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이우식 선생, 조선어사전 편찬에 수십억원을 기부하다

  • 기자명 정재환
  • 기사승인 2019.07.15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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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여름, 주시경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후 말모이 작업은 중단되었다. 1915년 최남선은 광문회에 계명구락부를 결성하여 조선어사전 편찬을 재개했지만, 결실을 보지 못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일경에 쫓긴 김두봉은 상하이로 망명했고, 1920년 이규영마저 세상을 떠났다. 주시경이 시작한 말모이 편찬은 성난 바람과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돛단배마냥 막막한 바다 위를 표류했다.

 

물론 조선인들의 사전 만들기가 완전히 중지된 것은 아니었다. 1927년 문일평, 오세창, 윤치호, 이능화, 최남선 등이 주도했던 계명구락부가 광문회의 사전 원고를 인수하여 최남선의 책임 아래 작업을 진행했다. 계명구락부의 사전 편찬에 거는 사회의 기대가 컸지만, 양건식, 변영로, 정인보, 최남선 등이 실무에서 물러나고, 1929년 이윤재, 이용기, 한징마저 하차하여 사전 편찬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사전을 만들어야 한다는 조선인들의 절박함은 주시경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활동하고 있던 조선어연구회에 의해 다시금 시동이 걸렸다.

 

1929년 4월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극로가 조선어연구회에 들어왔다. 이극로는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경제학 박사가 왜 조선어연구회의 회원이 되었을까?

이극로 선생

1912년 마산의 창신학교를 마친 이극로는 서간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향해 먼 길을 떠났다. 평북 창성에서 아침밥을 먹을 때 일행 중 한 명이 고추장을 달라고 했는데 집주인이 고추장이란 말을 못 알아들었다. ‘고추장’이란 이름을 몰랐다. 어찌 같은 조선 사람이 고추장을 모른단 말인가? 고추장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창성지방에서는 고추장을 ‘댕가지장’이라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극로는 생각했다.

 

사투리 때문에 고추장도 서로 통하지 않으니 참으로 답답하다. 같은 조선 사람들끼리 쓰는 말부터 한가지로 통일해야 한다!

 

이극로는 중국과 독일에서 유학하는 동안 민족을 일으키기 위해 언어를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어란 단순히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이 아니고 언어에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 정신과 사상이 담겨 있다. 민족과 언어는 운명공동체다. 피히테는 언어를 보존하는 민족은 살아남고 언어를 보존하지 못하는 민족은 사라진다고 했다. 이극로는 사라질 위기에 놓인 조선어와 조선 민족을 지키기 위해 좌고우면하지 않고 언어 운동에 뛰어들었다.

 

1935년 조선표준어사정회의 때의 조선어학회 회원들.

 

1929년 10월 31일 오후 7시 조선교육협회에서 열린 한글날 기념식에서 조선어연구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었고, ‘사회 각 방면의 인사’ 108인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조선어연구회 회원을 비롯해 김두봉, 김법린, 김성수, 김윤경, 김활란, 박승빈, 박희도, 방정환, 백관수, 변영로, 송진우, 안재홍, 양주동, 유억겸, 유진태, 윤치호, 이광수, 이극로, 이병기, 이은상, 장지영, 정인보, 조만식, 주요한, 최린, 최현배, 허헌, 홍명희 등 낯익은 이름들이다. 정치·사회·교육·문학·언론 등 다방면의 인사들이 사전 편찬에 뜻을 함께 했다는 것은 사전을 만드는 것이 일제의 통치 아래에서 민족의 정신을 지키는 대사업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사전편찬취지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낙오된 조선 민족의 갱생할 첩경은 문화의 향상과 보급을 급무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요, 문화를 촉성하는 방편으로는 문화의 기초가 되는 언어의 정리와 통일을 급속히 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를 실천할 최선의 방책은 사전을 편성함에 있는 것이다.

 

낙오된 조선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 백성이 된 조선인들을 뜻하고, 갱생할 첩경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니 이는 곧 독립을 뜻한다. 표현만 달리 했을 뿐이지 3.1운동 때 나온 독립 선언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이들은 독립의 지름길이 문화의 기초가 되는 언어를 정리하고 통일하는 것이라 선언하면서 그 최선의 방법이 사전을 만드는 것이라 했다. 사전을 만듦으로써 민족어를 보존하고 문화의 기초를 세워 독립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발기인 108인 중 권덕규, 최현배, 박승빈, 유억겸 등 21인이 편찬회 위원으로 참여했고, 이중건, 이극로, 최현배, 신명균, 정인보, 이윤재 등이 실무를 담당하는 상무 위원이 되었다. 생전의 주시경이 간절히 꿈꾸었던 말모이 편찬을 위한 채비는 끝났고, 돛이 올랐다. 문제는 돈이었다. 편찬 실무를 담당한 이들의 인건비뿐만 아니라 편찬 공간, 필요한 사무용품 등등 돈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1928년 이후 조선어 연구회는 경성부 수표동 42번지 조선교육협회회관에서 단칸방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고, 실질적으로 사전 편찬 업무를 책임지고 있는 조선어연구회의 구성원들은 조선어와 한글밖에 모르는 고지식한 학자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편찬회의 활동을 경제적으로 지원한 것은 사전편찬이 민족 사업이라는 데 공감하고 있던 사회각계의 민족 지사들로 구성된 후원회였다.

 

1935년 경 이극로의 노력으로 탄생한 후원회에는 이우식, 김양수, 장현식, 김도연, 이인, 서민호, 신윤국, 김종철, 설원식, 윤홍섭, 민영욱, 임혁규, 조병식 등 14인이 참여하였고, 조선어학회(1931년 조선어연구회에서 개명)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1935년에는 정세권이 화동 129번지의 2층 건물을 학회에 기증하여, 학회는 처음으로 독립된 건물의 주인이 되었다. 건물주가 조물주보다 높다는 농담도 있지만, 건물주가 되어 경제적으로 성공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비로소 사전 편찬에 전념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우식 선생.

1936년 조선어사전편찬회로부터 사전 사업을 모두 넘겨받은 조선어학회는 3년 계획으로 사전 편찬에 박차를 가했다. 사전 편찬을 위해 긴급히 사용할 예산으로 이우식이 1만 원을 기부했으며, 후원회는 1936년부터 1939년까지 1만 원을 기부했다. 전술했듯이 이우식은 혼자서 1만 원을 기부했다. 당시 1만 원! 지금이라면 어느 정도 되는 돈일까? 일제강점기 때 화폐 가치를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는 것은 기준을 잡기가 쉽지 않다.

 

1920년대 후반 경성방직 여공의 한 달 임금이 21원이었다고 한다. 당시 21원을 요즘 근로자 임금 2,000,000원으로 환산한다면 1만 원은 10억 정도가 될 것이다. 1930년대 소 값으로 보면 어떨까? 1933년 4월 소 한 마리 값은 72원 정도였는데, 2016년 5월 음성군의 한 농협 축산물 공판장 경매에서 낙찰된 한우 최고가가 1390만 원이었다고 하니, 평균 천만 원으로 치면, 72≒1,000,000이고 10,000≒1,388,880,000이다.

 

최근 음성군의 한 농협 축산물 공판장 경매에서 낙찰된 한우 중 최고가는 1390만원이었다. 경차인 기아자동차의 모닝(915만~1480만원)을 살 수 있는 큰 금액이다.
- 옥천향수신문, 2016.5.26. 「소 한 마리가 경차 한 대 값」

 

주택 가격으로 보면 어떨까? 동아일보 1940년 6월 6일 보도에 따르면, 당시 경성에는 주택 한 채 가격이 평균 칠팔백 원이고, 천원을 넘어가는 것도 있었다. 그렇다면 1만 원은 주택 10채 값이니 요즘 서울 아파트 5억 원짜리 10채로 환산하면 무려 50억 원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우식이 기부한 1만 원은 요즘으로 치면 10~50억 원 정도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참고문헌

심지연, 『김두봉』 

최경봉, 『우리말의 탄생』

조선어학회, 『한글』 31 

박용규, 「남저 이우식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정해동, 「선친과 그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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