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고려민주당·조선민족당 창당 본거지, 빵집이 되다

  • 기자명 석지훈
  • 기사승인 2019.08.19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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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안국역 3번 출구에서 현대그룹 사옥 방향으로 걸어가다보면, 계동/중앙고등학교 방향으로 올라가는 방향의 길 모퉁이에 커다란 한옥 한 채가 있다. 커다란 솟을대문 아래에는 "Onion"이라는 큰 간판이 매달려있고, 대문을 들어서면 큼직한 한옥 건물 세 채가 나온다. 이곳에는 지난 3월부터 빵집 겸 카페인 "카페 어니언 안국점"이 들어서있다. 낮과 밤, 내외국인을 가리지않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인기있는 "핫플"로 자리매김 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1. 지난 3월 카페로 새로 문을 연 종로구 계동 146번지의 대형 한옥. 1934년 무렵 지어진 근대 한옥으로, 문영학원 이사장이자 참정대신 한규설의 손자였던 한학수가 짓고 오랫동안 살았던 곳이다. 사진 출처: americano.jp

그런데 요즘은 정말로 보기 드문 이 정도 규모의 대형 한옥이라면, 그 집의 내력이 어떤 것일지 한번 쯤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이에 대해서는 지난 5월 18일자 <중앙일보>에 이 한옥을 지금처럼 카페로 개조한 두 명의 디자이너들의 인터뷰 기사가 실린 이래, 그 이후 여러 곳에서 별도의 사실확인 없이 계속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중이다. 인터뷰의 멘트를 그대로 옮기면 "100년 넘은 고택인데, 조선 시대 포도청 관련 건물이었다가 한의원ㆍ요정ㆍ한정식집을 거쳐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미 여행 전문안내서 출판사인 론리플래닛의 한국어 웹진 페이지에는 이 카페에 대한 내용을 소개하면서 "200년 된 포도청 건물에 들어섰다"고 앞의 인터뷰 내용을 고스란히 옮겨 적었으며, 수많은 개인 블로그나 인스타그램 페이지 등에 이런 내용이 이미 많이 퍼진 상태이다.

그러나 정말로 딱한 것은, 이와 같은 설명이 완전히 틀려도 이만저만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이 가옥의 정확한 내력이 이미 상당수의 역사학자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그동안 무척 잘 알려져 있었던 사실임을 생각해보면, 그간 이곳에 대해 보도해왔던 언론들이 이에 대해 단 한 번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았던 것은 더욱 한심스러운 일이다.

우선 "포도청" 건물이라는 저 서술의 내용만 따져보아도, 그간 이 카페에 대해 보도했던 언론이 이에 대한 아무런 팩트체킹을 하지 않았던 사실이 드러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시대 한양의 포도청은 좌포도청과 우포도청 두 군데가 있었는데, 이들 건물들은 1920년대까지도 남아있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위치와 주소가 이견이 없이 명확하다.

좌포도청은 지금의 종로 3가 단성사 바로 옆인 종로구 묘동 59번지에 있었고, 그 청사로 쓰이던 건물은 1920년대 이래 자치권운동을 벌이던 친일단체 국민협회의 건물로 쓰이다가 1932년 무렵에 헐렸다. 한편 우포도청은 종로구 서린동 154번지의 광화문우체국 자리에 있었으며, 갑오개혁 후 경무청 청사가 되고 이후로도 여러 기관들이 입주했다가 1925년에 광화문우체국이 신축되면서 헐렸다.

사진2. 현재 서울시 종로구 서린동 154번지 부근에 세워져있는 우포도청 표석과 안내판. 사진 출처: <성당일기_천주교 신자되기> 네이버포스트

이렇게 두 포도청의 정확한 위치가 확실히 알려져 있고 현재 이 부근에 각각 안내판과 표석까지 설치되어있는데도(사진 2), 이런 기초적인 사실조차 아무도 체크하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역사에 대해 조금만 상식이 있었어도, 1920년대에 새로 도로를 짓기 전까지 변변한 도로도 존재하지 않았던 이 계동/북촌 일대에 포도청같은 대형 관청이 들어서 있었을 가능성이란 전무하다는 것을 바로 알 것이다.

그 밖에 인터뷰 멘트에 언급된 요정이니 하는 것들 역시도 당시의 신문을 포함해 아무데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다만 이 집에는 1950년대 중반부터 "신의"로 유명했던 한의사 홍성학 (1892 - 1974)이 운영했던 계산한의원이 들어섰었고, 이후 1983년경부터 지난 2016년 무렵까지 이 집에 유명한 한정식집인 "산내리 한정식"이 입주해 있었던 것 역시 사실이다. 지금의 카페는 한정식집이 문을 닫고 거의 2년 넘게 비어있던 뒤에 바로 입주해 들어온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그렇다면 과연 이 집의 정체는 무엇일까?

종로구 계동 146번지의 이 한옥은 본래 1934년 무렵에 지어진 것으로, 본래는 을사늑약 때 조약의 체결을 끝까지 거부하다가 감금되었던 것으로 유명한 의정부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의 손자, 한학수 (韓學洙, 1907 - 1992)가 살던 집이다. 이같은 사실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 1970년대까지의 각종 신문 기사나 기록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가령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을 기념하는 개인 광고 (사진 3 참조)라던지 그가 참여한 수재의연금 기부자 명단 등 (사진 4 참조) 등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사진3. 동아일보 1935년 4월 1일자에 실린 창간 15주년 기념 축하 개인광고. "경성부 계동 146번지 한학수"라는 주소와 이름이 또렷하다. (*판형에 따라서 주소가 다른데, 초판에서는 148번지로 오식이 되었다가 2판 이후로는 146번지로 알맞게 정정되었다.)
사진 4. 동아일보 1934년 8월 10일자에 실린 "삼남수재의연금품" 기부자 명단에 등장하는 한학수의 이름과 주소. 경성 "시내 계동 146번지"임이 뚜렷하게 기재되어 있다.

 

한학수는 1933년까지 할아버지 한규설이 짓고 살았던 본가(서울시 중구 장교동 63번지, 가옥은 1980년 국민대학교 캠퍼스 내로 이축됨)에서 살다가 이듬해인 1934년에 분가해 나왔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였던 한양호(韓亮鎬)의 방탕한 생활과 사기사건 연루 등으로 가문의 자산과 체면이 큰 손해를 본 것 때문이 아닌가 싶다. 현재 이 집의 건축대장은 확인할 수 없지만, 1934년 7월에 계동 부근에서 터졌던 강도사건을 묘사한 <매일신보> 1934년 8월 20일자 기사에 "계동 146번지 한학수 씨의 새 집"이라는 표현이 나와 그 해에 지어진 집임이 거의 명백하다고 하겠다.

한학수는 일제강점기에 주로 임대업 등을 통해 상당한 자산가가 되었는데, 1935년 완공되어 당시 장안 최고의 사무실 건축이었던 종로 2가 한청빌딩의 소유주 (사진 5)였으며, 또 1937년 신축된 화신백화점 건물의 실소유주로 박흥식과 화신백화점의 지분을 공동으로 보유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각종 사회사업과 자선사업, 문화사업에도 손을 대어, 1939년에는 아버지 한양호와 함께 문영학원을 설립, 1944년 한양호가 사망하면서 문영학원의 이사장직을 승계받아 1991년 사망할 때까지 서울여상, 문영여중, 문영여고의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대체로 존경받는 교육자로서의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는 거액의 일제 국방헌금 기부 등의 행적이 있어 다소간의 오점도 있는 인물이다.

사진5. <조선중앙일보> 1935년 6월 19일자에 실린 "종로의 새 명물, 한청빌딩 완성"이라는 기사이다. 그 소유주인 한학수에 대해서 "부내 계동에 거주하는 고 한규설 씨의 손자 한학수"라고 기록한 것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이 정도의 인물이 살았던 가옥이라는 사실로서도 나름의 역사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하겠지만,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집이 1945년 해방 직후의 공간에서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의사결정의 장소로 활용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계동과 그 이웃한 원서동 일대에는 송진우, 여운형, 원세훈, 김병로 등 일제시대부터 활약하던 다양한 민족지도자들이 대거 거주하고 있었는데,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 소식이 알려지자 이들은 급히 모여 다양한 정치조직들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원세훈이 이끄는 우파 인사들은 바로 이곳 한학수의 집인 계동 146번지의 사랑방에서 회동을 가지며 정당 조직을 논의했는데, 그리하여 1945년 8월 18일 원세훈을 위원장으로 하고, 한학수, 이병헌, 김병로, 박명환, 송남헌 등의 이들이 위원으로 참가한 고려민주당이 창당되었다.

고려민주당은 일본 군경이 아직도 조선에서 치안유지를 담당하고 있던 상태 속에서 사실상 활동을 하지 못하고 곧이어 창당된 조선민족당에 흡수되었지만, 해방 공간에서 최초로 창당된 우파정당이라는 점, 그리고 오늘날의 더불어민주당으로 이어지는 "민주당계 정당"의 첫 포문을 열었던 곳이었다는 점 만으로도 그 집이 가진 역사성은 적지 않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해방 정국기에 구체적으로 정당 결성 및 정치 조직의 논의가 전개된 장소로는 사실상 현존하는 유일한 공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또한 같은 해 8월 28일에 조헌영, 조병옥 등의 고려민주당계와 김병로계, 신간회 경성지회계, 이인계 등이 참여한 정당인 조선민족당의 창당도 바로 이 한학수의 집에서 개최되었고, (김교식, "송진우", 계성출판사, 1984, p.342), 이후 9월 15일에 있었던 여운형과 원세훈 간의 합작 회동 역시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사진6. <동아일보> 연재 기사 "비화 미군정" 1982년 6월 14일자 연재분. "(전략) 민족진영은 당초 여섯 갈래가 있었다. 우선 원세훈 계가 있다. 계동 한학수(구한말 한규설의 손자)의 사랑방을 거점으로 자주 모여온 이 그룹에는 이병헌, 박명환, 송남헌 등이 속했다. 이 계통은 사회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색채가 있었다. (후략)"

이미 한학수의 집이 해방 공간에서 우파 정치운동의 산실이었다는 사실은 1970년대와 80년대 언론에서도 익히 알려져 있었던 사실이었다. 가령 <동아일보>가 연재한 "비화 미군정"의 1982년 6월 14일자 연재분 (사진 6)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전략) 민족진영은 당초 여섯 갈래가 있었다. 우선 원세훈 계가 있다. 계동 한학수(구한말 한규설의 손자)의 사랑방을 거점으로 자주 모여온 이 그룹에는 이병헌, 박명환, 송남헌 등이 속했다. 이 계통은 사회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색채가 있었다. (후략)"

또한 고려민주당 창당 당시 현장에 있었던 당사자인 송남헌의 회고록에도 한학수의 집에 대한 서술이 여러차례 쓰여있다. (송남헌, 심지연, "송남헌 회고록: 김규식과 함께한 길, 민족의 자주와 통일을 위하여", 한울, 2000, p.64)

"(전략) 그러자 8월 18일 내 친구 한학수가 나를 자기 집으로 불렀다.....(중략).....총독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하던 윈세훈은 1945년 8월 16일 고향 평택에서 광복의 소식을 듣고는 건국을 하기 위해서는 정당창당이 시급하다는 생각에 곧장 평택에서 서울로 올라와 계동 한학수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후략)."

이 때문에 그간 해방정국기 연구자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는 이 집의 내력이 익히 익숙하게 알려져 있어왔으며, 수많은 역사 가이드북이나 오마이뉴스 등 인터넷 언론 매체에도 이 집의 내력은 그간 대체로 정확하게 알려져 왔다.

하지만 SNS에 웃고 우는 이른바 "핫플"의 이해관계 속에서 이러한 사실은 깡그리 무시되었고, 사실과는 거리가 딴판인 엉터리 이야기가 새로운 "사실"이 되어 인터넷 스페이스를 메우고 있다. 이는 분명 문제가 있다 하겠다. 그저 보기에 예쁜 사진 찍기 좋은 이색 카페로만 취급되기에는 이 한옥의 건축사적 가치나 역사성은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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