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흥적 방곡령' 참사가 준 교훈...이기려면 냉철해야 한다

  • 기자명 김형민
  • 기사승인 2019.07.11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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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이름에는 항렬이 있어서 어렴풋하게나마 그 족보를 짐작케 하는 경우가 있다. 김씨나 이씨 같이 흔한 성은 가늠하기 쉽지 않지만 좀 드문 성의 경우 이름 두 자가 같은 사람들을 만나는 게 드문 일이 아니다. 조선 말기 양주 조씨 가문의 병(秉)자 항렬처럼.

그 중 조병갑은 한국 역사의 악역으로 유명하다. 고부군수로 부임해서 온갖 패악질을 다 벌이고 사람들 피를 짜내다가 동학 농민군의 봉기를 유발시켰던 그 사람이다. 그 사촌형으로 조병식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조병갑보다 한 수 위의 탐관오리였고 벼슬도 조병갑과는 사이즈와 그레이드가 달랐던 사람이다. 민비를 홀렸던 무당 진령군과 의남매를 맺고 누님이라고 부르고 다닐 정도로 정치적 감각(?)도 탁월했으며 만민공동회에서 다섯 놈의 역적(五凶)이라 지목될 정도의 악당이었다.

그런데 조병갑과는 달리 조병식은 탐관오리로 기억돼 있지 않고 되레 긍정적인 이미지를 휘감고 있다. 국사 시간에 졸지 않은 사람은 그의 이름 뒤에 따라 붙는 한 단어를 이미 떠올리고 계실 것이다. ‘방곡령’(防穀令).

EBS 화면 캡처.

방곡령은 개항 이전 조선 시대에도 있었다. 지방관들이 관할 지역의 곡식 유출을 막기 위해 수시로 내리던 행정 명령이었다(한양의 쌀값 걱정을 해야 하는 중앙 정부는 이 방곡령을 제한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개항 이후 방곡령은 그 성격이 바뀌었다. 일본은 한국을 식량 공급지로 간주했고 개항장 주변에 파고든 일본인들은 쌀이며 콩이며 하는 곡식들을 긁어 모았다. 당연히 해당 지역의 곡식 값이 천정부지로 뛰었고, 소작 농민들은 농사를 실컷 짓고도 생으로 배를 곯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래서 조선의 지방관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방곡령을 발동하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이 1889년, 위에 언급한 함경 감사 조병식의 방곡령이었다.

조선 정부는 조일통산장정 개정을 통해 외국에 대해서도 방곡령을 선포할 권리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런 단서 조항 하나가 붙었다. “조선 정부나 지방관은 방곡령 실시 1개월 전에 미리 예고한다.”

1889년 함경도에는 흉년이 들었고 가뜩이나 그리 풍요롭지 못했던 함경도 사람들은 반 넘어 배를 곯았다. 그 와중에 개항지 원산을 중심으로 진을 치고 있던 일본인들은 곡식을 바리바리 반출하고 있었으니 방곡령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곳곳에서 일본인들이 두들겨 맞고, 제주도에서는 곡식 반출을 둘러싸고 민란까지 터질 지경이었다. 조병식은 마침내 방곡령을 내린다.

굶주린 백성들을 생각해서였다기보다는 일본 상인들을 가로막고서 대신 자신이 콩 장사로 재미를 보려 했다는 설도 있지만 넘어가자. 조병식은 꽤 단호하게 방곡령을 밀어부쳤다. 그는 1889년 10월 24일(음력 10월 1일)을 기점으로 방곡령을 선포하고자 했고 그 한 달 전에 서울 통리아문에 보고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통리아문의 외무독판 (외무장관 격) 민종묵은 이를 느릿느릿 처리하면서 일본 공사에게 11월 22일 이후 방곡령을 실시하겠다고 통보했는데 더 웃기는 건 이를 함경감사 조병식에게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당연히 조병식은 자신이 보고한 날을 기점으로 방곡령을 선포했고 심지어 요소 요소에 공권력까지 배치해 곡식의 유통을 차단시켰다. 이는 단순한 행정 명령을 넘어서 일본 상인들의 전횡에 맞선 조선인들의 상권 내지 생존권 수호 투쟁과도 맞물려 있었다. “일본 상인들을 끼고 장난치는 자들을 밝혀내서 이름을 보고하라 하였고 죄가 큰 자는 목을 매달고 가벼운 자들은 유배 보낸다는 사실을 명심케 하라.” (일안-日案, 고종 26년 11월 21일조)는 명령이 떨어질 정도니 일본인들에 대한 감정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은 즉각 반발했고 예의 “1달 전 통보” 규정을 어겼다고 대들었다. 1달 전 미리 통보한다는 조항은 의무 조항이 아니었고 일본도 방곡령은 상대국의 권리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의 실수를 놓치지 않는다. “조선은 예고 기간 내에 이를 실시했으니 즉각 철회하라. 또 조선은 아국 상민이 ‘입을 수 있는’ 피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파고들었다. 덜떨어진 외무독판 민종묵은 허둥지둥 조병식에게 방곡령을 거두라는 명령을 내렸고 나름 고위직을 지내고 중앙에 줄도 있었던 조병식이 뻗대는 기세를 보이자 조선 조정은 3개월 감봉에 처한 뒤 아예 강원도 감사와 자리를 바꿔 버렸다.

한편 일본은 이 배상 문제를 철저하게 벼른다. 조선 사람들은 금새 까먹었지만 일본인들은 이 방곡령 사건을 ‘청일전쟁 이전의 최대 사건’으로 이를 빌미로 무력까지 행사할 분위기를 조성한 뒤 다시 청구서를 들이민다. 방곡령 후 3년이나 지난 즈음이었다. 그런데 역시 모지리 외무독판 민종묵은 이렇게 긴 시간이 지나서 무슨 배상이냐고 펄쩍 뛰면서도 일본 상인들의 피해가 있었음을 인정함으로써 또 한 번의 패착을 둔다.

방곡령은 독립국가의 권리였으니 최악의 경우라도 사전 유예 기간이 어긋나면서 일어난 피해만 배상하면 되는 것이었지만 일본 상인들의 피해를 인정한 이상 그 청구서 금액은 기하급수로 늘었다. 배상금 청구를 위해 한양이나 일본을 돌아다닌 여비까지 청구돼 있었다. 결국 조선은 이 배상금을 물어내고 말았다. 그리고 독립국가로서의 당연한 권리였던 방곡령도 유야무야 황사 비 맞은 채소처럼 누렇게 시들었고 조선 정부는 더욱 전전긍긍, 일본은 기고만장의 길을 걷게 된다.

방곡령처럼 지극히 정당하고 합법적이었던 조치가 일본에 의해 되치기당하는 모습을 보면 좀 서글프기까지 하다. 조병식의 의도가 무엇이었건 그는 방곡령 선포 시 꽤 의연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일본인들이 “감사를 갈아치우지 못하고는 일이 되지 않겠다.”고 탄식할 만큼. 하지만 그는 중앙 정부와 긴밀히 연계하지 못했고 중앙 정부는 헛손질 끝에 카운터를 맞는다.

가장 문제는 ‘준비’가 없었다는 점이다. 방곡령을 선포하는 것은 좋았고 일면 통쾌하기까지 했지만 일본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 이쪽에선 일본에 어떻게 나갈 것인지, 요즘 말로 ‘플랜 B'는 어떻게 할 것인지, 무슨 논리로 반박하고 어떤 근거로 공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3년 뒤에야 이게 무슨 짓이오.” 하는 풀죽은 항변만 난무할 뿐이었다.

jtbc 화면 캡처

방곡령이 선포되던 130년 전의 조선과 우리를 비교할 수는 없다. 또 오늘날의 정부와 조선의 정부를 갖다 대면 서치라이트와 반딧불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일본이 웃기는 도발을 감행할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전쟁 불사를 협박하던 일본인들 앞에서 130년 전의 조선인들이 드는 공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터이다. 더구나 일본인들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면서 “일본인들을 끼고 장난치는 자들 가운데 죄가 크면 목매달고 가벼우면 귀양 보낸다.”고 말은 잘하던 조선 관리들을 오늘날 대한민국 정부에 갖다 댈작시면 모욕죄 혐의를 쓸 수도 있으리라.

그래서 나는 기대한다. 민간 차원의 감정싸움과 팔뚝질을 동원할 것 없이, 우리 정부 차원에서 냉철하고도 통쾌하게 아베의 턱에 원투 펀치를 날려 주기를. “그래? 그럼 이건 어떻게 생각해?”하면서 뭔가를 코앞에 들이밀어 아베가 스미마셍을 부르짖게 만들기를. (그게 외교적 방안이든 경제적 대응책이든)

이건 일본 정부가 걸어온 싸움이고 이에 대응하는 건 일단 '의병‘이 아니라 ’관군‘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민간 부문이 나서기 시작하면 제대로 된 전쟁도 어렵게 되거니와 돌이키기 어려운 상처를 남기기 십상이다. 의병 정신이야 넘치게 훌륭하지만 임진왜란 때 조선 정부가 필사적으로 한 일은 의병을 정규군으로 편성하는 일이었다. 나라와 나라가 싸울 때 중심이 되는 건 그 나라 정부일 수 밖에 없고, 또 그래야 국력이 발휘되는 것이다. 민간의 분노는 뜨거울지는 모르나 파편적이며 냉철함을 기대하기 어렵다. 참고로 조선 말기와 구한말 일본은 ’조선인의 분노‘를 아주 적절히 이용했다. 임오군란 때도 그랬고 방곡령 때도 그랬다.

조병식같이 대책없이 뻗대지도 않고, 민종묵같이 멍청한 실수도 저지르지 않는 대한민국 정부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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