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선자도 당선시키고,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오보'의 역사

  • 기자명 김형민
  • 기사승인 2019.06.10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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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에서 미국과의 관계는 압도적일만큼 ‘명징’ (요즘 이 단어 때문에 하도 시끄러워서 굳이 써 봄)하다. 미합중국 대통령들은 각각 그의 시대에서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거나 그 진로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그 중 가장 인연이 깊은 이라면 역시 한국의 해방과 분단, 미 군정, 그리고 전쟁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 백악관의 주인이었던 해리 S. 트루먼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본디 트루먼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이 아니었다.

 

트루먼은 4선이라는 미합중국 선거 사상 전무후무한 당선 기록을 세운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후 3선 금지가 헌법으로 굳어졌다)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당선됐는데 그의 무게감은 기실 보잘것 없었다. 무던한 상원 의원 정도로 꼽히던 해리 트루먼이 부통령 후보까지 오른 데에는 루즈벨트의 심각한 건강상 문제를 알고 있던 민주당 고위 정치인들이 “(루즈벨트에게 무슨 일이 생길 시) 트루먼은 우리가 쉽게 조종할 수 있을 것 있을 것이다.”고 짬짜미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 그런데 역사는 이 사람에게 무서울 정도의 중책을 떠맡기게 된다.

 

일례로 그는 원자폭탄 개발 계획 등 국가의 대사에 대해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뇌일혈로 사망한 뒤 대통령직을 승계하자마자 트루먼이 들은 질문은 “원자폭탄이 완성됐습니다. 일본에 이걸 어떻게 쓸까요?” 였다는데 그가 대관절 어떤 심경이 됐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뜨기 부통령에게 별안간 누구도 휘둘러본 적 없는 제우스의 벼락이 쥐어진 셈이랄까. 어쨌든 그의 치세에 원폭은 떨어지고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고 냉전이 시작됐다. 그리고 바쁜 와중에도 백악관 시계는 어김없이 돌아 1948년 대통령 선거 시기가 돌아왔다.

 

상황은 결코 트루먼에게 유리하지 못했다. 트루먼의 선임 부통령이었던 헨리 윌리스는 소련에 대한 강경책을 구사하는 트루먼에 반발했고 ‘진보당’을 창당하여 민주당으로부터 갈라져 나갔다. 또 트루먼의 인종차별 완화 정책에 발끈한 민주당 우파들도 민주당을 박차고 나갔다. 여기에 전후 고용 불안 등 문제까지 겹치면서 1946년 의회 선거에서 민주당은 상하원 모두를 공화당에 내 주고 말았다. 1948년 대통령 선거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공화당 후보는 루즈벨트와도 맞겨뤘던 토머스 듀이였다.

 

거의 모든 언론과 정치인들이 토머스 듀이의 승리를 예측했다. 여론 조사의 결과도 그를 뒷받침했다. 선거 운동이 시작할 무렵 실시된 여론 조사에서 토머스 듀이는 트루먼을 무려 13% 차이로 따돌리고 있었다. ‘해보나마나’ 한 선거라는 공론이 미국 정계를 돌아다녔고 여론 조사 업체들은 역시 ‘해보나마나’ 한 여론 조사를 중단해 버린다. 10월 중순 ‘뉴스위크’지가 전국의 정치평론가들을 대상으로 선거 결과를 물었을 때에도 거의 100퍼센트 ‘듀이!’였다. 1948년 11월 2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 전날만 해도 트루먼의 당선을 예측한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결론은 트루먼의 승리였다.

 

해리 트루먼이 1948년 11월 2일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뒤 '듀이, 트루먼을 이기다" 오보를 낸 시카고 트리뷴지를 들고 환호하고 있다.

이 기적적인 승리의 레드 카펫으로 전락한 언론이 있었다. 시카고 트리뷴. 1948년 대선 당시 트루먼도 패배를 짐작하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시카고 트리뷴은 전화통화 설문조사를 통해 중산층의 지지를 받던 공화당 출신 듀이의 당선이 확실한 것으로 보았고 “듀이, 트루먼을 이기다.” (Dewey Defeats Truman)이라는 헤드라인을 내걸 오보를 대문짝만하게 냈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다. 이 오보는 미국 역사, 정치사, 사회학, 언론학, 통계학에서 빠지지 않고 소개되는 대표적인 오보의 전형으로 역사에 남는다. 오죽하면 2007년 시카고 트리뷴은 당시의 상황을 돌이키며 이런 기사를 쓴다.

 

“(전략) (여러 차례 듀이의 승리를 예견하는 여론조사에 의한 잘못된 선입견 때문이기도 했으나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시카고 트리뷴은 수 시간 후 단행될 예정이었던 인쇄노동자들의 파업 전에 신문을 내야 했다는 것이다. 첫 기사의 데드라인이 다가오자, 동부지역의 집계까지 적잖이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편집부국장 멀로니는 헤드라인 기사 제목을 불러야 했다. 멀로니는 트리뷴의 오래된 워싱턴 소식통이었던 아서 S. 헤닝의 분석에 기대를 걸었고 헤닝의 대답은 듀이였다. 헤닝의 분석은 거의 틀린 적이 없었다. 그 외에도 라이프 지는 듀이의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내걸었다. “미합중국의 다음 대통령”이라는 글귀와 함께.
Critically important, though, was a printers' strike, which forced the paper to go to press hours before it normally would. As the first-edition deadline approached, managing editor J. Loy "Pat" Maloney had to make the headline call, although many East Coast tallies were not yet in. Maloney banked on the track record of Arthur Sears Henning, the paper's longtime Washington correspondent. Henning said Dewey. Henning was rarely wrong. Besides, Life magazine had just carried a big photo of Dewey with the caption "The next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자숙과 변명이 반반씩 뒤섞인 듯한 기사이지만 해당 신문사의 60년이 넘도록 뼈아픈 오보의 기억이 유전되고 그를 곱씹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트루먼은 자신이 낙선했다고 주장(?)하는 시카고 트리뷴을 쳐들고 환호했고 그 장면은 트루먼 개인에게나 미국 현대사에서나 가장 기적적인 승리의 증거로 역사의 전시장에 특별히 나붙는다. 곧 시카고 트리뷴의 오보는 오보 자체로 끝나지 않고 역사의 일부가 돼 버린 것이다. 그러니 두고두고 아파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언론에게 ‘오보’란 일종의 숙명과도 같다. 모든 사실을 파악하고 모든 정황이 분명해질 때 기사를 내면 좋겠지만 언론계의 숨겨진 격언처럼 “아끼다가 X되는” 경우도 많고 시간을 다투는 취재경쟁에서 다른 언론사에게 뒤져 제주 삼다수를 벌컥벌컥 들이킬 일도 비일비재하며 ‘단독’의 영예는 언론인에게 훈장 이상의 영예로 빛나며 언론인들을 유혹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다른 언론보다 더 빨리 기사를 내고 싶다는 욕망은 쉽게 오보로 이어질 수 있고 언론인은 상시적으로 단독과 오보 사이의 담장을 걸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만 숙명이란 짐으로 짊어지는 것이지 갑옷으로 둘러치는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해 오보의 출현에 대해 경각심을 잊는 순간, 시카고 트리뷴처럼 자신들의 역사적 오보를 두고두고 부끄러워하고 곱씹지 않는 순간, “뭐 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하며 자신들의 오보를 슬그머니 덮는 순간, 언론은 더 이상 언론이 아닌 거짓말쟁이 양치기 소년에 다를 바 없게 된다. 저 유명한 “아니면 말고.”를 되뇌는 양아치 이상이 아니게 된다. 자신이 파악하여 선포한 ‘사실’이 사실이 아니었을 때 대처하는 자세는 언론인의 양식의 소유 여부와 직결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1등 언론 조선일보가 보여온 양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86년 11월 16일 조선일보 1면. 김일성 사망성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1986년 늦가을, 한국은 난데없는 김일성 사망설에 휩싸였다. 개인적으로 등교하던 중 김일성 사망설 호외를 읽다가 지각할 뻔 했던 기억이 생생하거니와 ‘괴수 김일성’, 전쟁의 원흉이며 민족의 원수로서 한 세대에서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웬만하면 피하게 만들었던, 동명이인이라면 개명 신청을 해도 법원이 받아들였던 절대적 ‘악인’이 죽었다는 소식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공산당은 무찔러야 하고 의심나면 다시 보고 수상하면 신고해야 하고, 맨주먹 붉은 피로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 되면 반공 포스터에 반공 표어에 반공 글짓기에 반공 연설대회까지 반공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몸으로서 김일성이 총을 맞아 죽었다는 뉴스는 그야말로 머리를 꿰뚫는 충격이었다. 학교 가는 버스 안도 웅성거리고 있었다. "총 맞아 죽었다 카네?" "아들내미가 죽인 거 아니가?" "뭐 김정일도 연금됐다 카던데?"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모를 정보(?)의 교환부터 "야 전쟁 나면 우짜노 니 예비군 끝났나?" 하는 현실적인 우려까지 만원버스를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가져온 신문에 보면 김일성이 세상을 하직했던 것은 거의 분명했다. 휴전선 전역에서 인공기가 조기로 내걸렸으며, "열차 타고 가다가 피격 사망하셨다"고 대남방송에 나왔고, 장중한 장송곡이 연방 울리는 것이 소련 공산당 서기장 죽었을 때하고 똑같으며, 일부 북한 인민군 장교들이 '중공'으로 피신했고 군부 내에 권력 투쟁이 심각하게 진행 중이라는 눈으로 본 듯한 기사가 신문을 메우고 있었다. 그 신문이 조선일보였다. 신문 한켠에는 "세계적인 특종"을 낚았다고 자랑이 대단했다. 거기다 1983년 아웅산 테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왔던 이기백 국방부 장관까지 나서서 조선일보를 인용하며 그 기사의 신빙성을 일부 확인하고 있었다. 야 이거 진짜구나. 이 사태의 진원지는 역시 조선일보였다. “북한 김일성이 암살됐다는 소문이 15일 나돌아 동경외교가를 한동안 긴장시켰다…이 소문의 내용은 중공국가 주석 이선념이 지난달초 평양을 방문하기전에 북한군 일부에서 김의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암살기도 가담자들은 중공으로 도주했으며 북한이 중공측에 대해 이들을 돌려줄 것을 요구해 오던중 이 사건에 가담했던 나머지 일파들이 결국 김을 암살했다는 것으로 돼 있다”는 일본 동경 특파원발 보도가 1986년 11월 15일 조선일보 1면 사단 기사로 실렸고 (미디어오늘 1995.6.21) 이 기사가 ‘경마 저널리즘’을 통해 김일성 사망‘설’(說)로, 나아가 ‘김일성 사망’으로 에스컬레이트돼 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있었다. 휴전선의 대남 방송에선 김일성이 열차 타고 가다가 피격 사망했다고 나왔다는데 (정말 들었을까?) 평양 방송에서는 아무 언급이 없었다. 그리고 방문 예정이던 몽골 국가 원수가 일정을 중지한다는 소식도 없었다. 온 나라 사람들이 눈이 커지고 귀가 쫑긋해졌다. 조선일보의 기사를 보면 영락없이 죽긴 죽은 거 같은데 그렇다고 죽었다고 확신하기는 좀 애매한 상황이었다. 관건은 몽골 국가원수의 방북이었다. 그때 김일성이 뭔가를 이유로 나오지 않는다면 죽은 것이고,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빵 하고 허탈한 풍선이 터질 일이었다. 11월 18일이 왔다. 몽골 국가원수가 방북하는 날이었다. 아마 그때만큼 몽골의 국가원수에 한국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일은 저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이래 없었으리라.

 

1986년 11월 18일자 경향신문 1면. 북한 김일성 주석이 공식석상에 나타나 생존이 확인된 내용을 담았다.

 

그런데..... 김일성은 멀쩡하게 나타났다. 기차 타고 총격이고 인공기 조기고 인민군 내부 투쟁이고 뭣이고 모든 사망설은 일순간에 봄볕 받은 눈처럼 사라졌다. 도대체 그 말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누가 그런 거짓말을 지어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명도 없었고, 되레 조선일보는 "그들 수령의 죽음까지 고의적으로 유포하면서 그 무엇을 노리는 북괴의 작태"에 분노하면서 "정상적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집단"에다가 자신들의 오보의 책임을 돌렸다. 즉 자신들은 오보를 한 것이 아니고 저쪽의 거짓말에 속았다는 것이다. 대관절 ‘유일체제’ 하에서 ‘수령’의 정상적이지 못한 죽음까지 조작해서 유포한다는 것이 자신들이 그때껏 설명해 왔던 북한의 신정(神政) 체제와 양립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오불관언이었다. 그렇게 그 오보는 조용히 덮였고 부끄러움도 신속히 세월의 장막에 갇혔다. 오보의 피해자는 4천만이었지만 오보의 주창자는 “우리도 피해자였다니까.”라고 투덜거리며 바바리맨처럼 추하게 그 알몸을 덜렁거리고 있었다.

 

제 버릇 누구 못 준다고, 조선일보의 오보가 또 한 번 화제가 됐다. 원래 북한에는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 예수의 후예들이 많았다. 거기에 조선일보는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의 실무 협상을 맡았던 김혁철 국무위원회 대미 특별대표와 외무성 실무자들”을 추가했다. 또 “대미 협상을 총괄했던 김영철 노동당 통일전선부장도 혁명화 조치(강제 노역 및 사상 교육)를 당했고 김여정도 근신 중”이라고 보도했다. 그런데 이 보도가 나오자마자 김여정과 김영철이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김혁철 또한 살아 있다는 보도가 나와 조선일보를 난처하게 만들어 놓았다. 조선일보는 또 1986년 식으로 “조선일보를 골탕먹이기 위해 강제 수용소에서 데리고 나온 것”이라고 변명할지는 모르나 그러기에는 현송월이나 이영길처럼 그들이 ‘죽였다 살린‘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2019년 5월 31일자 조선일보 "김영철은 노역형, 김혁철은 총살" 기사.

 

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1등 신문’에게 우리 사회가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 주지 못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고, 조선일보가 그나마 언론의 양식을 회복하여 오보에 대한 공포감과 책임감을 가져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야말로 굴뚝이다. 그런데 그런 오보를 접하는 우리들에게도 기억해야 할 것은 있을 터이다. 반복하건대 오보의 책임은 언론이 지는 것은 언론이지만 오보의 피해자는 우리들 자신이다. 오보를 한 언론을 비난하고 조소하는 것 또한 필요하나 왜 그 오보가 나왔고, 오보에 포함된 진실과 거짓의 성분은 어느 정도인지, 오보의 배경은 무엇인지도 알아야 그 피해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2013년 8월 29일 조선일보의 현송월 처형 오보 기사.

 

 

시카고 트리뷴이 오보를 낸 것은 인쇄업체의 파업 때문에 마음이 급해졌고 워싱턴의 소식통이 엉터리 정보를 준 이유도 있지만 애초에 듀이의 압승을 예언한 여론조사가 틀렸기 대문이었다. “예측이 빗나간 가장 큰 이유는 조사 대상으로 선정한 투표자 표본이 전체 국민을 대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꾸준히 진행된 도시 집중화 현상을 고려하지 않은 채 농촌 인구를 과다하게 표본으로 삼았던 것.” (생글생글 109호, 2007년 8월 10일)이다. 즉 시카고 트리뷴이 멍청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조선일보의 북한 관련 오보의 역사는 가히 실록을 쓸 수 있을 정도다. 그 의도의 사악함이나 보도의 무책임함은 따로 주워섬길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왜 북한에서 그리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살아나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구체적인 각론이 틀렸을지언정 한때의 권력자 장성택이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음을 당했듯, 한때의 고관대작들이 자신의 실책으로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나라라는 총론까지 무시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북한이 인정한 것만으로도 1997년 당의 '주체농법'을 체계적으로 방해해 북한의 식량문제를 위기로 몰아갔다는 혐의로 서관히 당 농업담당 비서를 공개처형했고, 이후 숙청의 도구로 활용되던 사회안정성 정치국장 채문덕도 모숨을 잃었으며 그 외 여러 사람들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보는 언론의 적이고 진실에 접근하려는 수많은 노력들의 원수다. 하지만 악의와 편견이 그득한 왜곡된 뉴스부터 착각과 판단 미스에 따른 경우까지 그 종류도 다양한 오보에는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조건이 담기게 마련이고, 일단의 진실도 함유돼 있다. 오보를 낸 언론을 조소하고 비난하는 한편으로 가끔은 시선을 깊게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걸핏하면 오보를 내는 양치기 소년을 두호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거짓말쟁이 소년은 혼찌검을 내 줘야 한다. 그런데 그런 거짓말에 혹한다는 것은 산에 늑대가 산다는 것이고 양떼를 공격할까봐 경계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할 일은 두 가지 아닐까. 양치기 소년을 갈아치우든지. 그렇지 못할 바에야 그들의 외침과 주장 사이에서 무엇을 거르고 수용하고 내칠 것인지를 갈음할 눈과 귀를 가지든지.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을 비웃고 그 품성에 분노하는 것만으로는 우리 양떼를 지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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