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들이 고안한 '양 없는' 양고깃국, 양갱으로 변신하다

  • 기자명 김현경
  • 기사승인 2019.08.09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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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갱의 원형을 찾아서> 시리즈

한국사를 살펴보면 중국으로 유학을 갔던 유명한 승려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왕오천축국전』을 지은 혜초는 당나라로 건너가 불도를 수행하고 천축국을 순례하였던 인물이다. 의상과 원효가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길에 원효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어 유학을 포기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고려시대의 승려인 대각국사 의천도 송나라로 유학을 다녀온 바 있다. 그런데 이처럼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승려들이 한반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반도로부터 불교가 전래된 이래로 전국적으로 신앙이 확산되었던 일본에서도 당연히 선진적인 불교 사상과 학문을 접하기 위해 많은 유학승들이 중국으로 향했다. 일본 승려 엔닌(圓仁)이 당나라에 들어가서 장보고에게 편지를 보냈고 장보고의 배려로 여행허가서를 발급받았다는 일화는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일본 승려들의 중국 유학은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대륙을 차지했을 때, 몽골이 중원에까지 진출하고 대제국을 수립했을 때, 그리고 주원장의 명나라가 세워졌을 때에도 꾸준히 이어져 왔다. 특히 12세기 후반부터는 중국에서 선종 불교를 심도 있게 학습하고 일본으로 돌아오는 선승(禪僧)들이 늘어났다. 무사 정권인 가마쿠라 막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막부 집권층이 선종 불교에 귀의하여, 선승들 중에는 집권층의 후원을 받아 명성을 떨치고 교세를 확장하는 승려도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요사이(榮西, 에이사이로도 읽음)인데, 막부의 수장인 쇼군의 비호를 받아 교토에 겐닌지(建仁寺)라는 절을 세우고 선종의 교세를 흥하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사이가 12세기 말에 송나라에서 돌아오면서 차(茶) 종자를 가져와 일본에서 본격적인 차 재배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전에도 차는 일본에 전래되어 있었지만 일부 귀족들만 즐기던 차를 무사를 포함한 다양한 사람들이 소비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바로 요사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요사이는 송나라에 있을 때 말차(抹茶)를 마시는 방법을 터득하였는데, 그가 지은 책 『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라는 책은 차를 마심으로써 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관리하는 내용을 적고 있다. 당시 일본인들은 차를 약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요사이는 사원에서 차를 접하였고 차는 불교문화의 일부로서 인식되는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전통적 사찰 음식. 출처:위키미디어

차 외에도 선승들이 중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접할 수 있었던 불교적인 음식 문화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점심(點心)이다. ‘점심’하면 우리는 낮 시간에 끼니로 먹는 음식, 즉 lunch를 떠올리게 되지만, 원래 이 말은 간단히 먹는 음식을 가리키는 한자어였다. 그것이 당나라 때의 승려인 덕산선사(德山禪師)의 일화로 인해 선종의 맥락을 담게 되었다. 그 일화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덕산선사가 『금강경』의 주석서를 등에 짊어지고 여행하던 중에 출출하여 한 노파에게 떡을 사려고 하였다. 노파가 등에 짊어진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덕산선사는 『금강경』을 풀이한 책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노파는 선사에게 질문해서 답을 하면 떡을 ‘점심’으로 줄 것이고 대답을 못하면 떡을 팔 수 없다고 하였다. 노파의 질문은 이러했다. 『금강경』에 이르기를 과거의 마음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하였는데 스님은 어떤 마음[心]에 점[點]을 찍으려 하십니까. 선사는 답을 못하고 막막해졌다고 한다. 간단한 요깃거리를 뜻하는 ‘점심’에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뜻을 담은 일종의 선문답인 것이다. 선종의 승려들은 식사시간 사이에 참선을 하는 도중에 출출해질 때면 ‘점심’을 먹었다고 한다. 당시 중국 사람들에게 식사와 식사 사이에 점심을 먹는 식습관이 있기도 했겠지만, 사찰에서의 점심에는 특히 불교적인 배경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덧붙이자면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점심의 개념은 바로 하루 두 끼를 먹던 생활에서 먹는 그 점심이라는 명칭을 하루 세 끼의 두 번째 식사에 대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점심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떡이나 과자류를 먹을 수도 있고 밥과 면, 만두 같은 간단한 식사류에 해당하는 것을 먹을 수도 있었다. 사실 ‘딤섬’이라는 말은 점심에서 비롯된 말이며, 얌차(飮茶)라는 말도 점심(딤섬)이 차를 마시면서 먹는 음식이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앞서 요사이가 송나라의 사원에서 차 문화를 접했다는 것을 언급하였는데, 차와 더불어 간식인 점심도 중국에 유학 중이던 승려들에게는 매우 밀접한 음식 문화였을 것이다.

 

양갱은 바로 중국 유학을 다녀온 일본의 선승들이 점심으로 들여온 음식이었다. 여기서 의아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살생과 육식을 금하는 불교에서 승려들이 양고기가 들어간 국을 먹는다고? 승려의 육식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도 논쟁이 있지만, 옛날부터 육식이 절대적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었고, 탁발을 하였을 때 신자들이 주는 음식에 고기가 들어가 있으면 그것을 먹는 것이 허용되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일본에서 유학을 간 승려들의 경우에도 중국에서 실제로 생선과 고기를 재료로 한 국을 공양받아서 먹었던 경험이 있었다고 하는 일본 요리연구가의 연구가 있다. 그러한 육식의 경험 속에서 양고깃국을 비롯하여 자라, 새우, 생선이 들어간 국이 수행 생활에 먹었던 음식들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일본으로 귀국한 뒤에도 승려들은 중국에서 먹었던 음식들을 ‘점심’의 메뉴로 그대로 가지고 들어왔다. 차와 마찬가지로 점심 또한 이들이 중국에서 체험한 불교문화의 일부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남이 준 고기 요리를 먹는 것과 본인이 고기 요리를 만드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다. 육식은 가능할지 몰라도 살생을 할 수는 없었던 선승들은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바로 생김새만 비슷하게 만들고 내용물을 모두 식물성 식재료로 대체하는 것이다. 16세기 초에 성립된 『식물복용지권(食物服用之卷)』이라는 책에는 여러 종류의 갱(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별갱(鼈羹)은 발, 손, 꼬리, 머리를 남겨두고 등껍질부터 먹는다.
저갱(猪羹)은 머리부터 먹는다. 죽엽갱(竹葉羹)은 새잎은 남겨놓고 마른 잎이나 꺾인 잎부터 먹는다. 계란갱은 알이 굵은 것부터 먹는다. 해로갱(海老羹)은 수염을 남겨놓고 먹는다.

 

별갱, 즉 자라를 재료로 한 국을 먹는데 등껍질을 먹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국들의 경우에도 굳이 어떠한 순서로 먹는다는 것을 지시할 필요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말인즉 저 ‘갱’들은 실제 재료를 사용해서 만든 국이 아니라 국과 재료의 모양새를 따라한 음식이라고 볼 수 있다. 아오키 나오미(靑木直己)는 위의 사료를 인용한 뒤 이처럼 모양새만 본뜬 갱을 먹을 때는 국물을 끼얹어서 먹었음을 당시 문헌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18세기의 책인 『데이조잡기(貞丈雜記)』에 따르면 별갱은 마와 설탕, 팥가루, 밀가루를 반죽하고 쪄내어 거북이등 모양으로 만들며, 갱에 끼얹는 국물은 된장과 물, 소금, 밀가루를 넣어서 만든다고 한다. 양갱에 대한 기록이 아쉽게도 보이지는 않지만, 일본에 건너온 14세기 이후의 양갱이라는 것도 이러한 갱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양고깃국을 생김새만 따라한 음식이었다. 양갱의 주재료인 팥은 양의 선지 색깔이라기보다는 원래 양고깃국에 들어간 양고기의 빛깔을 나타내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앞서 무사들이 선종에 귀의하여 승려들을 후원했다고 서술하였는데, 양갱을 비롯한 점심이 무사들 사이에서도 퍼지면서 법회에서 국의 일종으로 나오기도 하고, 정식 요리 코스 중의 국 메뉴로 포함되기도 하였다. 그러던 것이 점차 국을 곁들이지 않고 팥이 들어간 내용물만을 양갱으로서 먹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6세기 전반에 들어서는 천황과 귀족의 일기에 ‘양갱 한 상자[羊羹一折]’, ‘양갱 한 바구니[羊カン一籠]’ 등의 표현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때는 이미 국으로서의 형태를 잃어버리고 과자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우리에게도 조금은 유명해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같은 전국시대의 무장들도 과자가 된 양갱을 먹게 되었다. 1581년, 노부나가와 이에야스가 참석한 연회에 올라온 음식들의 명단이 기록으로 남아있는데 그 중에는 양갱이 과자 종류의 하나로 적혀 있다고 한다. 일본 예수회가 선교사들의 일본어 습득을 위해 1603년에 간행한 사전인 『일포사서(日葡辭書)』에서는 Can(カン), 즉 ‘갱’을 ‘콩이나 밀과 흑설탕 또는 설탕으로 만’드는 ‘일본의 단 과자의 일종’, Yōcan(ヤウカン), 즉 ‘양갱’을 ‘콩에 흑설탕을 섞어서 반죽한 것으로 만든 음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양갱은 일본의 과자로 변신하였지만 이때의 양갱 과자는 우리가 먹고 있는 양갱과는 조금은 다른 것이었다. 에도 막부가 생겨난 17세기 초만 하더라도 양갱은 재료를 넣고 쪄서 만드는 찐 양갱이었다. 그런데 17세기 후반에 들어 한천이 발견되고, 18세기 이후에 과자에 한천을 활용하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한천을 끓여서 녹인 다음에 팥소를 개어서 넣고 굳혀 만든 네리요칸(練羊羹 또는 煉羊羹)이 등장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연양갱’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네리요칸의 한자 표기를 한국어 발음으로 읽은 것이며, ‘연’은 연해서 연이 아니라 ‘반죽하다, 개다’라는 의미의 ‘네리’에서 온 것이다.

 

이상으로 양갱이라는 과자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고 그 명칭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도라야 문고와 아오키 나오미의 연구 등을 기반으로 하여 확인해 보았다. 오늘날에는 연양갱의 생김새가 거무튀튀한 짙은 갈색인데다가 식감도 탱탱하다보니 선지피를 연상하는 분들이 많이 있지만 그 원형은 양의 선지와 그다지 상관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일본인들도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양갱은 일본어로 요칸(ようかん)이라고 하는데 양간(羊肝), 즉 양의 간도 발음이 똑같다. 그래서 일본 양갱이 과자로 변화하는 16세기에 이미 ‘양간’이라는 표기가 보이고 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발음이 비슷한 한자를 가져다 쓴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18~19세기에 들어 연양갱이 등장하고 양갱의 모양새가 간을 연상하게끔 변해 가면서, 양갱은 중국의 세시기(歲時記)에 보이는 양간병(羊肝餠)이라는 떡에서 유래하였고, 원래 ‘양간’이라는 표기가 맞으며 ‘양갱’은 속칭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당시 수필 작품들에 간간이 나타난다. 이에 대해서 아오키 나오미는 양갱이 점심으로서 일본에 들어온 14세기부터 16세기에 이르기까지 ‘갱’ 또는 ‘양갱’이라는 표현이 계속 사용되고 있으므로 ‘양간병’을 양갱의 기원으로 삼는 것은 간과 갱의 일본어 발음이 유사하고 생긴 것도 간처럼 생겼다는 연상 작용에 의한 잘못된 설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과 양갱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기사를 끝맺고자 한다. 한국에 양갱이 등장하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1923년 5월 17일자 <동아일보>에는 목포 출신의 배화옥이라는 사람이 후쿠오카현 과자조합에서 주최한 전국 과자, 사탕 대품평회에 ‘평화양갱’을 출품하여 1등에 당선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1931년 10월 16일 <동아일보>의 ‘료리’라는 연속 기사에서는 ‘팟 편’, 즉 팥편(片)이라는 이름으로, 붉은 팥을 푹 삶아내어 체에 으깨어 거르고 거기에 밀가루를 넣고 설탕을 쳐서 그릇에 넣고 쪄내거나 한천을 넣고 만드는 ‘일본 사람이 파는 요강(羊羹)이라 하는 것’을 소개한다. 이런 것을 보면 식민지 조선에는 일본으로부터 양갱이라는 존재가 알려졌고 만들거나 소비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1945년 해방 직후에 해태제과가 창사와 동시에 판매한 간식이 연양갱이었다.

해태에서 만든 연양갱

그런데 기록에 따르면 이보다 더 먼저 양갱을 먹었으리라 추정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조선통신사이다. 요리를 가업으로 하는 시조(四條) 가문의 매뉴얼에 해당하는 『시조가법식(四條家法式)』에는 1636년 조선으로부터 온 사절을 대접하기 위해 차렸던 상차림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 과자들 중 하나로 ‘양갱’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우리가 현재 먹는 연양갱과는 다르지만 조선통신사 일행이 맞이한 상 한쪽에 양갱 과자가 놓여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과연 양갱을 먹었을까? 먹었다면 반응은 어떠했을까? 아니면 수상한 과자라고 생각해서 손도 대지 않았을까? 아마도 먹었다고 하더라도 별 감흥이 없이 기억 속에서 잊혀졌거나 아예 이름조차 몰랐을 수도 있다. 현재로서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양갱이라는 연결고리가 생긴 것이 그다지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혹시 조선시대 사람들의 양갱 체험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래서 식민지 조선의 양갱과의 미싱 링크를 찾아내게 된다면 과자 하나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발굴해낼 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문헌>

株式會社虎屋 虎屋文庫 編, 『和菓子展 「羊羹物語」』, 虎屋文庫, 1991

靑木直己, 「羊肝餠と羊羹: 日中食物交流史の一コマ」, 『和菓子』 20, 2013

*필자 김현경은 일본 고대사 및 중세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신분과 계층, 혈통과 세습 등에 관심을 갖고 있다.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대학원과 일본 교토대학 대학원에서 각각 석사학위를 받았고, 교토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을 이수하였다. 현재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어소시에이트 펠로우로 일하고 있다. 논문으로 <원 근신(院近臣)과 귀족사회의 신분질서: 실무관료계 근신을 중심으로>(<일본역사연구> 46, 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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