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왜 '류큐왕국'을 오랫동안 합병하지 않았나

  • 기자명 임영대
  • 기사승인 2019.06.26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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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는 지금은 일본의 일부로서 우리에게는 휴양지, 미군 기지로 잘 알려진 곳이다. 단 오키나와라고 하면 섬 하나만 가리키는 줄 아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그 섬은 오키나와 본도(本島)고 인근의 여러 섬은 오키나와 제도(諸島)에 속한다. 그런데 과거에 오키나와의 영향력은 훨씬 넓었다. 지금의 오키나와 제도뿐 아니라 인접하고 있는 여러 제도를 모두 자기 영향 아래 둔 독립왕국으로, 일본과 구분되는 별개의 나라였다. 이 나라를 류큐(琉球), 우리 식으로는 ‘유구국’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류큐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 나라다. 일본에 의해 흡수되어 지금은 오키나와현, 몇몇 섬은 가고시마현이 되었다. 지난 6월 15일에 그 과정에 관해 쓴 기사, '중국은 왜 150년 만에 오키나와 역사 조명에 나섰을까'(시사저널, 입력 2019.06.15. 19:03 수정 2019.06.15. 22:41)가 나왔다.

이 기사는 “비슷한 시기에 왕조를 열고 활발하게 교류를 펼친 공통점을 비롯해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은 점, 서구열강에 문을 열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쳤던 사실, 일본의 침략을 받아 수백 년 지속된 왕조가 사라진 것” 등에서 류큐가 조선과 흡사한 점이 많다고 규정한다. 또한, 독립을 지키기 위한 류큐의 노력을 소개하면서 노골적인 일본의 침략과 과거에 단순한 동아시아 국제질서였던 조공, 책봉 체계를 현대의 영토권과 연결하는 중국을 성토하고 있다.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나라로서 류큐의 고난이 남의 이야기 같지 않은 게 자연스럽다. 그러면서 우리는 결국 살아남아 나라를 유지한 만큼 류큐보다는 사정이 나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위 기사에서 소개한 류큐의 역사는 약간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 아래 부분이다.

 

원래 류큐는 3개 나라로 나뉘었다가 1429년 통일 왕국을 이루었다. 이후 여러차례 일본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1854년 미국에 이어 프랑스, 네덜란드와도 수호조약을 맺었다. 조선보다 먼저 문을 열고 서구문물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1872년 일본 메이지정부에 의해 류큐번이 되었고 류큐 왕은 졸지에 일개 영주로 전락하고 말았다.

 

류큐 왕국의 성립

류큐 각 지역에서 부족국가 형태의 정치체제가 처음 나타난 건 11~12세기쯤부터다. 이러한 변화는 오키나와 본섬에서만 보인 게 아니고, 주변에 있는 여러 섬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났다. 오키나와 본섬에서 처음 왕이라 일컫는 지배자가 나타난 건 1187년이었다. 국왕의 이름은 슌텐(舜天)이라 했고, 이 왕조는 3대를 존속한 뒤 유력한 신하였던 에이소(英祖)에게 양위하여 다시 새 왕조가 5대를 이어진다.

하지만 이 시기까지 오키나와에서 강력한 통일국가가 있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슌텐 왕조, 에이소 왕조 왕들은 여러 족장을 이끄는 영도자 정도의 지위였고, 왕권은 강하지 않았다. 이 왕조들을 그저 신화시대의 전설적인 존재 정도로 보는 견해가 있을 정도이다. 왕이 있었다고 해도 왕권이 강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그래도 14세기 초가 되면 오키나와 본도에는 대충 3개의 왕국이 상호 경쟁하면서 체계를 갖추게 된다. 중국에서는 이들을 각자가 지배하는 영역에 따라 북산왕(北山王), 중산왕(中山王), 남산왕(南山王)이라고 불렀다.

삼산시대(三山時代)의 류큐

 

이들 세 나라는 모두 명나라로부터 책봉까지 받으면서 생존을 걸고 체제경쟁을 벌였고, 그 승자는 중산왕이었다. 북산, 남산을 모두 멸망시키고 중산국이 오키나와 본도 전역을 장악한 해가 1429년이었다. 하지만 대만에서 규슈에 이르는 류큐 열도 전체를 류큐 왕국이 영유하게 된 때는 그러고도 더 뒤였다. 통일 이후 두 번째 왕조인 제2차 상씨 왕조의 3대 왕이었던 쇼 신(尚真)은 지방에 거주하는 호족들을 모두 수도인 슈리에 모아 중앙집권을 강화했고, 함대를 조직하여 오키나와 주변 여러 섬을 정복하여 140여 개 섬을 지배하에 두었다. 이때가 류큐의 최전성기였다.

 

류큐의 몰락

16세기 중반을 넘어가면서 류큐는 점점 내리막길을 걷는다. 일본 상인들이 류큐가 가져온 물품을 사는 대신 직접 동남아시아에 나가기 시작하고, 명나라가 해금정책을 완화하며, 서양 상인들이 아시아 내부 무역에 끼어들면서 류큐의 주력이던 중개무역이 쇠락했다. 여기서 임진왜란이 치명타를 가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류큐에 조선 원정에 사용할 군량미를 제공하라고 명령했고, 류큐에서는 명나라로부터 질책을 받으리라고 예상하면서도 일본이 침략하지 않게 하려고 요구받은 양의 일부만 일단 보냈다.

문제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였다. 임진왜란으로 큰 손해를 본 사쓰마의 시마즈 씨는 류큐에서 그 손해를 메우려고 했다. 처음에는 정치적으로 위압해서 목적을 달성하려 했으나, 이제는 확실히 친명정책으로 선회한 류큐는 시마즈 씨의 요구를 거절하고 에도 막부가 성립되었음을 축하하는 사절도 보내지 않았다. 이에야스도 처음에는 류큐를 후대하여 명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창구로 사용할 생각이 있었지만, 류큐가 일본과의 접촉 자체를 거부하자 시마즈 씨가 승인을 요청한 대로 군사력을 동원해 류큐를 복속시키기로 한다.

1609년 3월 4일, 오랜 전국시대와 임진왜란으로 단련된 시마즈 씨의 정예병 3천 명이 류큐 왕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약해진 류큐에는 적을 바다에서 막을 수 있는 수군조차 없었다. 사쓰마에서 가장 가까운 아마미 제도가 먼저 함락되고, 죽 늘어서 있던 섬들은 차례로 시마즈군의 손에 들어갔다. 오랜 평화에다가, 그나마 존재하는 군사력은 반란을 막기 위해 수도가 있는 오키나와 본도에 몰려 있어서 전력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오키나와 본도에서는 어느 정도 저항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수도로 들어오는 항구에 포대를 쌓고, 구식이기는 해도 화포를 준비해서 일본 수군이 들어오면 격침할 준비를 해놓았다. 이를 본 일본군은 훨씬 북쪽 해안에 상륙해서 육로로 수도를 향해 진군해서 포대를 우회해 버렸다. 숫자는 류큐군이 4천 명으로 더 많았다. 하지만 숙련된 베테랑에 류큐 군사들은 갖지 못한 조총까지 보유한 일본군은 연승했다. 결국, 적이 쳐들어온 지 1달도 되지 않은 4월 1일에 쇼 네이 국왕은 화의를 맺었다. 왕자와 정승 격인 고관들을 인질로 보내는 조건이었다.

이 정도라면 조선이 병자호란에서 패했을 때와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류큐의 패배는 전혀 달랐다. 소현세자가 끌려갔어도 인조는 조선에 머물렀지만, 쇼 네이 왕은 중신 100명과 함께 에도까지 끌려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알현하고 나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 이미 류큐 왕국은 진정한 독립국으로서 가지고 있던 지위를 상실했다. 위 기사에서는 “여러차례 일본의 침략을 받으면서도”라고 하여 그 침략을 류큐가 모두 버틴 것처럼 기술했다. 하지만 그 실상은 아니었다. 류큐는 일본의 ‘단 한 차례’ 침략에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오키나와 류큐왕국의 상징으로 붉은 색이 인상적인 슈리성.

일본에 합병되지 않은 이유?

이에 대해서는 이런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류큐 국왕이 죽거나 쫓겨나지 않았고, 일본에 완전히 흡수된 게 아니지 않으냐고 말이다. 류큐의 이름을 걸고 통상도 하고 조약도 맺었으니 류큐가 독립국이었다는 견해다. 위 기사에서 “조선보다 먼저 문을 열고 서구문물을 받아들였던 것이다.”라고 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 실상을 보면 류큐는 진정한 독립국이라고 할 수 없었다. 중국에 하듯이 새 국왕이 책봉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왕 외에 대신들까지도 취임할 때마다 시마즈 씨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서를 제출해야 했다.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사쓰마는 재번봉행(在番奉行)이라는 관리를 상주시켜서 류큐 정부를 철저히 감시했다. 류큐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군대와 무기도 보유할 수 없었다. 사쓰마는 류큐의 토지 면적을 따져 토지세를 부과했고, 류큐 정부가 각 섬에 인두세 형태로 할당한 이 세금 부담이 너무 커서 섬에 사는 주민들이 스스로 서로를 죽여 세금 액수를 줄일 정도였다.

그럼 왜 일본은, 사쓰마는 류큐를 정식으로 일본 영토로 병합하지 않고 독립국의 ‘형태’는 유지하게 두었을까? 그 배경에는 류큐의 조공무역이 있었다. 류큐는 조선과 마찬가지로 중국과 조공무역을 했는데, 중국에서 조공을 받는 대가로 내주는 물품들은 귀한 사치품이었다. 쇄국정책을 택해 모든 무역이 끊긴 일본으로서는 류큐가 행하는 조공무역에서 얻는 이득이 매우 중요했다. 조공무역을 계속하려면 류큐는 일본의 일부가 아니라 중국의 조공국이어야 했다. 그래서 사쓰마는 류큐가 자신들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청나라에 철저하게 숨겼다. 그리고 류큐가 조공무역으로 얻는 이익을 착취했다.

여기에 ‘외국’인 류큐가 막부의 쇼군에게 사신을 보내고 조공을 바치는 모습을 연출하면서 막부의 권위를 높일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조선통신사도 조공을 바치러 오는 사신이라고 대내적으로 선전하던 막부가, 류큐 같은 진짜 종속국을 포기할 리 없었다. 위 기사에서 좋게 평가하는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과 수호조약을 맺고 서구문물을 받아들였다는 부분에서도 류큐의 종속성이 드러난다. 대외적으로야 독립국을 표방하며 조약을 맺었지만, 류큐는 사쓰마에 조약문을 보내 사후검토를 청해야 했다. 사쓰마에서는 문안을 수정하라고 지시했지만, 미국 측의 미동의로 실제 수정되지는 않았다.

분명 멸망 직전까지도 류큐에는 약간의 독립성은 남아 있었다. 어느 정도 자치권도 있었고, 외교권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일본에 막대한 세금을 바치며 국정 전체를 통제받는 처지였고, 그랬기에 일본 정부의 결정 한 번으로 왕국에서 일개 번으로 호칭이 바뀌었고, 600명이 되지 않는 일본 군대와 경찰에 점령당해 마지막 국왕이 도쿄로 끌려갈 수 있었다. 위에서 언급했듯 류큐는 1609년에 이미 일본에 정복당했다. 그때 완전히 망해도 이상할 게 없었을 것이나 일본이 필요해서 독립국으로서의 형식을 남겨두었던 것이고, 그 필요가 다해서 남겨두었던 형식조차 없앤 것이다.

분명 류큐가 겪은 슬픈 역사는 우리와 비슷한 부분이 있고 여기서 동병상련을 느끼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그렇다고 해도 마치 류큐가 침략을 막아내고 독립을 유지했던 것처럼 오해하게 하는 서술은 지양함이 옳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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