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적자는 정말 위험한가

  • 기자명 전용복
  • 기사승인 2019.06.06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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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화폐이론> 시리즈

 

지난 칼럼에서 정부부채는 숙명이라고 했다. 간단히 요약하면, 경제규모가 증가하면 통화량도 증가해야 한다. 통화를 공급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중앙은행이 본원통화를 발행하고, 이를 기반으로 민간은행으로 하여금 신용화폐를 공급하게 하는 방식이다. 민간은행의 신용화폐는 곧 부채를 의미하므로, 이는 민간부문의 부채를 증가시켜 경제성장에 필요한 통화를 공급하는 방식이다. 경제성장에 필요한 통화를 공급하는 또 다른 방법은 정부가 적자재정을 감수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민간 대신 정부가 빚을 지게 된다. 현대 자본주의 화폐금융 체제는 경제가 성장하려면 누군가는 반드시 빚을 지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를 혁명적으로 개조할 것이 아니라면, 민간보다는 정부가 빚을 지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이것이 대중의 복리와 경제적 안정성에 더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제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대중들도 정부부채가 위험하다고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처(Thatcher) 전 영국수상처럼 민간부분(가계와 기업)의 재정 운영 원리나 정부의 재정 운영 원리가 동일하다는 관념을 수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두 경제주체의 재정 운영 원리는 전혀 다르다. 따라서 재정적자의 위험성도 단순히 민간부문의 재무관리 논리로 설명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 예산을 관장하는 국회예산정책처 또한 이러한 관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나라처럼 우리나라도 정부의 재정활동 규칙을 『국가재정법』이라는 법률로 정하고 있다. 그 중 『국가재정법』 제86조는 정부의 재정건전화를 위한 노력 의무를 명시한 것으로, “정부는 건전재정을 유지하고 국가채권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며 국가채무를 적정수준으로 유지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회예산정책처는 그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건전재정의 필요성 : 건전재정은 정부지출의 증가를 억제하여 구축효과 등으로 대표되는 정부지출의 비효율성을 완화시킨다. 또한 정부지출의 증가로 총수요가 증대되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는데 이를 억제하여 물가안정에 도움이 된다. 건전재정이 유지되지 않을 경우 신용등급의 하락을 통해 외국인 투자 감소와 경기 침체가 야기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 IMF사태와 글로벌 금융위기 등을 극복하기 위한 재정확대 정책으로 인해 GDP 대비 국가채부 비율이 3배 이상 급증하여(1997년 11.9%→2013년 36.2%) 재정위험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또한 향후 고령화 등으로 인한 복지지출 요구의 증대나 통일비용 등을 감안할 때 앞으로 건전재정의 달성은 긴요한 일이 될 것이며, 그 중요성이 더욱 강조될 것으로 보인다.”

국회예산정책처, 『국가재정법 해설』, 2014, 625쪽

 

다른 말로 하면, 정부지출 증가는 경제 전체의 비효율성, 인플레이션, 외국인 투자 축소, 경기 침체 등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재정적자는 경제에 백해무익하다는 말로 들린다. 그리고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D1)이 2013년 36.2%로 증가함으로써 재정적자 수준이 ‘위험’ 수준에 도달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함께 전하고 있다. ECB의 경고(warning)를 받은 이탈리아의 현재 국가부채비율은 136%이었고, 2017년 기준 미국은 136%, 일본은 233%이었다. 단, 이는 OECD 데이터 기준인데, 여기서 국가‘부채’란 중앙 및 지방 정부뿐만 아니라 각 정부 소속 비영리공공기관의 부채까지 포함한 수치이다. 이를 ‘D2’라 부른다. 2017년 우리나라 D1은 660.2조, D2는 735.2조 원이고, GDP 대비 비율로는 각각 38.2%, 42.5%였다. 

 

우리나라 언론보도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최근 경제상황이 악화되는 가운데서도 작년 정부재정이 흑자를 기록했고, 올해 강원도 산불피해 보상 예산이 포함된 추경예산안(6.7조 원, 이마저도 현재 국회 심의를 남겨두고 있지만, 자유한국당의 국회 보이콧으로 국회가 열리지 않아 심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도 너무나 보수적으로 편성됐다는 비판이 일었다. 이에 화답하듯 2019년 5월 16일 국가재정전략회의를 주재하면서 대통령령은 국가채무비율(D1) 40%를 고집하며 확장적 재정정책을 주저하는 기획재정부 관료들에게 미국과 일본의 예를 들며 40% 마지노선의 근거를 물으며 재정확대를 요구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대통령의 재정지출 확대 요구에 대해 우리나라 어느 경제 전문 일간지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며 간접적으로 비판한다.

 

“전문가들은 기축통화국인 미국, 일본과 한국 상황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한다. 미국과 일본은 빚이 많아도 자국 통화를 찍어내 갚는 게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원화를 기축통화로 바꿔 상환해야 하는 한국은 상황이 다르다. 빚이 많아지면 원화 가치가 하락할 가능성이 높아 발권력을 아무리 동원해도 채무를 전액 상환하는 게 불가능하다.”

 

기사는 익명의 전문가를 빌어서 우리 정부는 미국이나 일본만큼 재정확대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통화는 기축통화가 아니라서 발권력을 통해 정부부채를 상환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왜 “원화를 기축통화로 바꿔 상환해야”하고, 국가부채 비율이 높아지면 정말 원화가치가 하락할까? 대통령의 질문에 관료들은 당황했다는 보도가 있다. 다만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을 지낸 더불어민주당 최운열의원은 마스트리흐트 조약을 차용하여 정부부채비율의 한계치를 60%로 정하고, 향후 통일비용과 고령화로 인한 연금부담이 각각 GDP 대비 10%씩 증가할 것이므로, 현재 40% 유지가 적절하다고 답했다 한다.

 

오용되는 재정적자 책임론 : 남유럽 국가들의 경우

국회예산정책처와 한국경제신문이 제기한 재정적자와 국가부채 증가의 모든 부정적 효과는 아래에서 하나씩 검토할 것이다. 각론에 앞서 재정적자와 국가부채 ‘우려’가 생성되고 전파되어, 결국 대중들의 마음속에 내면화되는 과정에 문제는 없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재정적자에 대한 우려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국가부채위기가 원인으로 ‘보이는’ 경제위기들이 발생하곤 했다. 가깝게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에 뒤이어 남유럽 국가들이 국채위기를 겪었고, 남미의 재정위기는 이제 일상처럼 되어있다. 엊그제는 유럽중앙은행이 이탈리아 정부에 대해 정부부채비율이 높아 위험하니 낮추라는 경고를 보내기도 했다. 이 모든 사례들에서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어쨌든 과도한 재정적자가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서 그렇듯 선동의 논리는 단순하지만, 진실은 보다 복잡하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이런 사례들을 ‘재정건전성’ 담론을 옹호하는 근거로 활용한다. 그 과정에서 복잡하지만 실체적 진실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특정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맥락을 생략한 단순 논리를 제시하곤 한다. 그 결과 실체에 대한 입증책임을 항상 대중에게 넘겨진다. 가장 최근의 국가부채 위기 사례인 PIGS(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의 국가부채 문제를 국내의 정치인들과 언론이 어떻게 ‘소비’했는지,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복지수준 향상은 국민의 도덕적 해이가 오지 않을 정도로 해야 한다. 복지 과잉으로 가면 국민이 나태해지고 나태가 만연하면 부정부패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이 자리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는 평소 무분별한 복지지출을 그리스 국가부채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했다. 동시에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다고 덧붙임으로써, 세금 더 내고 더 많은 복지를 할 것이냐고 묻는다)

 

“문재인 정부는 대한민국을 국가부도가 난 제2의 그리스의 길로 이끌고 있다. 그 근거자료가 어제 확인됐다. 작년 국가부채가 127조가 늘어 1700조에 육박했다. 127조 중에 앞으로 공무원과 군인에게 줘야할 연금 충당분이 94조, 75%나 된다...평균수명 늘어나는 걸 감안하면 공무원 연금 주다 나라 망한 그리스꼴 나는 게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공무원을 줄이지 않고, 공무원을 17만 명이나 늘려서 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문재인 정부 책임이고 그 상황이 악화되면 대한민국이 제2의 그리스꼴 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10년, 20년 후에 국가부도위기가 오게 되면 그 부담은 몽땅 현재의 2~30대가 떠안아야 한다."

 

“2011년을 전후해 이탈리아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아일랜드 5개국(PIIGS)에서 나타난 남유럽 재정위기는 양상이 또 달랐다. 정부 곳간이 비면서 국가신용등급 하락, 자본 이탈, 극심한 경제침체로 이어진, 말 그대로 ‘재정위기’였다...최근 아르헨티나, 터키 등에 이어 이탈리아발(發) 금융위기설이 나돌았다. 이런 나라의 낙후된 정치, 미진한 구조조정, 취약한 국가 재정이 결합된 것이었다...전에는 이렇게 재정을 건실화하는 쪽에 무게를 두고 대통령 주재로 국가재정전략회의(사진)가 열렸다...그런데 올해는 지출 구조조정도, ‘예산을 아껴 쓰고 꼭 필요한데 집행하자’는 얘기는 별로 들리지 않아서 걱정이다.”

 

한국의 보수 정치인들과 언론들은 자신의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최신의 국가부채위기 사례를 호출한다. 위에서 인용한 김무성 전대표의 발언은 그리스 국가부채 위기를 이용해 복지지출 확대를 반대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 한다. 하태경의원 또한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국가 공무원 확충을 반대하기 위해 ‘그리스꼴 난다’고 협박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은 사설을 통해 재정지출 확대를 주문하는 국가재정전략회의를 비난하면서, 형태와 원인도 다양한 온갖 금융위기를 언급한다. 결론은 재정적자가 증가하면 ‘그런 종류의 금융위기’를 당할 것이라는 공포를 전파하고 싶은 것이다. 김무성의원은 다른 인터뷰와 회의석상에서 재정지출을 늘리려면 세금을 더 징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소한 필자에게 이는 ‘조세저항’ 국민정서를 활용해 재정지출 확대를 방해하는 전략으로 보인다.

 

이러한 언술들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보인다. 첫째, 반지성주의이다. 이들은 그리스 국가부채위기, 더 나아가 세계 곳곳에서 발생한 금융위기까지 언급하면서도 그 원인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리스 국가부채위기의 주요 원인이 복지지출이 아니라는 다양하고 설득력 있는 반론들은 그저 무시한다(이에 대한 반론 하나는 여기를 보라). 특히 위에 인용한 한국경제신문의 사설은 국민들이 아직 잊지 않고 있을성 싶은 온갖 경제ㆍ금융 위기들을 언급하여, 마치 국가부채 증가는 모든 경제위기의 근원인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둘째, 이들은 모두 극단적으로 단순한 논리를 구사한다. 그 흔한 금융위기의 형태 구분마저 무시한다. ‘정부부채 규모가 증가하면 경제금융위기가 오고 미래세대에 부담을 주는 것이다, 그리스를 보라!’ 어쨌든 자신의 목적(재정지출 반대)을 위해서는 매우 효과적인 전술임에는 분명하다. 대처의 단순화 언술이 통했던 것처럼, 이들의 언술도 지배적인 담론으로 유포되고 있는 것 같다.

 

<그림 1> PIGS 국가부채. 출처: OECD, Eurostat Database, 저자 계산과 그림.

 

위와 같은 언술이 가진 문제점을 몇 가지만 지적하자(단지 몇 가지 질문만 해보자). 첫째, 김무성의원의 주장처럼 복지 포퓰리즘이 문제였다면, 그리스의 국가부채는 위기 이전까지 지속적으로 상승했어야 한다. 과다 복지지출이 국채위기의 원인이려면 2008년 이전 오랫동안 부채를 쌓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2008년 금융위기 전까지 그리스 국가부채비율은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거나, 어떤 해에는 해락하기도 했다(그림 1). 그리스의 ‘좌파 복지 포퓰리즘’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둘째, 유럽의 골칫거리로 여겨지는 PIGS 네 나라의 국가부채비율은 2008년 금융위기 이전까지 10여 년 이상 안정적으로 유지되었고, 스페인에서는 오히려 하락하기도 했다. 포루투갈만이 예외적으로 1995년 67.5%에서 2007년 78.1%로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스페인의 국가부채비율은 1996년 73.9%에서 2007년 41.8%로 33.1%p 하락했다. 스페인의 GDP 대비 사회복지지출도 1995년 20.69%에서 2007년 20.80%로 증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페인도 예외 없이 국가부채위기를 경험해야 했다. 그렇다면 스페인은 왜 국가부채위기를 경험해야 했을까?

 

<그림 2> PIGS 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 출처: OECD database

 

셋째, 네 나라 모두에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GDP 대비 재정적자가 급등한 이유는 무엇인가? 세입 감소인가 세출 증가인가?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예컨대 그리스는 2008년 10.2%, 2009년 15.1%의 재정적자를 기록했는데(그림 2), 국내 언론에서는 이를 집중적으로 부각하여 과도한 지출을 문제 삼았다. 지출 대비 세입이 감소해도 국가부채는 증가할 수 있지만, 세입 감소를 문제 삼는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위기 이후 재정적자 확대는 국가부채위기의 결과인가 원인인가? 이는 PIGS 모든 나라에도 해당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넷째, 2001년부터 2007년까지 그리스의 재정은 연평균 GDP 대비 6.4%의 적자를 기록했음에도(그림 2) 전체 부채비율은 증가하지 않았다(그림 1). 이는 재정적자라 해도 국가부채비율은 상승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다섯째,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이들 PIGS의 GDP는 급격히 감소하거나 정체되었다. GDP 감소가 국가부채비율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GDP는 세입과 특히 깊이 연관되어 있다. 국민소득이 감소하면 세원이 감소하여 세입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예컨대 2008년 국가부채비율의 급등은 지출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세입감소가 주요 원인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거의 모든 재정 지표들은 GDP 대비 비율로 표시되고 있어, GDP의 변화 자체가 재정지표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국가부채비율=(부채총액/GDP)로 계산되므로, 부채총액이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GDP가 감소하면 국가부채비율은 상승할 수 있다. 그 역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GDP의 감소 혹은 정체가 국가부채 관련 지표들을 악화시킨 것은 아닐까?

 

이 칼럼은 이 같은 모든 질문에 답하여 남유럽 국가들의 국채위기 자체를 설명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다만 건전재정 담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 같은 질문들에 제대로 답하지 않은 채 이 사례들을 자신들 주장의 근거로 호출한다는 점은 꼭 지적되어야 한다. 국가부채위기로 불리는 사례들은 그저 공포 마케팅을 위해 자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재정적자가 증가한다고 꼭 국채위기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2002-2007년 사이 매년 GDP 대비 6% 이상의 재정적자를 기록하고도 국가부채비율이 일정했던 그리스가 이를 잘 보여준다. 현재 미국, 일본, EU국가들, 영국 등의 국가부채비율은 2007년까지 PIGS 국가들이 보여준 국가부채비율보다 월등히 높다. 요컨대, 현실은 훨씬 복잡하고 진실은 멀리 있을 수 있지만, 최소한 재정건전성 담론은 이를 성실히 설명하지 않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것이 남유럽 국가들의 국가부채위기를 여기서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런 수고는 왜 항상 대중들의 몫이어야 하는가?

이제 국가부채 증가로 예상된다는 부정적 효과란 것들을 하나씩 검토해보자.

 

정부는 파산하지 않는다

MMT에 따르면, 어느 정부가 ①주권통화를 보유하고(우리나라는 ‘원화’라는 자체 통화를 보유하고 있다), ②외화가 아니라 그 주권통화 단위로 표시된 국채를 발행하며, ③다른 무엇인가와 국내통화의 교환비율을 유지하려 하지 않는 한(예컨대 환율 고정이나 금태환 유지), 해당 정부는 자의가 아니고서는 파산(insolvency) 상태에 빠질 수 없다. 즉, 위 세 가지 조건만 충족되면 국가부채위기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재정적자의 위험성을 우려하는 주류 경제학의 담론은 자체적인 통화 발행권을 갖는 주권국가의 정부재정을 가계나 기업의 그것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관점으로부터 비롯된다. 하지만 정부는 민간 기업이나 가계와는 매우 다르다. 우선 주권통화를 보유하면 정부는 발권력을 갖는 반면, 가계 혹은 기업은 스스로 화폐를 발행할 수 없다. 가계나 일반 기업과 같은 민간은 자신의 지출을 소득을 통해 충당해야 하지만, 정부는 발권을 통해 지출할 수 있다. 지난 칼럼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처럼, 재정건전성 담론은 이러한 중요한 논점을 무시하고, 정부 또한 지출을 위해서는 소득(세입 혹은 부채)으로 재원이 조달되어야 하는 것으로 전제한다.

 

건전재정 담론을 유포하는 경제전문가들은 보다 세련된 이론과 논리를 개발해 왔다. 그 가운데 가장 설득력 있는 논리 중 하나는 ‘국가 신용도 하락 위험’이다. 이에 따르면, 국가부채가 과도하면 특정 시점에서 시장의 투자자들이 정부의 지불능력을 의심하게 될 수 있다. 시장의 신뢰를 잃은 정부의 국채는 투매의 대상이 되고, 국채 투매가 발생하게 되면 이자율이 급등하여 경제를 어려움에 빠뜨린다는 것이다. 시장은 적정한 국가부채 수준을 모니터링하고, 규칙을 위반하는 정부에 대해서 가차 없이 처벌하는 ‘채권 자경단’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민간 투자자들이 국채를 투매한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상환을 못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중앙은행이나 정부가 ‘통화를 창출’하여 민간이 매도하고자 하는 정부채권을 모두 매입해 주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소득으로 부채를 상환해야 하는 가계나 기업과 결정적으로 중요한 차이점이다. 앞서 제시된 남유럽 국가들을 포함하여 흔히 회자되는 국가부채 위기는 이와는 내용이 전혀 다른 경우들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실에서 목격되는 국가부채 위기의 대부분은 ‘외채위기’였다. 주권국가 정부의 부채가 자국통화로 표시되어 자국화폐로 상환되어야 하는 한, 정부의 지불불능 사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두 번째 조건인 ②국내통화 표시 채권 발행이다.

 

하지만 국가의 부채가 외국통화로 표시되어 있어서 외환으로 지불하여 청산해야 하는 경우, 외환보유고가 부족하게 되면 외채에 대한 지불불능 사태에 빠질 수 있다.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정부와 중앙은행이 해당 외화를 발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80년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1997-1998 아시아 통화위기, 남유럽 국가들의 국가부채 위기, 그리고 최근 터키의 금융불안까지 모두가 여기에 해당된다. ‘유로화’라는 단일 통화를 사용하는 유로존 국가들은 유로화 발행권이 없다. 오직 유럽중앙은행(European Central Bank)만이 유로화를 발행할 수 있다. 따라서 국가부채위기를 경험한 남유럽 국가들에게 유로화는 ‘외화’일 뿐이다. 결국 PIGS의 국가부채위기는 사실은 우리나라의 1997-98 IMF 위기와 같은 성격의 외환위기였던 것이다(차이가 있다면, 우리나라의 외채는 민간의 부채였던 반면, PIGS에서는 정부의 외채라는 점이 달랐다). 정부가 자국통화로 발행한 채무를 변제하지 못해 파산한 경우는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가부채가 금융위기와 비효율성을 낳는다며 제시하는 실증적 증거들은 대부분 이러한 기본적인 구분마저 무시한다. 그저 국가부채비율과 경제성장, 혹은 금융위기 변수들 사이의 통계적 관계만을 기계적으로 탐구하고 엉뚱한 결론을 내릴 뿐이다(얼마 전 MMT를 ‘넌센스’라며 비판했던 K. Rogoff 하버드대 교수의 연구 『이번엔 다르다』가 대표적이다).

 

중앙은행이 본원통화를 발행하여 민간이 보유한 국채를 대량으로 매입한 최근의 사례로는 200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의 일본과 2008년 발생한 세계 금융위기에 미국, 영국, EU 등의 중앙은행들의 자산매입 정책(소위 양적완화정책) 등을 들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중앙은행과 민간은행들의 대차대조표의 구성만이 변할 뿐 아무런 문제가 없다. 중앙은행의 자산에는 국채가 대량으로 증가하고 부채에는 본원통화량이 증가하는 것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 경우 ‘정부’의 부채부담은 오히려 감소한다. 왜냐하면 중앙은행은 행정부로부터 국채(자산)에 대한 이자를 지급받는 대신, 국채 매입을 위해 발행된 본원통화(부채)에 대해서는 이자를 지급하지 않기 때문이다(양적완화정책에서는 초과 지급준비금에 대해서도 이자를 지급했지만, 이것은 자의적인 정책적 판단에 따른 결정이었다). 정부가 중앙은행에게 지급하는 이자는 ‘정부’의 내부거래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한편, 시중 민간은행의 대차대조표에는 자산항목에서 국채가 지급준비금으로 전환되어 중앙은행에 예치된다. 하지만 중앙은행에 예치된 지급준비금에 대해서는 보통 이자가 지급되지 않으므로, 민간은행의 수익은 감소하게 될 것이다. 이자가 지급되는 국채를 매각하겠다는 결정으로 은행의 이윤감소는 이미 예고된 일이기도 하다. 국가부채위험이라는 것이 허구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면 은행들은 다시 국채 매입에 나서게 될 것이다. 통화정책을 위해서도 민간은행의 국채보유는 반드시 필요하므로, 중앙은행도 이를 다시 매각하고 본원통화를 회수하게 될 것이다.

 

이런 예상 시나리오는 금융 종사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있지도 않을 국가부채위기를 예상하고 이윤을 포기하면서까지 국채를 투매할 이유가 있을까? 금융기관들은 도그마적으로 재정건전성 담론을 사수하려는 이데올로그가 아니다. 이들은 철저히 이윤동기를 따르는 장사꾼일 뿐이다(외국 (투기) 자본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정부가 적자재정을 운용한다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자경단’으로 나서지는 일은 없다).

 

국가 신용도, 외국 자본, 환율

국가부채가 증가하면 국가 신용도가 하락하여 외국인 투자가 감소하여 경기침체가 온다는 국회예산정책처의 주장이나, 한국은 기축통화 발행국이 아니라서 발권력에 제한이 있다고 한국경제신문이 인용한 익명의 전문가의 견해는 아마도 국채를 보유한 외국인이 국채를 매도하고 이탈하는 경우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우리나라 증권시장(주식 및 채권 시장)에서 외국인 투자액은 2019년 4월 말 현재 687.9조 원(금융감독원)이었다. 현재 환율(1188원 = 1달러)로 환산하면 5,790억 달러 이상으로, 외환보유고 약 4,050억 달러를 능가하는 적지 않은 양이다. 이들이 동시에 이탈하고자 한다면 분명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외국인 자본 이탈 가능성과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증가한 국가부채를 외국인이 보유하면 국가부채가 증가하면 정부의 디폴트 가능성이 높아질까? 주권통화를 발행하는 국가가 주권통화로 표시되는 국채를 발행하면, 앞서 지적한 대로 국채 보유자가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정부의 상환능력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다시 한 번 반복하거니와, 국채 보유자가 상환을 요구하면서 만기연장이나 차환을 거부할 경우 간단히 주권통화를 발행하여 상환하면 그만이다. 국내통화 표시 국채를 외국인이 매입하는 경우도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국내통화로 상환하기로 약속된 차용증서이지, 외국인이라고 외화로 지급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권통화를 보유하고 그 통화로 가치가 매겨진 국채를 발행하고 상환할 수 있는 정부의 역량은 해당 통화의 국제적 지위(기축통화 등)와 무관한 것이다.

 

둘째, 이렇게 디폴트 위험이 없고 정해진 이자가 성실히 지급되는 투자자산을 외국인 투자자들이 포기할 이유가 없다. 다만 대외환경의 변화로 가까운 미래에 여타 통화 대비 국내통화 가치가 급격히 하락(환율상승)할 것이란 확신이 생긴다면 국내 채권을 일시적으로 매도하려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998년 외환위기와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영향이 그런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장하성(『한국 자본주의』, 2014, 274-294쪽)은 이 두 위기상황에서 나타난 외국인 투자자본의 이탈 규모를 추정했다. 우선 지적해야 할 점은 1998년 외환위기가 내환(內患)이었다면 2008년은 미국 등 선진국들의 금융시장이 붕괴하면서 발생한 외환(外患)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두 경우를 비교하는 것은 다양한 경우를 고려할 수 있게 해준다.

 

1997-98 외환위기의 경우를 살펴보자. 장하성과 그가 인용하는 여러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우리나라 주식시장 외국인 투자액은 1997년 7월 최고치를 기록했다. 9월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같은 해 11월까지 외국인 주식투자 자금이 이탈했다. 하지만 그 규모는 최대 10% 이내였고, 3개월 후인 1998년 2월에는 외국인 주식투자액 과거 최고치보다 오히려 6.3% 더 많은 외국인 자본이 다시 유입되었다. 외환위기가 공식적으로 종결(IMF 대출금 상환)된 2001년 말이 되어서는 1997년 최고치의 5배 규모의 외국인 주식 투자자금이 유입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부채자금(국채 및 회사채 투자자금)은 2001년까지 약 40%가 한국을 떠났고, 이후 꾸준히 재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8년 외환위기의 경우에도 유사한 패턴이 발견된다. 우리나라에 유입된 부채자금은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던 2008년 9월 사상 최고치인 3,116.5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이후 외국인의 부채자금은 2009년 3월 말까지 지속적으로 이탈하여 최고치 대비 17.3%가 한국을 떠났다. 하지만 4월부터는 외국인의 우리나라 부채 투자는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외국인의 주식투자 자금도 2009년 4월까지 18.1%가 국내 주식시장을 이탈했지만, 이후 재유입되어 2009년 12월 말이 되면 금융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내환과 외환 두 번의 위기 상황에서 외국인 투자자금의 이탈은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았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주식자금 최대 20%, 채권투자금 최대 40%가 적지 않다고 주장 할 수 있지만, 이는 극단적인 위기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란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외국인 투자 자금이 이탈하고 회복하는데 소요된 기간도 매우 짧았다. 즉, 외국자본 이탈은 규모도 작고 단기적 현상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외국인 투자자의 이탈이 무서워 재정적자를 증가시킬 수 없다는 논리에 강력한 반례로 이해될 수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 주권의 일부를 포기할 만큼 외국인 투자가 한국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증권시장에 투자된 외국인 자본이 우리나라 경제 펀더멘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외국인 투자자금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살펴보자.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2019.4월 외국인투자자 증권매매 동향」 보도자료에 따르면, 외국인 투자 자금 대부분이 포트폴리오 투자였고, 생산적 투자(해외직접투자)는 극소량에 지나지 않았다. 2019년 4월 말 기준 외국인의 투자는 코스피 주식 545.3조(37.3%), 코스닥 주식 28.8조(11.1%)의 규모였다. 하지만 코스피 투자의 96.1%, 코스닥 투자의 80%가 포트폴리오 투자로, 대부분이 배당이익과 시세차익을 노린 투기적 성격임이 드러난다. 또한 같은 시기 외국인은 채권시장에 총 112조 원을 투자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280억 원(0.025%)만이 회사채이고 거의 모든 투자금이 국채와 통화안정화증권에 투자되어 있었다.

 

국회예산정책처의 주장처럼 ‘재정적자 증가 → 국가 신용도 하락 → 외국인 투자 감소 → 경기침체’ 메커니즘이 작동하려면 외국인 투자자금이 생산부문에 투자되어 있어야 한다(재정적자 증가로 국가신용도가 낮아지지 않는다는 점은 바로 위에서 다루었다). 하지만 외국인 투자의 구성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포트폴리오 투자에 집중되어 있어 외국인 투자가 감소한다고 경기침체를 야기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실제로 우리나라 주식시장은 생산적 투자를 위한 자본조달 채널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2018년 우리나라 총투자 규모는 537.9조 원이었는데(한국은행 국민계정), 신규 주식발행을 통한 자금조달(유상증자) 규모는 6.6조 원에 지나지 않았다(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DART), e-나라경제지표 재인용). 비금융기업 회사채 발행액은 총 76.9조 원으로 우리나라 총투자 대비 14.8%에 불과했다. 물론 외국인 투자자들은 우리나라 회사채를 매입하지 않고 있다.

 

자본(통화)공급과 외국인 투자, 그리고 경제성장 사이의 관계에 대한 국회예산정책처의 주장은 이론적으로도 지지되기 어렵다. 이 논리는 투자는 저축 혹은 예금을 통해 재원이 공급되어야 하고, 그 한 가지 원천이 외국인 자본이라 가정한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통화금융체제에서 투자자금은 민간은행이 공급하고, 민간은행들의 통화창출 능력은 이론적으로 제약이 없다(두 번째 칼럼 참조). 즉, 투자자금이 부족해서 투자가 안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말이다.

 

외국인 투자가 국내의 생산적 투자와 그에 따른 경제성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외국인 자본의 이탈은 환율변화를 통해 국민경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할 경우, 지금까지 우리나라 정부를 비롯해 각국 정부가 보여준 가장 보편적인 대응은 이자율을 높여 외화유출을 억제하는 정책이었다. 과도한 국가부채가 이자율을 상승시킨다는 국채 자경단의 협박이 통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자율 인상으로 대응하려는 정책(통화당국의 긴축)은 외국인 자본의 유출을 막는데 무력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수많은 경험으로부터 얻은 교훈이다. 더구나 이자율 상승은 경제 전체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렇게 환율을 방어하려는 순간 한 나라의 재정통화정책은 외국인 투자자에게 발목을 잡히게 된다.

 

그래서 ③변동환율제는 재정정책의 자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이것이 MMT가 제시하는 세 번째 조건이다. 국가부채가 자국통화로 표시된 부채라 하더라도, 그것을 외국인이 대량으로 보유하는 경우 어떤 이유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국채를 대량으로 매도하게 되면, 외환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여 환율이 크게 변동할 수는 있다. 만약 환율을 특정 수준으로 유지하고자 한다면, 충분한 외환보유고를 보유해야 한다. 또는 ‘외국 투기자본이 보기에’ 해당 정부의 외환 조달 능력이 충분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투기적 자본의 공격을 받아 외환위기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정부가 환율이든 태환이든 무언가 방어하고 보장하려고 하면 그것이 곧 약점이 되어 해외 투기자본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변동환율제를 채택하고 이탈하고자 하는 외국인 자본에게 자유롭게 변동하는 환율이 적용되게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외국인들의 대규모 국채매각은 외환보유고 고갈이 아니라 환율 급등으로 나타날 것이고, 이탈 외국 자본의 손실로 반영된다. 적절한 재정정책으로 우리나라 경제가 안정적으로 성장하여 미래 수익성이 높아지고 어느 자산이든 지불불이행 가능성이 작은 상황이 된다면, 외국인 자본의 이탈은 일시적 소동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수익성 문제는 누구보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잘 안다. 일시적 평가절하는 오히려 투자기회를 제공하여 외국인 자본의 유입을 촉발하는 기회로 작용할 수도 있고, 이탈 동기도 약화시킬 수 있다. 경제가 (적극적 재정정책을 통해)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있고, 국채에 대한 이자가 성실히 지급될 것임이 확실하다면, 외국인 투자자가 급작스럽게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해당 국채를 투매하려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자본시장 자유화 이후 외국인 투자의 이탈과 환율상승 현상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 일시적 현상으로 끝나곤 했다. 시장의 변덕으로 일시적인 국내 통화가치의 하락이 예상되면 외국인 투자자에게는 일시적으 수익이 낮아질 것으로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경제가 지금까지 안정적으로 성장할 때, 채권과 주가의 폭락은 양질의 투자수단을 추가로 매수할 기회라 여기는 세력이 등장하곤 했던 것이다. 1998년 외환위기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국면에서 외국인 자본의 일시적 유출과 재유입이 좋은 사례이다. 해외자산을 보유한 국내 투자자들도 이는 국내 부채를 상환할 좋은 기회가 될 것이므로, 해외자산을 매각하여 외환을 국내로 들여오는 일도 발생할 수 있다. 또한 국내 통화의 평가절하는 수출기업들의 이윤을 크게 향상시키고, 이들 기업들의 주가가 올라갈 것이다. 이는 외국자본에게도 좋은 투자 기회로 작용하여, 외국인 투자자본의 유입을 촉진 할 수도 있다.

 

정책적 관점에서도 외국인 자본의 이탈과 환율 인상에 대한 공포로 지나치게 긴축적인 재정정책을 고수하는 전략보다는 환율변동에 대한 다른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일 것이다. 예컨대, 모든 수입에 대해 환율변동을 헤지(hedge)하도록 강제하는 ‘규제’를 시행하고, 그것이 기업활동에 과도한 비용을 초래하는 것이라면 소요되는 추가 비용 중 일부를 정책적으로 지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국내 통화가치 하락에 따른 수입물가 급등을 미연에 예방할 수도 있다. 이 모든 효과를 감안하면, 변동환율제는 조만간 해당 통화의 가치가 폭락할 것이라는 시장의 ‘기대’와 자기실현적 과정을 미연에 방지하여, 파국적 국내 자산 투매(sales in panic)의 가능성도 크게 낮출 것이다. 근본적으로 외국인의 이탈을 촉진하는 요인은 해당 경제의 자산가격이 급락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대개 국채가 낳은 위기가 아니라 부동산, 주식 등 자산시장을 버블로 이끈 금융시스템이나 정책당국의 정책 실패(‘빚내서 집사라’ 정책이 좋은 예이다)의 결과였다. 버블의 형성과 붕괴 싸이클을 따라 외국자본의 유출입은 과도한 국가부채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실제로 관찰되기도 했다.

 

외국인 자본의 이탈로 외환시장과 자산시장이 동시에 위협을 받는 경우, 각국 정부의 가장 보편적인 정책적 대응은 이자율을 높이는 ‘긴축정책’이었다(IMF나 세계은행 등 신자유주의 국제금융기구들의 요구사항이기도 하다). 이러한 대응은 외국인 투기자본이 일으킨 부정적인 효과를 상쇄하기 위해 국내 생산과 고용을 위축시키는 ‘긴축’으로 대응하는 것으로, 쉽게 정당화되기 어려운 정책이라 할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의 변덕이 주권국가의 재정통화정책을 제한하는 것이라면 외국인 투자에 일부 제한을 둘 수도 있다. 국내 생산과 고용에 눈에 띄는 역할을 담당하지도 않는 투기자본을 위해 국민경제가 희생되거나 독립 주권국가의 주권 일부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자본시장을 대외적으로 개방할지의 여부, 혹은 국제 투기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허락할지의 여부 등은 주권국가가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정책적 결정이다. 어떤 정책적 결정으로 경제에 부정적인 결과가 야기된다면, 정책방향을 전환해야 할 것이지, 왜 항상 자국의 국민이 그 뒤처리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와 관련, 자본시장 개방으로부터 기대하는 가장 중요한 경제적 이익은 ①경제발전에 필요한 자본재의 수입을 위해 필요한 외환의 공급, ②‘자본배분의 효율성’을 높여 경제 전체의 생산성 개선(경쟁효과) 등이다. ①의 경우는 경제발전 수준이 매우 낮아서 해외에 수출하여 외환을 획득할 수 있는 상품을 생산하지 못하는 경우에 해당되므로, 한국과 같이 발전한 경제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②에 대해서는 실증적으로 증거를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의 베트남이나 개혁개방 초기 중국 등의 경우처럼 실물부분에 투자되는 해외직접투자(FDI)의 경우가 이에 해당 될 수는 있지만, 생산자본의 유동성이 매우 낮다. 현재 금융시장을 배회하며 문제를 야기하는 자본은 대부분이 투기자본이다. 이들이 국내 채권(대부분 국채)이나 주식을, 그것도 발행시장이 아니라 유통시장(2차 시장)에서 매입한다고 해서, 실물경제의 투자 흐름을 어떻게 변경하고 그래서 경제 전체의 생산성을 어떻게 향상시키고 있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국채 이자율은 기본적으로 중앙은행의 정책변수이다. 현실적으로도, 자국통화로 표시된 국채에 대한 투매가 발생할 경우 중앙은행이 본원통화를 발행하여 매입하는 한편 환율상승은 용인하는 경우, 외국인 보유자들도 큰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급격한 매도에 동참할 것 같지는 않다. 중앙은행의 정책의지가 확고한 상황에서, 이러한 해프닝은 일시적 현상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일시적으로 급등한 환율이 가져올 부정적 효과는 정부정책으로 상쇄할 수도 있고, 헤지수단 등을 이용해 미리 대비하면 된다. 예컨대, 환율인상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경제부문에 대해 보조금을 지급하여, 그 효과가 국민 전체의 부담으로 가지 않도록 하는 대안도 고려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자율 인상으로 대응하는 것은 그 효과에서도 무력할 뿐더러, 정부의 보조금 지급 비용보다 경제 전체적으로 훨씬 큰 피해를 낳는다. 정부(재정정책)가 책임을 지고 손해를 보는 편이 낫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신용화폐가 지배하는 현대 통화제도 하에서 국내 통화의 가치를 고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어떤 형태로든 국내통화를 묶어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예컨대 과거 금본위제에서 국가가 발행한 통화는 언제든 ‘금’으로 바꿔주겠다고 약속하고, 그 교환비율까지 미리 약정하게 되면 국가의 정책여력은 사라진다. 현대에서 기축통화와의 교환비율(환율)을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정책도 이와 동일하다. 오히려 이것이 외국인 투기자본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일정정도 자본시장 개방이 불가피하다면, 변동환율제를 채택하고 환율의 급격한 변동으로 유발되는 부정적 효과는 재정정책으로 방어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일 것이다.

 

국내 통화가치의 자유로운 변동을 허용하는 정책은 무역적자의 무제한적 확대와 그에 따른 과도한 해외자금 유입을 억제하는 메커니즘으로도 작동할 것이다. 무역적자가 지속되고 그에 따라 자본계정 흑자가 확대될 경우, 국내통화의 가치가 부드럽게 하락하여 수입을 억제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지속적인 무역적자에 대응하여 빈번히 채택되는 정책은 시장 메커니즘의 작동을 촉진하기 보다는 긴축정책을 통해 국내 수요를 억제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외국통화 대비 국내통화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국민소득의 감소를 용인하는 정책인데, 환율안정에 왜 그렇게 높은 정책적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인플레이션 위험에 대한 평가

건전재정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로 가장 흔히 거론되는 또 하나의 위험은 물가상승 가능성이다. 국가부채가 증가하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를 제대로 토론하기 위해서는 재정적자가 인플레이션을 낳는 메커니즘을 우선 명확히 해야 한다. 국회예산정책처의 설명에 따르면 재정적자의 증가는 '총수요'를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이 설명처럼 수요 증가가 ‘문제적’ 인플레이션을 야기하려면 현재 경제가 완전고용 상태에 도달해 있어서, 총수요가 증가해도 생산은 증가하지 않아야 한다. 경제가 완전고용 상태에 도달하면 총수요가 증가하더라도 물가만 상승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경제는 완전고용 상태와는 한참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그림 3> 제조업 평균 가동률. 출처: 통계청 KOSIS

 

경제가 완전고용 상태에 있는지를 판단하는 지표는 설비 가동률과 실업이다. 가동률이란 최고 생산능력 대비 실제 생산량의 비율을 나타낸다. 이 비율이 낮을수록 유휴 설비가 많음을 의미한다. [그림 3]은 우리나라 제조업의 평균 가동률을 보여준다. 가동률이란 최고 생산능력 대비 실제 생산량의 비율을 나타낸다. 이 비율이 낮을수록 유휴 설비가 많음을 의미한다. 2018년 우리나라 제조업 평균 가동률은 73%로, 2009년 세계 금융위기 때보다도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유지보수를 위해 가동을 중단해야 하는 부분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20% 이상의 생산설비가 가동을 중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실업은 통계적 수치보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피부로 느낄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처해 있다.

 

우리나라 경제에서 다량의 유휴설비와 광범위한 실업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완전고용 수준에 크게 미치지 못하며, 수요 부족 문제가 심각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부가 재정적자를 통해 총수요를 늘린다 하더라도 가격이 크게 오를 가능성은 크지 않다. 불완전 고용이 널리 퍼져 있는 상황에서 총수요 진작과 가동률 상승은 오히려 (평균)생산성을 높여 생산물 단위당 생산비용을 낮출 수 있다. 총수요 증가는 오히려 물가하락 압력을 낳을 가능성마저 존재하는 것이다.

 

실제로도 [그림 4]가 보여주듯,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경제성장과 물가상승 사이에는 뚜렷한 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는 경제성장이 정체되었음에도 물가상승률이 높았던 반면, 어떤 해에는 매우 높은 경제성장률에도 물가는 크게 오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요컨대, 생산의 증가와 물가 상승 사이에 상당한 정도의 양의 상관관계는 발견되지 않는다. 불완전 고용으로 즉시 투입 가능한 여유 생산여력이 존재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잠재생산능력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에서 재정적자는 인플레이션을 증가시키지는 않는다.

 

<그림 4> 물가상승률과 경제성장률 2000~2017. 출처 : 한국은행 ECOS

 

재정적자가 인플레이션을 일으킨다는 주장이 흔히 언급하는 또 다른 메커니즘은 소위 ‘재정적자의 화폐화’(monetization of debt)의 경우이다. 재정적자(국채발행) 증가→중앙은행의 국채매수→통화량 증가→인플레이션 등의 연쇄반응이 그것이다. 우선 지적할 것은 현대 화폐금융 제도 하에서 정부가 적자재정을 운영하기 위해 발행하는 국채를 중앙은행이 직접 매입할 수 없으므로, 재정적자의 화폐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실제로 이것을 실행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일본의 경우를 예외로 보는 시각이 있긴 하다). 정부지출 증가는 시중의 지급준비금을 증가시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과도하여 목표금리를 하락시키는 경우 중앙은행이 나서서 흡수할 수는 있다. 하지만 중앙은행이 정부로부터 국채를 직접 매입하지 않는 경우 재정적자에 따른 지급준비금 증가는 민간이 국채대금으로 지급한 지급준비금을 되돌려 주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정부의 적자지출은 지급준비금을 추가로 증가시키지 않는다.

 

또한, 지난 칼럼에서 상세히 설명한 것처럼, 부채의 화폐화는 오히려 바람직한 정책방안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재정적자에 따른 부채를 민간이 아니라 중앙은행에 지는 것이다. 그러나 재정적자가 증가하고 이를 위해 방행된 국채를 중앙은행이 매입한다고 해도 물가상승률이 높아질 필연적인 이유가 없다. 간단히 재론하자면, 첫째, 은행의 국채매도 없이 지급준비금이 증가(재정적자의 화폐화)한다고 하더라도, 은행대출과 그에 따른 신용통화량도 비례적으로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지급준비금 증가가 대출 증가로 이어진다는 관념은 은행들이 지급준비금 제약에 직면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민간은행은 지급준비금 제약 없이 항상 원하는 만큼 대출할 수 있다. 오히려 은행대출의 진정한 제약은 ‘신용도 높은 대출수요’라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재정적자의 화폐화로 지급준비금이 증가한다 하더라도 민간의 신용통화량도 함께 증가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다만 정부의 재정적자로 민간의 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생산과 고용이 증가하여 통화량이 증가할 수는 있다.

 

둘째, 정부지출이 증가하여 통화량이 증가하는 동안 생산 또한 비례적으로 확대될 것이므로, 인플레이션 압력은 크지 않을 것이다. 정부가 지출을 늘림으로써 유효수요가 증가하고, 따라서 생산 확장을 위한 자금 수요가 증가할 수 있다. 실제로 이것이 현실적으로 보다 타당한 예측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통화량(대출) 증가에 비례하여 생산량 또한 증가하는 경우로, 이것이 인플레이션 압력을 크게 높일 것이라 기대하긴 어렵다. (생산과 무관한 부동산, 주식 등 자산가격의 버블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두 번째 칼럼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는 민간은행들이 화폐를 발행하고 배분할 권한을 갖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역사적으로도 자산가격 버블은 정부부문(정부와 중앙은행)의 지급준비금 공급과는 무관하게 민간은행 주도의 신용화폐 과잉 발행과 투기의 결과였다).

 

‘어느 경우든 통화량 증가는 물가상승을 낳는다’는 주류 경제학의 ‘화폐수량설’은 매우 비현실적인 가정들에 기초한 관념이다. 특히 신용통화량 증가와 생산 증가 사이의 관계를 ‘완전고용’ 가정으로 완전히 무시한다. 화폐수량설을 간단한 수식으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이 된다.

여기서 M은 거래에 활용되는 통화량, V는 화폐유통속도(1단위의 화폐가 매개하는 거래 횟수), P는 가격, Y는 실물 수량으로 측정되는 생산량을 나타낸다. 따라서 좌변은 거래에 사용된 총 화폐량, 우변은 총생산물의 화폐적 가치를 의미하므로, 본질적으로 양변은 항상 같다. 여기서 화폐유통속도는 제도적 요인이나 경제적 습관 등에 의해 결정되므로 단기적으로 잘 변하지 않는 상수로 가정할 수 있다. 또한 경제가 ‘완전고용상태’에 있으므로 단기적으로 생산량(Y) 또한 확대되기 어렵다고 ‘가정’(!)한다. 마지막으로 통화량은 중앙은행이 임의로 변경할 수 있는 정책변수로 간주된다. 이러한 가정들이 성립하면, 통화량의 변화는 비례적인 가격 변화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항등식이기 때문이다. 즉, 10켤레의 신발(Y) 거래에 10만 원의 화폐가 유통되고 있다면, 1켤레 당 1만 원의 가격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갑자기 중앙은행이 강제로 시장에 유통되는 통화량을 10만 원에서 20만 원으로 늘리면, 10켤레의 생산량이 변하지 않는 한, 신발의 가격은 2만 원으로 상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방식은 현실을 완전히 오도하는 것이다. 실물거래에 사용되고 유통되는 통화량 M은 사실상 신용화폐, 즉 민간이 창조하는 예금(=대출)인데, 민간은행이나 중앙은행이 이를 강제로 늘릴 수는 없다. 생산과 고용을 담당하는 민간경제부문은 신용화폐가 실제로 필요할 경우에만 대출받으려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늘리는 이유는 이를 활용하여 생산을 하고 이윤을 얻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통화량의 변화는 생산과 고용의 변화와 연결되어 있고, 통화량 M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생산 Y의 증가와 동반된다. 이렇게 통화량 변화와 생산량 변화가 비례한다고 가정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다. M과 Y가 비례적으로 변화하게 되면, 가격(인플레이션)의 변화 없이도 위 항등식은 성립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주류 경제학의 화폐수량설은 완전고용 ‘가정’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데, 그 가정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자본주의에서는 불완전고용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우리나라의 가동률과 실업률을 보라).

 

그렇다고 이것이 재정적자와 총수요의 증가가 물가상승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MMT 옹호자들은 ‘실물적 제약’(constraint of real resources)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정부가 재정적자를 통해 노동과 자연자원 등 가용한 자원 이상으로 수요를 늘리게 되면, 생산 증가보다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것이라 경고한다. 즉,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통화량이 증가해서가 아니라 경제가 가진 생산능력을 초과하는 수요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의 재정여력이 충분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가용 실물자원의 정도, 다른 말로 하면 경제의 생산능력 범위 내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요약하자면, 국채를 중앙은행이 매입하는 ‘재정적자의 화폐화’는 제도적으로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일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설사 그렇게 하더라도 그것이 인플레이션을 높일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이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유럽, 영국, 일본 등 선진국 중앙은행들의 양적완화정책을 통해서도 실제로 입증되었다. 양적완화정책을 통해 중앙은행이 대규모 국채(와 민간이 발행하고 부실화된 금융자산까지도)를 매입하고 시중에는 초과 지급준비금이 넘쳐 나고 있지만, 그렇게 10여 년이 지난 아직도 인플레이션 징후는 세계적으로 보이지 않고 있다.

 

실업보다 무서운 인플레이션?

2009년 1월부터 2017년 3월 자진 사퇴하기까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이사로 활동한 대니얼 타룰로(Daniel Tarullo) 조지타운대학교(Georgetown University) 교수는 최근 논문에서 ‘통화정책에 활용할 만한 인플레이션 이론이 없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세계 대부분의 중앙은행의 정책목표는 2~3% 내에서 인플레이션을 관리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세계의 중앙은행들은 인플레이션이 어떻게 발생하고 작동하는지도 모르면서 인플레이션 억제를 통화정책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정하고 있다는 말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왜 인플레이션은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 가장 두려운 해악일까? 주류 경제학의 입장은 물가가 불안정해지면 경제성장에 해롭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관찰되는 극히 일부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제외하고 적당한 정도의 인플레이션은 오히려 경제성장에도 이롭다는 연구 결과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Pollin & Zhu(2005)이 1961-2000년의 기간 동안 80개 국가를 대상으로 인플레이션과 경제성장의 관계를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첫째, 인플레이션과 경제성장 사이에는 선형관계가 아니라 비선형관계가 존재한다. 둘째, 적당한 인플레이션은 경제성장과 양의 관계를 갖지만, 약 15-18%의 임계점 이상의 인플레이션은 경제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여기에 인용된 수많은 선행 연구들도 유사한 결론을 내리지만, 각기 국가와 시기마다 다른 임계점을 제시하고 있다. 유사한 결론을 보여주는 주류 경제학자들의 연구도 상당수 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은행을 포함하여 전 세계의 중앙은행들은 연간 물가상승률 2-3%를 반드시 사수해야 하는 상한으로 정하고, 이유를 불문하고 그 이상으로 상승할 ‘조짐이 보이면’ 곧바로 긴축적 통화정책으로 전환하고 있다. 하지만 왜 2%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때 과도한 인플레이션 조짐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가 소위 필립스 곡선이다(물론 GDP갭을 고려하기도 한다). 이는 인플레이션율과 실업률 사이에 안정적인 음의 관계, 즉 일종의 상충관계를 도식적으로 보여주는 곡선이다. 고용은 현재 경제활동이 얼마나 활발한지를 보여주는 지표(Okun’s Law)이므로, 실업률의 감소는 경제의 과열 여부와 그에 따르는 인플레이션 가능성을 보여준다. 실업률이 지나치게 낮으면 곧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1950년대 말 최초로 필립스 커브가 제시된 이후, 그것이 과연 어느 시기에나 어느 나라 경제에서나 ‘안정적’으로 존재하지, 또는 그 기울기(상충관계의 정도)가 얼마나 되는지 등 이에 대해 수 없이 많은 반론이 제시되어 왔다. 최근의 IMF 경제학자들도 이에 대해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발표했는데, 19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그 기울기가 지속적으로 작아져 왔고(그림 5), 극단적으로 G-7 경제에서는 양자 사이에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다는 결론을 내놓기도 한다(그림 6). 이는 특정 인플레이션율 수준과 더 폭넓은 수준의 실업률이 대응할 수 있다는 의미로, 고용이 증가하고 실업이 줄어든다 하더라도 인플레이션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통화정책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현재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을 목표로 통화정책을 운영하는데, 인플레이션율 1%p 낮추기 위해(그것도 겨우 2-3% 수준에서!) 감내해야 하는 실업률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는 것이다. [그림 5] 연구의 추정대로 필립스 곡선의 기울기가 약 0.3이라면 인플레이션 1%p를 낮추기 위해서는 실업률이 약 3.3%p 증가해야 하는 것이다.

 

더 중요한 점은 인플레이션이 왜 발생했는지조차 묻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환율상승이나 해외 원자재 가격의 상승으로 국내물가가 상승하더라도 기준금리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우리나라 가계부채 수준이 역사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는 반면 가계의 소득은 정체되어 있는 상황에서 기준금리 인상은 소득불평등을 크게 악화시키고 금융불안을 가중시킬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준금리 결정에 이런 사정은 고려되지 않는다. 실제로 금융통화위원의 구성을 보면 대부분 관료와 자본과 금융업을 대변하는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현대의 통화정책이 왜 그토록 가혹하게 긴축적인지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인플레이션 상한을 정해 놓고 이를 초과할 경우 이자율 인상으로 대응하는 정책 매뉴얼의 최대 수혜자는 금융자산가들이다. 이것은 음모론이 아니다. 현실에서 나타나는 결과가 그렇다는 것이다. 우선 인플레이션은 금융자산의 가치를 훼손하므로, 이를 억제하는 것은 금융자산가들의 바램이기도 하다. 둘째, 인플레이션 상승을 명분으로 이자율을 인상하면, 금융자산에 대한 이자수익이 증가한다. 이것도 금융자산가들의 이해와 일치하는 정책이다. 따라서 인플레이션 목표제 통화정책은 생산과 고용에는 부정적일 수 있지만, 금융자본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 준다).

 

<그림 5>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율: OECD 20개국. 출처, Blanchard, Cerutti, and Summers(2015)

 

<그림 6>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율: G-7 국가. 출처: J. Bullard(2018), ECB

 

요약하자면, 현대 대부분의 중앙은행들이 통화정책의 준거 중 하나로 사용하는 인플레이션 목표는 바람직하지도 실효성도 없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재정적자가 인플레이션을 증가시킨다는 증거도 없다. 따라서 인플레이션 우려를 근거로 재정적자를 반대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정부지출은 비효율적이다 : 구축효과(crowding-out effect)

주류 경제학의 통상적인 관념에 따르면, 정부부채의 증가는 비효율성을 증가시켜 경제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정부부채 증가가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이유로 그것이 금융위기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과 민간의 투자를 밀어내고(crowding-out) 위축시킨다는 점이 흔히 지적된다. 우선 국채위기 가능성을 주장하는 논의들 대부분은, 그 구체적 내막과 역사적 배경에 대한 고려 없이, GDP 대비 국채비율과 금융위기 발발 사이의 통계적 관계를 기계적으로 연결한다. 그것이 외채인가 국내통화표시 국채인지조차 구분하지 않는다. 이러한 주장에 존재하는 유일한 이론적 근거는 ‘가계 혹은 기업처럼 정부도 부채가 과도하면 시장의 변동에 취약하게 된다’는 (잘못된) 상식적 가설뿐이다. 즉, 채권 자경단의 공격에 취약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앞서 지적한 것처럼, 근거가 없다.

 

국가부채가 증가하면 밀어내기효과(crowding-out, 흔히 ‘구축효과’라 부른다)를 통해 경제 전체의 효율성이 떨어지고 경제가 침체한다는 주장은 통화공급과 금융시장에 대한 잘못된 ‘가정’ 혹은 ‘전제’에 기반하고 있다. 이 주장은 암묵적으로 활용 가능한 통화량이 한정되어 있고, 이를 민간경제와 정부가 경쟁적으로 나누어 사용한다고 전제한다. 주어진 대부 가능 자본량이 제한되어 있는 조건에서, 자본시장에서 민간과 정부가 차입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상황을 가정하는 것이다. 그 결과, 정부가 적자재정을 운영하기 위해 더 많이 차입하게 되면, 이자율이 상승하게 되고 그 결과 민간의 투자가 억제된다는 것이다. 또한 정부보다 민간이 항상 보다 ‘효율적으로’ 투자하므로, 민간으로부터 정부로의 자원배분은 경제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낳는다고 주장된다.

 

이런 주장 또한 순수 사고실험에 지나지 않으며, 현실적으로 전혀 그 근거를 찾기 어렵다. 첫째, 정부부채가 증가한다고 해도 시장 이자율이 상승하는 것은 아니다(세 번째 칼럼의 실증자료 참조. 정부부채 증가가 이자율을 상승시킨다는 주장은 최근 MMT 비판에도 자주 등장한다. 폴 크루그먼이 대표적이다. 이에 대해 2016년 버니 샌더스 캠프에서 수석 경제자문역을 담당했던 MMT 주창자인 S. Kelton 교수의 요약과 반론을 참조하는 것도 좋겠다. 흥미로운 사실은 두 경제학자 모두 스스로 케인즈주의자라고 자임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크루그만도 경기침체에 맞서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주장한다. 이것이 전형적인 주류 경제학이 케인즈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MMT 및 포스트 케인지언들은 이를 비판하며 스스로가 케인즈주의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 주장한다. 즉, 케인즈주의는 ‘불황기 적극적 재정정책’ 정도로 협애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선 자본시장에서 정부는 민간과 ‘한정된’ 자본을 두고 경쟁하는 관계에 있지 않다. 한정된 대출 가능한 자본(loanable fund)라는 관념은, 은행에 저축이 우선 존재해야만 대출이 가능하다는 관념, 그리고 정부지출은 세입으로 충당되어야 한다는 관념과 맥을 같이하는 비현실적 가정이다. 우선 정부와 민간은 서로 사용하는 통화부터 다르다. 정부가 지출하는 통화는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지급준비금이고 민간이 투자에 사용하는 통화는 민간은행이 발행하는 예금(=대출) 형태의 신용화폐이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지급준비금이 부족하면 중앙은행은 반드시 추가로 공급한다. 따라서 정부와 민간은 대부자금시장에서 한정된 투자자금을 두고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

 

정부의 재정적자는 오히려 민간의 금융자원을 증가시킨다. 정부의 적자는 민간은행에게는 지급준비금 혹은 국채 형태의 자산을 제공하고, 가계와 기업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예금을 늘려준다(세 번째 칼럼 참고). 정부의 적자 지출은 민간부문의 순금융자산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정부의 지출은 이렇게 민간경제 전체에 걸쳐 넓은 의미의 통화를 공급하므로, 재정적자가 이자율을 상승시키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점으로, 이자율은 중앙은행의 정책변수이다. 현실에서도 시장의 단-장기 이자율 모두 중앙은행의 기준금리를 추종해 왔다는 경험적 연구는 무수히 존재한다. 잔존 기간별 수익률 곡선(yield curve)은 이에 대한 반론이 되지 못한다. 시장 이자율은 만기가 길수록 더 높아지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중앙은행의 이자율 결정능력이 부족함을 보여주는 증거는 아니다. 장기 이자율이 높은 이유는 장기 채권 구매자의 인플레이션 기대나 예상되는 채권가격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만일 장-단기 채권의 금리차가 지나치게 커서 문제가 된다면, 중앙은행이 장기채권을 매입하고 단기채권을 매도하는 공개시작조작을 통해 금리차를 축소할 수도 있다. 실제로 장기적으로 보면 장기와 단기 이자율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구축효과 주장이 비현실인 두 번째 이유는 이자율이 민간투자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찾아진다. 구축효과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대부자본 이론은 주류 경제학의 투자이론에도 영감을 주었다. 이에 따르면 대출의 수요곡선은 이자율과 반비례 관계를 갖는다. 이자율이 낮을수록 대출 수요가 커지고, 그 역도 성립니다. 그 논리는 이렇다. 대출을 늘려 투자가 증가하면 투입 자본량이 증가할 것이고, 자본의 한계생산체감의 법칙에 따라 자본의 한계생산가치(=한계생산물  단위가격, 단 한계생산물은 신규 투자에 따라 ‘추가로’ 생산되는 생산물의 량)도 하락한다. 한계생산가치는 대출에 따른 한계 이익을 나타내고, 대출 이자율은 투자비용이다. 전자가 후자보다 클 때에만 대출을 수요하게 된다. 따라서 대부자본이론에서 대출 수요는 한계생산체감의 법칙에 따라 우하향하는 모양을 갖게 된다.

 

경험적으로 자본의 한계생산체감의 ‘법칙’이 과연 현실을 잘 설명하는 법칙으로 인정될 수 있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오히려 자본 투입량이 증가하여 생산규모가 증가할수록 한계생산이 증가하는 경우가 흔히 발견되기 때문이다. 또한 투자 결정시 한계생산가치를 고려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를 계산할 수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한계생산가치는 한계생산물에 가격을 곱한 값이다. 그런데 한계생산량을 사전적으로나 사후적으로 측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또한 가격은 투자 이후 생산이 개시되어 한계생산물이 시장에서 실현된 이후에나 알 수 있게 된다. 생산물에 대한 미래의 시장가격과 한계생산량을 사전적으로 어떻게 정확히 예측하여 한계생산가치를 계산하고, 이를 투자결정에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한편으로, 한계생산가치 혹은 투입 대비 이익의 비율이 진정 투자결정 기준으로 활용되고 있는지도 의문을 갖게 한다. 첫 번째 칼럼에서 지적한 것처럼, 현실에서 투자는 대개 수요전망에 따라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 또한 투자로 한계이윤이 감소한다고 하더라도 지속적인 투자가 이루어지는 이유는 이윤량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10만큼 투자하고 있는 경우 이윤률이 10%라 하더라도 이윤량은 1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100만큼 투자하고 수익률이 5%로 떨어진다고 해도 이윤 총량은 5로 증가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투자 결정은 이윤율이 아니라 이윤의 ‘양’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생산물의 판매만 보장된다면 추가적 투자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재정적자는 총수요를 늘리는 정책이므로, 기업들의 투자를 유도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기업들은 시장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혹은 경쟁수단으로 투자를 선택하기도 한다. 이렇게 한계생산성 보다는 기업이 가진 자본 전체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고, 따라서 한계생산성체감의 법칙에 의존하는 투자이론은 현실에서 지지되기 어렵다 할 것이다.

 

요약하자면, 재정적자 자금은 민간부문과의 경쟁을 통해 조달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덧붙여 이자율이 정책변수이고, 재정적자는 민간의 금융자산을 오히려 증가시킨다는 점을 감안하면, 재정적자가 증가한다고 해서 이자율이 상승할 이유가 없다. 한계생산체감의 법칙이 지배하는 투자이론도 현실적으로 지지되기 어렵다. 따라서 재정적자의 구축효과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리카도 동등성 정리

부채가 경제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흔히 거론하는 또 다른 근거는 Barro(1974)가 제안한 ‘리카도 동등성 정리’(Ricardian Equivalence Theorem)라는 논리이다. 이에 따르면, 정부가 추가적인 징세 없이 부채를 늘리게 되면 사람들의 ‘평생소득’에는 변화가 없게 된다. 정부의 지출 증가로 당장의 소득은 증가할 것이다. 하지만 (초인적으로)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경제주체들은 미래 어느 시점에 이르면 국가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세금이 증가할 것이란 점을 미리 알고 있으므로, 이 미래 증세를 대비해 현재의 저축을 늘리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부채를 통한 정부지출의 국민소득과 총수요에 대한 효과는 저축 증가로 상쇄되고, 경제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설명이 주는 핵심 메시지는 ‘정부부채의 증가는 저축을 늘려, 현재의 경제성장 효과를 상쇄한다’는 것이다. 재정정책이 무력하다는 것이다(참고로, 이는 같은 이론적 기초를 공유하는 구축효과 논리와 모순된다. 구축효과 주장에 따르면 재정적자는 이자율을 상승시켜야 한다. 하지만 리카도 동등성 정리는 대부자금 수요(재정적자) 증가에 대응하여 공급(저축)도 증가하므로, 이자율은 변함이 없을 것임을 함축한다).

 

하지만 이는 현실과는 전혀 무관한 머릿속의 추론일 뿐이다. 첫째, 이 논리가 ‘가정’하듯 경제주체들이 그토록 합리적이거나 완벽한 계산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그러한 계산을 위한 정보가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의 정부부채 증가가 언제 어떠한 방식으로 개인들에게 얼마만큼의 세금으로 부과되고, 또 그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현재 얼마나 저축해야 하는지를 계산하기 위해서는 수많이 정보가 필요하고, 매우 고차원적인 계산능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더구나 현실적으로 이 논리가 요구하는 정보란 ‘수집될 수 있고 변하지 않는 확실한 정보’가 아니라 미래에 수시로 변할 수 있는 ‘불확실한 정보’인 것이다. 따라서 합리적 계산에 필요한 ‘주어진 정보’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현재 증가한 국가부채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반드시 ‘증세를 통해’ 상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증세’란 세율의 인상을 의미하므로, 이 논리는 성장하지 않는 경제를 ‘가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경제는 지속해서 성장할 것이므로 증세 없이도, 그것이 필요하다면, 부채를 상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현실적으로 정부부채는 미래에 상환되지 않는다. 만기가 도래한 정부채권은 기간을 연장하거나 차환을 통해 과거의 부채가 신규 부채로 전환될 뿐, 상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규모 대비 부채비율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지 않는 이유는 경제가 성장하기 때문이다. 세율이 불변이라 가정하면, 세입은 경제성장에 비례하여 증가한다. 이렇게 성장하는 경제에서 명목 경제성장률이 부채에 대한 이자율보다 높은 한 부채비율은 제한된 수준으로 수렴하게 된다.

 

정부부채 증가는 무조건 해로운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정부부채가 증가한다고 반드시 위험을 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부채의 증가는 경제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낳지 않는다. 오히려 정부부채는 성장하는 경제에게 민간의 부채부담 증가 없이 필요한 통화와 금융자산을 공급하는 바람직한 방법이다. 실업과 유휴 자본이 존재하는 불완전고용 상황에서, 민간의 순금융자산 축적은 민간의 유효수요를 증가시키고 생산을 확대할 것이다.

 

다음 마지막 칼럼에서는 정부적자의 ‘미래세대 부담론’을 살펴보고, 장기적 재정계획을 수립함에 있어서 바람직한 관점은 무엇이어야 할지 토론하고자 한다. 미래세대를 걱정한다면, 미래세대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그거 숫자에 지나지 않는 건전한 ‘장부’인가 아니면 건강한 ‘경제’인가?

 

필자 전용복은 2010년부터 경성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08년 미국 University of Utah에서 수요측 요인으로 중국경제의 빠른 성장을 설명하는 논문을 작성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학에서 가르치는 주류 경제학 대부분이 현실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고 믿으며, 대안적 경제이론을 탐구해 왔다. 특히 대안적 경제성장론, 화폐ㆍ금융론, 재정정책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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