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는 유사역사가가 아니다

  • 기자명 이문영
  • 기사승인 2019.07.22 08:5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사역사학은 사이비, 엉터리 역사를 주장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무엇이 엉터리이고 거짓인가를 판별하는 방법은 역사학적인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로 판별하게 된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본 지면의 “유사과학이 ‘과학’이 아니듯, 유사역사학은 ‘역사학’이 아니다”에서 이미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끊임없이 반론이라고 올라오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유사역사학이라는 용어가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만든 용어, 혹은 만든 용어를 원용한 것이라는 엉터리 반론이고(단 한 번도 주장 이외의 증거가 제시된 적이 없다), 다른 하나는 현재는 인정되지 않는 주장이 유사역사학이라는 기상천외한 주장이다. 첫 번째 반론은 필자의 졸저 <유사역사학 비판>에서도 몇 쪽에 걸쳐서 상세히 설명한 바 있으나 반론이라고 내놓는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으니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는지도 알지 못하고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유사역사학이란 pseudohistory의 번역어이다. 일제나 조선총독부 같은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두 번째 반론은 이런 주장으로 대변된다.

“그러면 신채호도 유사역사가냐?”

이 주장은 이렇게 발전하기도 한다.

“식민사학자들이 신채호도 유사역사가라고 매도한다!”

필자를 포함해서 그 어느 역사학자도 신채호를 유사역사가라 부른 적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쉽게 혹하니까 선전선동을 하는 것이다.

역사학자가 신채호를 또라이, 정신병자라 불렀다고 선전하는 것도 매우 좋아하는데, 우선 출전이 나오지 않는 일방적 주장이다. 논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유사역사학 쪽 주장 이외의 주장도 없다. 또한 이 말을 했다고 하는 사람은 뉴라이트 쪽 학자로 역사학계의 주류에 있는 사람도 아니며, 오히려 역사학계에서는 심하게 배척하고 있는 인물이다. 또한 신채호를 모욕적으로 호칭했다고 해서 그것이 신채호를 유사역사가로 규정하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실체가 없는 선전선동만 난무하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와 그의 저서 조선상고사.

 

역사학계의 신채호 평가

그럼 역사학계에서는 신채호를 어떻게 평가할까? 근대역사학의 시조로 평가한다. 한영우 교수는 민족주의 사학이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신채호에 의해 성립한다고 설명했으며, 다른 대부분의 역사학자들도 근대 역사학은 박은식과 신채호에 의해서 1908년 경에 성립했다고 보고 있다. 1908년은 신채호가 <독사신론>을 내놓은 해이다.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에서 조동걸은 이렇게 말한다.

 

<독사신론>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된 것이지만 당시의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한국 근대사학사에서 크게 주목되어야 할 글이다. 근대사학의 방법을 개척했다는 측면에서, 또 일제 식민사학의 침투를 비판하면서 민족사학의 방향을 수립했다는 측면에서 그때까지 계몽주의사학의 한계를 극복한 그야말로 신론(新論)인 것이다. (중략) 역사서술에서 민족을 발견하고 있는 것은 <독사신론>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중략) 그렇게 보면 근대사학은 신채호의 <독사신론>과 황의돈의 <대동청사>에 의해서 성립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신채호는 한국 역사학에서 중차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같은 책에서 박찬승은 이렇게 신채호의 사학을 설명한다.

 

신채호사학은 박은식사학과 함께 한국사학을 근대적인 학문으로 성립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것은 그의 역사학이 역사관의 측면에서 주자학적 명분론, 정통론, 존화사대주의적 세계관, 순환사관 등 중세적인 역사관을 극복하고 근대적 합리주의, 근대적 세계관, 순환사관 등 근대적인 역사관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또 역사이론적인 측면에서도 자료의 해석과 역사서술에서 객관성·사실성·체계성·종합성 등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사학을 근대적인 역사과학으로 끌어올리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평가가 역사학계가 신채호에 대해서 내리는 주류 관점의 평가이다. 뉴라이트 학자가 객석에서 아무렇게나 지껄인 이야기를 침소봉대하여 역사학계 전체의 관점인 것처럼 호도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유사역사가들은 입만 열면 역사학자들을 식민사학자, 친일파라고 욕을 하지만 역사학계의 거목 중 하나인 이기백은 남강 이승훈 집안으로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에서 함석헌 밑에서 공부를 했다. 이기백의 어린 시절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바로 신채호와 함석헌이다.

이기백은 <한국사 시민강좌> 제4집 ‘학문적 고투의 연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역사책으로는 신채호 선생의 <조선사연구초>를 열심히 읽었는데, 어려워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중에서도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 사건’만은 감동깊게 읽었으며, 고구려의 멸망과 북진정책의 좌절을 한스럽게 생각했다. 그리고는 <성서조선>에 연재되던 함석헌 선생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읽으면서 역시 같은 감명을 받았다. 하나는 낭가사상이라는 민족의 고유전신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이해하였고, 다른 하나는 도덕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이해한 것이었다. 그러다 그 둘이 모두 만주라는 땅에 대한 민족적 향수를 전하여 주는 데는 차이가 없었다. 나의 우리 역사에 대한 이해는 이 두분 선생의 글로부터 이끌리었다고 할 수가 있다.

 

흑백논리를 벗어나야

유사역사가들의 큰 문제점은 흑백논리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들은 신채호가 한 말을 금과옥조로 알고 그것에서 벗어나면 식민사학이 된다는 흑백논리를 가지고 있다. 신채호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역사 연구를 병행했다. 그가 볼 수 있는 자료에는 한계가 있었고, 시대도 그를 학문에만 매진하게 도와주고 있지 않았다. 당연히 그의 주장 중에는 오늘날 잘못된 것들이 있으며 학문이라는 것은 그런 잘못된 부분을 보완하고 수정하면서 발전하는 것이다. 유사역사가들은 강단의 식민사학자들이 이병도의 학설을 하나도 수정하지 않고 붙들고 있는 것처럼 자꾸 거짓말을 하지만, 실제로는 이병도의 학설 역시 엄청나게 많은 부분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유사역사가들은 신채호의 주장 중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나타나면 식민사학이라고 흑백논리를 들이대고, 이병도의 주장 중 받아들이는 것이 있으면 역시 식민사학이라는 흑백논리를 들이댄다. 이런 식이라면 학문은 전혀 발전할 수 없는 고정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유사역사학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민족주의의 열풍 속에서 세계 각국에서 발현되기 시작한 것이며 일본제국은 20세기 초에 투라니즘과 같은 유사역사학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1960년대부터 발현해서 1970년대를 거치며 증폭되었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유사역사학 비판>에서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유사역사학이 태동도 하기 전에 살았던 신채호가 유사역사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앞으로는 신채호를 역사학계에서 유사역사가라고 한다는 등의 거짓 선전선동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신채호는 그렇게 유사역사학의 방패막이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우리 역사학의 소중한 사람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의 이슈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