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무역갈등 외신보도' 듣고 싶은 내용만 보도했다

  • 기자명 문기훈 기자
  • 기사승인 2019.07.30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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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갈등이 태풍의 눈으로 부상한 가운데 국제사회 여론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이 높다. 그에 따라 외신 반응을 번역-소개한 보도가 줄을 잇는다. 중앙일보 22일자 기사 <"아베, 바보 같은 무역전쟁서 탈출해야" 국제사회 비판 확산>, 조선일보 23일자 <"자유무역 누린 日, 자유무역 지켜라">, 같은 날 JTBC <'싸늘한 해외 시선에'…일, 각국 외교관 불러 여론전>, 24일 아침 MBN <아베 향한 싸늘한 해외 시선…일, 외교관들 불러 여론전>, 26일 YTN <미국 주요 언론, 한목소리로 "일본이 잘못했다"> 등이 대표적이다. 블룸버그, 타임스, 이코노미스트를 주로 인용했다.

국내 언론이 인용한 외신들은 하나같이 수출규제 조치에 나선 일본의 행태에 비판적이다.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를 ‘무역 보복’으로 규정, 자유무역 질서에 역행한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를 전하는 국내 언론사들의 논지도 한결같다. 세계 유수의 언론들이 한목소리로 우리 정부에 힘을 보태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로 외신은 한국 편을 들고 있을까

그렇다면 외신은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인 과거사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일본을 비판하는 외신 보도 대부분이 강제징용 문제를 둘러싼 정치·역사적인 맥락을 함께 소개하고 있다. 대개 중립적인 입장이었으나 일본에 우호적인 기술도 일부 눈에 띄었다. 일본의 문제의식은 일리가 있지만 해결 수단이 잘못됐다는 견해가 많았다. 식민지배의 잔혹성과 불법성을 피해국 입장에서 충분히 헤아리지 못하는 서구적 시각의 한계라 볼 수 있다.

국제사회가 일본의 무역 제재를 규탄한다고 해서 그 근본적인 원인인 과거사 문제까지 우리에게 동조적이라 보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많은 국내 언론이 외신의 ‘아베 때리기’에만 초점을 맞췄다. 듣기 좋은 얘기만을 전하는 선별적 편집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모든 내용을 가감 없이 전한 뒤에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마땅하다. 국내 언론이 전하지 않은 ‘불편한 진실’을 뉴스톱에서 조명해 본다.

블룸버그 7월 21일 기사 'Abe’s Trade& War With South Korea Is Hopeless'

블룸버그 "한일 양쪽 모두 자신의 주장에 갇혀 있다" 

우선 국내 언론이 가장 많이 인용한 블룸버그의 21일자 사설을 살펴보자. <아베의 무역 전쟁은 가망이 없다 (Abe’s Trade War With South Korea Is Hopeless)>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비판의 수위가 상대적으로 높다. “어리석다 (foolish)”는 표현까지 등장한다. 비판은 국내 언론이 전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베가 통상 조처를 부당하게 정치와 연관시켰으며, 이는 일본 경제뿐 아니라 동북아 안보에도 해롭다는 것이다. 한일 양국의 긴장 완화를 촉구하며 사설은 끝을 맺는다.

한편 블룸버그는 이번 사태의 책임을 양쪽 모두에게 묻고 있다. 한일 정부 모두 자국 내 정치적 이해를 우선시해 관계를 악화시켰다는 지적이다. 블룸버그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둘러싼 양국의 해석을 모두 언급한 뒤 “양쪽 모두 자신의 주장에 갇혀 있다 (Both sides are now trapped in their positions)”고 썼다. 그러면서 “두 국가 모두 불만을 가질 이유가 있는 게 사실 (Both countries, it’s true, have reason to feel aggrieved)” 이라고 전했다.

글 전체의 논조는 ‘양비론’에 가까움에도 많은 국내 언론이 우리 정부에게 유리한 내용만을 중점적으로 인용했다. 실제로 사설은 문재인 정부의 대응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다. 정부는 앞서 일본의 제3국 중재위 설치 요청을 거부하고 한국과 일본 기업이 공동으로 출자해 재단을 설립하는 이른바 ’1+1 기금조성’ 방안을 제안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블룸버그는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을 해산시킴으로써 “스스로의 주장을 약화시켰다 (undercut his own argument)”고 주장했다. “그 어떤 사죄와 배상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본 내 회의론에 불을 붙였다 (That decision only fueled the narrative, common in Japan, that no amount of apologies or compensation would ever be enough)”는 설명도 덧붙였다. 블룸버그 사설을 소개한 대다수 국내 언론이 이런 내용을 누락했다. 한겨레와 머니투데이만이 짤막하게 언급했을 뿐이다.

 

뉴욕타임스 7월 15일자 기사 'Japan Cites ‘National Security’ in Free Trade Crackdown. Sound Familiar?'

NYT "일본, 올바른 접근법은 아니지만 '정당한' 불만 가지고 있다"

또다른 ‘유력 외신’인 뉴욕타임스는 어떨까. “일본이 안보를 수출규제의 구실로 삼고있다.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Japan Cites ‘National Security’ in Free Trade Crackdown. Sound Familiar?)> 제하의 15일자 기사는 국내 언론에 여러 차례 소개됐다. 기사는 모호한 안보상의 이유를 들며 무역 규제에 나선 아베 총리를 비판하고 있다. 과거 비슷한 사유로 ‘통상의 무기화’에 나섰던 미국, 러시아 그리고 중국을 답습했다는 것이다. 정치와 무역을 연계시키는 전략은 국제 통상 질서에 큰 도전이 될 수 있음을 뉴욕타임스는 지적한다. 실제로 일본 정부 일각에서 한국으로 수출한 불화수소가 북한으로 반출됐을 수 있다는 취지의 허위 주장이 나왔던 바 있다. 이후 논란이 일자 수출 관리상의 ‘부적절한 사안’이 있었다며 말을 바꿨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수출 규제의 정치적인 배경을 설명하며 일본 정치 전문가인 진 박 (Gene Park)을 인용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일본이 많은 정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Japan has a lot of legitimate grievances)”지만 무역 보복이 “올바른 접근법은 아니다 (not the right way to address them).” 적어도 과거사 문제와 강제징용 보상 문제에 관해서는 일본 정부가 불만을 가질 만한 사유가 충분하다는 주장이다. 뉴욕타임스가 인용의 형식을 빌려 일본 측 입장에 어느 정도 공감을 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해당 기사를 인용한 그 어떤 국내 언론도 전하지 않은 내용이다.

 

워싱턴포스트 7월 15일자 칼럼 'There’s a crisis unfolding in Asia. The U.S. is the only actor that can fix it'

WP 칼럼 "한국 국내 정치가 상황 악화시켜"

워싱턴포스트에 게재된 에번 메데이로스 (Evan S. Medeiros) 전 국가안보회의 선임보좌관의 기고문도 종종 언급된다. ‘일본 비판론’이 미국 주류 언론에서 확산되고 있다는 증거라며 YTN과 JTBC가 한번씩 짚고 넘어갔다. 확인 결과 원문은 블룸버그 사설과 마찬가지로 양비론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두 국가 모두 나름대로 일리 있는 주장을 펴고 있을지 모르나 근시안적이게도 더 중요한 외교 및 경제적인 이해를 손상시키고 있다 (Both sides may have technical merits to their arguments, but they are myopically damaging their larger diplomatic and economic interests […])”고 기고문은 밝히고 있다. 한일 갈등의 책임 소재가 양국 모두에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세계 경제와 동북아 안보에 미치는 타격이 크기 때문에 미국이 나서서 조속히 중재해야 한다는 게 글의 요지이다.

뿐만 아니라 해당 글은 어디까지나 개인 명의로 게재된 ‘기고문’이다. 정식 기사나 사설이 아니므로 워싱턴포스트 전체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일관계를 다룬 워싱턴포스트 기고문 중에서는 한국 정부에 비판적인 서술이 포함된 것도 더러 있다. 7월 18일자 기고문에서 셀레스트 에링턴 (Celeste L. Arrington) 조지워싱턴대 교수는 “한국의 국내 정치가 상황을 악화시킨다 (South Korea’s domestic politics complicates things further)”고 설명하며 사실상 ‘문재인 정부 책임론’을 제기했다. 문 대통령이 화해치유재단을 해산시킴으로써 일본과의 관계 개선 입장을 “손상시켰다 (undermined)”는 관측은 블룸버그의 것과 일치한다. 다소 편향된 내용도 있다. “문재인 정부가 경제와 북한 문제로부터 시선을 돌리기 위해 민족주의를 부추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the administration may also be taking advantage of an opportunity to stoke nationalist sentiment to distract from other economic- and North Korea-related challenges)”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워싱턴포스트 7월 18일자 칼럼 'Japan claims it’s restricting exports to South Korea because of ‘national security.’ Here’s the real reason why'

 

서구 언론 맹신할 필요 없지만 전달은 정확히 해야

외신 보도가 국제여론을 가늠하는 유용한 척도인 것은 사실이다. 정부가 일본을 WTO에 제소하기로 한 만큼 이번 분쟁이 ‘여론전’ 성격을 갖고 있는 것도 맞다. 외신이 대변하는 세계 각국 여론이 일본의 통상 보복에 비판적이라는 사실은 분명 안도감을 준다. 그렇다고 해서 국제사회가 일제의 식민 지배와 전쟁 범죄에 대한 우리의 관점에 완전하게 동의할 것이라 전제해서는 곤란하다. 서방 언론의 견해가 무조건 권위 있고 객관적이라 전제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식민지배 피해국의 목소리를 이해하는 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국제사회를 설득하고 호응을 얻기 위해서는 국제 여론을 정확히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서는 우리 입장과 다른 견해까지 두루 꿰뚫고 있어야 한다. 입맛에 맞는 내용만을 골라서 전한 국내 언론에 아쉬움이 남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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