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은 '경술국치' 경복궁 사진이 아닙니다

  • 기자명 석지훈
  • 기사승인 2019.07.04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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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4일 뉴스톱 지면을 통해 필자의 글, 「교과서에 실린 영화 <아리랑 >사진은 '아리랑 1편' 사진이 아니다」 이 게재된 이후, 필자의 여러 지인들은 물론이고 이 글을 읽은 많은 독자들이 한국 근·현대사 관련 출판물에 실린 여러 사진자료의 고증 문제에 대한 글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요청을 해왔다. 이에 힘입어, 앞으로 약 4회 정도에 걸쳐 그간 교과서를 비롯한 여러 공식 출판물에 실려 상당한 유명세를 탄 사진들 가운데 명백하게 그 정체가 잘못 알려진 사진들 몇 가지의 고증을 바로잡는 글을 써보고자 한다.

 

벌써 한 해가 절반이 넘게 지나갔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의 이곳저곳에서는 올해가 3.1 운동이 일어난 지 꼭 100주년이라는 그 상징성 때문인지 일제강점기의 항일운동과 투쟁의 숭고함을 상기하고 아울러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조선 식민지배의 악랄함과 잔혹성 역시 되새기고자 하는 크고 작은 문화행사와 전시, 출판 등이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무척 아쉬운 것은, 이러한 여러 자료 사진들 가운데 그 출처가 정확하게 확인되거나 엄밀하게 사진의 내용이 고증된 것은 극히 드물고, 이 때문에 그간 적지 않은 오류가 확대, 재생산되어 왔다는 점이다.

[그림 1] 이른바 “경술국치” 사진으로 알려진 경복궁 근정전의 일장기 게양 모습

이러한 사례로 가장 유명한 것은 일제강점기 민족의 수난을 다루는 서적과 전시 등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단골처럼 등장하는 자료 사진 한 장([그림 1])이다. 경복궁 근정전의 어칸에 대형 일장기가 내걸려있는 사진으로, 많은 사람들이 거의 아무런 이견 없이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상징하는 사진이라고 알고 있다(2018년 8월 29일자 세계일보 기사를 비롯해 최근의 언론보도에서도 이 사진이 계속 사용된 바 있다). 아무래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조선 왕조의 법궁(法宮)으로 알려진 경복궁, 그것도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근정전에 대형 일장기가 내걸렸다는 모습 그 자체만으로도 일본의 식민지배가 시작되었던 1910년 8월의 모습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기에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실제로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물론이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출판물, 그리고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독립기념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등 한국 근현대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박물관에서도 이 사진은 거의 예외 없이 “경술국치” 혹은 “한일 강제병합”을 묘사한 사진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이들이 간과하는 사실 중 하나는 바로 경복궁 그 자체의 역사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경복궁은 그 후 거의 270여년 간 대부분 폐허인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가, 고종이 즉위한 이후 1865년부터 1872년까지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중건 대역사를 통해 새롭게 다시 지어졌다. 그런데 이렇게 새로 지어진 후 불과 20년이 흐르지 않은 때인 1883년 무렵에 촬영된 경복궁 근정전의 모습은, [그림 2]처럼 잡초가 우거지고 지붕 선도 완전히 매끄럽지 않은 채 방치된 모습이다. 어떻게 된 것일까?

[그림 2] 1883년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이 조선 방문 중 촬영한 경복궁 근정전의 모습. 현재 확인된 경복궁 사진 가운데 촬영연도가 확인된 것으로는 가장 이른 시기에 촬영된 것이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조선시대, 특히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서울에 있던 궁궐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경영 및 관리되었는지에 대해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서울의 이른바 “5대 궁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이 모두 같은 시기에 “공존”했을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즉, 조선시대 내내 이들 궁궐들이 꾸준하게 관리, 유지되고 보수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조선 시대 대부분에 걸쳐,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로 조선의 궁궐들은 오로지 왕이 기거하는 공간에 한해서만 관리가 되었을 뿐, 나머지 공간은 최소한의 관리만이 겨우 유지되는 상태로 남겨지는 것이 관례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임금이 다른 궁궐로 옮겨가는 것을 뜻하는 이어(移御)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무려 2,000건이 넘는 기사가 검색되는데, 이처럼 조선시대 내내 임금이 이 궁에서 다른 궁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고, 임금이 자리를 옮긴 후의 궁궐들 역시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방치”되다시피 하는 것 역시 매우 흔한 일이었다. 이는 궁궐이 비단 임금과 왕후, 그리고 세자 등 왕실 가족만이 있는 공간이 아니라, 매일같이 거의 수천 명에 달하는 신하들과 관료들, 그리고 내시와 궁녀 등의 하인들이 한꺼번에 기거하고 왕래하는 공간이었으며, 따라서 그 유지비 역시 매우 막대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현대에도 가령 정부 기관이 기존에 사용하던 청사에서 다른 청사로 이전하거나 부서를 이관하게 되면 기존의 건물은 전용, 불하, 혹은 철거되기 전까지 최소한의 관리만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 것과 같다. 아래의 두 사진은 임금의 마지막 이어 이후 수십 년 간 최소한의 관리만 이루어진 두 궁궐, 경희궁과 창경궁의 모습을 담은 20세기 초 사진 두 장인데, 이를 통해 당시 최소한의 관리만 이루어진 궁궐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도 충분히 짐작 할 수 있다.

[그림 3] 1901년 프랑스인 샤를 알레베크가 촬영한 경희궁 숭정전. 1829년과 1883년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고 1860년 이후 국왕이 거주하지 않아 40년 넘게 방치되어 있었다. 내부의 의장재와 현판까지 전부 뜯어내고 건물의 골격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특히 고종 시대에는 궁궐의 부지 대부분이 농지로 개간되고 양잠을 위한 뽕나무가 대거 식수되면서 궁궐의 기능을 사실상 상실했고, 이 때문에 한말 외국인들의 기록에는 “뽕나무 공원” (Mulberry Park) 또는 “뽕나무 궁전” (Mulberry Palace) 등의 이름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림 4] 잡초가 무성한 채 방치된 창경궁 명정문 일곽의 모습. 1902년 일본인 건축학자 세키노 타다시 (關野 貞) 촬영. 창경궁에서는 1834년 이후 국왕이 거주하지 않았고, 1876년에 마지막으로 일부 전각에 수리가 이루어진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전각들이 쓰임새를 잃고 방치되어 있었다.

 

퍼시벌 로웰의 1883년 경복궁 사진으로 다시 돌아가보면, 문제의 사진 속 경복궁이 퇴락한 모습으로 보이는 것도 로웰이 이 사진을 찍었던 당시 경복궁이 궁궐로서 사용되지 않은 지 거의 7년이 경과했기 때문이다. 1876년 11월 4일, 내전(內殿), 즉 임금의 거처 공간인 강녕전과 교태전을 비롯한 15채의 건물과 부속채가 대규모 화재로 전소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하필이면 이는 1873년 12월에 발생한 두 차례의 화재로 불타 없어진 이들 건물들을 1875년 5월에 다시 지은 지 고작 1년 6개월 만에 발생한 것이었다. 세 차례 연거푸 화재가 발생한 상황에서 기존의 무리한 경복궁 공역으로 국고가 바닥나자 고종은 곧바로 경복궁을 떠나 9년 뒤인 1885년 1월 2일까지 창덕궁에서 기거하게 되었는데, 퍼시벌 로웰은 바로 이 시기에 경복궁을 찾아 사진을 남긴 것이다.

 

이처럼 경복궁은 고종 시기에 중건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쓰인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사용과 방치를 반복했다. 그리고 1895년 10월 8일 경복궁 후편의 별궁인 건청궁 옥호루에서 왕비 민씨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다시 4개월 뒤인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하는 이른바 아관파천이 벌어지면서 경복궁은 주인 없는 궁으로 전락해버렸을 뿐 아니라, 경술국치 때까지 특별한 허가 없이는 일반인이 관람하는 것 역시 불가능한 금단의 공간이었다. 즉 1896년부터 1910년까지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경복궁에 들어와 전각들을 관람한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상황을 생각해 볼 때 1910년 경술국치 당시 일본이 말 그대로 “구중궁궐” 깊숙한 곳에 위치해 대다수 사람들은 볼 기회조차 없었던 근정전에 일장기를 내걸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말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문제의 사진 ([그림 1])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면, 비록 여러 차례의 복사 떄문에 화질이 상당히 나빠진 경우가 많지만, 경술국치 시점까지 14년 동안 방치되었던 궁의 모습이라고 보기에는 주변 환경이 상당히 깔끔한 모습이라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근정전의 월대와 계단이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고, 주변에 있는 박석을 깐 바닥 역시 잘 정비되어 있는데, 이는 1910년 당시 14년 넘게 방치되었던 궁의 상태라고 보기 어렵다.

 

사실 이 사진은 경술국치 때가 아니라, 그로부터 5년 뒤인 1915년 10월 1일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 개막식 때 촬영된 것이다. 공진회는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여 이른바 시정(施政)을 시작한 지 5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고, 그 5년 간 일본이 조선을 얼마나 발전시키고 “함께 진보”(共進) 했는가를 보여주겠다는 취지로 개최된 종합 박람회인데, 이때 이를 위해 경복궁의 상당 부분을 철거해 버리고 그곳에 각종 박람회장 시설과 건축물들을 대대적으로 건설했던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당시 경복궁 근정전과 그 주변 행각 및 전각들도 공진회 행사장의 일부로 활용되었던 사실은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근정전은 당시 공진회 개막식을 비롯한 각종 행사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사람들은 사진에 날짜가 적힌 것도 아니고, 현수막 같은 것도 없는데 어떻게 이 사진의 촬영 일자를 정확히 알 수 있는지 의구심을 표할 것이다. 사실 이 사진의 촬영 일자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이 사진의 원래 판형 ([그림 5])에는 원래 비행기가 찍혀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많은 책에서 사진의 원본 판형을 제대로 소개하는 일 없이 근정전과 일장기 부분 사진만 잘라내어 소개했기 때문에 이 사진의 촬영 일자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놓치게 된 것이다. 

[그림 5] “근정전 일장기” 사진의 원래 판형. 1915년 10월 1일 조선물산공진회 개막식을 축하하기 위해 있었던 비행기 “미에 호”의 시범비행의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대부분의 출판물에서 사진에 들어있는 비행기를 의도적으로, 혹은 알지 못한 채 잘라 싣게 되면서 그간 이 사진의 정체가 잘못 알려져 왔다.

문제의 비행기는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의 요청으로 일본 제국비행협회가 조선물산공진회 개막을 축하하기 위해 보낸 미에 호 (三重號)라는 비행기였다. 이 비행기는 당시 일본 사법대신이었던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의 아들이자 일본에서 유명한 파일럿이었던 오자키 유키테루 (尾崎行輝, 1888 - 1964)의 소유였는데, 10월 1일의 공진회장 상공의 시험 비행 역시 그가 직접 운전한 것이었다. 비행기의 이름은 오자키가 그의 고향이었던 미에 현(三重 縣)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오자키는 1915년 9월 21일 교토를 출발해 조선으로 23일에 들어올 예정이었지만, 오는 도중 갑작스레 위병(胃病)으로 잠시 몸져 누었다가 25일에야 조선에 들어올 수 있었다. 오자키의 시범비행은 공진회라는 큰 행사와 맞물리면서 당시 세간의 관심을 상당히 끌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오자키가 입국한 이후 시범비행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관련 기사를 보도한 『매일신보』는 “내지 모 신문기자”의 말을 인용해, 오자키의 시범비행을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의 근두운 타기에 비유할 정도였다.

[그림 6] 1915년 10월 1일 공진회 개막식에서 비행기 시범비행을 수행한 파일럿 오자키 유키테루 (尾崎行輝, 1888 - 1964).

 

그렇다면 과연 이 문제의 사진이 “경술국치” 때의 사진으로 알려진 이유는 무엇일까? 일제시대에 간행된 공진회 관련의 출판물 한 두 가지에 실렸던 것을 제외하고, 이 사진은 그 후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진이 다시 세상에 소개된 것은 1970년대 말로 보인다. 강화도 조약 체결 100주년을 맞은 1976년을 전후하여 국내에서 이른바 “개화 100년”을 기념하는 근대사 관련 서적 상당수가 간행되기 시작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인기를 끈 것은 동아일보사에서 간행한 대형 사진첩인 『사진으로 보는 한국 백년』 시리즈 (전 4권, 1978 - 1980, [그림 7])였다. 당시 판매가 3만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에도 불구하고 각계에서의 호응이 매우 좋아, 양장본 사진첩으로는 국내에서 거의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판매고를 기록, 1994년까지 계속해서 재판이 발행되었을 정도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사진으로 보는 한국 백년』 은 한국 근대사 관계의 사진들을 한꺼번에 주제별, 시대별로 묶어 낸 책으로서는 최초였기 떄문에, 이 책에 포함된 사진자료들은 그간 수많은 다른 역사 관련 서적이나 신문, 잡지 기사, 심지어는 교과서나 국가기록원 자료실 등 정부의 공식자료에까지 이용되는 등 그 파급력이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진첩은 역사 전공자나 전문가들 없이 순전히 동아일보사의 편집부가 제작한 것으로, 제대로 그 사진 내용의 고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게다가 '최초', '독점'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신문사 편집부가 제작한 사진집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책에서 최초 소개된 사진들 대부분의 신빙성은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 아무래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

 

바로 이 『사진으로 보는 한국 백년』의 제 1권 114쪽에 이 사진이 다시 소개되면서부터 이 사진이 “경술국치”를 담은 사진이라는 오류가 공고해졌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 사진이 최초로 실렸을 때에는 그 사진의 판형이 잘리지 않은 온전한 사진이었고, 그 설명문 역시 그 어디에도 이 사진이 경술국치가 일어난 바로 그 날의 사진이라고 적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림 7] 동아일보사 편, 사진으로 보는 한국 백년 (1) (1978)

 

“10. 근정전에 걸린 일본기: 합방이 되자 일인들은 재빨리 경복궁 근정전에 그들의 국기를 내걸고 주인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근정전 위를 날고 있는 것은 일군(日軍) 비행기 삼중호(三重號)다.”

 

이렇게 애매모호하게 쓰여있는 사진 설명문 때문에 많은 이들은 이 사진을 “경술국치” 그 날에 촬영된 사진으로 착각하게 되었고, 결국 이렇게 발생한 오류가 수십 년 동안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반복되어 온 것이다. 이미 이 오류에 대해서는 지난 2010년에 역사연구자인 이순우 (現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선생에 의해 그 문제가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이 오류가 정정되지 않고 계속해서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은 실로 통탄스러운 일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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