등장하는데, 그나마 철학자들 중에서 이름을 기억할 만한 사람은 래리 라우든 Larry Laudan 정도이고, 그는 경험주의, 실재론, 상대주의적 전통을 모두 비판하고, 과학의 '연구 전통'을 통해 과학이 통속적 도전에 맞서는 진보적 행위라는 관점을 옹호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도 라우든에 대한 공부는 별로 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과학과 사이비과학에 대한 토론은 대부분 포퍼에서 시작해 파이어아벤트 정도에서 끝나고, 아무런 소득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난 수십년간 과학철학계에서 진행되어온 모든 논의들을 다 알지도 못할 뿐더러, 그들의 작업을 일획으로 폄하할 의도도 전혀 없다. 다만 구획 문제에 있어서 철학자들의 논의가 어떤 실천적 행위로 나아가는데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히고 싶을 뿐이다. 사이비과학의 제도권 진출과 공공영역에 대한 피해를 막기 위해, 과학철학의 역사를 공부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삶의 양식

스스로를 '과학사회학의 제3의 물결' 혹은 '선택적 모더니스트'라고 부르는 과학사회학자 해리 콜린스와 로버트 애번스는, 최근 출간된 책 <과학이 만드는 민주주의>에서 기존의 구획문제에 대한 논의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한다. 우선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이 철학자가 아닌 사회학자임을 분명히 하고, 그들의 이론이 철학자들의 그것처럼 정교하지 못하다는 점을 시인한다.  대신 그들의 논의는 대단히 실천적이다. 그들에 따르면 구획문제란 이런 것이다.

 

“구획문제는 철학자들이 과학의 논리를 찾으면서, 과학에 대해 기술하고 과학의 경계를 설정하는 법칙을 만들 때마다 예외가 있음을 끊임없이 발견해왔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구획 문제의 사회학적 버전은, 사회학자와 역사학자들이 과학자들의 행동을 주의 깊게 관찰한 결과, 그들이 명확한 규칙들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 또는 그럴 수 없었다는 -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생겨났다. 하지만 철학자들과 사회학자들 모두 과학이 특별하려면 이상화된 모델에 맞아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과학을 연구하던 학자들조차 하나의 일치된 물음에 도달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들 모두가 과학과 사이비과학을 구획하는 문제에서, 하나의 이상화된 모델을 가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런 시점에서 시작된 모든 구획문제는 틀렸다는 것이다.

 

그럼 이 두 학자들은 도대체 구획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까. 이들은 과학과 사이비과학을 나눌 수 없다고 주장하는가? 그건 아니다. 그들에 의하면 과학은 분명히 다른 것들과 구획되는 특징을 지닌다. 그걸 일반화할 수 없을 뿐이다. 이들은 사회학적으로 구획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의 '삶의 양식'이라는 아이디어를 가져온다. 삶의 양식이라는 개념의 해석에 주의할 필요는 없다. 삶의 양식은 이 두 저자가 과학을 조금 더 실천적인 의미에서 다루기 위해 도입한 세계관일 뿐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과학은 구성원들의 전형적인 행동과 의도를 기초로 한 사회적 집단 나누기다. 여기서 과학은 다른 사회적 집합체와 비슷하다. 그 경계와 구성원, 특징은 표준화된 사회학적 연구 방법을 이용해 모두 조사할 수 있다."

 

과학은 다른 사회적 집합체들처럼, 행동과 의도를 통해 나누어지는 뚜렷한 집단이다. 하지만 과학 전체를 예외 없이 설명할 수 있는 그런 설명방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예외가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은 철학자들이 상상하듯이 "무너지지 않는 논리에 의해 지탱되는 것이 아니다". 과학은 오히려 스스로를 과학자라고 확인하는 사람들이 어떤 활동을 과학이라고 믿고, 그것을 추구하기만 한다면 무너지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 과학은 과학을 형성하려는 열망들이 모여, 스스로를 다른 것과 구별짓기만 한다면 과학으로 존재할 수 있다. 

 

과학자 사회를 구분 짓는 특징은 한 두개가 아니다. 그건 논리실증주의에서 주장하던 명제의 정합성일 수도 있고, 머튼이 주장하던 공유주의, 보편주의, 조직적 회의주의, 이해불가침 등의 규범일 수도 있다. 그게 무엇이 되었던, 과학자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표현을 통해 그 규칙을을 구성하지 않고서도, 자신들을 다른 집단과 쉽게 구분지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군인들이 나가 적군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는 있지만, 전쟁에 나가 적군과 축구를 한다는 건 생각할 수 없는 이유를 생각하면 된다. 이렇게 다른 집단들과 다른 특이성을 더해가면서, 과학자들은 과학과 비과학을 다양한 방식으로, 하지만 집단 전체의 관점에서는 통일된 방식으로 구획할 수 있다.

 

선택적 모더니즘과 민주주의

저자들은 자신들의 이런 관점을 선택적 모더니즘이라고 부르는데, 선택적 모더니즘은 과학적 가치가, 과학이 발견하는 결과에 의해서가 아니라, 과학이 자연을 발견하는 방법이 보여주는 가치 (실험, 비판, 토론, 합의 등의 민주적 가치와 닮은) 때문에, 언제나 더 나은 선택이라는 전제 하에, 사회가 다양한 정책과 의사결정 과정에서 이를 염두에 두고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즉, 과학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이유는, 과학이 발견해온 발견들 때문만이 아니라, 과학이 그 발견을 이루기 위해 사용한 방법의 가치들 때문이며, 과학적 방법론이 보여주는 바로 그 가치에, 민주주의가 지켜나가야할 핵심적인 교훈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구획문제를 과학자사회에 맡기는 것이 가장 민주적인 선택일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이라는 활동 자체가 끊임없이 스스로를 구분하려는 노력의 결과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논리적이고 명료한 단어로 사이비과학의 특징을 설명해내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과학자들에게 사이비과학 구획의 문제를 맡기면, 일반인이나 인문학자들에게 맡기는 것보다는 나은 결과가 나올 것임은 확실하다. 나는 이 원칙이 현재 한국사회가 처한 유사과학의 제도권 진출에 많은 교훈을 내어준다고 믿는다. 법과 정치를 다루는 정치인들은, 좀 더 적극적으로 과학자들에게 그런 작업을 맡길 필요가 있다. 그래야 과학기술정통부가 유사과학 단체의 컨퍼런스를 후원하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적어도 그 의사결정 과정의 중간에 과학자로 훈련받은 단 한사람의 관계자가 있었다면, 그런 실수는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김우재, 과학뉴스를 의심하는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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