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총장·법무부장관 이인 선생, 한글학회에 전 재산 기증하다

  • 기자명 정재환
  • 기사승인 2019.10.16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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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초반 항일 의식이 강한 학생들은 독서회 모임을 통해 민족운동의 방략을 구상하거나 사회주의 이론을 학습하면서 일제 타도를 모색했습니다. 당시 일제에 큰 충격을 주었던 경성제대반제동맹사건 역시 독서회를 모체로 출발한 것이었습니다만 독서회 운동의 중심은 전국 각지의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었습니다.

독서회를 반제사회주의 활동으로 규정한 일제는 화순ㆍ공주ㆍ서울ㆍ대구ㆍ함흥 등지에서 학생들을 검거해 재판에 넘겼습니다. 이인 변호사는 함흥 만세교 아래에서 졸업 기념으로 모였다가 검거된 학생들을 위한 변론에 나섰습니다. 이인은 사회주의운동에는 회의적이었지만, 일제의 탄압에 시달리는 청년 학생들을 도와야 한다는 데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유를 억압하고 착취만을 일삼는 식민정책에 대해서 학생들이 반발하는 것은 자연발생적인 현상이다. 그러므로 학생들만을 나무랄 것이 아니라 위정자와 사회가 책임을 분담해야 할 것이다. 더우기 이 사건은 극심한 고문으로 날조한 것이 아닌가.

 

1896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인은 조부에게서 한문을 수학했고, 대구의 달동의숙과 경북실업보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정칙중학교와 메이지대학 법학부에서 공부했고, 1922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처음 맡았던 사건은 의열단사건이었고, 독립투사 오동진사건, 독립투사 이응서사건, 창원소작쟁의사건, 6.10만세운동사건, 간도사건 등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피체된 투사들과 농민과 노동자들, 학생들을 무수히 변호하면서 일제의 요시찰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이인은 어릴 적 양계초의 「월남망국사」를 읽었습니다. 프랑스가 베트남을 침략한 후 베트남의 말과 글을 말살하고 베트남 고유의 사상을 없애려고 할 때, 베트남 승려들이 비밀리에 베트남 말과 글을 지키는 활동을 통해 고유문화를 지키고 민족의식을 일으키려 한 데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합되자 ‘월남망국사’는 남의 나라 얘기일 수만은 없었습니다. 일제가 우리말과 글을 없애려고 하니 반드시 우리말과 글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인은 1926년 무렵 조선어학회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당시 조선어연구회(후에 조선어학회)는 ‘3ㄹ’, 즉 ‘말과 글과 얼’이 없어지면 민족이 영구히 없어진다는 경계심을 갖고 우리말글 보존과 연구ㆍ보급 활동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조선어연구회는 1929년 한글날에 사회 각계 인사 108인이 참여하는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발기회를 조직했습니다. 11월 2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실린 명단에서는 조선어학회 회원을 비롯해 김성수, 김활란, 박희도, 방정환, 백관수, 백낙준, 이광수, 이우식, 최린, 현진건 등등 107인만 확인되니, 어쩌면 이름이 빠진 한 사람이 이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1935년 태국을 시찰하고 돌아온 이극로가 태국에서는 관혼상제의 대사가 있으면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문집을 내고 부처님 앞에 바치는데, 허례허식이 없는 것은 물론 책을 출판함으로써 문화가 진보하니, 우리도 해보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3월 중순 경성부 공평정의 요리점 태서관에서 이극로, 이인, 이윤재 외 발기인 수명이 모여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이하 출판관)을 설립했고, 초대 관장을 맡은 것은 김성수였으나, 6개월 후에는 이인이 관장에 취임했습니다.

조선문자급어학사 표지

‘출판관’의 첫 작품은 1938년 1월에 나온 김윤경의 「조선문자급어학사」였습니다. 김윤경은 상동청년학원에서 주시경을 사사한 수제자로서 이 책에서 우리말의 범위와 정음창제 이후의 국어정책 그리고 우리말글의 보급에 대한 역사를 정리했습니다. 지금도 이 책은 국어학계의 기념비적 저술로 꼽히고 있습니다. 출판비를 댄 것은 이인이었는데요, 양친 회갑을 위해 마련했던 비용 1,200원으로 1,000부를 출판하여 500부는 조선 및 일본의 각 도서관에 보내고, 나머지는 판매했습니다. 1938년 2월에는 오세억으로부터 결혼기념 자금 400원을 제공 받아 11월 경 노양근의 저작인 「날아다니는 사람」을 500부 출판했습니다. 1936년 봄 이인은 이우식, 김양수, 장현식, 김도연, 서민호, 신윤국, 김종철, 설태희, 설원식, 윤홍섭, 민영욱, 임혁규, 조병식 등과 함께 조선어사전편찬회 후원회에도 참여했습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후원회는 사전 편찬을 위해 1만 원을 기부했습니다.

이인은 ‘양사관’ 설립에도 관여했습니다. 하루는 조선어사전편찬회 회장 이우식이 이인과 이희승, 이극로를 강호천이라는 뱀장어구이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이우식은 갈수록 총독부의 탄압이 심해져서 학자들마저 숨구멍을 못 트고 있으니 학자들을 먼저 살려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주어야겠는데 자신이 천 석 되는 재산을 내놓을 테니 양사관을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이우식은 그 자리에서 기부 각서를 작성하여 이인에게 건네며 ‘모든 것을 애산에게 일임하니 조속한 시일 안에 양사관을 설립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마침 조선어학회 화동회관을 기증했던 정세권이 가회동에 있는 큰 집 한 채를 내놓았고, 대구의 전 참찬 곽종석 집안에서 장서 18,000권을 기증하기로 했습니다. 이로써 양사관의 기틀이 짜였고, 이인은 설립 인가를 받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총독부의 허가를 얻지 못해 양사관 설립 계획은 물거품이 돼버렸습니다.

1942년 11월 10일 새벽 댓바람에 들이닥친 4명의 형사에 의해 이인은 조선어학회사건 관련자로 검거되어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으로 끌려갔고, 김양수, 서승효, 장현식, 안재홍 등과 함께 나흘 후 열차에 실려 함흥으로 이송되었습니다. 함흥 독서회사건의 변호인이었던 이인은 조선어학회사건 피의자의 몸으로 다시 함흥 땅을 밟았습니다. 함흥경찰서 유치장은 신사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들로 초만원이었고, 형사들은 취조 때마다 모든 사건의 피의자들을 고문해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끔찍한 고문으로 이인은 앞니 두 개가 부러졌고, 양쪽 귀와 엄지와 검지 사이가 찢어졌습니다.

1944년 9월 30일 예심종결로 정식 재판에 회부되었고, 1944년 12월 21일부터 1945년 1월 16일 사이에 9번의 원심 공판이 열렸습니다. 이인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혹은 3년)을 선고받았는데, 조선어사전 출판, 혁명투사 양성기관인 조선양사원 계획, 조선기념도서출판관 설립 및 활동, 조선물산장려회 활동,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대회에 돈 200불을 부쳐 김법린의 참가를 도운 일 등 모두 7가지 혐의에 대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해방 후 이인은 한국민주당에 참여했고, 미군정 하에서 검찰총장, 대한민국 초대 법무장관이 되었습니다만, 이승만과는 사이가 나빠 2개월 만에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당시 이인은 ‘이승만이 정부 수립에 있어서 전연 백지였던 주먹구구식이었고 특히 인사에 있어서는 등신이란 혹평을 들을 만큼 편협하였다. 그래서 국회와의 조화가 이룩되지 못한 것은 당연하려니와 행정면에 있어서도 지대한 차질을 거듭해서 급기야는 뜻하지 아니한 북괴의 남침을 초래하였다.’고 호되게 비판했습니다.

사표는 수리되지 않았지만, 장면이 주미대사로 나가게 되어 1949년 6월 열린 보궐선거에서 그의 선거구인 종로을구에서 당선되어 제헌국회의원이 되었고, 5.16쿠데타가 나기까지 민의원과 참의원 등을 지냈습니다. 이렇듯 이인은 일생을 통해 법조인이자 정치인으로 민족과 국가를 위해 봉사했지만, 우리말글과 조선어학회에 대한 애정 또한 변함없었습니다. 1976년 8월 15일 이인은 유일한 재산인 효자동 자택을 처분한 돈의 절반인 3천만 원을 한글학회(1949년 10월 2일 조선어학회에서 한글학회로 개명)에 기부했습니다.

 

사진: 한글학회, 「50돌 뒤 10년의 한글학회 발자취」, 1981.
해방 이후 30년이 넘도록 일정한 회관 하나 없어 자주 이사를 다니는 것이 항상 마음 아팠다. 더구나 지금 서울 신문로에 있는 회관은 낡은 여염집을 일부 개조한 것이어서 우리글ㆍ우리말의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해야 할 한글학회가 제대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 중앙일보, 1976.8.19.

 

한글학회는 1958년 4월 28일부터 신문로1가 58번지 14호 쇠락한 목조건물을 학회 사무소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차례 새 건물 건축이 논의되었지만 번번이 성사되지 못하다가 이인의 기부금 3천만 원을 종자돈으로 회관 건립에 착수했습니다. 모자라는 공사비는 동대문구 망우동과 김포군 월곶면의 땅을 처분했고, 「한글 새소식」을 통해 760여만 원의 국민 성금을 모았습니다. 여기에 정부도 국고 보조금 1억 원을 지급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지만, 이 모든 것이 이인의 우리말글 사랑이 만들어낸 기적이었습니다. 새 회관은 1976년 10월 9일 한글날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10월 8일 준공되었고, 한글학회는 새 회관에서 한글연구와 한글운동을 맘껏 펼칠 수 있었습니다. 사진 속 한글회관은 준공 직후 촬영한 것인데 지금도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서 있습니다.

1979년 4월 5일 작고한 이인은 유언을 통해 노년을 보내던 강남구 논현동 소재 2층집마저 한글학회에 기증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사상변호사로서 민족을 위해 변호했고, 조선어학회의 조선어사전 편찬을 도우며 우리말글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이인은 마지막 떠나는 길에서도 우리말글 사랑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참고문헌>

최영희ㆍ김호일, 「애산 이인」, 애산학회, 1989.

애산 이인, 「애산여적」 제4집, 애산학회, 2016.

한글학회, 󰡔한글학회 100년사󰡕, 2009. / 󰡔50돌 뒤 10년의 한글학회 발자취󰡕, 1981.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원순, 「이인 변호사」, 󰡔애산학보󰡕 35, 애산 학회, 2009.

홍종욱, 「이인이 회고한 해방 전야」, 󰡔애산학보󰡕 44, 애산 학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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